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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록수] 이역(異域)의 하늘(1)
영신은 차마 발길이 돌아서지 않는 것을, 하는 수없이 조선을 등지고 떠났다. 그렇건만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동혁에게서는 전보도 편지도 오지 않았다. 차디찬 다다미방에서 얄따란 조선 이불을 덮고 자고, 입에 맞지 않는 음식으로 겨우 요기만하며 지내는 영신에게는, 기숙사 생활이 여간 신산한 것이 아니었다. 동무들도 친절하기는 하나, 속마음을 주고 이야기할 사람이 없어, 어올루지 않는 일본 옷을 입은 것처럼, 동급생들하고도 어울리지를 않았다. 학교도 예상하였던 것보다는 취미에 맞는 것이 없고, 농촌에 관한 것은 거의 한 과정도 없어,
‘이걸 배우러 여기까지 왔나.’
하는 후회가 났다. 정양할 겸 온 것이라고, 수토가 달라 몸은 점점 쇠약해질 뿐.
학교에 가서도 층층대를 오르내리려면, 다리가 무겁고 무릎이 시큰시큰하여서, 매우 괴로웠다. 부었다 내렸다 하는 다리를 눌러보면, 손가락 자국이 날만치나 살이 무르다. 같은 방에 있는 학생에게 물어보니,
“암만해도 각기병 같은데, 얼른 병원에 가 진찰을 해봐요. 각기가 심장까지 침범허면 큰일 난답니다.”
하면서도 전염병이 아닌데도, 같이 있기를 꺼리는 눈치까지 보였다.
“아이고! 또 병원엘 가야 허나!”
말만 들어도 병원 냄새가 코에 맡이는 듯, 지긋지긋하였다. 가볼래야 진찰료와 약값을 낼 돈도 없지만........
‘이런 구차스런 유학이 어디 있담.’
영신은 만사가 도시 귀찮았다. 공부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고향에 가 눕고만 싶었다.
오락한 곳마다 모두 방황하여도
일간두옥 내 집만한 곳이 없고나!
소녀시대 부르던 <홈 스위트 홈>을 그나마 남몰래 불러보려면, 떠나올 때에도 찾아가 뵙지 못하고 온 홀어머니 생각에, 저도 모르게 베개를 적시는 밤이 계속되었다.
‘내가 천하에 불효녀지. 무슨 사업을 헌답시구, 그 불쌍헌 어머니 한 분을 모시고 지내지를 못 허니......’
할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밤이면 밤, 꿈이면 꿈마다 보이는 것을 ‘청석골’이다. 이제는 제2의 고향이 아니라, 저를 낳아 길러준 어머니가 계신 고향보다도 ‘청석골’이 그리웠다. 어느 것이나 정다운 추억이 아닌 것이 없다.
“오오 ‘청석골’, 그리운 내 고향이여!”
시를 지을 줄 모르는 영신의 입에서, 저절로 새어 나오는 영탄사건만, 그대로 내뽑으면, 시가 되고 노래가 될 듯싶다.
정을 가득 담은 원재 어머니의 편지를 받을 때마다, 뒷일을 맡은 청년들의 자세한 보고를 접할 때마다, 사랑한느 사람의 편지를 받을 때만치나, 가슴이 설레었다. 그중에도 제가 ㄱ, ㄴ부터서 가르치고 가장 불쌍히 여기던 금분이가, 공책에다가 연필로 꼭꼭 박아서,
전 선생님 보구 싶어요. 오늘두 선생님 편지 기다리다간, 체부가 그대루 가서, 옥례허구 필순이허구 자꾸만 울었세요. 우리들은 선생님이 이상스런 옷을 입구 박히신 사진 보구, 깜짝 놀랐지요. 아이 숭해, 인전 그런 옷 입지 마세요. 그래두 우리들 보구 웃으시는 걸 보니깐, 어떻게 반가운지 눈물이 나겠지요. 아이 그런데 선생님, 난 몰라요. 그걸 서루 뺏다가 찢었으니 어쩌문 좋아요? 옥례가 찢었세요. 그래서 반씩 노나 가졌는데, 또 한 장만 보내주세요 네네. 아무두 안 뵈구 저만 두구 볼께요.
글자도 몇 자 틀리지야 이바노브나 않고, 정성을 들여 반듯반듯이 쓴 글씨를 볼 때, 영신은 어찌나 귀엽고 반가운지, 그 편지에 수없이 입을 맞추었다. 눈보라 치는 겨울에도 홑고쟁이를 입었던 금분이를, 저의 체온으로 품어주듯, 그 편지를 허리춤에다 넣고, 틈만 있으면 꺼내 보았다.
어떤 날은 사내아이들과 계집아이들의 편지가, 소퐃럼 뭉텅이로 와서 부족을 물었다. 편지마다 선생님 보고 싶다는 말이요, 사연마다 어서 오라는 부탁이다. 어떤 아이의 펴닞에는, 누런 종이 위에 눈물을 뚝뚝 떨어뜨려, 글씨가 번진 흔적처럼 보여서,
“오오, 이 세상에서, 어느 누가 나를 이다지도 보고 싶어 하겠느냐. 이다지도 작은 가슴을 졸이며, 고어여쁜 눈에 눈물을 짜내며, 이 나를 기다려줄 사람이 누구냐. 너희밖에 없다. 온 세계를 헤매다녀도, 우리 고향밖에 없다. ‘청석골’밖에 없다!”
하고 그 편지 뭉텅이를 어린애처럼 붙안고 잧다. 그는 홈식(사향병思鄉病)이란 병까지 침노를 받은 것이다.
한편으로 동혁의 소식이 끊겨서, 가뜩이나 심약해진 영신의 애를 태웠다. ‘한곡리’로 몇 번이나 편지를 했건만 답장이 없다가, 하루는 뜻밖에 정득의 이름으로 편지가 왔다. 동혁은 도청 소재지의 검사국으로 넘어갔고, 동화는 만주에 가 있는 듯하다는 것과, 수일 전에야 동혁이와 한방에 있던 사람이 나와서, 일부러 찾아왔는데,
‘검사국까지 넘어오기는 했으나, 면소(免訴)[형사 소송에서 공소권이 없어져 기소를 면하는 일]가 되어 불원간 나갈 자신이 있으니, 영신 씨에게도 그 말을 전해주고, 아무 염려 말고 건강에만 주의하라고 부탁을 하고 같으니 안심하라.’
는 사연이었다.
영신은 비로소 마음을 놓고, 그날 밤은 일찍 자리에 누웠다. 그러나 곁에 누운 학생이 늦도록 촛불을 켜놓고 복습을 하느라고, 부스럭거리고 드나들고 하여서, 잠은 들었다가도 몇 번이나 깨었다. 청석골의 환경이 머릿속에 환하게 나타나고, 학원과 아이들의 얼굴이, 핀트가 어그러진 활동사진처럼 어른어른하다가는, ‘한곡리’의 달밤, 그 바닷가에서 동혁에게 사랑의 고백을 받던 때의 정경! 병원에서 그에게 안겨, 지궁스러운[마음 쓰는 것이 지극히 정성스럽고 극진한 데가 있다] 간호를 받던 생각이 두서없이 왕래해서, 그 환영을 지워버리려고,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며 무진 애를 쓰다가, 근근근 쑤시는 다리를 제 손으로 주무르며 간신히 잠이 들었다......
“땡그렁 -- 땡그렁--”
청석학원 앞에 새로 단 종소리가, 어렴풋이 들린다. 종대에 돌연히 나타나 종을 치는 사람을 보니, 용수[죄수의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머리에 씌우는 둥근 통 같은 기구]를 써서 얼굴은 보이지 않으나, 시꺼먼 두루마기 앞섶에 번호를 붙였는데, 그 건장한 체격이 동혁임에 틀림없다. 동혁은 커다란 수갑을 찬 두 손을 모아, 줄을 쥐고 매달리며 힘껏 힘껏 잡아당긴다.
“땡그렁 -- 땡그렁-- 땡그렁--”
종이 사뭇 깨어지는 듯한 소리가, 온 동리에 퍼진다. 불종[불이 난 것을 알리기 위하여 치던 종] 소리나 들은 듯, 동네 사람들은 운동장에 백결 치듯 모였다. 동혁은 무어라고 소리소리 지르며, 수갑을 낀 팔을 내두르면서, 한바탕 연설을 한다.
그 말은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 군중은 우아! 우아! 하고 고함을 지른다. 그러다가 동혁은, 무참히도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모양으로, 말을 탄 사람들에게 붙들려 질질 끌려간다.
“동혁 씨!”
“동혁 씨!”
영신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허겁지겁 그 뒤를 쫓아가는데,
“사이상, 사이상, 네고도 잇데루노? 아 고와(영신씨, 영신 씨, 잠꼬대를 허우? 아이 무서)!”
하고 어깨를 흔드는 것은, 새벽 기도회에 참례하려고 잠이 깬, 곁에 누웠던 동급생이었다.
영신은 전신에 소름이 오싹 끼쳤다. 이마의 식은 땀을 손등으로 씻으면서도, 꿈의 세계를 헤매는 듯 눈을 멀거니 뜨고, 한참 동안이나 천장을 쳐다보았다. 몸서리가 쳐지는 지겨운 환영에서는 깨어났으나, 종소리만은 현실이었다. 학교 안에 예배당으로 쓰는 강당 앞에서, 늙은 교지기가 쉬엄쉬엄 치는 종소리가, 졸린 듯이 들린다. 꿈자리 산란한 이역의 서리 찬 새벽하늘에....
영신은 기도회에 참례를 하려고, 밤사이에 더 부어오른 다리를 간신히 짚고 일어서, 세수간으로 나가다가 머릿속이 핑 내둘리고, 다리의 힘이 풀려, 문지방에 허리를 걸치고 쓰러졌다. 학생들은 벌써 기도회로 다 가고, 굴속같이 컴컴한 기다란 복도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없다.
영신은 의식을 회복하고 눈을 떴을 때에야, 제 몸이 의료실로 떠메어 와서 누운 것을 깨달았다.
영신은 의식을 회복하고 눈을 떴을 때에야, 제 몸이 의료실로 떠메어 와서 누운 것을 깨달았다.
숙직하는 교원에게 응급치료를 받은 후, 교의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에, 영신은 몽유병 환자와 같이 눈을 멀거니 뜨고 누워서, 수술실처럼 흰 휘장을 친 유리창이, 아침 햇발에 뿌옇게 물이 드는 것을, 넑ㅅ을 잃고 보고 있었다. 그제야 맹장염 수술한 자리가 뜨끔거리는 것을 깨닫고,
“아이고! 인전......”
하고 절망적인 한숨을 내뿜었다.
백발이 성성한 교의는, 실내에까지 단장을 짚고 들어와서, 영신을 자세히 진찰해본 뒤에,
“몸 전체가 대단히 쇠약헌데, 각기병은 짧은 시일에 쉽사리 치료를 헐 수 없는 병이니, 고향으로 돌아가서, 편안히 쉬며 치료를 허는 게 좋겠소. 복부의 수술도 완전히 하지 못해서, 재발될 증조가 보이니, 특별히 주의를 허지 않으면 큰일 나오.”
하고는 비타민 B가 부족해서 나는 병이니 현미나 보리밥을 먹으라는 둥, 심장이 약하니 절대로 과격한 운동을 하지 말라는 둥, 주의를 시키고 나갔다.
경험 있는 의사의 권고까지 받고, 여신은 더 있을 수가 없었다. 고명한 의사가 들이쌓였고, 의료기관이 아무리 발달된 곳인들, 고향으로 돌아갈 노자 몇 십 원이 없는 영신에게 있어, 무슨 소용이 있으랴. 가나오나 나므이 신세만 지는 몸이, 더구나 인정 풍속이 다른 소천 리 타향에서, 그네들의 진심에서 우러나지 않는 친절을 받느니보다는, 하루반비 정든 고장으로 돌아가서, 피골이 상법해가는 몸을, 편안히 눕히고 싶었다. 편안히 눕히지는 못하더라도, 여러 해 만에 어머니를 곁에 모셔 오고, 청석골의 산천을 대하고, 꿈에도 밟히는 어린 학생들의 손을 잡고 뺨을 부벼보면, 정신상으로나마 얼마나 큰 위로를 받을지 몰랐다. 그는 마침내,
’가자, 죽드래도 내 고향에 가 묻히자!‘
하고 비장한 결심을 하였다. 서울연합회의 백 씨에게 급한 사정을 알리고, 노비를 보내달라고 편지를 써서, 항공 우편으로 부쳤다. 돈 말을 하기는 죽기보다 싫지만, 남에게 구구한 사정을 하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인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한 달 학비를 다가쓰는[당겨 쓰다] 셈만 친 것이다.
노비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영신의 고민은 거의 절정에 이르렀다.
’우리의 결혼 문제는 어떡헐까.‘
그것은 물론 시급히 닥쳐오는 문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은 자유를 잃은 몸이 되어 있고, 저는 무엇보다도 첫째 조건인 건강을 잃은 몸이다. 그러나 이미 약혼을 해놓고 이제까지 기다리던 터이니, 그 문제가 가장 큰 고민거리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이는 불원간 나올 자신이 있다구 허지만, 내 몸이 이 지경이 된 것을 보면, 얼마나 낙심을 헐까. 그 이는 오직 나 하나를 기다리고, 청춘의 정열을 억지로 눌러오지 않었느가. 나이 삼십에 가까운 그다지 건장헌 청년으로, 보통 남자로는 참을 수 없는 것을, 점잖이 참어오지 않었는가. 다른 남자는 술을 마시고, 청루[창기나 창녀들이 있는 집]에까지 발을 들여놓는데, 그이는 생물의 본능을 부자연하게 억제하며, 오직 일을 하는 것으로 모든 오뇌를 잊으려고 하지 않었는가. 더군다나 늙은 부모를 모신 맏아들로, 오직 나 때문에, 이 변변치 않고 보잘것없는, 나 하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동혁에게 대해서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나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남의 청춘을, 무참히 짓밟는 것이 아닐까. 00일보사 누상에서 첫 번 얼굴을 대한 후, 벌써 몇몇 해를 사모해오고 사랑해오는 동안, 나는 그이에게 털끝만한 기쁘도 주지 못하였다. 도리어 적지 않은 정신상, 육체상 고통을 주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인제 와서, 무슨 매매계약을 한 것처럼, 약혼을 해약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영신의 여윈 뺨을 소리 없이 흘러내리는 것은, 아직도 식지 않은 눈물이다. 좀체로 모든 일에 비관치 않으려던 전일에 비해서, 너무나 마음까지 몹시 약해진 것을 스스로 깨달을수록, 눈물은 그 비례로 쏟아져, 소매를 적시고 베개를 적신다.
사랑하는 사람은 돌덩이 같은 육체와 무쇠와 같은 의지력을 가진 사람이니까, 감옥에서 고생쯤 하는 것으로는 끄떡도 아니할 것만은 믿는다. 그저 무사히 나오기만 축수할 뿐이다.
’그렇지만 그이가 나온 뒤까지, 오래오래 두고 이 지경대로 있으면 어떡허나. 하나님께서 설마 나를 이대로 버리실 리는 만무하지만......‘
하고 아직도 신앙을 잃지 않으려고, 정성껏 기도도 올려본다. 주를 부르며 저의 고민을 하소연도 해본다.
’내가 만일 건강이 회복되어서, 그이와 결혼 생활을 헌다면 어떻게 될까? 구차헌 살림에 얽매고, 어린것들이 매어달리고, 시부모의 시중을 들고, 집안 식구의 옷뒤[빨래나 바느질]를 거두고, 다만 먹기를 위해서, 이른 아침부터 밤늦도록, 다른 농촌의 여자와 같이 집군석 붴구석에서, 한평생을 헤어나지 못하고 말 것이다.‘
하고 앞일을 상상해볼 때, 영신의 머릿속은 또다시 시꺼면 구름이 끼는 것처럼, 우울해진다. 아직까지 사업에 무한한 애착심을 가지고, 한 몸을 이 사회에 바쳐온 영신으로서는, 두 가지 길 중에 어느 한 가지 길을 밟아야 옳을는지, 방황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떡허나? 아아, 어떡허면 좋을까?’
영신은 이불 속에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내가 그이를 진심으로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지금의 나로서는 꼭 한 가지밖에 취할 길이 없다!’
영신은 무한히 고민한 끝에, 한 가지 결론을 얻었다.
‘나와의 결혼을 단념시킬 것뿐이다!’
이 말 한마디는, 창자를 끊어내는 듯한 마지막 가는 말이다. 그러나 영신은 그렇게 부르짖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이는 웃음읫 말이래도 ’조선 안의 허구많은 여자 중에, 하필 ‘채영신’ 석 자만 쳐다보고, 두 눈을 꿈벅거리고 이;ㅆ는 나 자신이, 불쌍해 보인다‘고 하였다. 그 말이 어느 정도까지는 속임 없는 고백일 것이다. 기막히는 일을 당할 때에 웃음이 터져 나오고, 가슴이 답답할 적에 트림이 끓어오르는 것과 같이, 그는 하도 기다리기가 지루해서, 그런 말을 허게까지 된 것이 아닐까.’
하니, 두 사람을 만나게 한 운명을 저주하고도 싶었다.
‘왜 곧잘 참어오던 내가, 내 발로 걸어서 한곡리를 찾었고, 달 밝은 그 날 밤 바닷가에서, 경솔히 마음을 허락했든가. 일평생의 고락을 같이할 맹세까지 했든가.’
하고 그때의 기분이, 너무나 로맨틱(낭만적)하였던 것을 몇 번이나 후회하였다.
‘아아 그러나, 나는 그이를 지극히 사랑한다. 그이를 사랑하게 된 뒤로부터 나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심까지 엷어졌다. 지금의 ’박동혁‘은 나의 생명이다! 내 맘이 그 이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무슨 일이 있는지, 어떠한 고통을 당허든지, 이 세상에 다만 한 사람인 그이의 행복을 위해서, 참는 도리 밖에 없다.’
‘자아를 희생할 줄 모르는 곳에, 진정한 사랑이 없다. 사업을 위해서 이미 희생이 된 이 몸을, 사랑하는 사람의 장래를 위해서, 두 번째 희생으로 바치자! 이것이 참되고 거룩한 사랑의 길이다!’
하고 영신은, 두 번 세 번 제 마음을 다질렀다.
‘이번에 만나는 때에는, 단연히 약혼을 해소하자고 제의를 하리라. 의논을 할 것이 아니라, 이편에서 딱 무질러버리고 말리라.’
하고 단단히 겴힘을 하였다.
그러나 저의 건강으로 말미암아, 이런 결심까지 하게 된 것이 서럽다. 그다지 사랑하던 남자를 놓칠 생각을 하니, 분하기도 하였다. 동혁의 넓은 품 안에, 그 아귀힘 센 팔에, 채영신이가 아닌 다른 여자가 안길 것을 상상만 해보아도, 이제까지 느끼지 못하던 질투의 불길이 치밀어, 얼굴이 화끈하고 다는 것이야 어찌하랴.
‘시기를 하거나, 질투를 하는 것은, 가장 야비하고 천박한 감정이다.’
하고 제 마음을 꾸짖어도 본다. 그러나 꾸지람을 듣는 것쯤으로, 그 분이 꺼질까 싶지가 않다.
기숙사의 밤이 깊어가는 대로, 영신의 고민도 깊어가고, 마음이 괴로울수록 안절부절못하는 육신도, 어느 한 군데 괴롭지 않은 데가 없었다.
........영신이가 떠나는 날 아침, 널따란 학교 마당에 전송하여주는 사람은, 사감과 한방에 있던 학생 두엇뿐이었다. 몇 달 동안 숙식을 같이하던 여자는, 매우 섭섭한 표정을 지으면서, 현관까지 따라 나와,
”사요나라, 오다이지니(잘 가요, 몸조심허서요).“
하고 굽실해 보이고는, 게다짝을 달각거리며, 뒤도 아니 돌아다보고 들어가 버린다. 제 방에서 환자를 내보내는 것이, 시원섭섭한 눈치다.
오래간만에 조선옷으로 갈아입고, 고리짝 하나를 인력거 앞에다 놓고, 정거장으로 나오는 영신의 행색은 초라하였다. 그는 인력거 위에서 흔들리며,
’내가 지금 어디루 가는 셈인가.‘
하고 번화한 시가지를 둘러보았다. 돈 있는 집 딸들이, 음악학교 같은 것을 졸업하고, 그야말로 금의로 환향하는 광경을 상상해보고는,
’내가 얻어가지고 가는 것은, 병뿐이로구나!‘
하고 어이없는 웃음을 웃었다.
그러나 ’청석골‘서 정이 든 여러 사람이 마중을 나오고, 그 귀여운 아이들이 ’선생님! 선생님!‘하고 달려들 생각을 하니, 어찌나 기쁜지 몰랐다. 미리부터 가슴이 설레서,
’비행기라두 타구, 어서 갔으면.‘
하고 기차를 탄 뒤에도, 마음이 여간 조급하지가 않았다. 그러면서도,
’혹시나 동혁 씨가 나와서, 나를 버썩 안고 차에서 내려놓아 주지나 않을까.‘
하였다. 그것이 공상이 되지 말기를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