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그녀를 처음 만난 곳이나 그/그녀의 품에 처음 안겼던 곳도 그럴 수 있고 헤어지자는 말을 들은 그 카페나 우연히 마주쳐 안부만 어색하게 묻던 시청앞 지하철역도 그런 곳일 수 있다. 젊은 날의 거기.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싸아한 그곳들. 오늘은 초가을 아련한 기억 만들기에 더없이 좋은 곳으로 간다.
하나만 약속하고 떠나자. 오늘 만든 추억을 평생 공유할 수 있기를 서로 다짐하고 가자. 내년에도 후년에도 9월이면 늘 둘이서 함께 이곳을 다시 찾을 수 있도록, 멀어지지 않기로 약속하고 데이트길에 오르자.
서울 동남쪽에는 연인을 위한 쾌적한 공원들이 많다. 그중에서 오늘은 암사동 선사유적지와 올림픽 공원을 찾는다. 동네 아줌마 아저씨들의 조깅장소나 짬짬이 있는 가수들의 대형콘서트 자리로만 내주기에는 너무 아까운 올림픽 공원. 초등학생들 견학장소로만 애용되기에는 그 맑은 공기와 버드나무숲에게 정말 미안한 암사동 선사유적지. 코끝에 묻어오는 공기를 한껏 호흡하다 보면 법정스님의 글에 나오는 어느 꼬마의 말처럼 "바람이 달다"는 얘기가 절로 나온다.
공기와 풍경으로 독자를 미혹하는 거냐고? 물론 아니다. 선사시대 유적터며 움집, 숲속 가득한 야생동물 등 볼거리도 많다. 그렇지만 뭐 꼭 볼 게 많아야 맛인가. 몽촌토성 벤치에 앉아서 지난 드라마 〈애인〉의 그들처럼 사랑얘기를 나눠도 좋고 곰말다리 위에서 짧은 입맞춤만 해도 행복하지 않을까. 연인의 마을, 서울 동남쪽으로 간다.
<<13:00 단골 만남의 장소, 세종문화회관 옆 KFC>>
벌써 몇번째 등장하는 세종문화회관에서 오늘도 만난다. 물론 잠실 근처 어디에서 만나도 괜찮겠지만 혹시 그/그녀와 당신 중 누구라도 시내에서 출발해야 된다면 강동구 끄트머리까지 오는 시간과 거리가 너무 힘들 수도 있으니 아예 만나서 같이 가자. 세종문화회관 옆 골목에 있는 KFC에서 만나서 오늘 데이트를 시작하자.
<<13:00 - 13:40 이름도 단순한 광화문집의 김치찌개>>
여러분의 편의를 위해 사진 퍼왔습니다
보기만 해도 먹고싶다. 꽁치구이나 계란말이까지
지난번 목동편의 세종회관 뒤쪽 LG25편의점을 기억하는가? 그 편의점 골목 초입왼편에 광화문집이 있다.
이집에서는 생각할 필요도 없이 김치찌개를 시키면 된다. 전국 한식당 중에 메뉴에 김치찌개 없는 집이 얼마나 될까. 그만큼 김치찌개는 흔한 음식이다. 그렇지만 그 많고많은 김치찌개 중에 제대로 맛을 낸 잘 끓인 김치찌개를 맛보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이 집은 그 많은 김치찌개 중에 몇손가락 안에 드는 맛난 찌개를 선보이는 집이다. 얼리지 않은 돼지고기 목살과 잘 익은 신김치로 맛을 내서 그런지 맛이 깊고 중후하다. 돼지고기·김치·두부·양념장·파. 다섯가지 이외의 다른 재료는 들어가지 않는다. 순수한 돼지김치찌개인 셈이다.
평일 점심시간같으면 몰려든 넥타이부대들때문에 자리 하나 얻기도 힘들겠지만 다행히 오늘은 주말이다. 여유있게 찌개 한 냄비를 다 비워도 괜찮을 듯. 간혹 그녀의 옷에 뻘건 찌개국물이 튈 위험이 있으니 미리 앞치마를 달라거나 손수건을 준비하는 매너를 잊지 말자.
<<13:40 - 14:30 5호·8호 타고 마을 타고 선사시대로>>
마을버스 타고 가는 길에 보이는 암사해물탕 본점. 진짜 암사동에 있었구나...
시골 소도시 어느 큰길같은 유적지 바로 앞 길
식사를 마쳤으면 LG25 건너편에 보이는 광화문역 입구로 들어가 5호선 지하철을 타자. 마천행이든 상일동행이든 상관없이 천호 방향으로 가는 거 아무거나 타면 된다.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5호선 지하철 내부는 정말 시끄럽다. 공사비 아끼려고 선로를 자갈이 아닌 시멘트로 마감을 해서 바닥소음이 이이이이이이이잉~ 장난 아니다. 어쩌다 맞은편 열차랑 스쳐지나가기라도 할 때는 위위위위위위위윙~ 수준으로 소음이 급상승한다. 머리가 찌지지잉 울릴 지경이다. 도대체 몇십년 내다보고 한 지하철 공사 맞나? 탈 때마다 투덜거리는 투덜이 지영은 기자다.
어쨌든 그나마 차량 내부는 깨끗하고 사람도 적으니까 좀 봐준다. 천호까지는 14정류장. 이렇게 쓰니까 "히익 그렇게 멀어?"하는 사람 분명히 있겠지만 그/그녀와 함께라면 그까짓 30분을 못 참을까. 아마 1분처럼 지나갈 거다. 걱정하지 마라.
천호에서 내리면 8호선 암사방향으로 갈아탄다. 많은 사람들이 지하철 갈아타는 거 진짜 싫어한다. 본인도 그렇다. 왜 이렇게 많이 걷게 만들어놓은 거냐고 갈아타러 가는 내내 씹퉁댄다. 그러나 천호역에서 5호선-8호선 갈아타는 곳은 그야말로 예술이다. 갈아타는 데 이렇게 쪼끔밖에 안 걷는 환승역은 처음 봤다. 계단 2~30개만 올라가면 된다. 30초도 안 걸려서 아주 편하다.
8호선을 타고 한정류장만 가면 암사역. 1번 출구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간다. 요즘 개통한 새 지하철역 출입구에는 에스컬레이터가 잘 돼 있어서 좋다. 나같이 게으른 사람한테는 제격이지. 올라가면 바로 앞에 마을버스 정류장이 있는데 거기서 줄줄이 오는 아무 버스나 타고 선사유적지 앞에서 내리자.
줄줄 써놓으니까 되게 복잡하게 가는 거 같지만 직접 해보면 40분쯤 걸린다. 하나도 안 힘들다. 본 기자, 절대 거짓말은 안 하니까 내가 힘 안 든다면 안 드는 거다.
<<14:30 - 15:30 암사동 선사유적지가 이런 곳이군>>
고인돌 입구
이런 사진 교과서에서 봤다
우선 마을버스에서 내리면 여기 서울 맞아? 싶다. 무슨 시골 소도시에 와 있는 것처럼 길에 차도 없고 건물도 없고 공기 자체가 다르다.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아 오길 잘 했다" 싶을 거다.
내려서 길을 건너면 고인돌로 된 선사유적지 입구가 있다. 입장료는 500원. 싸다. 고인돌을 통과해서 들어가면 탁 트인...은 아니고 숲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무성한 나무 사이로 길들이 보인다. 오른쪽으로 가면 옛 선조들이 살던 움집과 전시실이 있다. 움집 안에는 엄마·아빠·딸로 구성된 가족의 식사시간을 재현해놨다. 전시실에서는 선조들의 생활모습을 모형으로 볼 수 있고 국사교과서에서만 보던 빗살무늬토기니 청동제 농기구 등도 구경할 수 있다.
움막내부모형
휴지통도 빗살무늬토기
공원 전체가 산책로
선사유적지의 하이라이트는 뭐니뭐니해도 버드나무다. 전시실을 나와 다시 움집방향으로 쭉 걷다가 움집을 지나쳐 조금 더 가면 능수버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그 밑으로 나무 벤치가 죽 있는데 오랜만에 보는 버드나무가 참 반갑다. 선사유적지답게 빗살무늬토기를 흉내낸 쓰레기통도 재미있고 작심하지 않으면 평생 안 오고 지나칠 이곳을 그/그녀와 찾았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옛날에 고등학교(본 기자 남녀공학 합반 출신입니다) 2학년때 국사선생님(이름도 당당하다 조왕호 선생님)께서 "너네 주말에 몰래 데이트할 때 괜히 껌껌한 극장같은 데 가고 그러지 마라. 당당하게 손 잡고 암사동 선사유적지 가서 체험도 좀 하고 그래. 꼭 으슥한 데 가야 데이트냐? 학생답게 교육적인 데 좀 찾아다녀. 알았냐?"그러셨는데 갑자기 10년도 더 지나 이곳을 찾으니 그 생각이 나.... 앗 또 쓸데없는 얘기를...
어쨌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벗어나 다른 세계-마치 4차원에 온 것처럼-에 와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하는 이곳. 꼭 그/그녀와 와볼 만한 곳이다.
<<15:30 - 16:00 다시 마을 타고 8호 타고 올림픽 마을로>>
지하철역 나오면 바로 만나는 평화의 문
선사유적지를 빠져나와 바로 앞에 있는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2분정도만 기다리면 버스가 온다. 300원짜리 버스를 타고 암사역에서 내려 다시 지하철을 타고 3번째 역인 몽촌토성에서 내린다.
개찰구를 빠져나와 1번 출구로 향한다. 여기서 잠깐. 1번출구 오른편에 있는 화장실에 잠시 들르자. 야외공원의 맹점이 제대로 된 편한 화장실이 없다는 거다. 미리미리 갈 수 있을 때 가 두자. 게다가 이 역의 화장실은 서울시선정 깨끗한 지하철 화장실로 지정된 곳이다. 무궁화가 세개나 붙어있다. 아주 깔끔하고 쾌적한 화장실이니 가기 싫어도 들르자. 헤헤헤.
1번 출구를 나오면 만나는 돌계단이 참 좋다. 계단 끝과 하늘이 맞닿아 있어서 끝까지 오르면 하늘을 만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무슨 얘긴지 모르겠는 분은 직접 찾아가보세요). 계단을 다 오르면 정면에 평화의 문이 보인다. 여기가 올림픽 공원이다.
<<16:00 - 18:00 아아 정말 좋다. 올림픽 공원>>
이것이 장승터널
자전거도 탈 수 있다
올림픽공원에 딱 도착하면 제일 처음 보이는 것이 인라인스케이트(롤러블레이드) 타는 사람들. 동호회들이 매주 여기서 모임을 갖는다고 한다. 평화의 광장이라고 불리우는 이 넓은 마당 한켠에는 자전거를 빌려주는 곳도 있다. 그/그녀와 오랜만에 자전거를 타보는 것도 색다른 재미일 듯.
평화의 문 양쪽의 장승터널(기자 맘대로 붙인 이름입니다. 직접 가서 보면 왜 이런 이름을 붙였는지 알게 될 겁니다)을 빠져나가면 야외무대로 내려가는 계단과 호수를 만난다.
호수 왼편끝쪽을 보자. 퐁네프다리를 절대 연상시키지 못하는 곰말다리가 아담하게 호수를 가로지르고 멀리 아파트숲이 성냥곽보다도 더 작게 보인다. 앞쪽을 보자. 몽촌토성과 산책로가 잔디로 뒤덮여 한편 그림같다. 산책로 저 위쪽에는 언덕배기에 벤치가 담담히 놓여있어 우리를 부른다.
"어디어디에서 뭐뭐하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은 세계의 유명한 도시마다 거의다 있다. 서울에는? 이대정문에 있는 다리에서 해질 때 기차 꼬리를 밟으면...이라는 얘기외에는 들은 게 없다. 다리위에서 기차꼬리를 밟는다고? 참나... 내가 열번도 넘게 해봤는데 이뤄지기는 커녕 기차 꼬리 밟은 느낌도 안 나더라. 기차는 휘익 굴 속으로 사라지고 나는 멍청하게 '에잇'하며서 다리를 퍽퍽 밟고 있는 게 멍청하게만 느껴졌다.
곰말다리
올림픽공원의 곰말다리에서 서쪽을 보고 9월9일 오후 다섯시 오분 정각에 키스를 하면 사랑이 이뤄진다... 뭐 이런 건 어떨까? 초가을 저녁답게 해가 뉘엿뉘엿 저물기 직전, 호수에 반사된 햇살로 천지가 반짝거리고... 으으 너무 유치한가. 어쨌든 이 전설이 유포되면 원조는 지영은이라는 걸 잊지 말아주십쇼.
호수를 끼고 오른편으로 걸어가면 조각공원에 다다른다. 잔디밭 위로 조각들이 가득하다. 조각공원 너머로는 아담한 숲도 있고 팍팍한 다리를 쉬어가기에 좋은 벤치들도 넉넉하다 못해 넘친다.
벤치마다, 계단마다, 어디에나 연인들이다. 야외촬영하는 커플, 기타를 치고 있는 남과 여, 만난지 얼마 안 됐는지 조금 떨어져 앉아 얘기중인 사람들, 그리고 더없이 행복해보이는 오래된 연인까지... 진정 연인들의 천국이다.
조각공원을 오른편에 두고 있는 넓은 길을 쭉 걷다보면 왼편에 몽촌토성 산책로 입구가 나타난다. 아까 호수에서 봤던 언덕배기 벤치로 가는 길이다.
길고 긴 산책로가 끊임없이 나있다. 길마다 다 걸으면 3㎞도 넘을 것 같으니까 다 걸을 욕심일랑 처음부터 갖지 말자. 다 걷기에는 정말 벅차다. 미리 아래 지도를 보고 목표지점을 정해서 가장 빠른 길을 택해가자.
물론 다 걷고 싶다면 그것도 좋다. 언덕배기를 오르내리고 오른쪽·왼쪽으로 감겨드는 길들이 다 상냥하기 그지없으니 걷다가 그만둘 생각이 들지 않을 지도 모른다.
올림픽공원 안에는 체조·펜싱·역도·수영·경륜·테니스 경기장 등이 있다. 이중 펜싱경기장에서 오늘 밤 10시에 서태지의 컴백 콘서트가 있다. 공원이 워낙 넓어서 호수쪽에 있으면 별 영향이 없을테지만 그래도 장난 아니게 시끄럽고 붐빌 것이 예상되니 늦어도 여섯시에는 공원을 빠져나오자.
공연 티켓을 갖고 있는 독자는 곧바로 펜싱경기장으로 향해도 좋고.
<<18:00 - 20:00 강동구청역에서 만난 35년 전통 떡갈비>>
오늘의 저녁식사를 해결해줄 곳. 동신떡갈비
서태지 콘서트를 보지 않은 사람들은 다시 8호선을 타고 암사쪽으로 하나만 올라가서 강동구청역에서 내린다. 3번출구로 나와서 강동구청 방향으로 걷다보면 구청앞 삼거리에 도착한다.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조금만 더 내려가면 다시 작은 사거리를 만나는데 그 사거리에 멈춰서서 대각선 방향을 보자. '동신떡갈비'가 사진에서처럼 짜자잔~ 나타난다.
35년 전통의 떡갈비
매콤하고 시원한 김치말이국수
이 집은 35년 넘게 떡갈비를 구워판 집이다. 동두천에서 시작한 떡갈비 장사를 1986년에 이리로 옮겨서 하고 있는 것 뿐.
갈빗살을 잘게 다져서 양념을 하고 시루떡 모양으로 구워낸 떡갈비를 촛불버너를 이용, 식지 않게 내준다. 부드러우면서도 감칠맛이 나는 게 입에서 살살 녹는다. 양념이 아주 조금 느끼하지는 하지만 식사로 김치말이국수를 먹으면 그것마저 싹 가신다.
떡갈비 한대에 김치말이 국수 두개 시키면 둘이 먹기에 충분하다. 곁들여 나오는 반찬과 후식으로 주는 식혜도 집에서 정성스레 만든 듯 제맛이 난다.
<<20:00 - 당신들의 밤>>
오늘은 정말 힘든 여정이었다. 직접 해본 기자도 완전 쭉 뻗었다. 오늘만은 웬만하면 일찍 귀가하는 걸 권하고 싶다. 그렇지만 뭐... 본 기자의 밤이 아니라 당신들의 밤이니까 맘대로 하겠다면 할 말은 없다.
행복하고 부드러운 밤 보내시라~
오늘 데이트 한 선사유적지와 올림픽공원은 반드시 방문하시길 바랍니다. 정말 생각보다 백만배는 좋습니다. 추석연휴에 찾으면 사람도 없고 한가한 것이 그야말로 베스트일 것 같습니다. 연휴라 시간도 많으니까 그/그녀를 위해 못하는 요리솜씨라도 발휘, 김밥이나 유부초밥을 정성스레 싸간다면 그야말로 감동의 물결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