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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화가, 무용평론가 김영태를 그리며 게시판
2016.09.09. 12:40
http://blog.naver.com/kimwonarch/220808702814
시인이자 화가이며 무용평론가 고(故) 김영태(金榮泰) 씨는 –하도 오래 전 일이라 기억도 잘 안 나지만- 아마도 공간 시절 박용구(朴容九) 선생님과 무용가 최현(崔賢) 씨와 함께 알게 된 사이였는데 그럭저럭 인사나 하는 정도였다가 어느 때부터 더욱 친하게 되었는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이런저런 문화행사에서 자주 마주치게 되었고 특히 무용계 행사에는 터줏대감처럼 빠지지 않는 인물이라 내가 경희대 무용과의 박명숙(朴明淑) 교수와 가까워진 후 더욱 자주 보게 된 것 같습니다. 그는 자기 글에 나에 관해 쓴 것이나 나의 커리커처 같은 것을 먼저 보내주기도 해서 답례로 식사도 하고 차도 마셨는데 대단히 섬세한 성격에 삐치기도 잘하고 무언가 섭섭한 일에 못 견디는 성품이었습니다. 조동화(趙東華) 선생의 「춤」잡지에 글을 자주 실었는데 어느 날 조 선생과 싸웠다며 나에게 하소연을 하기도 했지요. 더군다나 동숭동 내 사무실과 그의 혜화동 로터리 아남아파트가 지척이라 말년에 더 자주 만나게 되었고 내가 보내준 이용재(李勇裁)의 책 「좋은 물은 향기가 없다」를 읽고는 거의 최고의 책이라는 듯 칭찬을 아끼지 않는 글을 자기 책에 싣기도 했습니다. 나에게는 또 특별히 좋은 무용공연에 초대장을 많이 보내주어서 늘 감사하게 생각이 있었지요.
나보다는 7년이나 손위로 36年生인 그는 스스로를 초개(草芥) 또는 눌인(訥人)이라고 쓰곤 했는데 그것들은 아호(雅號)처럼 들리지 않고 불초(不肖) 또는 소생(小生)같이 자기를 낮추는 표현으로 들렸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봉두난발(蓬頭亂髮)이라 했고 줄담배에 멋쟁이 stick과 모자 그리고 명품 가방이 그의 외관상의 특징이었습니다.
그가 암에 걸려서 오래 못 살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뒤늦게 그에게 미안하고 안쓰러운 마음으로 더 자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에 대한 마지막 기억들은 약간은 가물가물하지만 슬픈 추억으로 남아있고 최후의 며칠 이야기는 지금도 또렷이 생각이 나고 있습니다.
그날 그는 고기가 먹고 싶다고 했습니다. 불고기와 냉면을 잘하는 「조선옥」인가를 가자고 하는데 내가 안 가본 집이라 좁은 골목을 어렵게 찾아서 차를 몰고 갔습니다. 냉면은 차가워서 못 먹겠고 고기가 먹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미 갈비나 불고기를 생각만큼 잘 먹을 몸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동물적으로 고기를 먹겠다기보다는 정신적으로 옛 기억을 떠올리고 싶은 것 같았습니다. 고기를 먹는 것은 특히 갈비 같은 경우, 앞니로 뜯고 어금니로 씹어 먹어야 하는 것이지만 그날 그가 시킨 너비아니구이는 입 안에 넣고 우물우물 녹여서 즙과 양념을 목구멍으로 삼키는 일종의 의식(儀式)에 불과한 것이었지요.
오히려 그날은 내가 그의 용기를, 아니면 식욕을 불러일으키려고 더 고기를 많이 먹었습니다. 식당을 나오면서 그는 몹시 불만족해하며 동시에 몹시 만족해하며 나에게 여러 번 고맙다고 말했습니다. 병명이나 증세에 따라 다른 것인지 성격상 그런 것인지 그는 평소에도 좀 유난히 먹는 것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나는 그가 혼자 살면서 가끔 오후에 인사동길에서 만나면 비닐봉지에 감자나 파나 쇠고기 등 음식재료를 사서 들고 집으로 가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그가 집에 돌아가 파를 다듬고 음식을 준비하는 좀 궁상스러운 광경을 연상하고는 그 꼬지지한 모습이 조금 더 처량하게 보이기도 했습니다. 혼자 사는 남자의 부엌 풍경이 어떠했을까를 생각해 보면 그의 쪼그리고 앉은 뒷모습이 더욱 처량하게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늘 음식에 대해 까다롭고 미식을 즐겼습니다.
병세가 위중해서 고대안암병원에 입원했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그는 나에게 전화로 오렌지가 먹고 싶다고 했습니다. 사무실에서 가까운 곳이지만 그때 내가 당장 뛰어갈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게다가 전화목소리로 예상컨대 오렌지를 국물이 뚝뚝 흐르도록 우적우적 씹어 먹을 힘도 없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서두르지를 않았습니다. 나는 저녁에 가겠다고 전화를 끊고 미스 황에게 오렌지를 좀 사다가 갖다드리고 오라고 시켰습니다. 병원에 다녀 온 미스 황은 과연 잘 잡수시지 못하더라고 보고를 했습니다.
그날 밤 내가 겨우 일을 끝내고 병원을 찾았을 때, 그는 이미 혼수상태였습니다. 나는 그렇게 빨리 상태가 악화되리란 생각을 못한 것이 못내 미안하고 안타까웠지만 어쩔 수 없이 낮에 통화한 것이 어쩌면 마지막 대화였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나는 봉투에 돈을 좀 넣어서 가져갔으나 그대로 가져올 수도 없어서 돈 봉투를 간병인에게 맡기고 깨어나시면 드리던지 원하는 걸 사다드리라고 부탁을 하고 왔습니다.
또 하나 내가 준비해 간 것은 옛날에 내가 옹플뢰르(Honfleur)의 Maison Satie(에릭사티의 집)에 갔을 때 사온 배(梨)모양의 작은 기념품이었습니다. 배는 사티가 1903년에 작곡한 “배 모양을 한 세 개의 피아노곡”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스톱워치로서 피아노 위에 올려놓는 메트로놈(metronome:박자조절기)인데 평소 그가 보고 싶어 하던 물건이었습니다. 에릭 사티를 제일 좋다고 하던 그는 내가 사티의 집에 다녀온 이야기를 하면 몹시 부러워했지요. 그 생각이 나서 그날 집에서 가져나온 배를 함께 들고 가면서 그걸 보면 좋아하겠다던 생각은 헛것이 되었습니다. 나는 돌아오면서 그 박절기(拍節器)를 그의 머리맡에 두고 오면 혹시 깨어나서 그걸 보고 좋아하지 않을까 생각을 했는데, 사실 나중에 챙길 사람이 없으니 그걸 분실할 수도 있겠다며 그냥 들고 나온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습니다.
다음 날 경희대 무용과 박명숙 교수에게서 그가 밤에 병원에서 집으로 옮겨져 운명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나는 박 교수와 함께 혜화동 로터리의 아남아파트에 갔으나 빈소도 상주도 문상객도 아무도 없었습니다. 미국에서 그의 아들들이 위독하단 소식을 듣고 와 있었는데 운명 즉시 화장을 해서 수목장(樹木葬)으로 뼛가루만 묻어드리고 급히 미국으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그 아들들이 수목장하는 데까지 여행 가방을 끌고 왔다가 즉시 비행장으로 가더라고 누군가 말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외롭게 살다가 혼자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는 49재라고 하던 날 강화도 전등사(傳燈寺)에 있는 그의 수목장지에 무용 평론하던 후배 몇 명과 찾아갔습니다. 사람이 죽고 나면 그 허무함과 인생의 무상함을 늘 느끼기 마련이지만 커다란 나무 밑에 아무런 표지도 없이 향불 한 가닥만 연기를 내고 있는 모습이 그의 마지막 처량함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엎드려 절을 하고 일어나니 작고 하얀 나비 한 마리가 주변을 날아다니고 있었습니다.누가 그랬던가. 나비가 죽은 사람의 영혼이라던가 현신이라던가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한 그의 시 “누군가 다녀갔듯이”가 생각났습니다.
「누군가 다녀갔듯이」
하염없이 내리는
첫눈
이어지는 이승에
누군가 다녀갔듯이
비스듬히 고개 떨군
개잡초들과 다른
선비 하나 저만치
가던 길 멈추고
자꾸 자꾸 되돌아보시는가
전등사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차 속에서 무용평론가 ○○○ 씨와 무용사진가 ○○○ 씨가 나에게 말하기를 고인이 운명하기 전에 자기가 죽으면 일년 되는 날 추모의 무용공연을 한 번 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했습니다. 나에게도 그렇게 말해서 도와달라고 하라고...
그리고 일 년 후 시인ㆍ화가ㆍ무용평론가 김영태의 일주기(一週忌) 추모공연이 2008년 7월 12일 아르코대극장에서 열렸습니다. 무용공연이 있는 날이면 그가 항상 앉았다는 2층 왼쪽 맨 뒷줄 빈 좌석에 꽃다발이 놓여 있었고 그가 생전에 “나의 뮤즈”라고 사랑했던 젊은 무용수들이 거의 대부분 노개런티로 출연해 주었고 공연이 끝나고 나니 누군가 뒷풀이 음료까지 로비에다 마련해 둔 것을 보고 참 고마웠습니다. 정작 나는 해준 것도 없이 손님으로 대접만 받는 꼴이 되었습니다.
2008. 7. 12. 아르코예술극장 故 김영태 一週忌 추모공연 “나의 뮤즈들” 뒷풀이.
사진 좌로부터 김태원(춤평론가), 김순정, 이용인(이나현으로 개명), 허용순, 김지영, 정순영(춤평론가), 김원
X월 X일
건축가 김원 에세이 『행복을 그리는 건축가』를 읽다가 그가 좋아했던 노자(老子)의 대교약졸(大巧若拙)을 음미해 본다. 지극한 경지에 이른 솜씨는 지극히 치졸해 보인다는 뜻이다. 명필 추사가 말년에 쓴 ‘판전’이 그러한 경우인데 내가 쓴 봉두난발체가 대교약졸에 이르려면 아직 멀었다.
X일 X일
건축가 김 원(金 洹)은 2003년 회갑을 맞았다. 회갑기념 <행복을 그리는 건축가>(열화당)에 들어있는 김 원이 사랑한 사람들은 김중업, 김수근, 권진규(화가) 등이다. 그들은 이 세상에 없다. 고희연을 앞두고 내가 사랑한 사람들을 선별하라면 김 원도 그 안에 있다.
김수근 건축연구소에 재직했을 때 만났으니 30여년이 넘는다. 얼마 전 완공된 러시아 대사관이 그의 최근작이지만 그는 건축가요, 환경운동가이다. 1979년 지오 폰티의 <건축예찬>을 번역했듯이 그의 심미안은 나 같은 시력(詩歷) 40년 건달이 따라가지 못한다. <건축예찬>은 ‘창은 얼어붙은 음악’이라고 정의되어 있듯이 산문시였다. 지오 폰티의 유려한 글을 김 원의 감각적 문체가 시적 상상력을 환기시킨 책이다. 책 안 읽는 무용가들에게 <건축예찬>을 읽으라고 권한 것은 건축가는 집을 짓는 설계자를 떠나서 ‘모든 재료에는 형태가 되고자 하는 열망이 있다’ ‘건축가는 건물이 하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한다’에서 춤과 대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모든 움직임에는 원인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 있다’ ‘무용가는 움직임이 만드는 상상력에 귀기울여야 한다’ 이다.
<건축예찬>은 이탈리아 건축가를 소개하는 글이 아니었다. 김 원이 머리말에 썼고 밀라노에서 만났듯이 그는 시인이었다. 지오 폰티는 말했다. “건축은 초연하다. 음악은 그렇지 못하다(음악은 진동한다). 바흐는 초연하다. 그는 건축가일지도 모른다.” “건축은 말이 필요 없다. 침묵으로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건축은 노래해야 한다” (르 코르뷔지에) “발코니는 한 척의 범선, 창은 투명한 그림이다.” “건축가는 계단이라는 배우의 연기(演技)를 들어야 한다.” “가장 아름다운 계단은 거대한 공간 속에서 넓은 벽을 따라 기어오르는 폭이 좁은 계단이다.” “분수는 하나의 목소리이다.”
며칠 전 무용가 박명숙과 딸 희주 부부, 김 원과 라 쿠치나(김 원 설계)에서 저녁을 먹었는데 영화 <진주 귀걸이 소녀>가 화제였다. 김 원이 네덜란드에 유학했듯이(바우센트룸 국제대학원) 이 그림은 네덜란드 화가 페르메르의 걸작이다. 필자는 페르메르가 그린 <귀향>을 본 적이 있는데 영화를 보려고 벼르다가 짧은 종영으로 놓쳤다. 김 원이 인터넷 사이트에 쓴 글에 의하면 페르메르 원화에 나오는 진주 귀걸이 소녀와 영화의 주인공(스칼렛 요한슨) 모델은 부끄러운 듯, 방심한 듯한 연민의 모습이 거의 닮았다. 소설을 쓴 트레이시 슈발리에는 <진주 귀걸이 소녀> 복사본을 머리맡에 두고 살다가 어느 날 10대 모델의 표정에서 화가에게 못다 한 하녀의 비밀을 상상력으로 숨결을 불어넣는다. 화가는 가장 그리고 싶은 하느님의 피조물을 이젤 앞에 앉힌다. 그림의 균형을 위해 화가는 아내의 진주 귀걸이를 꺼내 소녀의 귀에 걸 때 귀뿔이 뚫어지지 않아 귀를 뚫겠다고 소녀의 허락을 받는다. 김 원은 이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다. “침묵의 고통 뒤에 소녀의 작은 귀바퀴에서 흘러내리는 한 방울의 피, 지극히 절제되었으되 대단히 육감적인…” (처녀의 상실을 상징했듯이)
그림이 완성되고 나서 하녀는 집으로 돌아온다. 1년 후 화가의 집에서 같이 일했던 동료가 소녀를 찾아온다. 화가가 작은 포장지에 싸서 보낸 진주 귀걸이였다.
영화에서 생략되었지만 김 원이 읽은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화가가 임종할 때 그가 간직했던 <진주 귀걸이 소녀>를 침상 곁에 갖다 놓아달라고 했다”
X월 X일
혜화동 네거리 단골찻집 ‘엘빈’ 옆집 동양서림에 간다. “건축평론가인데 요즘 택시 운전하는 이용재 씨가 쓴 책 『좋은 물은 향기가 없다』나왔어요?” 묻는다. 서점 주인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나를 쳐다본다. “저 늙은이는 늘 이상한 책만 찾아….” “신간이요?” 되묻는다. 신간서적 진열대에도 그 책은 없다. 할 수 없이 주문한다.
이용재 씨가 1960년생이니까 내가 문단에 데뷔한 이듬해 태어났다. 명지대 대학원 때 「김중업의 작품에 관한 연구」를 썼고, 『김원 건축작품집』등 책을 냈다. 이 책은 스승 김원에 대한 저자의 존경심과 여러 일화를 소개하고 있지만 저자의 해박한 역사관은 물론, 육두문자가 여러 번 나오듯 선배 건축가에 대한 찬미를 떠나서 나 같은 먹물이 그동안 체험했던 세태의 만물상을 이실직고하는데, 책을 읽다가 여러 번 포복절도하게 만든다.
71세에 동아일보사 대기자가 된 최정호가 스타일리스트이듯 40대 이용재 역시 ‘대단한 스타일리스트’임은 분명하다. 읽기 시작해서 책을 놓지 못한 것도 요 근래 처음인 것 같다. 그만큼 이용재의 글은 설득력은 물론, 따분하고 지리멸렬한 세상을 살아가는 내게 주사바늘로 각성제를 투약했다. 책 읽다가 여러 번 미친놈처럼 웃었고(너무 통쾌해서, 후련해서, 곪아터진 환부를 도려내는 듯해서),
건축가 김원이 누구인지 아는 내게 이용재의 김원 찬미는 세상과의 타협을 불허한 한 예술가를 다각도로 조명한 숨겨진 일화, 건축가이며 생태환경 개선 리더의 양심과 고집 및 안목으로 일관했다는 점에서 충격이고, 작은 ‘지진’ 같은 것이다. 저자가 비록 리히터가 치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을 들으면서 택시를 몰지만. 리히터는 쇠망치로 건반을 내리친다. 아니 손가락은 뭐하나? 건반 안 깨지나? 리히터는 라흐마니노프의 악보를 치는 게 아니다. 자기를 친다. 인생이 좀, 세상이 좀 싫었는가 보다. 오죽하면 쇠망치로 내려치겠는가. 세상을 뽀개고 싶은가? (본문 중에서)
[출처] 시인, 화가, 무용평론가 김영태를 그리며|작성자 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