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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 주현절 첫째 주일
예배 시편 / 시편80편 1-7절
찬송 / 473장 · 아 내 맘속에서
성서 / 예레미야 18장 1-10절, 고린도후서 4장 5-12절
말씀 / 질그릇에 간직한 보물
이스라엘 백성아, 내가 이 토기장이와 같이 너희를 다룰 수가 없겠느냐? 나 주의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 안에 있듯이, 너희도 내 손 안에 있다. (예레미야 18장 6절)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엄청난 능력은 하나님에게서 나는 것이지, 우리에게서 나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
김윤식 목사
Ⅰ
한 대학교의 강의실에서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퀴즈를 냈다고 합니다. 교수님은 갑자기 테이블 아래에서 커다란 항아리 하나를 꺼냈지요. 그러고는 교실 한편에서 주먹 크기의 돌을 가져와 항아리를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더 이상 항아리에 넣을 곳이 없게 되자 교수님은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항아리가 가득 찼습니까?” 학생들은 그렇다고 대답했지요. 그러자 교수님은 다시 교실 한편으로 가서 자갈을 가져와 항아리에 채워 넣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또 물었습니다. “항아리가 가득 찼습니까?” 그러자 학생들은 잠시 고민하다가 그렇다고 다시 대답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교수님은 교실 한편으로 가서 물을 가져와 항아리를 가득 채웠습니다.
교수님은 그제서야 학생들에게 이 간단한 실험의 의미를 물었지요. 학생들은 가득 찬 것같이 보여도, 더 노력하면 새로운 일을 사이에 넣을 수 있다는 걸 가르쳐 주시기 위한 실험이 아니냐고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교수님은 학생들에게 반드시 큰 돌을 먼저 넣어야만, 다음의 것들도 넣을 수 있으니, 모든 일의 우선순위를, 곧 처음과 나중을 잘 구분하라고 가르쳐 주었답니다. 생각해보면 그렇습니다. 모든 일에는 먼저 해야 할 것과 나중에 해야 할 것이 있고, 뿌리처럼 근본이 되는 것과 가지 끝 돋아난 싹처럼 지엽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수님은 이 실험을 통해서 학생들에게 ‘선후, 본말’을 분별하는 지혜를 가르쳐 주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실험에서 더욱 중요한 조건이 있습니다. 항아리에 무언가를 채우기 위해서는 항아리의 어딘가는 비어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어있어야 채울 수 있고, 비어있어야 쓸모가 있고, 쓸 수가 있습니다.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요. 항아리는 빈 공간이 있어야, 채워서 사용할 수 있고, 우리가 생활하는 집 안의 방도 빈 공간이 있어야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2023년을 시작하면서, 올 한 해 동안 우리가 먼저 해야 할 것과 나중에 할 것, 본질적인 것과 지엽적인 것을 잘 구분하는 지혜를 지닐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뜻으로 우리를 채우기 위해서, 우리 안에 허황된 것들과 잘못된 미움과 탐심을 비울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마음 가운데 우리의 탐심과 허황된 마음을 비우고, 주님의 말씀의 빛으로 우리를 가득 채울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주현절 첫 주일입니다. 주현절은 주님께서 나타나셨다는 뜻을 지니고 있지요.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함께 계시면서 나타내신 복음의 사역을 기억하며 따르는 절기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비추어 주시고, 우리 가운데 빛과 소망으로 함께해 주시기를 기원하고,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도록 다짐하는 절기입니다. 주님께서 은총으로 함께하셔서 어둠 속에 헤매는 우리를 밝게 비추어 주시고, 우리를 주님의 빛으로 채워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우리가 주님 빛 안에 비친 우리의 모습을 새롭게 발견하고, 가족과 이웃을, 우리의 주변을 주님의 은총의 빛으로 밝게 비출 수 있는 주님의 빛으로서 살아가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Ⅱ
오늘 우리는 구약 말씀으로 예레미야서 18장의 말씀을 받아 읽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토기장이의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지요(렘 18:1). 흙으로 그릇을 빚는 토기장이의 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시겠다고 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토기장이의 집으로 갔습니다. 때마침 토기장이가 물레를 돌리며 일을 하고 있었지요(렘 18:3). 예레미야는 그곳에서 토기장이가 일하는 모습을 자세히 보았습니다.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그릇을 빚다가 잘되지 않으면, 다시 그 흙으로 만들려던 그릇이 아니라 다른 그릇을 만드는 것을 보았지요(렘 18:4). 그때 주님께서 예레미야를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토기장이와 같이 너희를 다루시겠다는 말씀이었지요. 주님은 토기장이이시며, 이스라엘 백성은 진흙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토기장이와 같고, 이스라엘 백성이 진흙과 같다는 말씀은 주님께서 토기장이처럼 이스라엘을 그분의 뜻과 계획대로 빚으시겠다는 뜻이지요. 유다와 예루살렘이 주님의 손에 있는 진흙이라면, 그들이 주님의 뜻에 어그러질 때 주님은 그들을 다시 바르게 하실 것입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이 진흙과 같다는 것은 아직 그들이 바르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그들을 향해서 악한 길에서 돌이키고, 주님께로 돌아오라고 간절히 외치며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처음 불러 소명을 주실 때, 그 소명은 악하고 허망한 것들을 뽑고 부수거나, 멸망시키는 주님의 심판과 심고 세우시는 회복과 구원을 선언하는 것이었습니다(렘 1:10). 이제, 예레미야는 토기장이의 집에서 이 소명을 다시금 돌아봅니다. 아직 변화 가능한 진흙과 같은 이스라엘, 토기장이의 손에 붙들려 있는 진흙과 같은 이스라엘이 돌이키기만 한다면, 주님께서 그들을 다시 심고 세우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돌이키지 않는다면 그들을 뽑고 부수며,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그 고집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악한 길을 변함없이 고수했습니다. 그들은 예레미야의 말을 듣고 마음을 비우고, 참회하며 돌이키기는커녕 오히려 예레미야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지요. 이러한 위기 속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그들을 고발합니다. 예레미야 18장 18절입니다. “백성이 나를 두고 이르기를 ‘이제 예레미야를 죽일 계획을 세우자. 이 사람이 없어도 우리에게는 율법을 가르쳐 줄 제사장이 있고, 지혜를 가르쳐 줄 현자가 있으며, 말씀을 전하여 줄 예언자가 있다. 그러니 어서 우리의 혀로 그를 헐뜯자. 그가 하는 모든 말을 무시하여 버리자’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도, 더 나아가 예레미야를 죽이는 계획을 하는 데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믿을만한 것들이 제법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레미야가 없더라도, 우리에게 율법을 가르쳐 줄 제사장이 있다. 예레미야가 없더라도, 우리에게 지혜를 가르쳐줄 현자가 있다. 예레미야가 없더라도 우리에게 말씀을 전하여 줄 예언자가 얼마든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에게는 예레미야가 없더라도, 무수한 제사장과 현인과 예언자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고집대로 행동할수록 하나님의 뜻과 멀어졌지요. 그리고 결국, 그들에게는 많은 제사장과 현인과 예언자는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계시지 않게 되었습니다.
Ⅲ
이어지는 예레미야 19장에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다시 부르십니다. 예레미야에게 토기장이를 다시 찾아 항아리를 하나 사라고 말씀하시지요(렘 19:1). 그리고 백성의 대표인 장로들과 제사장들을 데리고, 그 항아리를 든 채로 힌놈의 골짜기로 향하도록 하십니다. 힌놈의 골짜기. 그곳은 구약성서에서 가장 악하고, 허망한 우상숭배(몰렉숭배)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곳입니다. 그곳에서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탐심을 위해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섬겼지요. 그런데 힌놈의 골짜기의 가장 큰 문제점은 우상을 섬기는 방식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불안을 없애기 위해서, 탐심을 위해서 자기의 자식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주님께서는 그곳에서 예레미야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려질 끔찍한 재앙과 심판을 선언하십니다(렘 19:3-9). 그들이 행한 악행대로, 보응하는 끔찍한 심판입니다. 주님께서는 항아리에 담긴 내용물을 빼내고 부어버리듯, 이스라엘과 유다의 악한 계획들을 모두 부어버리겠다고 선언하십니다(히, 바라부크; 렘 19:7).
그리고 예레미야는 그 자리에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항아리를 깨뜨려 버렸습니다(렘 19:10). 토기장이의 손에 들린 진흙은 잘못되어도 다시 다른 그릇으로 만들 수 있었지만, 이제 깨진 항아리는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재앙과 심판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항아리와 같이 처참하게 깨버렸다는 것을 예레미야를 통해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악한 마음과 고집을 돌이킬 줄 몰랐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인 제사장은 힌놈의 골짜기에서 항아리를 깨뜨린 예레미야를 잡아다가 때리고, 그를 묶어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죄명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불경죄였습니다(렘 20장).
이스라엘에는 성전과 무수한 제사장과 현인과 예언자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제대로 된 지도자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공평을 저버린 왕과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을 항아리를 깨뜨리듯 처참하게 파기했습니다. 제사장 예언자들은 권력에 빌붙어 그저 듣기 좋은 “은혜와 평화”만을 외치고 있었을 뿐입니다. 새 마음과 새 뜻을 위해 잘못된 것들은 이제 뽑고 부수고 멸망되어야만 합니다. 그들이 악한 길과 고집을 돌이키지 않으므로 하나님이 멀리 떠나게 된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많은 제사장과 현인과 예언자는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계시지 않게 되었습니다.
일찍이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불안한 마음에 저마다 지닌 금을 녹여 우상을 만들어, 그것을 하나님으로 섬겼지요.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돌판을 들고 내려오다가, 그 장면을 보고는 화가 나서 그 돌판을 던져 깨뜨려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다시 부르셔서 새 돌판에,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 주셨습니다. 옛것은 깨어졌지만, 새것이 은총으로 주어졌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눈 예레미야의 본문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악행과 고집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거역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토기장이의 손에 들린 진흙처럼 그들을 빚어가길 원하셨지만, 완고한 고집과 악행은 결국 스스로 깨진 항아리가 되는 결말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예레미야를 통해 이스라엘을 뽑고 파멸하고, 멸망하게 하는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선언하시는 이유는 그들을 새롭게 심고 세우기 위함입니다. 썩은 권력과 거짓 종교가 심판받은 자리에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를 그리고 말씀의 빛으로 가득한 성전을 새롭게 세우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다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구하면, 하나님께 돌이키면 그들을 다시 바르게 세워주시고, 하나님의 빛과 은총 가운데 거하게 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예레미야를 통해 주어지는 새로운 빛, 새로운 언약의 말씀은 부서질 돌 판에 새기거나, 깨어질 항아리에 담는 것이 아닙니다. 속에 두시는 언약, 마음에 새기는 말씀입니다(렘 31:33).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함없이 살아간다는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뽑고 파멸하고, 멸망하게 하는 심판이 지난 후에, 새로운 말씀을 빛으로 그들 가운데 심어주시고, 그들을 세워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주시는 새로운 빛과 말씀, 새로운 언약입니다.
Ⅳ
오늘 우리가 받아 읽은 신약 말씀에서 바울은 우리를 질그릇에 비유합니다. 질그릇은 고온에서 구워진 단단한 그릇도 아니지요. 유약도 발라지지 않아서 깨지기 쉬운, 말 그대로 보잘것없는 흙그릇입니다. 바울은 인간이 질그릇처럼 흙으로 빚어졌음도 잘 알고 있었고(창 2:7), 앞서 살펴본 예레미야의 말씀에서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존재이며, 깨지고 부서지기 쉬운 존재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렘 18:6; 19:1, 10).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여전히 돌아섰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졌지만, 그리고 이 과정은 지금도 계속 진행 중이지만, 바울은 하나님의 참된 형상이신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빛이 드러났다고 말합니다(고후 4:4). 태초에 하나님께서 “빛이 있었으면!” 하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고, 그 빛을 우리의 마음 가운데 비추어 주신다는 겁니다(고후 4:6).
우리는 질그릇에 불과하지만, 보잘것없는 질그릇이 이 하나님의 빛 안에서 다시 새로워집니다. 더 이상 보잘것없는 그릇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 가장 값진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그 영광을 아는 빛을 담아두시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질그릇 안에, 바로 우리 안에 빛나는 보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빛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빛이 아니라, 그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빛입니다. 이 빛이 우리 속을 밝힐 뿐 아니라 우리의 밖을 밝게 할 것입니다.
바울은 이 빛이 있기 때문에,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는다”라고 고백합니다(고후 4:8-9). 이 보물은 우리의 탐심을 채우기 위한 우상이나, 부와 재물을 장담하는 부적은 아닙니다. 질그릇 속에 보물을 지닌 믿음의 사람에게도 죄어듬과 답답한 일과 박해와 거꾸러뜨림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바울은 이 보물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으면서, 아니 이 보물 때문에 누구보다 오해와 핍박과 박해와 고난을 받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고난 속에서도 이토록 용기 있게, 담대하게 전하는 질그릇 속에 담긴 보물인, 그 빛을 그저 마음에 담아두고 아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짊어지고, 드러내고, 육신을 통해 드러내고자 애썼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질그릇 안에 담긴 보물은 바로 “예수의 죽으심”을 우리의 몸에 짊어지고 다니는 것입니다(고후 4:10). 예수님의 삶과 죽음,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나타난 영광의 빛을 아는 지식입니다(고후 4:6). 촛불이 자기 몸을 태워 빛을 비추는 것처럼, 자신의 생명을 살라 죽기까지 사랑하신 예수의 죽으심을 몸으로 짊어지는 것이었지요. 그렇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죽음을 기억하고 짊어지는 것이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바울의 이 고된 노력은 자기를 위한 것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고린도후서 4장 12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리하여, 죽음은 우리에게서 작용하고, 생명은 여러분에게서 작용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지요.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애타게 찾으면서도, 조금이라도 피해를 보고 고통당하는 것을 외면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 아닌지요?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보물은 세상이 생각하는 보물이 아니었지요. 자식까지 불태우며 탐심을 채워주는 우상도 아니었습니다. 나에게 죽음이 작용하고, 너에게 생명이 나타나게 하는 보물! 나를 죽이면서 다른 이를 살리는 보물!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내 안을 밝히는 보물, 나를 불사르는 보물, 다른 이를 비추는 보물, 세상을 비추는 보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그분의 영광의 빛을 알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질그릇과 같은 우리 가운데 빛나는 보물을 채우기 바라십니다. 다만, 우리가 겸허한 마음으로 주님의 빛 안에서 우리를 돌아볼 때, 주님께서 우리 안에 뒤틀린 진흙과 같은 마음을 바로잡아 주시고, 우리가 버리고 깨트려야 할 악행과 고집을 벗어버릴 수 있도록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질그릇과 같을 지라도, 주님의 은총의 빛으로 우리를 가득 채울 때, 때로 죄어듬과 답답한 일을 당하고, 박해를 당하거나 거꾸러트림을 당할지라도 예수님의 죽음을 기억하고 몸으로 짊어짐으로, 우리가 주님 안에서 우리에게 죽음이 작용하게 하고, 다른 이에게 생명이 나타나도록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어둠 속에서 살아갈지라도, 어둡고 어려운 생활이 이어질지라도, 아니 세상이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짊어지는 삶,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의 빛을 드러내는 믿음은, 그 빛이 작을지라도 주님 안에서 더욱 빛날 것입니다. 우리가 올 한 해를 시작하며, 우리 가운데 있는 허망하고 불의한 탐심을 비우고 내려놓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 빈자리에 다른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우리의 질그릇 속에 “나에게 죽음이 작용하고, 너에게 생명이 나타나도록 하는” 이 빛나는 보물을 소중히 지키며 간직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