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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쳐)3조 두류공원 인물동산에서 활동
* 벤처 3조 김병철 조장 중심으로 사회공헌활동을 통하여 문화재지킴이 회원들이
활동하는 모습과 공원을 찾으시는 많은 시민들에게 열성적으로 활동하는 모습과
시민들이 궁금해 하는 내용에 대하여 해설도 하면서 긍지를 가지고 즐거운 마음으로
활동하여 주기를 조원들에게 말씀을 하시며, 공지사항 및 활동할 사항에 대하여도
안내하고 봉사하는 보람으로 적극 참여하여 주시는 것 감사하다는 말씀을 하시며
행복한 활동시간을 가지자고 하신다.
▼ 김병철 조장이 진행하시는 장면
▼ 적극 참여하는 조원들
▼ 두류공원내의 인물동산 조성현황
시민들을 위한 아늑한 휴식공간을 찾으시는 시민들에게
인물동산에 대하여 해설할 수 있도록 열심히 학습하다.
* 인물들에 대한 소개자료는 블로그나 카페에서 퍼 온 것으로
사회공헌활동하는 회원들에게 크게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1. 목우 백기만[白基萬]<1902. 5. 12 ~1967. 8. 7>
달서구 두류동 산 154번지(두류공원 내)에 소재한 이 비는 1991년 7월 15일 백낙운·이설주·
최영호·이윤수·전상렬·여영택·이민영·전인규·윤장근 등이 뜻을 모아 대구가 배출한 신문학
개척자요 항일운동가이며, 대구사랑 실천자인 목우 백기만 선생의 정신을 함양하고 그 업적
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가로 120㎝, 세로 44㎝, 높이 120㎝)하였다.
목우는 1902년 5월 12일 대구시 남산동에서 백량휴의 차남으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수원이다. 1919년 3·1운동 당시 18세의 나이로 대구만세운동을 주도하였고 대구를 사랑하시던
선생의 남다른 정성은 우리들 가슴에 영원히 남을 『대구시민의 노래』로 표현되어 남아 있다.
주요저서로 『상화와 고월』『씨뿌린 사람들』등이 있으며, 묘소는 신암동 애국선열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2. 고월 이장희<1900.1.1~1929.11.3> 시비가 있는 곳에서
이장희 선생은 1900년 11월 9일 대구 서성동에서 태어나 1929년 11월 3일 짧은생을 마친
시인이다. 본명은 양희(樑熙)이며 아호는 고월(古月)이다. 그는 대구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경도중학을 졸업하였다. 문단의 교우관계는 유엽·김영진·백기만 등 극히 제한되어 있었고
세속적인 것을 싫어하여 고독하게 살았다.작품활동은 1924년 이후 '실바람 지나간 뒤',
'새 한 마리', '불놀이', '무대', '봄은 고양이로다' 등 5편의 시작품과 톨스토이 원작의 번역소설
'장구한 귀양'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으며 그후 '신민', '신여성' 등 30여편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의 시는 사후 1951년 청구출판사에서 간행된 백기만편의 '상화와 고월'에 실린 11편만이
전해지다가 1970년대 초반부터 그의 시연구가 본격화되면서 '봄은 고양이'와 '봄은 고양이로다'
등 두권의 전집에 그의 유작이 총정리 되었다. 그의 시적 특색은 섬세한 감각과 이미지의
조형성을 보여줌으로써 한국시사에서 새로운 시적 경지를 개척하였다. 위의 시비는 향토
문학가들이 그의 시를 기리고 외로운 얼 을 달래기 위해 1996년 11월 9일 두류공원내
인물동산에 비를 세웠다.
3. 이상화<1901.4.5~1943.4.25> 시비
"시인 이상화는 서기 1901년 신축 4월 5일 부친 이시우공의 제2자로 태어나
서기 1943년 3월 22일 43세로 세상을 떠나니 대구는 그 출생지요 종언지이다.
그의 시력은 <백조>동인시대에 시작되었으니 향기롭고 분방한 그 시상은 초기의
조선시단에 있어서 청신한 일매력이었다. 대표작으로는 <나의 침실>을 비롯하여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역천><이별> 등이 있으니 비면에 새긴 시구는
<나의 침실로>의 1절이다. 흘러간 울(?)의 자취를 굳이 찾을 것이 아니로되 시인의
조잘(?)한 생애를 추모하는 뜻과 아울러 뒤에 남은 자의 허술하고 아쉬운 마음을
스스로 달래자는 생각으로 적은 돌을 새겨 여기 세우기로 한다."
김소운 찬(글을 지은 사람)
제첨 위창 오세창 84세(서예가, 종이에 글씨를 쓴 사람)
시구 유윤3자 태희 11세(이상화 시인의 셋째 아들)
배명 죽농 서동균(서예가, 뒷면 글씨 새긴 사람)
[출처] 이상화 시비|작성자 주윤
4. 빙허(憑墟) 현진건<1900.8.9~1943.4.25> 문학비에 대하여
현진건 선생은 1900년 음력 8월 9일 대구 계산동에서 태어 나 1943년 5월 25일생을
마친 한국사실 문학의 대표적 작가 이다.호는 빙허(憑墟)이며 1915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成城中學(성성중학) 4학 년을 중퇴하고 상해로 건너가 호강대학에서 수학 후
1919년 귀국하였다. 1920년 '개벽'에 '犧牲花 (희생화)'를 발표하고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하면서 이듬해에는 '빈처(貧妻)'를 발표함으로써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홍사용,
박종화 등과 '백조(白潮)' 창간동인으로 참여하여 1920년대 신문학운동에 본격적으로
참가하였다. 1922년에는 동명사에 입사했고, 1925년 그 후신인 시대일보가 폐간되자
동아일보로 옮겼으며 1935년 동일일보 사회부장 당시 일장기 말살사건으로 인해 구속되었다.
1937년 동아일보사를 사직하고 소설 창작에 전념하였으며, 친일문학 에 가담하지 않은 채
가난하게 살다가 1943년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장·단편 20여편과 7편의 번역소설
그리고 여러편의 수필 비평문 등을 남겼는데, 그의 작품 경향은 민족주의적 색채가 짙은
사실주의 계열로서, 지식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자서전적 신변소설, 하층민과 민족적 현실에
눈을 돌린소설, 1930년대의 장편소설과 역사소설의 세 부류로 나눈다. 이밖에 그는 '조선혼과
현대정신의 파악'과 같은 비평문을 통해 식민지 시대의 조선문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는 김동인·염상섭과 더불어 근대문학 초기에 단편소설 양식을 개척하고,
특히 식민지시대의 현실대응 문제를 단편기교와 더불어 탁월하게 양식화한 작가로서,
문화 사적 위치를 크게 차지하고 있다. 위의 문학비는 향토 문학인들이 뜻을모아 영롱한
그 자취를 후세에 전하고자 1996년 11월 9일 두류공원내 인물동산에 비를 세웠다.
5. 운영 애국지사 조기홍<1883~1945> 선생 동상 및 기념비
《대한민보》를 인쇄하고 배포했던 독립 운동가.
대구 출생. 1919년 최익무(崔益武) ·유흥준(柳興俊) 등과 《대한민보(大韓民報)》를
인쇄하여 배포하고 3 ·1운동에 참가한 후 피신하였다. 1921년 대한민보사건이 드러나
대구에서 1년간 복역하였다. 출옥 후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일본요인 암살과 일본군시설을
파괴하려고 폭탄을 제조 ·은닉하였다. 기회를 기다리던 중 발각되어 3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석방 후에도 계속 항일투쟁에 진력하다가 1943년 다시 검거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그로 인하여 병사하였다. 1968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6. 애국지사 박희광<1905.2.15~1970.1.22> 선생 조각상
일제강점기 때 활동한 독립운동가.
본관 밀양(密陽). 별명 상만(相萬). 경상북도 선산(善山) 출생이다.
1912년 조국광복의 역군이 될 결심으로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단체인
통의부(統義府)에 가입하여 제5중대원으로 중대장 김명봉(金鳴鳳)의 부하가 되었다.
1924년 동지 김광추(金光秋)·김병현(金炳賢)과 함께 선양[瀋陽] 성내에 거주하는
친일파(親日派) 보민회(保民會) 회장 최정규(崔晶奎)의 집을 습격, 최정규는 은신하고
그의 장모와 서기 박원식(朴元植) 등을 사살하였다.
그 후 다시 활동을 개시하여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중국경찰에 체포되어 일본경찰에게
인도되고, 뤼순[旅順]에서 징역 20년을 선고받아 15년 동안 복역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7. 대구사범학생독립운동기념탑
소재지 : 대구광역시 달서구 두류동 두류공원내 인물동산
※ 기념탑 건립문 ※ 눈서리가 땅을 덮어도 송죽은 푸름을 바꾸지 않고 총칼이 목숨을 겨눠도 지사는 뜻을 굽히지 않나니, 자연은 푸른 나무들에 의해 아름다움을 더하고 인류역사는 불의에 항거하는 지조로 인해 바른 길로 나아감이라. 일제 군국주의 망령이 이 땅을 침탈하고 2천만 백의민족을 노예로 삼음에 4천유여년의 유구한 혈성의 민족 자존은 분연히 분기하였더라. 자유와 평화를 위해 피흘리고 차디찬 영어에서 신음했으니 자유는 만물의 생명이며 평화는 인류 공영 기본권이라 그 누구도 타의 자유의 정확을 저상커나 늑탈치 못함이 만유의 대도이다.
대구사범 학생 항일독립운동은 1930년 후반부터 40년대 초에 걸친 암울했던 시기에 일제의 국가총동원법과 치안유지법이 난무하던 가혹한 시대적 배경하에서 일어났고 혹독한 탄압 속에서 줄기차게 투쟁을 전개한 연면상이 그 특징이다. 특히 이 운동은 독립을 쟁취하는 데 그치지 않고 광복 후까지 대비한 미래지향의 지성적 학생운동으로서 항일독립운동사에 찬연히 빛나는 새로운 장을 열었던 것이다. 여기 그 공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탑을 높이 세우고 그들의 위대한 업적과 이름을 이 비에 적어 새기노니 불굴의 그 애국 충정 길이길이 민족의 역사와 함께 영원할지어다.
1997년 11월 3일 문학박사 오세창 지음 대구사범10회 경북대교수 변유복 세움
8 만포 한시인 최양해[晩圃 崔穰海] 선생의 한시비<1897~1978>
만포 최양해 한시비 두류공원에 건립 지난 23일 오전 11시 달서구 두류공원 내 인물동산에 한학자이자 한시(漢詩) 작가였던 만포 최양해 선생의 한시비 제막식이 거행됐다. 인물동산에는 선생의 흉상과 함께 선생의 시 ‘대구장관(大邱壯觀)’을 새긴 한시비가 건립됐다. 만포는 1897년 경주 태생으로 1945년부터 대구에 거주, 대구·영남시우회(大邱·嶺南詩友會)에서 활동하며 별세 전까지 한시 260여 수 중 대구를 소재로 한 한시 100여수를 남겼다. 일생 동안 한시 창작과 경학 전수에 힘쓰다 1978년 9월 21일 대구시 남구 봉덕동에서 82세로 별세했다
漢詩 “大邱 壯觀” 소개 .
大邱 雄容 在此城 대구시의 웅장한 기상 이 성안에 있으니,
舊奇 新美 總鮮明 옛 모습 새로운 단장 모두가 선명하다.
異花 映日 心惟感 기이한꽃 햇빛 비춰 마음을 감동케 하고
老木 誇春 目可驚 고목도 봄을 자랑하니 눈이 이리 부시는구나,
否泰 多端 難測實 막히고 트인 운의가닥 그 실상 알기 어렵고
往來 無數 不知明 가고 온 많은 사람들 누구인지 모르겠네,
一醒 一醉 眞人事 취하고 깨어남이 진실로 사람의 할일인데
憂樂 同盟 子我情 근심이나 즐거운 너와 나 함께 하세
9. 서양화가 이인성<1912.8.28~1950.11.4> 동상
한국 근대미술을 대표하는 서양화가, 이인성(1912~1950). 대구에서 태어난 그는 우리나라의 하늘과 땅, 자연과 사람을 감각적인 색채와 치밀한 구도로 그려내 ‘천재 화가’라 불린 인물이다. 그가 머물며 작품 활동을 펼쳤던 대구는 거리 곳곳이 미술관이 되었다.
대구 지하철 3호선 건들바위역에서 3분 남짓, 이천동 대봉교회 뒤편 골목으로 걸음을 옮기면 주택가 담벼락을 배경 삼아 작은 갤러리가 펼쳐진다.
화가 이인성의 작품을 타일에 옮겨 벽화로 조성한 것으로 이인성의 연표와 함께 <건들바위> 연작(아침햇살ㆍ눈 오는 날), <해당화>, <정원>, <사과나무>, <빨간 옷을 입은 소녀>, <멜빵 바지 입은 소녀> 등 총 10점의 다채로운 작품이 나란히 이어진다.
10. 애국지사 백산 우재룡<<1884.1.3 ~1955>> 동상
백산 우재룡 선생은 구한 말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삶을 살아오다가 일제의 기세를 꺾기 위하여 항일 운동을 하였으며, 광복회 재건 사업과 독립운동으로 희생하신 분들에 대한 선양사업 등 애국 운동을 하였습니다.
“하늘의 이치는 올바른 것이다. 죄악이 많은 일제가 항복하니 나도 이 세상에 살아서 분을 풀 날이 있구나.” 20여 년간 옥고를 치르며 국권 회복을 위해 생애의 절반 이상을 독립운동에 투신한 백산 우재룡 선생이 일제가 패망하자 광복의 소회를 술회한 말이다. 일제의 강압통치에 항거한 독립운동가들은 무수히 많지만 대구·경북을 활동무대로 일제에 맞선 경우는 그리 흔치 않다. 광복 72주년을 맞아 새롭게 다가오는 우재룡 선생의 나라사랑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우재룡 선생은 1884년 1월3일 경남 창녕에서 부친 우채희씨와 모친 진주강씨의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유년시절은 창녕에서 보냈다. 10세 전후로 대구부(옛 달성군 성서면 신당리)로 이주해 성장기 대부분을 대구에서 보냈다.
1903년 20세때 대한제국 육군의 대구 진위대에 입대해 참위(현재 하사관)로 5년간 복무하다 을사늑약 때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선생은 의분을 참지 못하고 항일무장투쟁에 참여, 산남의진(山南義陣)을 맡아 종횡무진 전공을 세웠다. 창녕 화왕산전투를 비롯, 청하전투와 팔공산전투 등 20여 차례의 전투를 직접 진두지휘하며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나 일제에 체포돼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2년여를 대구 감옥에서 복역하다 한일합방 기념특사로 풀려났지만 선생은 구국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일제의 군자금을 탈취해 경기·관동·영남지방에서 풍찬노숙을 마다않고 무장투쟁을 계속했다. 이후 활동무대를 만주로 옮겨 이상룡·김동삼·김좌진 등 애국지사와 함께 항일 투쟁에 나섰다. 1919년 3·1만세운동 즈음 국내로 잠입해 평양·경성에서 활동하면서 상해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전달하며 주비단(籌備團)을 조직해 왕성한 독립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반역자의 밀고로 37세에 일제에 체포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17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렇지만 선생은 긴 수형생활의 고초를 참으며 일제의 회유에 타협하거나 자신의 구국의지를 꺾지 않는 등 불굴의 용기를 실천했다.
1938년 54세에 출감했을 때는 창녕조씨 부인과 1남2녀 등 가족 모두가 혹독한 일제의 탄압과 생활고로 병사하는 참담한 아픔도 겪었다. 그후 옥고로 얻은 병을 치료하던 중 김소전씨를 배필로 만나 슬하에 2남1녀를 두게 되었다. 옥고의 여독이 채 가시기 전에 다시 항일투쟁을 하기 위해 동지들을 규합하려 경주·영천·하양 등지를 다니던 중 8·15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에는 향리와 가까운 달성군 유가면 유곡리로 이주해 대한광복회 재건에 전력투구하면서 독립운동 희생자들의 선양사업을 전개하는 등 한평생을 애국활동을 펼치다가 1955년 71세를 일기로 운명했다.
선생의 유해는 달성군 유가면 옥녀봉에 안장됐다가 1967년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됐다.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고 2009년 1월 국가보훈처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부인 김소전씨(103)는 현재 대구 달서구 상인동 자택에서 살고 있다. 장남 대현씨(74)는 “11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선친의 말씀을 뚜렷이 기억할 수는 없지만 어머니를 통해 아버지의 유별난 나라사랑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들었다”며 “특히 통일조국의 소망을 돌아가실 때까지 입버릇처럼 되뇌이곤 하셨다”고 전했다. 한편 대구시는 선생의 큰뜻을 기려 2011년 12월 두류공원 내 인물동산에 선생의 흉상과 공덕비를 건립해 애국애족의 민족정기를 함양하는 산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첫댓글 두류공원 인물동산에서 동상마다, 비석마다 꼼꼼하게 살펴보시면서 많은 공부를 한신 듯합니다.
수고 많았습니다.
대구가 낳은 시인/墨客/技人들이 두류공원에 많이 모셔 놓았군요.. 덕분에 많은 상식을 얻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두류공원 인물동산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병철 조장님을 비롯한 벤쳐 3조 회원님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집안에 가만히 앉아서 많은 공부를 하게되어 고맙습니다.
밴처 사공3조 회원님들 수고 하셨습니다.
많은 사진 올려주신 리승주 팀장님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정말 수고 많으셨고 화이팅
자세한 사진과 해설은 많은 참고 자료가 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벤처사공3조 이만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