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2회 詩하늘 시낭송회에 최근 시집 『알약』(시와표현)을 낸 박윤배 시인을 초대합니다.
대학시절에 여러 대학에서 시 부문 대상을 여러 번 받은 바 있고.
1989년 대구에서 매일신춘문예에 당선되었고, 1996년 『시와시학』 신인상을 받았으며,
2009년에는 대구시인협회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쑥의 비밀』(도서출판전망), 『얼룩』(문학과경계), 『붉은 도마』(북랜드), 『연애』(책나무출판사), 『알약』(시와표현)이 있다.
문학평론가 이경철 님은 시집 『알약』(시와표현)을 아래와 같이 표현한다.
“오랜만에 만나는 야성적 언어, 남성적 어조가 활발한 시집이다. 하늘과 땅의 접경에서 자욱하게 일어나는 먼지, 이게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아프고 또 아픈 일상일지니, 구름도 할미꽃도 바람도 여자도 시인도 이 땅에서 잠시 만나 뜨겁게 한 몸으로 어우러지며 일으키는 먼지. 비유나 암시에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의 언어와 애니미즘의 역동적 상상력이 우리네 일상을 아연 살맛나게, 사랑할 맛나게 돌려놓는 시집이다.”
그리고 김윤정 교수는 서평에서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시가 ‘알약’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단순한 것으로 보이지만 시의 의미에 관한 깊은 통찰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오늘과 같이 시의 목적과 방향이 모호한 시대에 시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진지한 성찰을 내포하고 있다. 다원주의화된 시대에 시가 누릴 수 있는 개성이 무한대인 만큼 시의 기본이 사라지고 있는 시점에서 박윤배 시인은 시가 추구해야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인식을 향해 있다.”
이제 우리는 11월 5일 박윤배 시인과 만난다.
그의 시편으로 시낭송과 시세계 이야기를 들으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으면 한다.
시를 좋아하는 모든 분들과 함께 오시기 바랍니다.
깊어가는 가을밤에 시가 우리 귀에 곱게 내리기를 기원합니다.
-일시 : 2015년 11월 5일 목요일 오후 7시
-장소 : 남구청소년창작센터 창공홀
(대구 남구 중앙대로 45길 53)/053-664-3100
-회비 : 없음.
-제공 : 시하늘 가을호, 시낭송용 작은 시집
-박윤배 시인의 시세계 해설 및 질의 : 변희수 시인
-음악 : 박길영
-연락처 : 가우 010-3818-9604/ 찬솔 010-9358-5594
보리향 010-2422-6796 / 김양미 010-2824-8346
*박윤배 시인 약력
ㅡ1962년 강원도 평창 출생, 충북 제천에서 성장
ㅡ1989년 매일신춘문예에 시 당선
ㅡ1996년 <시와 시학> 신인상
ㅡ시집으로는 『쑥의 비밀』 (도서출판전망), 『얼룩』 문학과 경계, 『붉은 도마』 북랜드, 『연애』 (책나무출판사)가 있음
ㅡ활동 : 한국시인협회, 대구문인협회, 시인협회, 시와시학회 회원, 새로운 감성과 지성 동인.
ㅡ2009년 대구시인협회상 수상
ㅡ전 MBC여성시대 진행, MBC문화센터 “재미있는 시 쓰기” 강사, 대구교육청 문예영재원 강사, 대구시인협회 사무국장을 지냄. 현재: 형상시문학회 고문, 대구詩창작원대표, 계간 <문장>주간
수인囚人
-박윤배
제주 용천동굴에서 보낸
六千 年의 고립을
어떻게 말해야 하나
주홍미끈망둑
이름 하나 얻었으니
눈 더 퇴화한들
어둠은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닐 것
천연기념물 제466호가
큰머리에 멜라닌 색소 빠져나간
주홍미끈망둑이라면
나는 오직 당신에게
눈멀고 싶은
수인번호 제467호
천 년의 구간
-박윤배
플라스틱 세숫대야, 내 얼굴 때를 먹고
얼룩지더니, 연밥의 싹을 틔운다
신라의 능에서 출토된 연밥이
천년 세월 건너뛰어 싹을 틔웠다 해서
나 또한 지난가을 단풍든 속리산에서
법주사 종소리로 둥글어진 연밥 몇 개 사온 뒤
겨울 말미를 흠집 조금 내어 물에 담갔다
순 한방 샴푸 발라놓고 감는 머리
거품 꺼지는 소리 들려주던 세숫대야
그 세숫대야를 토실한 연밥에게 내어주고
그냥 수도꼭지에 목 들이밀고 기다리다 고개를 드는데
연밥도 머릴 감고 있었나! 꾸역꾸역 거품이다
오천 원에 열 알 덤으로 다섯 알 더 받아온 연밥
봄볕 찰랑이는 나의 세숫대야에 잠겨
몸 안 거품을 먼저 꺼내고서야 싹은
초록 틈새 벌리느라 팽팽한 신음이다
일주일 만에 열다섯 알이 동시에 아랫도리 벌리니
푸른 오줌발에 왁자해진 세숫대야
삐죽하게 고개 쳐드는 연의 줄기로 보아
머지않아 둥근 연잎이 넘쳐나겠지
누군가 흠집 내어 주길 기다리는 우주의 종소리들이
수돗물을 타고 내 정수리를 흠씬 적셨다
겨우내 얼어있던 2층 누옥의 화장실 수도꼭지에서
천 년 전 사찰 연못에 드는 물길인양
진흙 속 노래가 좌르르 새어 나왔다
흘린 땀의 시간들 씻겨주던 세숫대야 안에서
그렇게 핀 연꽃의 언어는
천 년 후, 그녀 겨드랑이 향해
물씬한 내 살 냄새를 전송하고 있다
보석가게를 오픈하다
-박윤배
얼마 전 내가 운영하던 詩창작원에서
기초반을 수료한 보석공예가 김경수 씨
그가 꽃신 구부려 만든 반지를 보고
나 보석가게 차리고 싶어졌다
허술한 출입문에 워낭 달고
보안장비는 필요 없이
보석가게 하나 차리기로 했다
첫째 진열장엔 어느 시인 눈에 번쩍 뜨인 노루의 초경 스민 돌
둘째 진열장엔 연경지에서 만난 붉은 찔레꽃
셋째 진열장엔 박꽃 피던 지붕 위로 던진 유치 몇 개
넷째 진열장엔 서투른 내 작두질에 베인 어머니 손톱
회칠한 벽면에는
낙타를 타고 먼 길을 걸어올 외로움에 지친 자를 위해
사막 주점 삐딱하게 걸려있던 멈춘 시계라 해도
마음속 보석인 듯 나는 걸어두리
평생을 노동하며 살았어도
먹고 입고 가르치다 보니
모은 돈 별로 없고, 잠시 허욕에 탕진한
신불자라면 더더욱 반갑게 손님으로 맞이하는
그런 보석가게 주인이 되는 거지
진열한 보석을 보는 그들 눈빛에
내 보석들은 더더욱 반짝이지 않을까
알약▪1
-박윤배
뿌연 사각 종이 봉지 안에 반쪽짜리도 하나 끼워
알약들 이마 맞대고 모였다
좁은 목구멍 한입에 털어 넣지 못해
당신은 한 알씩 오물오물 물과 함께 삼킬 테지만
끝내 달려가야 할 곳은 목젖 너머의 통점임을 알기에
창밖 바람에 찢긴 흰 목련봉우리에게
등을 보이고 선 채, 잘 가시라는 내 손짓도
그대는 꿀꺽 삼키고 있었다
정구업진언 淨口業眞言
-박윤배
습관적으로 거드는 손을 그냥 놔두고
한 송이 포도를 입으로 다 따먹고 나니
안보이던 길이 보였다
검게 그을려 탱글탱글해지기까지, 새의 어린 입술과 늙은 입술은 번갈아 지나갔을 테고, 번개 삼킨 비 혀끝도 닿았으니, 능욕 신맛 버리고 단맛을 얻은 것이지
공중 둥글게 부풀리던 알들,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말로 하는 약속은 이제 그만, 원시 음성을 아 아 오 오 들려줘!
남겨진 것은 몸이라는 절벽에 매달린 손끝 발끝들, 길이 마지막으로 물고 있던 알알 포도들 꾸역꾸역 밀어 넣은 곳이 검은 입 속이었으니, 움켜쥘 네 공중은 홀쭉한 무욕이어도 좋았다
둥근 말로 지은 죄업들을 길에 버리니
잘린 탯줄 같은 몸 끝자락 막다른 길에
피딱지가 피운 꽃들이 총총하다
검단동 가을
-박윤배
붉나무 둥치를 모서리 많은 바람이 툭툭 차서
애꿎게 쓸려 다니는 마른 잎의 행간
눈 기다리는 마음은 비좁다
흰 길 이리저리 남기는 전투기들
버스 기다리는 변방 하늘을 날아도
아무 걱정 없다는 듯, 금 간 아파트 담장 아래 포장마차
바퀴는 고정되어 있다
계절에 안 어울리게 펄럭이는 꽃무늬 치마
둥근 허리 접고 앉은 젊은 여자
간장에 어묵 오래오래 담그는데
함부로 바퀴 굴리지 않는 포장마차 주인 그녀도
얼마 후 표정은 닮아있다
몇 해 전인가 장맛비로 불어난 강물에
이이를 고무공처럼 쓸려 보냈다는 그 여자
한 방향으로 쓸어 넘긴 머리는
나뭇가지에 걸린 비닐인 듯 흐느적거렸다
슬픔에 흰 머리핀 꽂아주고 날아가는 전투기에
퉁퉁 불은 어묵이 이유 없이 슬퍼
금호강 간장 종지 속 가을은
팔 할의 썰린 청양고추가 채우고 있다
먼지
-박윤배
머물다 떠나는 자리이거나
풀고 싸는 짐 속에
소멸 흔적 켜켜이 쌓여 있다
씻은 살갗인데도 또 밀리는 때처럼
밖에서 날아들지 않아도 슬픔은
안에서 꾸역꾸역 밀려 나오기도 하는 것
홀연히 말라가는 나뭇가지 위
풍장으로 널린 새의 죽음도
아침 내내 선명했던 울음도
어느 날엔가는
쓸쓸한 기억이 되고 말리라는 예감
한때 검정구두 반들거리던 기억도
희미해지다가 결국엔 먼지 되어
허공 툴툴 차는 것
3대代가 든 사진 액자 모서리에도
활자活字 빼곡한 책들 서가書架에도
촘촘했다, 먼지는
내소사來蘇寺 문살 나이테에
늦가을 햇살 내려와
목어 소리 삼키는 동안에도
먼지를 탑塔으로 쌓고 허물고
포획되다·3
-박윤배
쨍쨍한 햇살 속에서
수레를 끌거나
지루한 장맛비에도 쇠꼴 베어오시던
아버지 당신은
집에 포획된 것이다
질척이는 논둑길 중심 잡기로 걸어서
법 없이도 살다 갔다 말하지만
배운 것 없음을 한탄하던
당신 노랫자락 끝에는 늘
있었다, 물방울로 지은 집 한 채
땀 젖은 옷가지 빨랫줄에 널며
당신 마당 어귀에 연못 팠다고 해도
첫 햇살과 만나는 토란잎에
물방울로 포획되었던 것이다
해뜨기 전 잠시 가져본 평화와
언 듯 스쳐 간 것이
이승 행복 전부였음을
좀 더 일찍 왜 내게 알려주지 않았을까
살아가며 난간에서 스스로 알게 되는
영롱함 뒤에 남겨진 쓸쓸함에 대하여
왜 내게 말해주지 않았을까
늦가을, 연잎에서 문드러지는 잎맥
생은 그렇다, 쓸쓸이다
양산 여자
-박윤배
손전화기 속에 사는 여자가 있다. 버튼 하나만 누르기만 하면 쏜살같이 커피 배달해 오는 여자. 좀 식었군! 바쁜가 보지? 물을라치면 입으로 뎁혀 드릴까요? 농담하는 여자
깔깔깔 웃음이 예쁘기도 하지만 사실은 엉덩이가 예쁜 여자. 통도사가 가까워 죄의 그늘 제법 많이 지운 여자. 어릴 때 미친 여자를 본 뒤 옆머리에 들꽃 하나 기억 속에 꽂고 사는 여자. 내가 쓴 몇 편 시 읽고 울었다는 여자
한번 인연은 놓지 않을 것 같은 여자. 운전이 무서워 안 배운 여자. 끝까지 양산다방을 지키고 싶다는 여자. 한 며칠 그녀 잠적에 따라붙고 싶은 여자. 나랑 같이 살림 차리면 키우던 애완견도 자생 춘란도 굶겨죽일 것 같은 여자. 그러나 혼자 느낀 거지만 허술한 내 아랫도리 정력 들키고 싶지 않은 여자
슬림형인 여자. 내 몸 위에서 미끄럼 타서 위아래가 분주할 것 같은 여자. 그 여자는 어제의 여자. 오늘은 내 손끝을 사랑해서 까딱해도 알아서 스마트하게 변신하는 여자. 뒤로 가는 운전은 못하지만 앞으로 가긴 잘해서 요즘은 물 좋은 남자 만나기에 바쁜 여자. 쨍쨍한 햇살에도 더 이상 그을릴 흰 살이 없어 양산을 버린 여자
수인囚人▪ 2
-박윤배
외로움도 오래 가둬두면
달짝지근해 지나보다
어머니 딸려 아버지도 보내고
용천 주홍미끈망둑 보러 갔으나
망둑이 없다. 눈 어두워 못 찾나
눈 밝아져 대처로 나갔나
더 깊고 어두운 동굴 살펴도
없다, 들락거린 동굴만 애인이 되었다
제주 동굴 망둑을 시로 그려낸 후
내게 생긴 애인은 몸 안쪽은
미끈함 좌우로 구부리는 진화
이 나이에 연애는 유치한 일이지
뻐끔뻐끔 떠벌린 지가 얼마인데
그런 내가 누구를 사랑할 수 있을 듯
다시 설레기 시작했다는 것이
놀랍다, 보양식 먹어도 끄덕 않던 슬픔
생식기가 고독에 달콤해졌다는 것
이번엔 제대로 된 분홍감옥에
꼼짝없이 내가 갇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