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육신공원-가깝고도 먼 길
(2016년 11월 17일)
瓦也 정유순
서울 노량진에는 사육신(死六臣)묘역이 있다. 서울에 올라 온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세월의 눈치만 보다가 이제야 발길이 돌려진다. 오며 가며 간판만 확인하고 지나치면서 언젠가는 꼭 한번 둘러봐야지 마음으로만 수 없이 약속하면서도 “살아 있는 권력에 맞서다 처참하게 죽은 자”들을 찾아본다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꺼림칙하다는 선입견(先入見)을 갖고 있는 것이 내 자신의 구차한 변명인지도 모른다.
<사육신 공원 입구>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온 시대가 독재와 군사정권의 횡포가 심했던 시절을 오랫동안 보아왔던지라 나도 모르게 몸을 사리는 버릇이 시나브로 젖어 있었던 것 같다. 더욱이 조상(祖上) 중 한 분이 1453년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란(癸酉靖亂) 때 사사(賜死)되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할 번한 사실을 알고부터는 마음만 앞설 뿐 좀처럼 몸이 따르지 않았다는 게 솔직한 고백이다.
<사육신 공원 안내>
계유정난(1453년)으로 단종의 왕위를 찬탈(簒奪)한 세조가 1456년(세조2년) 6월에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자리에 성삼문의 아버지인 성승과 유응부 등이 왕을 호위하는 별운검(別雲劍)을 맡은 것을 계기로 세조 일파를 제거하고 단종(端宗)의 복위를 꾀하려고 하였으나, 한명회 등이 눈치 채고 행사를 축소해 별운검을 없애버려 거사를 행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같이 거사를 계획했던 김질(金礩)이란 사람이 장인인 정창손(鄭昌孫)과 함께 수양대군(세조)에게 이 사실을 밀고하면서 거사는 실패로 끝났다.
<사육신 공원 홍살문>
사육신은 이와 같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어 처형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성삼문(成三問)ㆍ박팽년(朴彭年)ㆍ하위지(河緯地)ㆍ이개(李塏)ㆍ유성원(柳誠源)ㆍ유응부(兪應孚) 등 6명을 가리킨다. 이들 외에도 성승(成勝) 김문기(金文起) 등 70여 명이 모반 혐의로 처형되거나 유배되었고, 이들의 친자식들도 모두 목을 매어 죽이는 교형(絞刑)에 처해졌으며, 집안의 여자들은 노비가 되었고, 가산도 모두 몰수되었다.
<사육신묘 설명문>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지만 보통 사람들은 단종 복위운동 하면 사육신만 떠올리는 까닭은 생육신의 한분이신 추강 남효온(秋江 南孝溫, 1454∼1492)의 문집인 추강집(秋江集)에 실린 육신전(六臣傳) 때문이라고 한다. 추강집에는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만 기록이 되어 단종복위의 핵심 인물로 이들만 떠오르고 나머지 사람들은 잊혀 진 결과가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사육신 공원 불이문>
그리고 이곳에 사육신묘가 조성된 계기는 일찍부터 박씨지묘(朴氏之墓)·유씨지묘(兪氏之墓)·이씨지묘(李氏之墓)·성씨지묘(成氏之墓)라고 새겨진 표지석이 서 있는 네 개의 무덤과 그 뒤편에 또 하나의 묘가 있어왔고, 민간에서는 네 개의 묘소를 사육신묘라 일컫고 뒤편의 묘는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의 묘라 전해왔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생육신의 한분이신 매월당 김시습이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진 시신을 바랑에 담아다가 노량진 외진 언덕에 임시로 매장하였다고 전해오기도 한다.
<사육신 묘>
이렇게 민간에서 구전(口傳)되어 오던 사육신묘가 공인된 것은 1679년(숙종5년)에 왕명으로 봉분이 만들어지고 1692년(숙종18년)에 사육신의 사당인 민절서원(愍節書院)에 편액(扁額)을 하사하였으며, 1782년(정조6년)에는 사육신의 신도비가 건립되어 이들의 충절이 민간에서 국가적으로 크게 현창(顯彰)되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정책으로 철폐되었다.
<사육신 공원 의절사>
지금 노량진동에 있는 묘역에는 박팽년(朴彭年)·유응부(兪應孚)·이개(李塏)·성삼문(成三問)의 묘만 있었고, 하위지(河緯地)와 유성원(柳誠源)의 묘는 없었으며, 그러다가 서울시에서 1977∼1978년까지 사육신 묘역의 정화 공사를 할 때, 하위지와 유성원의 가묘(假墓)를 만들면서, 사육신의 묘를 모두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사육신역사관>
그러나 이때 당시의 행적으로 볼 때 김문기(金文起)가 사육신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와 논란 끝에 추가하여 가묘(假墓)를 쓰고 위패를 봉안하는 것으로 정리하였으나, 1982년 국사편찬위원회는 “김문기의 공적은 인정하되 사육신의 구성에는 변경이 없다”고 밝힌바 있다. 아마 정조 때 작성된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에 계유정난과 단종복위 운동 과정에서 희생된 명단에 사육신 보다 위인 삼중신(三重臣)으로 김문기(金文起) 민신(閔伸) 조극관(趙克寬)이 함께 등재되어 있어서 내린 결정 같다.
<사육신 공원 낙엽>
노량진역에서 사육신공원으로 가는 언덕길을 조금 올라가면 홍살문이 나오고 정문인 불이문(不二門)으로 들어서면 여섯 분과 추가된 김문기 등 일곱 분의 위패가 모셔진 의절사(義節祠)가 있고, 마당 왼편에는 신도비(神道碑)가 보호각 안에 있으며, 오른쪽으로는 1954년에 서울시가 세운 육각의 사육신비가 자리하고 있다. 불이문과 의절사는 1978년 묘역 정화사업 때 세워졌다고 한다.
<사육신 공원 단풍>
사육신역사관을 잠시 둘러보고 옛날 노량진 수원지였던 동작체육공원 쪽으로 내려오는데 충신들의 절규와 거열형으로 찢길 때 튀어나온 핏빛이 물든 것처럼 단풍은 햇살에 더 붉어진다. 노량진수원지는 1910년에 문을 열어 수돗물을 정수하여 공급해오다가 2001년에 문을 닫았고, 그 자리에는 대부분의 면적에 체육공원이 들어서서 시민에게 되돌려졌으며, 일부 대지에는 아파트단지가 들어선 것 같다.
<노량진수원지 공원>
<노량진수언지공원 인근 아파트>
노들역을 건너 상도터널 위로하여 노량진근린공원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노량진 본동 골목길을 따라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릉이 있는 수원 화산(華山)의 현륭원(顯隆園, 융릉)에 갈 때 배다리로 한강을 건너와서 잠시 쉬고 갔다는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에 들어가 본다.
<한강대교 입구>
<상도터널 입구>
<용양봉저정-네이버캡쳐>
건축연대는 정조13년(1789년) 이후로 보고 있으며, 능행 도중 휴식을 취하면서 점심을 들었기 때문에 주정소(晝停所)라고도 한다. 내부 벽에는 정조의 능행길 화성행차도<반차도>가 그려져 있고, 정선(鄭敾)의 동작진(銅雀津)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 등이 걸려 있다.
<능행길 화성행차도>
<정선의 동작진>
용양봉저정을 나와 한강변으로 난 자전거 길과 산책로를 따라 흑석동에 있는 효사정(孝思亭)으로 올라간다. 효사정은 조선 세종 때 한성부윤과 우의정을 지낸 공숙공(恭肅公) 노한(盧閈 1376∼1443)의 별서(別墅)였다고 한다. 모친이 돌아가시자 3년간 시묘를 했던 자리(지금의 노량진 한강변)에 정자를 짓고 수시로 올라가 모친을 그리워했으며, 멀리 북쪽을 바라보면서 개성에 묻힌 아버지를 추모했다고 한다.
<효사정>
노한과 동서지간인 이조판서 강석덕(姜碩德)이 이름 붙인 원래 효사정이 사라져,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효사정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는 여러 문헌을 참고하여 원래 터를 찾았으나 주변 환경의 변화로 찾지 못하고, 옛터와 가까운 지금의 자리에 정자를 세웠는데, 이 자리는 일제강점기 때에 한강신사(또는 응진신사)가 있던 자리라고 한다. 그리고 바로 옆에는 구국의 일념으로 한국전쟁에 참여한 학도의용군의 넋을 기리는 현충비가 있다.
<효사정>
<학도의용군 현충비>
이촌동아파트 숲과 남산이 보이는 한강변으로 다시 나와 반포천과 합류하는 동작역 앞 구반포아파트 숲속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낙엽이 수북이 쌓인 반포천을 따라 콧노래를 부르며 고속터미날역 까지 간다. 이 길의 이름도 콧노래를 부르는 길이라 하여 ‘허밍웨이(Humming Way)’로 명명하였다. 들리는 듯 들리지 않는 듯 부르는 게 콧노래인 것처럼 주변 환경과 닮은 길에서 자연스럽게 동화되어 어떻게 걸었는지 모르게 하루를 보냈다.
몸은 가까이 있으면서도 마음은 더 먼 길! 서울 길을∼∼∼
<동작대교>
<이촌동과 남산>
<반포천변 허밍웨이>
<성모병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