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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27일 화요일 [(녹) 연중 제12주간 화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알렉산드리아의 성 치릴로 주교 학자 아브람의 가축을 치는 목자들과 롯의 가축을 치는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자, 롯은 요르단 들판을 선택하고 동쪽으로 옮겨 간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라며,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라고 하신다(복음). <너와 나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한 혈육이 아니냐?>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13,2.5-18 2 아브람은 가축과 은과 금이 많은 큰 부자였다. 5 아브람과 함께 다니는 롯도 양과 소와 천막들을 가지고 있었다. 6 그래서 그 땅은 그들이 함께 살기에는 너무 좁았다. 그들의 재산이 너무 많아 함께 살 수가 없었던 것이다. 7 아브람의 가축을 치는 목자들과 롯의 가축을 치는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때 그 땅에는 가나안족과 프리즈족이 살고 있었다. 8 아브람이 롯에게 말하였다. “우리는 한 혈육이 아니냐? 너와 나 사이에, 그리고 내 목자들과 너의 목자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9 온 땅이 네 앞에 펼쳐져 있지 않느냐? 내게서 갈라져 나가라.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 10 롯이 눈을 들어 요르단의 온 들판을 바라보니, 초아르에 이르기까지 어디나 물이 넉넉하여 마치 주님의 동산과 같고 이집트 땅과 같았다. 그때는 주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시기 전이었다. 11 롯은 요르단의 온 들판을 제 몫으로 선택하고 동쪽으로 옮겨 갔다. 이렇게 두 사람은 서로 갈라지게 되었다. 12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서 살고, 롯은 요르단 들판의 여러 성읍에서 살았다. 롯은 소돔까지 가서 천막을 쳤는데, 13 소돔 사람들은 악인들이었고, 주님께 큰 죄인들이었다. 14 롯이 아브람에게서 갈라져 나간 다음,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눈을 들어 네가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을, 또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아라. 15 네가 보는 땅을 모두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히 주겠다. 16 내가 너의 후손을 땅의 먼지처럼 많게 할 것이니, 땅의 먼지를 셀 수 있는 자라야 네 후손도 셀 수 있을 것이다. 17 자, 일어나서 이 땅을 세로로 질러가 보기도 하고 가로로 질러가 보기도 하여라. 내가 그것을 너에게 주겠다.” 18 아브람은 천막을 거두어,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의 참나무들 곁으로 가서 자리 잡고 살았다. 그는 거기에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6.12-1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6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12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13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14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거룩한 것이란 어떤 것일까요? 원래는 구별된 것, 따로 몫을 지어 떼어 놓은 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에 많지 않아서 쉽게 접할 수 없는 것, 그래서 값이 제법 나가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심으로써, 가장 거룩한 것은 바로 우리 가운데 있고, 이웃과 함께 머무는 것임을 보여 주셨습니다. 지난 4월에 영화로 소개되어 우리를 잔잔하게 울린 소록도의 두 천사 이야기를 아시나요?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동정녀 회에 입회하여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고, 간호사가 되어 동양의 맨 끝 나라인 한국에, 그중에서도 가장 버려진 천형의 섬, 소록도에 있는 나환우들을 찾아온 ‘마리안느와 마가렛’이라는 두 천사의 이야기입니다. 4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나환우들을 위해 봉사하면서, 맨손으로 약을 발라 주었던 동정녀들, 그리고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의료 지식보다는 그들의 얼굴을 보고, 아침마다 따뜻하게 우유를 데워 주고, 소박한 생일잔치를 열어 주는 것을 훨씬 소중하게 생각했던 두 사람은, 진정으로 거룩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던 이들입니다. 어떤 어려움이나 두려움 가운데에서도 사람을 사람으로 존중해 주는 것, 상대방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주고, 장갑이 아닌 서로의 손을 잡고 대화하는 것, 이것들은 쉽지 않은 좁은 문이지만, 하느님께 이르게 하는 거룩한 문입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
완벽한 평화주의자 예수님 다시는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될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던 625를 회상하며, 평화 통일을 꿈꾸며, 평화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지난겨울 한 열차 역에 내렸을 때의 일입니다. 마침 기온이 급강하한데다 눈까지 내려서 새벽 역사안의 기온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몇몇 노숙자 형제들은 추위를 견뎌내지 못하고 화장실 안까지 들어오셔서 잠을 청하고 있었습니다.
‘혹시라도 아는 얼굴은 없나?’ 해서 한분 한분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고 있었는데, 얼마나 달콤한 단잠에 빠져있었는지? 잠자는 얼굴들은 또 어찌 그리도 평화로운지요? 당시 저는 갑자기 들이닥친 몇 가지 고민거리로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던 터라 그분들의 모습이 부럽기까지 했습니다. 행복지수, 내적인 평화에 대한 충족도는 재산의 많고 적음이나 지위고하 여부와도 다름을 새삼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72제자들을 당신에 앞서 사람들 가운데 파견하시면서 지상과제를 부여하시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 나라의 선포입니다. 그리고 플러스알파로 또 다른 과제 하나를 주시는데, 그것은 세상 사람들 앞에 ‘평화의 사도’로 존재하라는 사명입니다. 갖은 걱정과 근심, 불안 속에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평화를 빌어주는 평화의 사도가 될 것을 당부하십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0장 5절)
그런데 이웃들에게 평화를 빌어주는 사람, 평화를 건네는 사람이 되기 위한 전제조건 한 가지가 있는데, 나 자신 안에 먼저 평화를 간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평화의 사도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부터 먼저 고요와 평정 안에 깊이 머물면서 평화를 만끽하고 있어야 그 평화를 이웃들에게 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자신은 갖은 인상을 다 써가면서, 갖은 고뇌로 가득 차있으면서 이웃들에게 ‘평화롭게 지내십시오!’ 하고 인사를 건넨다면 인사말을 듣는 사람들이 모두 웃을 것입니다.
평화의 사도로 존재하기 위해 가장 우선적인 일은 예수님의 권고말씀처럼 보다 많이 버리는 일입니다. 보다 자주 떠나는 일입니다. 이기심을 버리고 욕망도 버리고, 슬픔조차 버리고, 버렸다는 그 마음조차 버릴 때 우리는 평화의 기반을 마련하게 되는 것입니다. 버리고 버려서 더 이상 버릴 것이 없어지는 그 순간, 그 버린 공간에 주님의 참 평화가 서서히 자리 잡게 될 것입니다. 그 순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만물, 모든 존재, 매 순간의 사건들은 그 자체로 은혜로움과 감사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결국 진정한 평화의 원천은 우리 주님이십니다. 고통과 절망, 두려움과 의혹 그 한가운데를 지나가면서도 오직 주님께만 전적으로 의지할 때, 그분께 우리 존재 전체를 내어맡길 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참 평화를 선물로 주실 것이고 그 순간 얻게 되는 평화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의 평화입니다.
이 세상 어딜 가도 서정적인 영화나 배경이 아름다운 드라마를 보는듯한 완벽한 평화란 없습니다. 진정한 평화는 우리 삶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서 굳건히 자리 잡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놓는 순간 우리에게 다가오는 평화입니다. 그분이 계심으로 인해, 그분이 우리 인생의 중심이 됨으로 인해 누리게 되는 위로 그것이 참 평화의 원천입니다.
복음서 전반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는 것처럼 유다인들은 다윗가문에서 출생한 메시아, 힘과 능력을 갖춘 정치인으로서의 메시아, 결국 로마의 압제로부터 민족들을 해방시켜줄 해결사로서의 메시아, 그래서 이스라엘을 온 세상의 중심이 되게 하는 정복자로서의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의 허무맹랑한 기대를 무너트리십니다. 그들의 그릇된 메시아관에 반박하십니다. 당신은 철저하게도 비폭력주의자로 처신하십니다. 완벽한 평화주의자로 살아가십니다.
참된 메시아는 이 세상의 왕이 아니라 이 세상을 초월하는 왕입니다.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아시리아와 페르시아, 이집트뿐만 아니라 온 세상 전체를 다스리실 왕 중의 왕이십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잠시 지나갈 이 현세에 기반을 둔 왕이 아니라 영원한 도성,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 아버지께 기반을 둔 왕이십니다. 만왕의 왕은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는 왕, 힘의 논리에 의존하는 그런 왕이 절대 아니셨습니다. 거듭되는 폭력과 압제, 비인간화 앞에서도 끝까지 견뎌내며, 끝까지 용서하며, 박해자마저 사랑으로 감싸 안은 사랑의 왕이셨습니다.
이제 권력이나 물리적인 힘으로 인간이나 세상을 지배되는 시기는 지나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해 늘 대화하면서 타협점을 끌어내려는 노력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조금씩이나마 깨달아가고 있습니다. 비록 시간이 좀 걸린다 할지라도 앞뒤 정황을 잘 따져본 다음, 물러설 것은 크게 물러서고 양보하면서 대화로 일을 풀어나가려는 노력이야말로 복음적 노선이며 비폭력 노선의 바탕입니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자아존중감을 키우자
제가 군대를 제대하고 대학에 복학하였을 때의 일입니다. 저는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중학교 때부터 경영학을 전공하려는 마음을 가졌었고, 대학도 학과를 먼저 보고 선택하였습니다. 물론 군대 가기 전에는 다른 과 학생들이 ‘경영학’을 사람들 등쳐먹는 학문이라 하여 ‘사기과’라고 놀려대기도 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습니다. 사실 사람들을 얼마만큼 잘 이용해서 비용을 줄이고 수익을 최대화 하느냐가 경영학의 관건이니 그렇게 놀림을 받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을 하였고 부끄럽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복학해서 다시 공부를 시작했는데, 도저히 수업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구토가 나올 지경이었습니다. 비용 몇 십 원 줄이기 위해서 사람들을 이용해야 하는 비인간적인 학문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인생을 살아가는데 평생 돈 몇 푼 때문에 걱정하고 머리 쓰며 살아가야 할 만큼 내 인생이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삶이 너무 초라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사제의 삶을 결정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실 이렇게 저를 변하게 했던 것은 대학 들어가면서 복학할 때까지 5년 동안 꾸준히 읽었던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 때문이었습니다. 이 책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한 인생을 세상에 얽매이지 않고 정말 가치 있게 사신 분들이었습니다. 내 인생도 그 분들처럼 세상 걱정으로 아웅다웅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가치 있게 살고 싶었습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것인데, 이 책을 읽으면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삶을 배워가면서 제 맘속에 꾸준히 크고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자아존중감’이었습니다.
자아존중감(自我尊重感, Self-esteem)이란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소중한 존재이고 어떤 성과를 이루어낼 만한 유능한 사람이라고 믿는 마음입니다.
자아존중감은 학업 성적, 리더십, 위기극복능력, 대인관계 등 삶의 많은 영역에 영향을 미칩니다. 특히 대인관계는 자아존중감과 정비례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대한민국의 서울과 경기도 권에 거주하는 고등학교 1학년생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자아존중감이 가장 높은 그룹은 89.3%가 대인관계 최고 수준의 그룹에 속했습니다. 반면 자아존중감이 낮은 그룹은 78.0%가 대인관계 수준 역시 낮게 나타났습니다. 이와 같은 선상에서 자존감의 상처는 우울증으로 이어지고 자살에 이르게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존감과 자존심은 매우 다릅니다. 물론 둘 다 자신을 좋게 평가하고 사랑하는 마음이지만, 자존심은 타인과의 경쟁 속에서 얻는 긍정이며 자존감은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긍정입니다. 이에 따라 자존심은 끝없이 타인과 경쟁해야 존재할 수 있으며 패배할 경우 무한정 곤두박질칩니다. 제가 보는 입장은 자존심은 교만에서 나오는 것이고, 자존감은 겸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자존감은 자신에 대한 확고한 사랑과 믿음이기에 경쟁 상황에 따라 급격히 변하지는 않습니다.
자존감은 보통 아이 때 부모에 의해 많이 결정이 됩니다. 예를 들면 자아존중감을 떨어뜨리는 행동은 부모가 아이에게 밥을 먹여주는 것입니다. 13~14개월 정도 되면 아이들은 혼자서 수저를 쓰려하고 밥을 먹으려 합니다. 그때 부모는 주변이 밥풀로 덮이는 것을 싫어해서, 아니면 밥을 먹여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해서 아이가 수저를 쓰는 것을 막고 부모가 억지로 시간에 맞추어 밥을 먹여주면 아이들은 배고픔이라는 자신의 몸에서 보내는 신호가 옳은지 아니면 엄마가 밥을 먹으라고 하는 것이 옳은지 혼동하게 됩니다.
아이에게 있어 부모는 절대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결국에는 엄마가 옳다고 생각하게 되고 자신의 몸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하게 되면서 아이들의 자아존중감은 낮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로부터 교육된 자아존중감보다도 신앙이 주는 자아존중감은 비교할 수 없이 큽니다. 부모에게서 받은 참으로 가치 있고 사랑받을만한 사람이라는 믿음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믿음에서 생기는 자아존중감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남들이 나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라고 하십니다. 우선 남이 나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기기 위해서는 나는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자아존중감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난 할 수 있는 게 없어. 그냥 대충 살면 되지 뭐. 나는 죽어도 싼 놈이야!’라고 하는 사람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렇게 자존감이 없는 사람은 남들에게도 그렇게 대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믿음으로 자아존중감을 키웁시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교만과, 육체와 돈의 노예로 살아갈 비천한 존재들이 아닙니다. 영생을 누리는 훨씬 가치 있는 존재들입니다. 온 우주를 만드신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된다면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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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