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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역반장 월례연수] 예수님의 희년 선포
지난 시간들을 통해 희년의 뜻과 의미, 희년의 근본정신, 그리고 구약에 나타난 희년의 모습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지난달에 이어 레위기 25장을 다시 한번 살펴보면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너희는 안식년을 일곱 번, 곧 일곱 해를 일곱 번 헤아려라. 그러면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나 마흔아홉 해가 된다. 그 일곱째 달 초열흘날 곧 속죄일에 나팔 소리를 크게 울려라. 너희가 사는 온 땅에 나팔 소리를 울려라. 너희는 이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한 해로 선언하고,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주민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의 희년이다. 너희는 저마다 제 소유지를 되찾고, 저마다 자기 씨족에게 돌아가야 한다.(레위 25,8-10)
레위기 25장은 희년에 관한 말씀의 요약이자 핵심으로, 희년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선 희년은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고 땅을 분배 받은 시점부터 일곱 번째 맞는 안식년의 바로 다음 해입니다. 7년에 한 번씩 안식년이 돌아오니 마흔아홉 해가 지나고 오십 년째가 되는 해를 희년으로 선포했던 것입니다.
이 희년의 중심 주제는 ‘해방’입니다. 농사일을 쉬는 것은 안식년과 동일합니다. 하지만 희년에는 모든 부채가 탕감되고, 매매한 땅이나 담보로 잡힌 소유지 등이 본래의 주인에게 반환되는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또한 빚을 져서 노예가 되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희년에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자유’와 ‘해방’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금리가 높이 치솟고 대출 이자를 갚느라 허덕이는 사람이 늘어나는 요즘, 당시 사람들에게 희년이 얼마나 큰 기쁨이었을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사업 실패 등으로 집을 잃고 가족과 떨어지게 된 사람에게 있어서 집과 땅을 돌려받고, 가족과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은 분명 크나큰 희망입니다. 이는 삶 안에서 몇 번씩 넘어지고 주저앉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희년의 실질적인 도움과 효과로 인해 과연 희년이 기쁨의 해가 될만한지 먼저 함께 묵상해 보면 좋겠습니다.
희년을 통해 다시금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사람들은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더욱 깊이 체험할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회개하며, 다른 사람들을 너그러이 받아들이고 용서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다가오는 2025년 희년을 통해 우리에게도 이런 새 삶의 기회가 주어지길 바라봅니다.
오늘의 주제인 ‘예수님의 희년 선포’를 살펴보기 전에 구약 성경의 말씀을 하나 더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주님의 은혜의 해, 우리 하느님의 응보의 날을 선포하고 슬퍼하는 이들을 모두 위로하게 하셨다. 시온에서 슬퍼하는 이들에게 재 대신 화관을 슬픔 대신 기쁨의 기름을 맥 풀린 넋 대신 축제의 옷을 주게 하셨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들을 ‘정의의 참나무’ ‘당신 영광을 위하여 주님께서 심으신 나무’라 부르도록 하셨다. 그들은 옛 폐허들을 복구하고 오랫동안 황폐한 곳들을 다시 일으키리라. 폐허가 된 도시들, 대대로 황폐한 곳들을 새로 세우리라.(이사 61,1-4)
이사야서 61장의 말씀은 앞서 읽어본 레위기 25장의 ‘해방’과 조금 다른 점이 돋보입니다. 레위기에서는 해방의 실질적인 주체가 땅의 현재 주인, 혹은 채권자였습니다. 레위기의 해방은 땅의 현재 주인이 본래의 주인에게 땅을 돌려주고, 채권을 가진 사람이 채무를 탕감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서에서는 해방의 주체가 하느님으로 나타납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가 해방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한편 레위기의 해방은 땅, 빚, 노예 등 사회 · 경제적인 면에 국한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사야서의 해방은 사회 · 경제적인 것뿐 아니라 정신적, 심리적인 면도 다루고 있습니다. 곧 마음이 부서진 이들과 슬퍼하는 이들에게 위로와 구원을 주는 해방의 모습 또한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해볼 수도 있겠습니다. ‘레위기의 희년 규정이 과연 잘 지켜졌을까?’ 처음에는 잘 지켜졌을 수도 있지만, 점점 사회가 커지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등장하면서 실질적으로 희년의 규정들이 지켜지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기득권층은 자신들이 가진 재산과 권력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이사야서에 나타난 희년에는 종말론적인 신학이 더해집니다. 지금의 현실에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희년의 해방이 종말에 가서 메시아를 통해 이루어질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 말입니다. 그리고 그 희망은 ‘주님의 은혜의 해’라는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더 이상 희년의 해방은 권력을 가진 혹은 땅이나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 아닌, 전적으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은총과 구원의 결과라는 뜻으로 이해해 볼 수 있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신약의 예수님께서 등장하십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17-21)
예수님께서는 위에서 살펴본 이사야서 61장을 그대로 인용하셨는데, 마지막 한마디 말씀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이제 희년은 예수님 안에서 더욱 깊은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기득권의 탐욕으로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던 해방이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사야서에서 나타났던 종말론적 관점이 마침내 메시아의 오심으로 완성되고 실현될 것입니다. 해방과 구원의 시간은 ‘오늘’ 예수님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다음 시간에 좀 더 자세하게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 입문] (8) 문자(文字), 기억의 보존과 활용
성경은 인간의 언어와 문자로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글로 쓰인 성경이 두루마리나 책의 형태로 하늘에서(?) ‘쿵’하고 떨어진 것은 아닙니다. 기록 이전에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신(들)과 인간 세상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을 것입니다. 시와 노래, 탄원과 고백, 환호와 분노, 사랑과 미움, 전쟁과 평화 같은 인간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과 그에 대한 생각들이 이런 이야깃거리의 주제가 됩니다. 과거에는 인간 스스로에 대한, 그리고 그 인간 사회의 구성원들이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풀리지 않는 질문에 대한 답을 종종 보이지 않는 신에게 유보하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래서 천재지변이나 질병과 같은 불행한 사건들은 신들의 분노로, 풍작과 이상적인 자연환경은 신들의 축복으로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런 사회에서 태어나고 자라는 사람들에게 세상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인터넷이나 도서관, 교육기관 등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들 보다 먼저 세상을 살았던 이들의 축적된 경험과 성장과정 속에서 체험을 통해 얻게 되는 통찰이 인류의 문화를 발전시킵니다.
우선, 가정은 한 사람이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역량을 키워가는 첫 교육이 이루어지는 장소였습니다. 조금 더 성장하여 집 밖으로 그의 활동 범위가 넓어지면, 또래들과의 놀이, 사회 구성원 전체가 참여하는 공동 노동, 축제와 같은 사회적 활동이 그의 인식의 폭을 더욱 넓혀주고 그 깊이를 더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대개 최고의 정보 제공자는 지적 활동의 기간과 체험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연스레 한 부족과 사회의 연장자들은 살아있는 백과사전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원과 자기들 만의 독특한 풍습과 사회적 합의의 이유와 의무 등에 대해 설명해 주고, 구성원들 간에 다툼이 있을 때는 권위를 지니고 공적인 판결을 통해 분쟁을 해결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형태의 정보 전달과정은 점점 거대해지는 공동체의 규모에 부응하기에는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마을과 부족 단위를 넘어 국가라고 부를 정도의 거대한 한 사회 전체에서 통용되고 그들을 하나로 규합할 수 있는 가치체계를 담아낼 수 있는 보다 확실하고 효율적인 지식과 지혜의 저장 수단이 필요합니다. 한 사람의 기억에만 의존하지 않고, 굳이 그 사람을 찾아가거나 초빙하지 않더라도 쉽고 간편하게 확인과 조언을 얻을 수 있는 수단. 그것은 정보를 저장할 수 있는 표지, 곧 문자입니다. 문자는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기억은 한계가 있지만 문자는 거의 완벽하게 그 보존기간을 늘려줄 뿐 아니라 동시에 여러 지역에서 같은 정보를 전달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국가의 주요 정책이나 새로운 소식을 한 사람이 순회하며 들려주지 않더라도, 여러 도시에 같은 권위를 가진(보통 통치자의 인장으로 확인가능한) 정보들이 한꺼번에 전달되고, 설령 시간이 지나 정확한 의미가 생각나지 않을 경우에는 다시금 확인 가능한 매우 유용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상거래 내역을 기록하던 수단이었던 단순한 기호들이, 점점 더 복잡한 의미를 담아내는 문자로 발전하여 법과 신화, 시와 같은 한 사회의 공적 정신적 가치를 보존하는 기억의 저장고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인류가 문자를 활용하기 시작한 것은 구약성경이 글로 기록되기 2,500여년 전부터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바빌론 유배시기, 단편적으로 전해지던 망국의 기록 유산들을 수집, 정리하며 시작된 구약성경의 초기 편집작업이 문자의 태동지였던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한복판에서 이루어진 것도 우연은 아닐 것입니다. 화실에 세워 놓은 그리스-로마의 석고상이 인체 드로잉의 길잡이가 되고, 고대 중국의 금석문과 명필들의 서첩들이 서예가들의 참고서 역할을 하듯 구약성경의 저자들은 켜켜이 축적되어 왔던 선진 문명의 도서관에서 참조할 수 있었던 글쓰기의 기본 소양에 기대어 자신들의 조상들과 그들이 섬겼던 신이 남겨준 역사와 교훈을 기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지에서 만나는 성경 말씀] 코르넬리우스와 카이사리아
사도 10,1-2에 등장하는 코르넬리우스는 이방인이지만 신심이 깊은 인물입니다. 그는 “이탈리아 부대라고 불리는 군대의 백인대장”으로서 “온 집안과 함께 하느님을 경외하며··· 자선을 베풀고 늘 하느님께 기도”한 사람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코르넬리우스를 눈 여겨 보시고, 그가 살던 카이사리아로 천사를 보내십니다. 그리고 야포에 머물던 사도 베드로도 카이사리아로 가게 하시는데, 이 모두는 코르넬리우스를 기점으로 이방인 선교의 첫 걸음을 떼게 하시려는 계획에서였습니다.
카이사리아는 현 이스라엘의 정치 수도인 텔-아비브와 그곳에 자리한 야포항에서 북쪽으로 45km가량 떨어진 곳입니다. 갈릴래아 북부의 카이사리아 필리피(마태 16,13-20)와 구분하려고 ‘카이사리아 마리티마’, 곧 ‘해변의 카이사리아’라고도 일컬어지던 곳입니다. 카이사리아를 세운 이는 유다 임금 헤로데입니다. 당시 로마 황제 아우구스토가 그 땅을 헤로데에게 하사하자, 헤로데는 기원전 25년부터 13년까지, 12년 동안 공사하여 아름다운 항구를 짓고, 로마의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토에게 헌정했습니다. 그리고 아우구스토 카이사르에게 바친 도시라는 뜻으로 카이사리아라 명명했습니다.
당시 베드로는 야포에 있었는데요, 야포는 구약 시대부터 항구 역할을 하던 곳입니다. 사도 10장에 따르면, 베드로는 야포에 있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서 환시를 보게 됩니다.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이 뒤섞인 아마포 그릇이 하늘에서 내려와, 베드로에게 그것을 먹으라고 지시하는 환시였습니다. 베드로가 부정한 것은 먹을 수 없다며 거부하자,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15절) 하는 말씀이 하늘에서 들려왔습니다. 이는 정결과 부정의 경계가 무너졌음을, 곧 선민과 이방인 사이의 구분이 사라졌음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뒤 베드로는 카이사리아로 올라가 신심 깊은 이방인 코르넬리우스를 만납니다. 그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그를 교회에 받아들입니다(사도 10,1-11,18). 다시 말해, 할례 없이 이방인을 받아들임으로써 이제부터는 율법이 아닌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세상이 되었음을 알린 것입니다.
이후 카이사리아는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됩니다. 2세기에 카이사리아 교회는 주교좌가 되고, 3세기에는 신학 연구의 중심지가 됩니다. 교부 오리게네스는 이곳에 교리학교를 세우고, 초대 교회 신학의 중심지로 성장시켰습니다. 그는 많은 작품을 남긴 저술가였는데, 안타깝게도 그의 사후 벌어진 ‘오리게네스주의 논쟁’으로 많은 본문이 소실되고 맙니다. 하지만 1930년경부터 교부학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그는 교부 신학의 아버지로 재평가 받게 되었습니다. 「교회사」의 저자이자 오리게네스의 제자였던 에우세비우스는 카이사리아 태생으로 315년경 그곳의 주교가 되었습니다. 현재 카이사리아에는 헤로데가 만든 도시의 유적만 남았지만, 이방인이었다가 하느님의 백성 안에 ‘접붙여진’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전해주는 성지입니다.
[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70) 말라키서
식어버린 믿음 꾸짖으며 예언자의 도래 예고
히브리어 ‘말라키’는 우리말로 ‘나의 사자(使者)’, ‘나의 심부름꾼’이란 뜻입니다. 이를 음차해 헬라어 구약 성경 「칠십인역」은 ‘Μαλαχιαs’(말라키아스), 라틴어 대중 성경 「불가타」는 ‘Malachias’,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펴낸 우리말 「성경」은 ‘말라키서’라고 표기합니다.
히브리어 구약 성경 제1경전인 「타낙」은 말라키서로 예언서 전체를 마감합니다. 아울러 그리스도교는 말라키서를 신약 성경과 잇는 가교 구실을 하도록 구약 성경의 마지막 경전으로 배열해 놓았습니다.
말라키 예언자가 언제 태어났고 어떤 사람인지 아무런 정보가 없습니다. 그래서 말라키가 특정 인물을 지칭하는 고유명사인지, 아니면 예언서 제목인 일반명사인지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전통적으로 말라키는 기원전 515년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된 때로부터 에즈라-느헤미야 개혁이 있기 이전 사이에 활동한 예언자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최근 대다수 성경학자들은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3,1)란 내용을 근거로 말라키를 실존 인물로 보지 않고 경전 이름이라고 주장합니다.
또 「불가타」 성경을 펴낸 예로니모 성인은 에즈라서와 말라키서가 유사하다고 여겨 에즈라를 말라키서의 저자로 추정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에즈라서와 말라키서는 관점이 완전히 다른 경전입니다. 에즈라서는 레위인을 비판하지 않는 데 반해 말라키서는 레위인들의 죄를 고발(2,4-8)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라키서의 내용을 토대로 말라키 예언자가 활동했던 시기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말라키서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빌론 포로생활에서 이미 돌아왔고 예루살렘 성전이 다시 지어졌으며, 그들이 경신례를 다시 거행하기 시작한 지 오래된 상황이었습니다. 기원전 515년 성전 재건축이 완성된 후 상당한 시간이 흐른 것입니다. 하지만 이민족과의 혼혈혼 문제에 관한 에즈라의 대개혁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개혁은 기원전 440년께 가서야 단행됩니다.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는 하느님께 대한 회의론이 팽배해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면 메시아 왕국이 바로 도래하리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하까이와 즈카르야 예언자가 성전 재건과 결부시켰던 구원의 희망은 기대와 달리 성취되지 않았으며, 경제적 어려움은 계속되고 여전히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 실망감으로 신앙이 식어갔습니다. 사제들과 레위인들은 전례를 등한시하고, 사람들을 매수해 갖은 부정을 저지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우상을 섬기던 과거의 잘못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이러한 현실에 대응하기 위해 말라키 예언자가 등장해 “화덕처럼 불붙는 날이 온다”(3,19)고 종말을 예고합니다. 그러면서 주님께서 오시는 그 날을 맞을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일깨웁니다. 따라서 말라키 예언자는 기원전 480~460년께 활동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말라키서는 총 3장으로 편집돼 있습니다. 내용상으로는 당시 유다 공동체 안에서 문제가 되고 있던 여섯 가지 사안들을 하나하나 들고 나와 논쟁을 펼친 다음, 새로운 시대를 향해 엘리야 예언자를 보낼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여섯 가지 논쟁은 다음과 같습니다. △ ‘이스라엘을 향한 주님 사랑’에 대해 말라키는 하느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꾸짖습니다.(1,2-5) △ ‘그릇된 경신례와 참된 사제직’에 관해 합당하지 못한 제물을 하느님께 봉헌하며 자신의 임무를 소홀히 하는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질책하고 징벌을 선포합니다.(1,6-2,9) △ ‘혼혈혼과 이혼’에 대해 동족 간 순수한 혼인을 마음대로 파기하는 유다인들을 질책합니다.(2,10-16) △ ‘심판과 정화’에 관해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정화하실 것이며, 악을 일삼는 자들은 응당한 징벌을 받게 되리라 전합니다.(2,17-3,5) △ ‘올바른 십일조와 예물 봉헌’에 대해 십일조와 봉헌 예물을 올바로 바칠 때 비로소 하느님에게서 풍성한 소출의 복을 받게 되리라고 가르칩니다.(3,6-12) △ ‘종말의 심판’에 대해 하느님을 경외하는 의인만 구원된다고 말씀합니다.(3,13-21)
끝으로 말라키서는 ‘주님의 날’을 두려움 없이 맞을 방법을 일러줍니다. 그 방법은 모세의 율법을 기억하고, 엘리야를 비롯한 예언자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입니다.(3,22-24)
그리스도교는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3,23)라는 말라키서의 이 말씀을 주목합니다. 교회는 이 문장으로 신약과 구약을 잇는 경전으로 말라키서를 구약 성경 맨 마지막에 배열합니다. 공관 복음서는 이 말씀을 여러 번 인용하며 ‘요한 세례자’를 가리키는 내용으로 해석합니다.(마태 17,10-13; 마르 9,11-12; 루카 1,17)
또 요한 세례자의 광야에서의 활동과 나인의 기적(루카 7,11-17)은 엘리야와 사렙타 과부의 이야기(1열왕 17,8-24)를 연상케 합니다. 올리브 산에서 받은 천사의 위로(루카 22,43)는 엘리야가 만났던 천사의 시중(1열왕 19,5-8)을 기억하게 합니다. “불을 지르러 왔다”는 주님의 말씀(루카 12,49)은 엘리야의 심판하는 불(2열왕 1,10.14)을 반영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거룩한 변모 현장에서도 엘리야가 등장합니다.(마태 17,1-9; 마르 9,2-10; 루카 9,28-36)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18) 힘과 용기의 지도자, 여호수아
이스라엘 역사에서 안타까운 장면 중 하나는 모세가 가나안을 지척에 두고 숨을 거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고 광야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동고동락했던 사람들과 이별했다. 광야에서 자신들을 이끌었던 지도자 모세가 세상을 떠나자, 이스라엘 민족은 큰 시름에 빠졌을 것이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모세의 뒤를 이어 전사로서 용맹하게 가나안의 각지에서 계속 싸우며 결국 가나안을 정복하고 그곳에 정착한다. 여호수아는 가나안을 정찰하고 전략을 세워 전투를 벌여 이스라엘 민족에게 승리를 안겨주었다.
희세지웅(希世之雄)이란 사자성어는 난세에 보기 드문 영웅이 나타난다는 말이다. 역사에서 보면, 때에 맞는 지도자가 나타나 활약하는 것은 그 나라나 민족을 위해서는 큰 행운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탄생시킨 지도자라고 하면 여호수아는 실제 전투에서 큰 활약을 했던 전사(戰士)형 리더였다. 이미 오래전에 터를 잡아 살고 있는 가나안 주민들을 공격하는 것은 여러 가지로 불리한 점이 많았지만, 여호수아는 이를 극복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다한다.
가나안 땅을 점령하고 실제로 국가를 세운 사람은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였다. 모세는 그를 무척 신임하고 일찍부터 후계자로 생각했다. 여호수아는 실제 전투에서 많은 공을 쌓았고 실전 경험을 터득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측근으로 이집트 탈출을 하면서 광야 생활 내내 큰 공로를 세운 충직한 인물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작 가나안 땅 가까이에 도착했을 때 그동안의 광야 생활에 지친 사람들은 모세에 대해 반란이라도 할 기세였다. 게다가 이들이 맞이한 가나안에는 만만하지 않은 적들이 버티고 있었다. 가나안에 있는 민족과 전쟁을 치러야 하는데 이스라엘의 군사력은 보잘것없었다. 싸우기도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적의 기세에 눌려 전전긍긍했다. 전투에서 전의(戰意)를 상실하면 싸움은 해보나 마나 필패이다.
이때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찰하고 돌아와서는 옷을 찢으며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외치며 사기를 진작시켰다. “우리는 젖과 꿀이 흐르는 낙원과 같은 땅에 들어갈 수 있소. 적들을 두려워하지 마시오. 하느님이 우리 편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반대하고 이집트로 돌아갈 궁리만 하고 있던 차였다. 그런 환경에서 여호수아의 외침이 제대로 먹힐리 없었다. 오히려 전투를 독려하는 여호수아는 목숨을 위협받는 지경에 빠졌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죽음을 무릅쓰고 소신있게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위기에서 포기해 버리고 모험에 나서지 않는 지도자는 리더로서 자격이 없다. 여호수아의 용기 있는 행동은 위기를 오히려 기회로 바꾼다. 그는 무엇보다 힘과 용기를 가지라고 하며 함께하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었다. 여호수아는 전투에서는 맨 앞장서서 싸우는 힘과 용기가 있는 유능한 지도자이면서 동시에 믿음이 강한 인물이었다.
[성지에서 만나는 성경 말씀] 포도나무, 이스라엘의 상징
이스라엘 순례 때 누리는 기쁨 가운데 하나는 저렴하면서도 질 좋은 포도주를 마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포도는 가나안의 일곱 토산물 가운데 하나인 만큼(신명 8,8) 성경엔 포도와 관련된 지명이 여럿 나옵니다. “벳 케렘”(예레 6,1)은 ‘포도원의 동네’, 삼손의 연인 들릴라가 살았던 “소렉 골짜기”(판관 16,4)는 ‘검붉은 포도 골짜기’를 의미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고향으로 추정되는 ‘에인 케렘’은 ‘포도원의 샘’이라는 뜻입니다.
포도나무는 무화과나무, 올리브나무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하는 과실수입니다(예레 2,21; 에제 15장 등). 대홍수 뒤 노아가 경작한 첫 작물이 바로 포도였기에(창세 9,20), 이것이 세상 만민 가운데 하느님의 맏아들(탈출 4,22)인 이스라엘의 상징이 된 건 적절해 보입니다. 성경에서 하느님은 포도나무 또는 포도원의 주인으로 묘사됩니다(이사 5,1-7; 예레 2,21). 시편 80,9-10에서는 이스라엘이 하느님께서 이집트에서 뽑아와 가나안에 심으신 포도나무라고 노래합니다. 포도는 건포도로 만들거나(1사무 25,18 등) 즙을 끓여 꿀로 만들어 먹었지만, 백미는 단연 포도주였습니다. 그래서 포도 수확철은 흥겨움으로 넘치던 때였는데요(판관 9,27), 두고두고 마실 포도주를 생각하면 콧노래가 절로 나왔을 터입니다.
하지만 그 열매가 딱딱하고 시큼한 들포도로 변해버리면 아무 짝에도 쓸모 없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께 불순종하여 꾸짖음을 들을 때 이런 들포도에 자주 견주어 졌습니다(이사 5,4; 예레 2,21 등). 이런 때는 포도주도 독주로 암시됩니다. 말하자면, 포도주가 제공하는 즐거움 대신 음주의 부작용인 취기(醉氣)만 남는다는 것입니다: “너(예루살렘)의 추잡한 짓과 탕녀 짓이 너에게 이런 일들을 가져왔다. ··· 그것은 질겁과 황폐의 잔, ··· 너는 그 잔을 마셔 비우고서는 그 조각까지 깨물며 네 젖가슴을 쥐어뜯으리라”(에제 23,29-30.33-34).
포도나무의 비유는 이후 요한복음에도 등장합니다. 다만 요한복음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예수님이 포도나무에 비유됩니다(15,5). 그 안에 머물지 않는 가지는 말라서 불태워지지만, 합당한 열매를 맺으면 그 나무를 가꾸신 하느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신다고 합니다(6.8절). 구약성경에서는 포도나무가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하였지만, 요한복음에서는 포도나무를 예수님과 동일시하는데, 이는 아마도 집회서에서 영감을 얻은 듯합니다: “내가 친절을 포도 순처럼 틔우니 나의 꽃은 영광스럽고 풍성한 열매가 된다. ··· 나는 내 모든 자녀들에게··· 영원한 것들을 준다. 나에게 오너라, ··· 와서 내 열매를 배불리 먹어라. ··· 나에게 순종하는 이는 수치를 당하지 않고··· 죄를 짓지 않으리라”(24,17-19.22). 또한 요한복음에서는 포도나무 안에 생명이 있음을 암시함으로써 예수님이 ‘생명나무’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이런 메시지는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생명의 빵이라 하신 요한 6,22-59과 일치합니다. 포도나무의 비유와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이 시기에 우리에게 참으로 좋은 묵상거리를 전해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