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 처| 변한규 목사
음력 사월 초파일은 석가나 나신 날이고 양력 12월 25일은 예수님이 나신 날입니다.
그러나 이 두 날은 질적으로 다른 날입니다.
하나는 인간이 난 날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이 나신 날입니다.
하나는 죄인이 난 날이고
하나는 메시야가 나신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신 날 하늘에서 성탄 축하하는 찬송이 울려 퍼졌습니다. 그 곡에 대하여는 알 길이 없습니다. 칸 타타로 되었는지 오라토리오로 되었는지 짐작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작사자는 성령이심이 확실하고 찬양 대원은 천군과 천사들임이 확실합니다. 가사의 중요한 내용도 밝혀져 있는데 누가복음 2장 14절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오늘 온 세계 교회가 지키는 성탄 주일인데 하나님께서는 영광, 우리 모두에게는 평화가 임하여 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기예수님께서 어떻게 나셨습니까? 이사야가 본문 14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
아기 예수님이 처녀의 몸에서 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처녀의 몸에서 왜 나셨을까요?
첫째, 예언적 탄생을 위함.
선지자 이사야는 예수님 탄생 700여년 전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의 처녀 탄생을 예언했습니다.
마태복음 1장에서 그 예언대로 예수님이 처녀의 몸에서 실제로 나셨습니다.
선지자들의 모든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처녀의 몸에서 탄생하지 아니 하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사야의 예언 곧 하나님의 말씀이 부도날 뻔 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처녀탄생은 예언적 탄생입니다.
사실 이사야가 예수님의 처녀탄생만 예언한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 9장 6절에서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낳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라고 예언했습니다.
이사야 11장 1절에서는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라는 말로 예수님이 다윗의 족보에 기록될 자인것도 예 했습니다.
이사야 53장 2절에서는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고 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에 관한 예언들이 많습니다.
미가 5장 2절은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을 예언했고
호세아 11장 1절은 예수님이 헤롯을 피해 애굽으로 피신할 것도 예언했습니다.
스가랴 9장 9절은 예수님이 나귀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것을 예언했고
스가랴 11장 13절은 예수님이 은 30에 팔리실 것도 예언했습니다.
시편 16편 10절은 예수님의 부활을
시편 6편 18절(틀림) 예수님의 승천을 예언했습니다.
이 모든 예언들이 신약에서 그대로 성취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했습니다.
'5분 후에 일어날 일을 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세계를 정복할 수 있으리라'
그런데 인생이 무엇입니까?
야고보서 4장 14절에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그런데 이사야는 700여년 전에 예수님의 처녀 탄생을 예언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요? 사실 이사야가 예언한 것이 아니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그렇게 알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처녀는 아이을 잉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처녀 탄생이야말로 역사에서 신비중에 신비요, 정말 신비한 사건 가운데에 엄청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처녀가 잉태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성경은 하나님의 성령이 그를 간섭함으로 잉태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물론 신학자중 자유주의 신학자 바르트나 부르너 교수는 예수님의 처녀 탄생을 아예 부인합니다. 그러나 보수주의 신학자 제임스 오르 교수는 예수님의 처녀 탄생을 부인하는 것은 성경의 증거에 대하여 큰 불의를 행하는 일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무엇입니까?
성경의 예언을 그대로 믿는 믿음이요 성경이 말씀 하신대로 예수님의 처녀 탄생을 그대로 믿는 믿음입니다.
본문에서 '처녀'라는 말은 히브리어 성경에서 '알마'라는 단어인데 처녀라는 뜻도 있고 젊은 여자라는 뜻도 있긴 합니다. 그래서 미국 개혁표준성경에서는 알마라는 단어를 '젊은 여자 (Young Woman)'이라고 번역을 했던 일이 있습니다.
그랬다가 미국 사회에 큰 무리를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젊은 여자 중에는 결혼한 여자도 있 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처녀라는 말을 '젊은 여자'라고 번역한다고 하면 기독교는 무너질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성경대로 예수님의 처녀 탄생을 그대로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이적적 탄생을 위함.
처녀는 결코 아이를 낳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만고불변의 자연법칙입니다.
그런데 본문 14절은 다시 말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여기 '처녀 잉태' 이것이야 말로 이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다' 그 이름 자체가 우리에게 이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적이 무엇입니까?
어찌 보면 성경은 이적적인 말씀입니다. 사실 이적이 아닌 말씀들이 없습니다. 이적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의미합니다. 마태복음 19장 26절에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바로 이것이 이적입니다.
누가복음 1장을 살펴보면 천사와 처녀 마리아의 짤막한 대화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31절에서 천사가 말합니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34절에서 마리아가 말합니다.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다시 천사가 말합니다.
35절에 "성령이 네게 임하고 그 능력이 너로 잉태케 하리라" 마리아가 겸손하게 38절에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실제로 처녀 마리아의 몸에서 예수님이 나신 것입니다.
처녀 탄생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입증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간섭하지 아니하시고는 이런일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또 하나님은 생명의 주인되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어찌 처녀의 태중에다가 아기 예수님을 잉태케 못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의 처녀 탄생은 예수님의 절대 권능, 한없이 넓으신 하나님의 능력, 이것을 넌지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불가능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질병도 '건강아! 있으라' 말씀하셔서 건강케 하실 수 있고 심지어는 우리의 번민인 암병까지도 능히 고치실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우리 모두는 새 성전 건축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탄주일에 '3차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라는 내용으로 선물을 드리고 싶어 했는데 지금도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가 없습니다. 버둥되도 안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으로서는 할 수 있다'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도와주실 줄 믿습니다.
'나도 할 수 있다' 빌립보서 4장 13절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나도 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내가 가진 능력으로 내가 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주님 안에서 내가 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낙망하거나 좌절하지 맙시다.
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까?
연약한 나를 꼭 붙잡아 주실려고 오셨습니다.
힘이 부족한 나에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실려고 오셨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찬송은 이것입니다.
♬예수는 나의 힘이요 내 생명 되시니,
내 친구 되시니, 내 기쁨 되시니, 내 소망 되시니♬
이것이 우리의 찬송입니다.
수믿는 성도는 누구나 예수님 안에서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전도하고, 구제하고, 고아원 찾아 가고, 교도소 찾아 가고, 장애인 찾아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늘 울어도 눈물로서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없어 이 몸 바칩니다' 헌신할 수 있습니다.
헌신은 나의 몸을 예수님 위에 바치는 일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몸 바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예수님 때문에 시간 바칠 수 있고 정성 바칠 수 있고 젊음 바칠 수 있고 재물 바칠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오병이어를 바쳤습니까?
어떻게 나의 옥합을 깨뜨릴 수 있었습니까?
어떻게 나의 이삭을 바치고 어떻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바칠 수 있었습니까?
헌신하는 믿음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이적적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십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행하실 수 있는 이적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필요하시면 이적으로 역사하시는 우리 주님이십니다.
셋째, 구속적 탄생을 위함.
소경은 소경을 인도 할 수 없습니다. 죄인은 죄인의 구주가 될 수가 없습니다.
죄인이 어떻게 죄인의 죄를 용서할 수가 있으며 죄인이 어떻게 죄인의 죄를 탕감하고 구속할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인간적인 죄를 단절하기 위해서 처녀의 몸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우주적입니다.
우선 천한 계집종의 몸을 빌렸습니다.
그리고 베들레헴의 가난한 촌민들에게 기쁨을 주셨습니다.
동방박사에게 구원을 주신 예수님, 가난하고, 헐벗고, 매맞고, 정처가 없는, 병든 인생들에게 소망을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차별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나같은 죄인 살리신♬ 우리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평범한 인간으로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인류의 죄를 구속하시고 구원하실 구주로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이심이니라"
예수님의 처녀 탄생은 '예수님이 누구시냐?'를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신이시면서도 사람(God-Man) 신인이심을 증거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면서 하나님,
하나님이면서 사람이신 분이십니다.
그가 우리 죄를 구속하시고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이땅에 오셨습니다. 이것은 2000여년전 사건이면서도 오늘 우리에게 은혜가 되는 능력이 되는사건입니다.
왜 예수님이 처녀의 몸에서 나셨을까요?
죄! 죄! 죄!와는 무관하신 무지하신 예수님으로 오시기 위해서입니다.
베드로가 증거했습니다.
'그에게는 죄가 없도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한 빌라도까지도 증언했습니다.
'그에게서는 죄를 찾을 수가 없다'
아리마대 요셉이 말했습니다.
'그는 참으로 의인이었도다'
누가복음 19장 10절에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고 했고
사도행전 2장 21절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씀 사도행전 16장 31절에 "주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했습니다.
찬송 작가 왓츠가 노래했습니다.
♬구세주 탄생했으니 다 찬양하여라♬
예수님은 살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죽으실려고 오신 분이십니다.
왜 죽으실려고 오셨습니까?
'죄의 삯은 사망'인 인생들을 살리기 위해서 구세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친히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찬송은
♬예수 십자가에 흘린 피로서 그대는 씻기어 있는가
더러운 죄 희게하는 능력을 그대는 참 의지 하는가
예수의 보혈로 그대는 씻기어 있는가
마음속에 여러 가지 죄악이 깨끗이 씻기어 있는가♬
예수님은 한 번도 거짓말을 해 보신 적이 없으십니다.
한 번도 부정한 일을 하거나 언행심사가 불순해 본 적이 없으십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죽으시다니 왠 말입니까?
♬나의 죄 흉악하나 눈과 같이 희겠네♬
바로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지금 방방곡곡에서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 백성 맞으라' 찬송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우선 내가 예수님을 맞이했는가? 마음 가운데 영접했는가? 물어야 합니다. 생일 잔치날 주인공이 없으면 그 자리가 싸늘할 것입니다. 크리스마스의 주인공 되시는 예수님을 우리의 마음 가운데 영접하십시다.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셔야만 했습니까?
나의 죄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53장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고 했습니다.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돌아와! 돌아와! 버린 자식이여!" 그런데 아직도 탕자의 자리에서 머묻거리는 인생이 많습니다. 누가복음 15장 탕자비유에서 탕자가 돼지 우리에 서 뒹굴고만 있었다면 어찌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일어났습니다. 아버지께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받은 축복은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 났도다'이것이 그가 받은 축복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은 탕자였습니다. 15년동안이나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 길로만 질주 했다면 오늘의 어거스틴은 없을 뻔 했습니다. 가던 자동차에 액셀을 밟으면 멈춥니다. 그리고 방향을 바꿀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했습니다.
그의 방향을 바꾸더니 오늘의 역사 모퉁이에서 탕자 인생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김익두라는 사람은 당시 깡패 두목이었습니다.
그가 장터에 나타난 날 저마다 '오늘은 재수 없게 되는 날'이라고 했답니다. 공연히 때리고 인사를 안 하면 '왜 인사를 안 하느냐'고 트집하고 인사를 하면 '니가 언제 나를 봤냐고' 트집하고 온 장의 음식은 공짜요 물건의 외상입니다. 외상값을 받으려는 사람은 봉변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서양 선교사 부인이 전도를 했습니다.
'예수믿고 천당가세요' 전도지를 주었는데 그는 전도지를 받자마자 그 전도지로 코를 풀어 팽개쳤습니다. 선교사 부인은 대노하면서 말했습니다. '당신, 전도지로 코풀면 코가 썩어요'
이 한 마디가 귓전을 후리고 가슴을 때렸습니다. 잠을 자면서 '혹시 내 코가 썩지는 않는가?' 만졌다고 합니다.
성령이 감동 하니까 깡패 두목 김익두도 예수님을 영접하고 주의 종이 되어 당시 능력있는 하나님의 종으로 쓰임받을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오신 예수님, 나의 기쁨, 나의 소망이십니다.
내 마음속에 영접하십시다.
'오! 예수님, 내 가정에도 오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늘에서는 영광, 땅에서는 우리 모두에게 평화가 넘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