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럭주럭 내리는 겨울비를 뚫고 줄기차게 부는
샛바람에 파도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갯바위를
밤새 후려치더니 오늘 아침에는 먼 수평선 조차도 또렷하여 하늘은 하늘대로 바다는 바다대로
제자리 있어 방파제 사이로 빠져나가는 고깃배도
상앗대로 밀듯이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며
흘러간다.
봄이 오기 전에 겨울 바닷바람을 실컷 마셔두려고 오일 펜스에 앉아있는 갈매기를 바라보며
선창을 거니니 먼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가슴을 시원하게 적셔준다.
출항을 끝내고 돌아온 고깃배들을 묶은 밪줄에 포자를 터트린 미역과 파래가 물 위에 떠오르다 물속에 잠기기를 물살의 세기에 따라 반복하고
고깃배 갑판 위에서 어부들은 어망에 난 구멍들을 한 올 한 올 궤메고 있다
" 멸치 어망이 원래 그렇게 듬성듬성합니까"라고 하니 수염이 터부럭한 늙은이가 대구 어망이라고 한다.
30 톤도 안되는 배가 대구 잡으러 어디까지 가는 것일까하고 물어보려다 방해될까봐 그만 두었다.
오히려 나는 몇 톤인 배이길래 무엇을 잡고자
끝없이 펼쳐져 있는 망망대해를 겁없이 헤메었던 까닭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
오징어,풀치, 납세미 등이 넚다란 평상 위에서
꼬득꼬득 말라가고 바닷속에서 움직이어야 할
불가사리가 방파제 위에 뒹굴딩굴
하며 나자빠져 있는 모양을 보니 아무리 해도 죽거나 없어지지 않으니 이 방법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어 보인다. 불가사리의 강한 생명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도다리, 농어 , 붕장어 등이 담겨 있는 水槽에 붉은 도미 한 마리가 유별나게 설쳐댄다.
횟집 옆에는 할매들이 쪼그리고 앉아 옛날에는
바닷가에 패대기 쳐저 있을 물메기를 손질하며
전복,고동 등을 담은 다라이를 앞에 두고 미역,
다시마를 팔고 있다.
부둣가는 조용하고 한가한듯하지만 바닷속의 생물들은 바쁘고
춥다고는 하지만 바다를 터전으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손길도 바쁘게 움직여 부지런한 어부들은 이미 출항을 준비해 두었다.
어느덧 겨우내 언 땅이 녹기 시작하여 얼어 붙어있던 도랑의 물도 바다로 흘러 들고 있고, 바닷 바람이 데리고 오는 소복히 쌓인 흰 눈 같은 구름을 보니 오랜만에 살아있다는 느낌에 퍽 만족스럽다.
"큰 녀석은 뒤뚱거리며 손에 바가지 하나 들었고
작은 놈은 바싹 마르고 안색이 푸석하며,
우물가에 애 하나는 유독 비쩍 말라서
배는 성난 두꺼비요 볼기짝은 쭈글쭈글.
어미 간 후 아이는 철버덕 앉아 우는데
똥오줌 범벅에 콧물 눈물이 줄줄.
어미 돌아와 아이를 후려치니
울음소리 자지러져
천지 사이가 처참하여 구름도 멈춘 누나."
이백여 년 전 강진의 다산초당에 머무르던 정약용이 마을 아이들이 굶주려 있는 실상을 보고 지은 시다.
내가 살았던 범전동은 6.25 전쟁 때 미군 하야리아 부대가 주둔했던 곳이다. 하야리아’라는 부대 명칭은 1950년 9월 주한 미군 부산기지사령부가 이곳에 설치되었을 때, 그들이 주둔하는 기지에 애칭을 붙이는 관례에 따라 초대 사령관의 고향인 미국 플로리다 주의 ‘베이스 하야리아’라는 지명을 따 명명한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하야리아 부대가 지금은 '부산시민공원'으로 탈태환골했지만
此際에 솔직히 털어놓으면 그 당시 그곳은 미군부대에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양공주와 미군들의 접촉을 자주 보게 되는 취락지역이라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는 교육상으로 좋은 환경은 못되었다
나는 배가 고프면 똑똑한 똘마니 두서넛과 작당을 한다.
헌병이 무장하고 근무를 서고 있는 정문 위병소에서 30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에 철조망이 처진 담벼락 옆 도라무깡 통 속을 깨끔 발로 들여다보고 빈 큰 분유통이 있으면 작전 개시다.
발 빠른 얌생이가 적격이다
헌병의 동선을 자세히 살펴보고 손짓을 하면
얌생이가 헌병 몰래 정문으로 달려 들어가 분유통을 꺼내어 오면 작정 성공이다
1분 내에 해내어야 한다.
헌병 2명이 동시에 1분 동안 정문을 비운 때를
포착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작전은 '총을 맞을 수도 있었다 대단한 담력과
치밀함이 필요했다.
그 분유통의 재질이 알루미늄이라 엿장수에게
주면 서너 명이 허기를 면할만치 엿을 준다
한 날에는 그 작전에 대단한 결함이 있었다.
얌생이가 드럼통 속에 있는 분유통을 꺼집어
내려고 드럼통 위로 몸을 날리는 순간 얌생이가 보이지 않는다.
드럼통 속으로 빨려 들어간 것이다.
할 수 없이 두 손 들고 위병소로 들어가 손으로
배를 만지며 얼굴은 슬픈 표정을 짓고 도라무 깡을 가리키며 흑인 헌병에게
" 배가 고파 그랬다 "라고 하며 버벅거렸다.
그 헌병은 전에도 우리의 작전을 몇 번 목격한
모양이었다. 얌생이를 도라무 통에서 꺼내 주고
빈 우유통을 손에 쥐여주며 정문으로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고개를 숙였지만 속으로는 "웬 떡인가 " 싶었다 .
부전천을 가로지르는 굴다리 옆에는 장미크럽이라는 네온사인이
휘황하게 번쩍거리고….
다리 밑에는 꾸겨져 아무렇게나 버려진 파지들을 모아 규격에 맞게 쌓아둔 더미 옆에 움막을 지어 사는 사람들이 추위를 이겨 내기 위하여 피운 모닥불을 쬐며 여럿이 서 있었다.
나는 지금 생각해 보니 어린 시절을 매우
혼란스러운 환경 속에 보냈다는 경외감에
소스라치게 놀란다.
헤드라인이 '미국에서 자녀의 총기 난사 사건과 관련해 부모의 형사 책임 인정'이다.
검사는 “이 모든 일을 막을 수 있었지만 비극적이게도 작고 쉬운 일을 부모가 하지 않았다”라고 주장했다.
피해자 아버지는 배심원단 평결 뒤 “ 부모로서 할 일을 다 했다면 이런 일을 겪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자식을 낳는 것은 선택할 수 있어도, 자식을 돌보는 것은 선택 할 수 없다 "라는 것이다
이 기사를 보고 내 딸들이 자라 온 시절에
아비로서 한 역할을 곰곰이 반추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