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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英祖의 生母이다.
그 전신이 무수리 였다는 것은 근래까지도
궁궐 주변은 물론 전승담으로서 익히 아는 얘기지만, 高宗에게서 직접 이에 대해 들은 기억이 있다는 것은 마지막까지 생존했던 두 後宮 광화당 이씨와 삼축당 김씨의 증언이다
즉 무수리가 아니고 침방나인(針房內人)이었다는 것이다.
이를 입증하는 일화로서 고종은 후일 영조와 숙빈최씨와의 대화를 인용하였다 한다.
"침방에 계실 때,무슨 일이 제일 하시기 어렵다이까"
물은 즉, 崔氏의 말이,
"중누비,오목누비,납짝누비, 다 어렵지만 細누비가 가장 하기 힘들었더니이다."
했다.
왕은 그 자리에서 누비로 만든 토수(吐水)를 벗어놓고 일생 누비옷은 걸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이 일화를 高宗이 (무수리說)을 부정하면서 반증으로 들었다 한다.
(무수리說)은 英祖와 그 王妃 정성왕후 서씨와의 不和說로 이어진다.
즉,영조가 결혼 초야에 신부의 손을 만져 보면서
"곤전(坤殿)의 손이 곱구려"
했더니 신부의 대답이
"양반의 집에서 자라서 일을 안 해 그렀습니다" 했다는 것이다.
王은 이 한마디에 말할 수 없는 모욕감을 느끼고 그 길로 뛰어나와 소박을 놓았다는 얘기이다.
그것은 生母 최숙빈의 물긷기, 불때기로 거칠고 험했던 신분이 생각나서였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고작 15세의 어린 신랑이 그런 행동을 취할 줄 알았는지, 또 신부는 신부대로 장래 설사 國母가 될 여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옛날 지체있는 집안의 딸이 그렇게 주착없는 대답을 했는지 의심스럽다.
그런데 英祖가 정성왕후에게 냉랭했었다는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며느리의 (한중록)에 정성왕후의 임종 때
대목에,
[양전ㆍ兩殿, 사이 극진치 못하오시나 병화이 위중하시니 오시는지라]
하고
객혈(喀血)을 많이 하고 혼수 상태에 있는 왕비는 거들떠 보지도 않고, 父王이 무서워 신하들 처럼 부복하고 있는 그 곁의 世子를 보고 잔소리만 했다는 것이다.
그 보다도 왕비가 운명하려는 순간에 공교롭게도 때마침 사위(病的으로 영조가 사랑하던 따님 화완옹주의 남편 정치달)의 부고가 전해지자,
영조는 -그제서야 통곡하시고- 그 宮으로 달려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쪽은- 정순왕후가 申時쯤(오후 4시)에 운명 하셨는데-
王을 기다리다 못해 날이 저물고 나서야 喪主들이 발상(發喪)을 하고 다음 날 王의 환궁을 기다려 염을 했다고 한다.
이것을 뒷받침해 주는 사실로,
實錄(실록)에는 왕비의 운명 직전에 英祖가 부마(사위)의 喪에 出宮하려 하여 신하들이 강력히 만류하자, 몹시 화를 내고 승지와 대사간을 비롯한 신하들을 파면 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감사합니다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