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플란트 / 박명증
“계산은 장모님과 원장님이 하실 겁니다.” 치과 진료를 마치고 나오면서 내가 안내데스크의 실장에게 살짝 던진 말이다.
지난여름, 지인이 경영하는 복숭아 농장에 일을 거들어 주기 위해 이틀을 보낸 적이 있었다. 첫날은 비가 와서 제대로 일을 하지 못했다. 저녁에 간단한 술자리를 하고, 내일의 작업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으나 한밤중에 잠이 깨었다. 이십여 년 전쯤에 충치 치료를 하고 금으로 덮어씌운 오른쪽 아래 어금니가 욱신거리는 바람에 잠을 깬 것이다. 심한 통증은 아니었지만 걱정스러운 마음에 조금은 불안했다. 다행히도 이튿날 아침에는 말짱했다. 그리고 몇 달 동안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러던 것이 다시 욱신거리기 시작했고 통증도 함께했다. 어쩔 수 없이 치과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좀 일찍 왔어야 했는데, 잇몸이 많이 상해서 치료에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경과를 보고 임플란트가 가능한지를 결정해야겠습니다.” 원장의 말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치아 치료와 임플란트 시술은 다시 반년 정도의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끝이 났고, 치료비는 아내에게 미루었다. 원장인 사위와 해결하라고는 했으나 사실은 그냥이었다. 내가 한 일은 아내가 준비해 준 봉투 하나를 실장에게 건넨 것이다. 직원들 보기에 미안하다며 마련한 정말, 말 그대로 몇 잔의 커피 값이었다.
대학생 때였다. 여름방학이라 시골집에 머물고 있었다. 어느 날 비 온 후의 저녁 무렵이었다. 아버지께서 기분 좋게 한잔하고 오시다가 어디서 부딪쳤는지 앞니에 덧씌운 보철이 약간 어긋나 있었다. 통증은 없었지만 불편해 보였기에 병원으로 모시고 갔다. 평소에는 걸어서 가는 시골길이었지만 읍내로 가기 위해 택시를 불러 탔다. 조그만 시골 읍내였기에 치과는 없었고 유일한 의원이었다. 집게 비슷한 의료용 기구로, 튀어나온 보철을 몇 번 다독이니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얼마냐고 물었다. 그러나 의사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박 군, 나는 치과 의사도 아니고 큰일도 아닌데 뭐 돈까지 받겠는가. 그냥 가게. 아버님이나 잘 모시고 가게.” 연세가 지긋하신 의사 선생님은 읍내에선 용하다고 소문이 나 있는 분이었다. 따스한 정을 지니신 분으로 주민들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환자를 편안하게 하는 의사가 최고라고 했든가.
다시 택시를 타고 집으로 오는 도중에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너거 엄마는 차비나 좀 줘서 보내지, 아(아들)한테 부담을 주나!” 아버지는 엄마가 나에게 택시비와 병원비를 준 것을 모르고 계셨던 모양이었다. 자식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아버지의 마음은 부모님의 공통된 마음에 담긴 부정(父情)이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도 십 년이 훨씬 지났다. 사십여 년 전의 일이, 오늘 치과를 다녀오면서 문득 떠올랐다. 공짜 치료 때문이었을까.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이틀 전쯤이었다. 목욕하고 싶다고 하셨다. 병중이었기 때문에 동네 목욕탕으로 모시지는 못하고 화장실 욕조를 이용해서 몸을 씻겨 드렸다. 몇 달 전에 간암 진단을 받고도 노령이라 달리 치료 방도를 구하지도 못하였고, 객지에 나와 살고 있는 자식들에게는 알리지도 않으셨다. 그러다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사의 진단에 따라 마지막으로 자식들에게 알리셨다. 이왕지사 이렇게 갈 것인데 자식들에게 미리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한 배려였을 것이다.
나는 휴일마다 병간호를 해드렸고 아버지의 마지막 부탁을 들을 수 있었다. 깨끗한 몸으로 조상님들을 만나기 위한 의식이었는지도 그때는 몰랐다. 조상님 곁으로 가실 때가 되면 본능적으로 그 순간을 안다고 하는데 그 말이 정말인지도 모르겠다. 할머니도 그러셨다. 노환으로 오늘내일하였는데 머리를 감고 싶다고 해서 아내가 머리를 감겨드렸는데 그 후 이틀을 넘기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화장실의 좁은 욕조에서 몸을 씻겨 드리고 나서 머리의 샴푸 거품을 샤워기로 씻어 내릴 때였다. “니 엄마는 머하노. 이럴 때 좀 도와주면 수월할 텐데.” 나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데도, 아버지는 자식에게 미안해하셨다. 어쩌면 마지막으로 아내의 보살핌이 그리웠는지도 모르겠다. 우둔한 나는 아버지의 자식에 대한 배려라고만 생각했다. 한평생 자식들을 보살펴야 한다는 가장으로서의 무의식적인 사명감이 죽음을 앞에 두고서도 나타난 것이려니 생각했다.
아버지는 그 이튿날 병원으로 가시고 또 그 이튿날 숨을 거두셨다.
병원으로 모시고 직장으로 돌아오자마자 곧 위중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아내에게 먼저 가라고 했다. 저녁 퇴근 때까지는 기다리실 줄 알았는데 점심때가 좀 지나서 아내에게 연락이 왔다. 숨을 거두셨다 한다. 아들을 기다리셨을 텐데. 나는 임종도 하지 못했다.
장례를 끝내고 난 뒤, 그동안 아무 말씀도 없던 어머님께서 한 말씀 하셨다. “이렇게 가는 것을….” 육십여 년을 함께 살아오셨던, 그동안의 삶을 되돌아보며 슬픔과 아픔과 아쉬움을 함께 내뱉은 한마디였다. 아버님 떠나신 지 십수 년이 흘렀고, 어머님도 지난해에 아버님 곁으로 가셨다.
이렇게 가는 것을 아버님 가실 적에
어머님 하신 말씀 보내는 아쉬움에
이제는 선산 선영에 함께 누워 계시네
뿌리까지 뽑힌 치아는 임플란트로 다시 태어났지만, 돌아가신 부모님은 꿈속에서 나마 뵈올 수 있을까. 요즘은 초저녁잠이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