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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계사신(牝鷄司晨)
암탉이 새벽에 우는 일을 맡았다는 뜻으로, 아내가 남편의 할 일을 가로 막아 자기 마음대로 처리함을 비꼬아 이르는 말이다.
牝 : 암컷 빈(牛/2)
鷄 : 닭 계(鳥/10)
司 : 맡을 사(口/2)
晨 : 새벽 신(日/7)
출전 : 서경(書經) 목서편(牧誓篇)
암탉이 새벽을 알리느라고 먼저 운다는 뜻으로, 부인이 남편을 젖혀 놓고 집안일을 마음대로 처리함을 이르는 말이다. 암탉이 울어 때를 알린다는 말이므로 음양의 이치가 바뀌어 집안이 망할 징조이다. 후비(后妃)가 국정을 마음대로 하거나 처첩(妻妾)이 가정을 마음대로 휘두름을 비유하는 말이다.
널리 알려진 속담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집안의 여자들을 주눅 들게 하는 남정네의 전유물이었다. 날이 샜다고 울어야 할 수탉이 제 구실을 하지도 못하면서 암탉이 우는 것도 막았다. 가정에서 부인이 남편을 제쳐놓고 떠들고 간섭하면 집안일이 잘 안된다고 나무라는 것이다.
남존여비(男尊女卑)가 뚜렷했던 옛날이라도 무작정 여성을 비하한 것이 아닌 것은 여기서 가리킨 암탉이 중국 역사상 가장 잔인하고 음란한 독부 달기(妲己)였기 때문이다. 고대 하은주(夏殷周)의 3왕조 중에 은나라의 마지막 왕이 폭군으로 유명한 주왕(紂王)이다.
초기 군사를 잘 이끌어 많은 전쟁에서 승리한 주왕에 전리품으로 바쳐진 달기는 요염을 앞세워 완전히 왕을 요리했다. 달기의 환심을 사기 위해 주왕은 가혹하게 세금을 거둬 주지육림(酒池肉林)에서 질탕하게 향락을 즐겼고, 간하는 충신들에겐 숯불로 달군 구리기둥에 기름을 발라 맨발로 건너가게 한 포락지형(炮烙之刑)을 내렸다.
백성의 원망이 하늘을 찌르자 주(周)의 무왕(武王)이 제후들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주왕 토벌에 나섰다. 은나라의 목야(牧野)라는 곳에서 도탄에 빠뜨린 주왕의 죄상을 열거하며 분투할 것을 당부하는 말을 남긴 것이 목서(牧誓)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암탉은 새벽에 울지 않으니, 암탉이 새벽에 울면 집안이 망하는 법이다(古人有言曰; 牝鷄無晨, 牝鷄之晨, 惟家之索).' 지금 주왕은 계집의 말만 듣고 백성을 학대하며 나라를 어지럽히고 있다."
무왕은 사기가 떨어진 70만 군사를 패주시키고 주왕도 자살하자 주나라를 건국하게 된다. 고대 중국의 기록 서경(書經) 목서편에 실려 있다.
오늘날 암탉 운운의 속담은 사어가 될 정도로 각계에서 여성의 활약이 눈부시다. 우선 주민등록 여자 인구가 사상 처음으로 남자를 추월한 여초(女超) 사회에 진입했고 여성 공무원 수는 내년에 절반을 넘는다고 한다.
세계를 주름잡고 있는 프로골퍼는 세계랭킹 10위 안에 4명, 20위 안에 10명이나 되어 남자 선수를 까마득히 압도한다. 여군도 고속정 정장에서 전투기 조종사까지 금녀의 벽을 허물고 있다. 다만 국회의원은 비율이 전 세계 190개국 가운데 111위라고 하니 분발할 곳이 아직 남아있다.
빈계지신(牝鷄之晨)
빈계(牝鷄)는 ‘암탉’의 뜻이고, 신(晨)은 ‘새벽’의 뜻이다. 그러므로 암탉이 새벽을 알린다는 뜻으로, 여자가 남편을 업신여겨 집안일을 자기 마음대로 처리함을 이르는 말이다. 새벽을 알리는 것은 수탉이 할 일인데 암탉이 수탉 대신 때를 알리는 것은 음양의 이치가 바뀌어 질서가 없어졌다는 뜻이며 예로부터 집이나 나라가 망할 징조로 보았다.
서경(書經)의 목서편(牧誓篇)에 나오는 말이다. 주(周)나라의 무왕(武王)이 은(殷)나라의 폭군 주왕(紂王)을 정벌하기 위해 한 말이다. 주(周)나라의 서백(西伯)이 죽자 그의 아들 발(發; 무왕)이 대를 이었다. 이때 은(殷)나라의 주왕(紂王)은 달기(妲己)의 미모에 정신이 나가 주색(酒色)으로 세월을 보내거나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호화로운 궁궐을 지어 백성들의 원망이 하늘을 찔렀다.
무왕(武王)은 주왕(紂王)의 폭정이 날이 갈수록 더해지자 제후들의 강력한 요청과 은(殷)나라의 백성들을 구제한다는 이유로 주왕(紂王)을 토벌할 결심을 세웠다. 그래서 주(周)나라의 무왕(武王; 發)이 은(殷)나라의 폭군 주왕(紂王)을 정벌하기 위해 제후군을 이끌고 목(牧)이라는 야외에서 싸우게 되었다.
전투를 하기 전에 군사들에게 맹서(盟誓)하면서 분투할 것을 당부하였다. 그 때의 말을 기록한 것이 이 목서(牧誓)라는 것이다. "왕이 말하기를, '옛 사람의 말에 닭이 아침에 울 때 수탉이 먼저 울고 암탉은 그 뒤를 이어 울어야 당연하다.' 암탉이 먼저 우는 것은 도에 어긋난다."
일반가정에서도 그렇다. 남편이 우선 자기의견을 정하고 부인은 이를 도와야 한다. 그러나 이제 상왕(上王; 은왕) 수(受; 주왕)는 부인(夫人; 달기)의 말만 중시하며 현자의 의견을 멀리했다. 또 주왕(紂王)은 매일 유락(遊樂)에 빠져 왕으로서 중요한 제사를 소홀히 하고 천지신들이 나라를 보호하고 있으나 그 은혜에 보답하려는 정성이 없어 제사에도 등한시 하였다.
또 왕은 자기 친척도 보살피지 아니했다. 제(弟)는 부(父)의 제(弟)이나 그 가족을 멀리하고 대우하지 않았다. 오히려 중죄를 범하고 그 땅에 있을 수 없어 사방에서 도망해 온 자를 신용해 중용하였는데, 대부(大夫) 혹은 경사(敬事)의 높은 지위를 주었다. 그러나 원래가 죄를 범하고 온 자들이, 그러한 지위를 얻으면 그 지위를 이용하여 백성을 괴롭히고 개인의 즐거움만 구했다.
또 갖가지 간사한 짓을 거리낌 없이 자행했다. 이러한 행위는 왕의 잘못으로 왕이 그러한 자들을 채용했기 때문이다. "악행이 이 정도이면 단연코 용서하지 못하겠으니, 나 발(發)은 하늘을 대신하여 그들에게 형벌을 주려고 군사를 일으켰노라." 신하인 무왕(武王)이 천자인 주왕(紂王)을 정벌하기 위한 명백한 대의명분을 말한 것이다.
암탉은 물론 달기(妲己)를 가리킨다. 옛 부터 새벽에 우는 것은 수탉인데, 암탉이 새벽에 울면 불길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이는 집안에서 여자가 소리를 지르며 기승을 부리는 것을 부정적으로 비유한 말이다. 우리 속담에서도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도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여성의 활발한 사회활동을 비아냥거릴 때도 이 속담은 동원된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남자 못지않게 적극적이고 왕성하고 생산적인 사회활동을 한다. 이에 따라 그들의 사회적인 위상이 높아 가고, 인권도 신장되는데, 사회적으로 이런 추세는 앞으로 더욱 가속될 것이다.
비슷한 말이 예기(禮記)의 곡례편(曲禮篇)에 나온다. "바깥에서 일어난 이야기는 집안으로 들이지 않으며, 집안 이야기는 바깥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 한다(外言不入於梱, 內言不出於梱)." 이는, 남자는 바깥 일에 대해 여자, 특히 아내에게 이러쿵 저러쿵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빈계지신 유가지삭(牝鷄之晨 惟家之索)이라. 즉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이다 부언시용(婦言是用)은 ‘여자의 말을 마냥 옳게 쓴다’는 뜻이다. 달리 말해 줏대없이 여자의 말을 잘 듣는 남자를 비아냥거릴 때 쓰는 말이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계지신 유가지삭(鷄之晨, 惟家之索)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새벽을 알리는 울음은 수탉의 몫이다. ‘암탉이 울면 알을 낳는다’는 항변이 즉각 따르긴 하나, 경우가 다르다.
은(殷)나라의 주왕(紂王)은 요부 달기(妲己)에게 푹 빠져 지냈다. 달기의 말이라면 무조건 다 들어 줬다. 달기라는 色(색)에는 酒(주)가 따르게 마련이다. 허구한 날 주색(酒色)을 즐기느라 바쁘다 보니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리 만무했다. 주연을 베풀면서 어진 신하들을 멀리하고 일족들 마저 돌보지 않았다. 예정된 절차처럼 전국에서 반란이 잇따랐다.
이같은 혼란을 틈 탄 주(周)나라 무왕(武王)은 은(殷)의 주왕(紂王)을 쳤다. 병사 3000명을 이끌고 은(殷)으로 진군했다. 그리고 외쳤다. “암탉은 새벽에 울지 않는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하는 법이다.” 주왕(紂王)을 치는 대의명분으로 계지신 유가지삭(鷄之晨 惟家之索)을 거론한 것이다. 암탉이 곧 달기임은 불문가지다. 鷄(계)는 무신(無晨), 새벽에 울지 않아야 마땅하다는 주장이다.
계지신(鷄之晨)을 경계하는 표현은 한둘이 아니다. 外言不入於梱, 內言不出於梱은 같은 말이다. 바깥 얘기를 문지방 안으로 들이지 말아야 하고, 집안 얘기를 밖으로 흘려서도 안 된다는 가르침이다. 암탉이 못 미덥기는 마찬가지인 셈이다. 심지어 여자는 우정의 적이요, 피할 수 없는 형벌이며, 필요악이라고 극언한 이는 어느 종교의 성인이다.
공자(孔子) 역시 암탉을 무시했다. 남존여비(男尊女卑), '남자는 높고, 여자는 낮다'는 뜻이다. 공자가 태산에서 노닐다 영계기(榮啓期)를 봤다. 거지나 다름없는 행색으로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부르는 그에게 물었다. “선생이 즐거워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영계기가 답했다. “나는 즐거움이 매우 많습니다. 하늘이 만물을 만들 때 오로지 사람만 귀히 했는데 나는 사람이 될 수 있었으니 그것이 첫 번째 즐거움입니다. 또한 남존여비인데 나는 이미 남자의 몸을 얻었으니 그것이 두 번째 즐거움입니다.” 공자는 그를 ‘스스로 깨친 사람(自寬者)’이라고 추어 올렸다. 전족(纏足)으로 여성을 애완한 대륙답다.
암탉의 서러움은 속담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여자와 소인은 가까이 하지 마라.' '여자가 말이 많으면 과부가 된다.' '여자가 너무 알면 팔자가 세다.' '여자와 북어는 사흘 걸러 때려야 한다.'
암탉의 슬픔은 중국과 우리나라에 국한하지 않는다. 일본의 아내들은 남편을 주인이라 불렀다. 서구 신사도(紳士道)의 이면에는 물질적 존재, 소유물, 재산으로서의 여성이 자리잡고 있다. 여자는 남자의 재물이므로 보호해야 한다는 발상의 산물이 바로 젠틀멘 코드 일수 있다.
역사는 영어로 History다. 그의(His) 이야기(Story), 즉 남자들의 이야기가 History의 어원이라는 설이 그럴싸하게 퍼져 있을 정도로 동서고금 남존여비의 뿌리가 깊다. 남사고(南師古; 조선 명종 때의 예언자. 호 格菴)의 격암유록(格菴遺錄)에 들어 있다는 윤리를 끊는 사람은 죽는다(絶倫者怨無心)는 구절을 호주제폐지(戶主制廢止)와 연결해 말세라며 혀를 끌끌 찬다.
우리나라 최초의 암탉다운 암탉은 7세기 신라의 선덕여왕(善德女王)이었다. 당(唐)나라의 2대 황제 태종(太宗)은 그때까지 중국에서도 등장하지 못한 여왕의 출현을 조롱하며 암탉을 들먹였다. 이후 구한말(舊韓末)에 이르러 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가 고종(高宗) 앞에서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큰소리를 쳤다. 여기서 암탉은 물론 명성황후(明成皇后)다.
중국 장개석(蔣介石)의 부인 송미령(宋美齡), 모택동(毛澤東)의 부인 강청(江靑)도 싫든 좋든 암탉 소리를 듣고 살았다. 주은래(周恩來)의 부인인 등영초(鄧穎超)는 새벽에 우는 암탉답지 않은 삶 덕에 생전은 물론 사후에 추앙받고 있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부인 가운데 필리핀의 이멜다 마르코스와 유사한 경우도 있고, 암탉과 무관한 인물도 있다.
2006년 여름 시점에 계지신 유가지삭(鷄之晨 惟家之索)을 강변하면 시대착오적인 공공의 적으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계지신(鷄之晨)을 탓하던 중국의 수탉들도 간 데 없다. 어느덧 암탉에게 뺨을 맞아도 그러려니, 익숙해졌다. 또한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국무총리가 여성이었고 차기 대통령 후보 리스트의 최정상에도 여성이 올랐었다.
걸핏하면 수탉들만의 대결장에 끼어들려 애쓰고 있는 골퍼 미셸 위도 암탉이다. 작금의 암탉 상위시대는 역경이 일찌감치 내다봤다. 택산함(澤山咸) 괘(卦)는 여자가 위에 있고 남자가 아래에 있다는 의미다. 지천태(地天泰)도 마찬가지다. 여자가 위에서 아래로 힘을 쓰고 남자가 아래서 위로 힘을 써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주역(周易)이 암탉더러 독주하라고 권하는 것은 아니다. 암탉과 수탉이 생물학적 성별 본분에 충실하게 화합해야 만사형통이라는 조화옹(造化翁)의 진리를 환기하고 있을 따름이다. 홀로 힘쓰는 암탉은 무의미하다. 지혜로운 수탉, 무모할 만큼 저돌적인 수탉, 계산에 밝은 수탉이 곁에 있으면 강한 암탉은 더 세질 수 있다. 암탉은 자신의 스타일을 다양하게 바꿀 수 있다.
벼슬(文), 발톱(武), 적(敵)과 맞서는 용기(勇), 먹이가 있으면 ‘꼭꼭꼭’ 대며 무리를 부르는 어진 성질(仁), 때를 맞춰 울음으로써 새벽을 알리는 충직(信) 등이 닭의 다섯 가지 덕(德)이다. 이 중 암탉의 몫은 仁(인) 정도다. 수탉의 문무용신(文武勇信)보다 암탉의 仁(인)을 중시하는 세상이다.
새벽이 오면 수탉이 울어서 시각을 알려주는데 암탉이 울게 되면 수탉 위주의 사회질서가 깨지는 것을 경계하는 말로 여성이 권력자로 나서는 것을 제어하자는 뜻도 있다.
신라(新羅) 선덕여왕(善德女王)때의 이야기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협공으로 어려움에 처하자 당(唐)나라 태종(太宗)에게 사신을 보내어 도움을 청하게 되었다.
당태종(唐太宗)은 “그대 나라는 여자를 임금으로 삼아 주위 나라의 업신여김을 받으니, 이는 임금을 잃고 적을 받아들이는 격”이라고 못마땅해 하는 것을 사관이 받아 적기를 “신라는 여자를 세워 왕위에 있게 하였으나 진실로 난세의 일이며 이러고서 나라가 망하지 아니한 것은 다행하다 할 것이다. 서경(書經)에 빈계지신(牝鷄之晨)이라 하였으니 어찌 경계할 일이 아니랴(삼국사기)”고 하면서 암탉으로 비유하는 여자가 왕이 된 것을 탓하고 있었다.
사실 중국은 측천무후(則天武后), 여후(呂后), 서태후(西太后)등 아주 못된 암탉들이 많이 출현해서 여성의 진출을 경계했겠지만 우리나라는 선덕여왕(善德女王) 이후로 멋있게 울어 제친 많은 암탉들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알게 모르게 빈계지신(牝鷄之晨)의 굴레를 우리 여성들에게 씌워온 천년의 잘못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1920년 신여성을 대표해서 여성 차별의 굴레를 벗어나려던 여성운동의 선구자 나혜석은 그녀의 시에 자신의 처지를 쓰고 있다. “나는 사람이라네. 남편의 아내 되기 전에 자녀의 어미 전에 첫째로 사람 이라네.” 그녀는 이렇게 탄식하면서 사람의 가치가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노력 했지만 실연과 이혼에 이어 병마와 싸우다가 서울시립병원에서 외롭게 회한의 생을 마감 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다. 현대사회에서는 여자도 남자 못지 않게 적극적이고 왕성하게 생산적인 사회활동을 한다. 따라서 그들의 사회적 위상이 높아지고 인권이 신장되는데 빈계지신(牝鷄之晨)의 철학을 고수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암탉이 힘껏 울면 울수록 수탉의 어깨가 가벼워 질 것이고 암탉도 나름 대로의 더욱 신나는 생활을 향유할 수 있는 것 이다.
당나라 7명의 황제가 황후를 두지 않은 이유
정실 처(妻)를 맞는 일은 취처(娶妻)라고 하였고, 첩을 들이는 일은 납첩(納妾)이라고 하였다. 고로 취처납첩(娶妻納妾)은 황제의 궁정생활에서 정상적인 현상이다. 황후는 황제의 정처(正妻)로서 후궁의 여러 비빈들의 주인이고, 황제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그 영향력으로 보면 절반의 황제라고 말할 수 있다. 황제에게 몇 명의 부인. 비빈, 세부(世婦), 어녀(御女)가 있든, 황제와 함께 침대에서 잘 수 있고, 자녀를 낳을 수 있다. 그러나 그녀들의 신분은 모두 천한 첩과 같은 류이다.
명문세가출신의 신분이 고귀한 황후는 오로지 1명이다. 황후는 황제와 짝이 되는 여인이고, 통상적인 상황하에서라면 황제가 등극할 때 자신의 황후를 모두 책봉한다. 그러나, 당나라 말기의 7명의 황제(당순종, 당헌종, 당목종, 당경종, 당문종, 당무종, 당선종)는 그들의 생모, 조모를 황태후, 태황태후로 추존하였을 뿐, 자신의 황후는 책봉하지 않았다.
그 원인을 따져보면 여러가지 설이 있다. 다만 사료의 기재에 따르면 다음의 몇 가지 이유에서이다. 황후를 세우지 않은 것은 빈계사신(牝鷄司晨; 암탉이 울다), 황후간정(皇后干政)의 난처한 경우를 벗어나, 황제가 조정을 마음대로 다스리게 하기 위함이다. 속담에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牝鷄司晨, 惟家之累)'라는 말이 있다. 즉, 집안의 암탉이 울어서 새벽을 때운다면 이 가정은 망할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여성이 권력을 잡아서 음양이 뒤바뀌면 나라나 국가가 망한다는 것을 뜻한다. 당연히 이 비유는 적절하지 않다. 그러나 전혀 이치에 닿지 않는 것도 아니다. 황후가 후궁의 대권을 장악하여 황상칭제를 동요시키는 작용은 무시할 수 없다. 역사적으로 한고조 유방의 여후, 당고조 이치의 무후는 모두 황후간정에서 성공적으로 정권을 찬탈할 전형이다. 황후가 조정에 간여하는 것은 황제가 가장 골치아프게 생각하는 일이다. 궁녀와 비빈이 많더라도, 명호를 주지 않고 황후를 두지 않으면, 그녀들은 마음대로 흥풍작랑(興風作浪)하기 어렵다.
7명의 황제가 철저하게 황후가 정치에 간여하는 것을 벗어나기 위하여 황후를 세우지 않았다. 그중 당헌종 이순(李純)의 방식이 가장 두드러진다. 그는 역사적 교훈츨 받아들였다. 그가 보기에, 이전에 당고종 이치의 무후, 당중종 이철(李哲)의 위후, 당숙종 이형(李亨)의 장황후등은 모두 황제를 겨제했고, 황권을 노렸다. 당동벌이(黨同伐異; 뜻이 같은 자들은 같은 당으로 모으고, 뜻이 다른 자는 제거하다)하거나, 무리를 끌어모아서 파벌을 만들었다.
성지를 거젓으로 전하기도 하고, 궁중을 어지럽혔다. 그리하여 남편인 황제가 어떻게 할 방법을 찾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저 꾹 참고서 황후가 하는대로 놔두는 수밖에 없었고, 조정에 간여하는 화근을 불러왔다. 그러므로, 그는 "후비가 높은 자리를 차지하면 견제를 받을 수 있다. 그래서 황후를 두지 않은 것이다."
그가 황위를 승계한 후, 셋째 아들 이항(李恒)을 태자로 세운다. 1년이 지나자마자 태자를 세운 조정관리들은 이항의 생모인 곽씨(郭氏)를 황후로 세우기를 청한다. 그는 그에 따르지 않고 여러가지 핑계를 대어 거절했다. 그는 후비들을 억누르기 위하여 황후를 세우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다. 곽씨를 귀비에 봉했을 뿐이다.
곽귀비도 그 뜻을 이해하였고, 부군의 의도를 잘 알았다. 예법을 따르고 궁중에서 함부로 설치지 않았으며, 분수에 넘치는 생각이나 기도를 하지 않았고, 자신의 본분을 지키고 법도를 지켜서 조정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평안하게 살았다. 당문종의 대에 이르러 곽태후는 삼궁태후(당목종, 당경종, 당문종)인 원로가 된다.
황후를 세우지 않은 것은 황후의 감독과 간섭을 피해서, 황상이 최대한도로 음욕을 즐기기 위해서이다. 당헌종이 황후를 세우지 않은 원인은 "황후가 질투를 하여, 자신이 다른 여인을 총애하는 것을 간섭하고,자신이 산천궁녀과 즐겁게 어울려놀지 못하게 할 것을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신당서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원화원년, 귀비(곽씨를 가리킴)를 책봉하였다. 팔년, 여러 신하들이 세번이나 황후로 세울 것을 청했다. 황제는 자오년은 좋지 않은 해라고 핑계를 대기고 하도, 어떤 때는 후궁에 미인이 많은데 황후의 존귀한 자리를 얻게 되면 마음대로 후궁들고 어울리지 못하게 견제할 것이어서 그 말을 따르지 않았다."
후당서에도 유사한 기재가 있다: "원화원년 팔월, (곽씨)가 귀비에 책봉된다. 팔연 십이월, 백관이 글을 올려 귀비를 황후로 책봉할 것을 청하고, 세번을 올렸다. 황상은 연말인데, 다음 해가 자오년이어서 좋지 않은 해라는 이유로 하지 않았다. 황제는 후궁에 좋아하는 여인이 많았고, 황후는 집안이 명문거족이어서 황후의 자리를 얻게 되면 다른 후궁들을 총애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를 종합하면 당헌종은 '연말'이고 '자오년은 좋지 않은 해'라는 것을 이유로 삼았다. 다만 실제 이유는 후궁에 좋아하는 여인이 많은데, 황후를 세우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할 것을 우려하였다는 것이다. 황후를 두지 않으면, 자신의 곁에 자신을 감시하고 다른 여인을 질투하고 미워하는 눈이 없게 될 것이다. 그래서 황후와 그 외척의 간섭을 피할 수 있다. 아무 비빈이나 마음대로 총애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고, 감독간섭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당헌종은 비록 집정에서도 날카로운 개혁을 추진하여, 번진을 삭감하고 중앙집권을 강화하여, 당나라에 '원화중흥(元和中興)'을 불러왔지만, 여성편력 방면에서는 그후 7명의 황제의 나쁜 모범이 되었다. 그에게는 자녀가 38명이 있었다(아들 20명, 딸 18명). 21명의 후비가 있고, 비에 봉해진 여인은 3명이다. 비의 아래 궁녀는 부지기수이다.
음욕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그는 평생 황후를 두지 않았다. 말년에 그는 조서를 내려 약방문을 구하고 신선이 되고자 연단을 했으며, 장생불로를 꿈꾸었다. 오랫동안 금단약을 복용하다보니 성격이 포악하고 조급하며, 화를 많이 내게 되었으며, 판단력을 잃었다. 결국은 환관에게 살해당한다.
아들은 아버지를 따르는 법이다. 당헌종의 아들인 당목종도 아버지를 그대로 본받아서, 황후를 두지 않는다. 그는 4년간 재위하는데, 유한한 정력을 무한한 먹고 마시고 노는데 쏟았다. 그리하여 신체의 각 부분이 쇠약해져서 결국은 용상에서 죽는다. 향년 겨우 30세였다.
'당사연의'에서는 당목족의 죽음을 이렇게 묘사한다: "당목종의 나이가 장년인데, 어찌 계속 병을 안고 있는가. 그는 부친을 본받아서, 금석(연단)에 빠져서 조열(燥熱)을 풀지 못하고, 진음(眞陰)을 해쳤다. 처사인 장고는 당목종에게 간하여, 당헌종의 뒤를 따르도록 한다. 당복종은 그의 말이 옳다고 여겨서 계속 약을 먹는다. 그리하여 진음이 날로 고갈되고, 원기가 상하여 결국은 일어날 수 없는 병세를 나타낸다."
당목종 이후 그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당경종 이담, 당문종 이앙, 당무종 이염이다. 이들도 생전에 황후를 두지 않는다. 이 세 명의 황제는 제대로 된 일은 하지 않고, 조정을 돌보지 않으며, 오로지 여색만 탐했다. 그리하여 단명했다.
당경종의 재위 기간동안 그저 놀러 다니고 연회를 베풀며, 격구를 하고, 음악을 연주했다. 그는 황음무도한 황제였다. 18살에 환관 유극명에게 피살된다. 당문종은 가노에게 억압당해서 32살때 우울하게 죽는다. 당무종은 음란하고 무절제하며, 오랫동안 단약을 복용하다가 33살에 궁에서 병사한다. 당헌종의 열세째 아들인 당선종 이침(李忱)도 최후에 장기간 성욕을 자극하는 장생약을 복용하다가 죽는다. 이를 보면, 당헌종이 황후를 두지 않은 것이 후세에 미친 영향은 아주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황후를 두지 않은 것은 적서(嫡庶)의 다툼을 배제할 수 있어, 황상이 황태자를 책봉하는데 선택의 여지가 많다. 황제의 아들도 적서의 구분이 있다. 황후가 낳은 아들이 적자가 되는 외에 나머지는 모두 동근(同根, 같은 부친)에 속하고 모조리 서자로 칭한다.
황후를 두는 때에는 적장자이면, 나이가 많건 적건, 실력이 뛰어나건 아니건, 인재가 될 수 있든 없든 황상이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법도에 따라 황태자로 봉하게 된다. 역사상 부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서도 세운 황태자는 그가 황위를 계승한 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여 폐위된 경우가 수두룩하다. 한나라때의 유하(劉賀)는 겨우 27일간 황제로 있다가 폐출된 바 있다.
황후를 두지 않으면 황제는 적서지쟁의 소용돌이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더 이상 거기에 얽매어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자신의 뜻에 따라 여러 자식들 중에서 마음에 드는 자를 태자로 세우면 된다. 예를 들어, 당순종 이송(李誦)이 등극하기 전에 20년간 태자로 있었는데, 태자궁에만 비빈이 19명이 있었다. 즉위1년간 역시 황후를 세우지 않는다. 곁에는 항상 총애하는 비 우씨(牛氏,. 소용)와 왕씨(양제)가 있었다.
왕양제는 황후도 아니고, 우소용보다 신분도 낮았지만, 왕양제가 장남 이순의 모친이었다. 비록 우소용이 극력 반대했지만, 당헌종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이순을 황태자로 세운다. 당순제가 죽은 후, 이순은 직접 생모인 왕양제를 황태후로 추존한다. 만일 당순종이 우씨를 황후로 앉혔더라면, 이순은 태자가 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 牝(암컷 빈)은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소 우(牛=牜; 소)部와 음(音)을 나타내며 匕(비, 빈)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牝(빈)은 ①암컷 ②골짜기 ③계곡(溪谷)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소의 암컷을 빈우(牝牛), 다 자란 암말을 빈마(牝馬), 암 기와를 이르는 말을 빈와(牝瓦), 가축의 암컷을 빈축(牝畜), 암탉을 이르는 말을 빈계(牝鷄), 문짝에 빗장을 지르도록 낸 구멍을 빈공(牝孔), 양의 암컷을 빈양(牝羊), 새의 암컷을 빈조(牝鳥), 암 사슴을 빈록(牝鹿), 암 승냥이를 빈랑(牝狼), 길짐승의 암컷과 수컷을 빈모(牝牡), 홍합을 달리 이르는 말을 해빈(海牝), 암탉이 새벽에 우는 일을 맡았다는 뜻으로 아내가 남편의 할 일을 가로 막아 자기 마음대로 처리함을 비꼬아 이르는 말을 빈계사신(牝鷄司晨) 등에 쓰인다.
▶️ 鷄(닭 계)는 ❶형성문자로 鶏(계)는 통자(通字), 鸡(계)는 간자(簡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새조(鳥; 새)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奚(해, 계)로 이루어졌다. 새벽을 알리는 새(鳥)의 뜻이 합하였으며 닭을 뜻한다. ❷상형문자로 鷄자는 ‘닭’을 뜻하는 글자이다. 鷄자는 奚(어찌 해)자와 鳥(새 조)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奚자는 상투를 손으로 잡은 모습을 그린 것이지만 여기에서는 닭 볏으로 응용되었다. 사실 갑골문에 나온 鷄자는 좀 더 직관적이었다. 닭 볏과 다리, 꽁지까지 그대로 묘사되어 있었기 때문에 한눈에도 이것이 닭을 그린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소전으로 넘어오면서 닭의 볏은 奚자가 대신하게 되었고 隹(새 추)자가 더해지면서 볏이 있는 새를 뜻하는 雞(닭 계)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해서에서는 隹자가 鳥자가 바뀌면서 지금은 鷄자가 ‘닭’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鷄(계)는 ①닭(꿩과의 새) ②화계(花鷄: 되새. 되샛과의 겨울 철새) ③폐백(幣帛)의 하나 ④성(姓)의 하나 ⑤현(縣)의 이름 ⑥산(山)의 이름 ⑦물의 이름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닭의 알 달걀을 계란(鷄卵), 닭의 울음을 계명(鷄鳴), 닭고기를 계육(鷄肉), 닭을 가두어 두는 장을 계사(鷄舍), 닭과 개를 계구(鷄狗), 닭고기를 넣고 끓인 국을 계탕(鷄湯), 닭의 갈빗대라는 뜻의 계륵(鷄肋), 닭의 주둥이라는 뜻의 계구(鷄口), 사내끼리 성교하듯이 하는 짓을 계간(鷄姦), 밤눈이 어두워 밤에 사물을 잘 보지 못하는 사람을 계맹(鷄盲), 닭을 잡아서 그 뼈나 눈을 보고 치는 점을 계복(鷄卜), 닭이 새벽을 알림을 계신(鷄晨), 닭고기를 넣고 끓인 국을 계탕(鷄湯), 닭의 갈빗대라는 뜻으로 먹기에는 너무 양이 적고 버리기에는 아까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형편을 계륵(鷄肋), 닭의 주둥이라는 뜻으로 작은 단체의 우두머리를 이르는 말을 계구(鷄口), 닭의 무리라는 뜻으로 평범한 사람의 무리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을 계군(鷄群), 독서하는 방을 계창(鷄窓), 닭을 기르는 일을 양계(養鷄), 집에서 기르는 닭을 가계(家鷄), 닭을 잡아서 죽임을 도계(屠鷄), 싸움 닭을 투계(鬪鷄), 썩지 아니하도록 하기 위하여 내장을 빼고 털을 뽑고 얼린 닭을 동계(凍鷄), 묵은 닭을 노계(老鷄), 때 아니게 낮에 우는 닭을 오계(午鷄), 어미 닭을 모계(母鷄), 털이 흰 닭을 백계(白鷄), 닭의 무리 속에 한 마리의 학이라는 뜻으로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서 뛰어난 한 사람을 계군일학(鷄群一鶴), 닭의 무리 가운데 한 마리의 학이란 뜻으로 많은 사람 가운데 뛰어난 인물을 계군고학(鷄群孤鶴), 계란에도 뼈가 있다는 속담으로 복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기회를 만나도 덕을 못 본다는 말을 계란유골(鷄卵有骨), 동쪽 닭과 서쪽 개가 우는 소리가 들린다는 뜻으로 닭 우는 소리와 개가 짖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린다 하여 인가가 잇대어 있음을 계견상문(鷄犬相聞), 닭이 울고 개가 짖는다는 뜻으로 인가나 촌락이 잇대어 있다는 계명구폐(鷄鳴狗吠), 닭의 울음소리를 잘 내는 사람과 개의 흉내를 잘 내는 좀도둑이라는 뜻으로 천한 재주를 가진 사람도 때로는 요긴하게 쓸모가 있음을 계명구도(鷄鳴狗盜), 닭 울음소리를 묘하게 잘 흉내 내는 식객을 계명지객(鷄鳴之客), 닭의 부리와 소의 꼬리라는 뜻으로 큰 단체의 말석보다는 작은 단체의 우두머리가 되라는 말을 계구우후(鷄口牛後), 닭 울음의 도움이란 뜻으로 어진 아내의 내조를 계명지조(鷄鳴之助), 살갗은 닭의 가죽처럼 야위고 머리칼은 학의 털처럼 희다는 뜻으로 늙은 사람을 계피학발(鷄皮鶴髮), 닭과 돼지가 한데 어울린다는 뜻으로 같은 고향 사람끼리 서로 친목을 도모함을 계돈동사(鷄豚同社), 닭과 집오리가 먹이를 서로 먼저 먹으려고 다툰다는 뜻으로 여염의 사람들이 서로 다툼을 계목쟁식(鷄鶩爭食), 닭 대가리는 될지언정 쇠꼬리는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로 남의 위에 서야지 남의 꽁무니에 따라 다녀서는 안됨을 계시우종(鷄尸牛從), 몸이 쇠약해서 침상에 기대어 몸을 지탱함을 계골지상(鷄骨之床), 다른 사람의 권세에 빌붙어 승진하는 것을 계견승천(鷄犬昇天), 맨드라미 열매의 과육이라는 뜻으로 여성의 젖가슴을 계두지육(鷄頭之肉) 등에 쓰인다.
▶️ 司(맡을 사)는 ❶회의문자로 后(후)의 자형(字形)을 거꾸로 한 것, 口(구; 기도의 말), 신에게 빌다, 모시다, 사당, 또 비는 사람, 벼슬아치, 졸개 등을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司자는 ‘(일을)맡다’나 ‘벼슬’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司자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后(임금 후)자를 거꾸로 그린 것으로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을 그린 것이라는 해석이다. 다른 하나는 팔을 하늘 높이 들어 명령을 내리는 사람을 그린 것으로 보는 해석이다. 그러나 갑골문의 형태로 보면 높은 직책을 가진 사람이 명령을 내리는 모습에서 ‘주관하다’나 ‘관리하다’라는 뜻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司(사)는 ①(직무로서 어떤 일을)맡다 ②엿보다, 살피다 ③지키다, 수호(守護)하다 ④관아(官衙: 공무를 집행하는 곳) ⑤마을 ⑥벼슬(관아에 나가서 나랏일을 맡아 다스리는 자리. 또는 그런 일) ⑦벼슬아치, 관리(官吏), 공무원(公務員)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그릇된 일을 다스려 바로잡음을 사정(司正), 회의나 예식 등의 진행을 맡아봄을 사회(司會), 주교와 신부의 총칭을 사제(司祭), 서적을 맡아보는 직분을 사서(司書), 군대나 함선 따위를 지휘 감독함을 사령(司令), 사제가 신자를 통솔하고 지도하여 구원의 길로 이끄는 일을 사목(司牧), 회사의 중국식 일컬음을 공사(公司), 어떠한 단체의 사무를 맡아보는 직무를 유사(有司), 절의 모든 일을 감독하는 직책을 고사(庫司), 절에서 주로 밥을 짓는 승려를 공사(供司), 감옥의 일을 맡아보는 관원을 옥사(獄司), 암탉이 새벽에 우는 일을 맡았다는 뜻으로 아내가 남편의 할 일을 가로 막아 자기 마음대로 처리함을 비꼬아 이르는 말을 빈계사신(牝鷄司晨), 중요하지 않고 일이 많지 않아 한가로운 벼슬 자리를 이르는 말을 한사만직(閑司漫職) 등에 쓰인다.
▶️ 晨(새벽 신)은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날 일(日; 해)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辰(신, 진)으로 이루어졌다. 별의 이름으로, 이 별은 농사를 알리는 별이라고 한다. ❷회의문자로 晨자는 ‘새벽’이나 ‘때’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晨자는 日(해 일)자와 辰(때 신)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辰자는 풀을 베는 도구를 그린 것이다. 갑골문에 나온 晨자를 보면 艸(풀 초)자에 辰자가 결합해 있거나 또는 양손에 辰자를 쥐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이른 새벽에 낫으로 풀이나 벼를 베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소전에서는 양손에 낫을 들고 있던 모습이 日자로 바뀌어 이것이 시간과 관련된 글자임을 뜻하게 되었다. 그래서 晨(신)은 ①새벽 ②때, 시일(時日) ③진시(辰時) ④별의 이름 ⑤새벽을 알리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새벽 흔(昕), 새벽 효(曉), 새벽 서(曙)이다. 용례로는 샛별로 새벽에 동쪽 하늘에서 반짝이는 금성을 이르는 말을 신성(晨星), 아침의 햇빛을 신광(晨光), 새벽녘으로 날이 샐 무렵을 신명(晨明), 이른 아침에 부모의 침소에 가서 밤새의 안후를 살핌을 신성(晨省), 아침 해가 솟는 쪽의 산 곧 동쪽의 산을 신악(晨岳), 새벽을 알리는 닭을 신계(晨鷄), 새벽에 일어남을 신기(晨起), 새벽에 성문 여는 일을 맡은 문지기를 신문(晨門), 아침과 저녁을 신석(晨夕), 새벽과 밤을 신야(晨夜), 이른 아침을 신조(晨朝), 새벽에 치는 종을 신종(晨鐘), 아침으로 날이 새면서 오전 반나절쯤까지의 동안을 신단(晨旦), 이른 아침에 사당에 뵙는 일을 신알(晨謁), 식전에 하는 화장을 신장(晨粧), 새벽과 황혼을 신혼(晨昏), 날마다 새벽녘이면 설사가 나는 병을 신설(晨泄), 맑은 첫새벽을 청신(淸晨), 먼동이 트려 할 무렵을 효신(曉晨), 닭이 새벽을 알림을 계신(鷄晨), 서리가 내린 추운 아침을 상신(霜晨), 꽃이 핀 아침을 화신(花晨), 먼동이 트는 이른 새벽을 등신(登晨), 날이 밝아올 때를 영신(迎晨), 이른 아침을 조신(早晨), 이른 아침에 부모의 침소에 가서 밤 동안의 안후를 살피는 예절을 신성지례(晨省之禮), 아침 일찍이 관청에 들어가고 밤늦게 퇴근함을 신입야출(晨入夜出), 아침 일찍 출사하고 밤늦게 귀가함을 신입야귀(晨入夜歸), 굶주린 새벽 호랑이와 같은 맹렬한 기세를 신호지세(晨虎之勢), 암탉이 새벽에 우는 일을 맡았다는 뜻으로 아내가 남편의 할 일을 가로 막아 자기 마음대로 처리함을 비꼬아 이르는 말을 빈계사신(牝鷄司晨), 저녁에는 잠자리를 보아 드리고 아침에는 문안을 드린다는 뜻으로 자식이 아침 저녁으로 부모의 안부를 물어서 살핌을 이르는 말을 혼정신성(昏定晨省) 등에 쓰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