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914
10월15일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연중 제28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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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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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U55XJ_9k1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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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은둔 가운데 격정을, 겸손 가운데 비범을, 고통 가운데 행복을 살았던 성인(聖人)들!>
제 개인적으로 성인전을 자주 읽는 편입니다. 어떤 성인전은 지나친 찬양과 과장 투성이어서 계속 읽어나가기가 부담스러운 경우도 많습니다. 또 어떤 성인의 행적은 요즘 분위기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어서 웃기기도 합니다.
알퐁소 성인이나 몽포르의 루도비코 성인 같은 경우 저희와는 달리 탄식하며 식당으로 갔습니다. 식탁에 앉아서도 연옥에서 고통 받고 있는 영혼들 생각에 표정이 늘 어둡고 우울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식사를 하니 소화가 제대로 되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시복시성되는 분들의 분위기는 사뭇 다릅니다. 요한 23세 교황님께서는 식사 시간에 그렇게 행복해하셨습니다. 특별한 음식이 나오면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감탄사를 연발하셨습니다.
요즘 성인 반열에 오르시는 분들은 지극히 인간적이면서도 지극히 영적인 분들이십니다. 토마스 머튼은 ‘성화란 더욱 완전한 인간이 되어가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성인들은 깊은 봉쇄의 벽 안에서 답답하고 따분한 인생을 산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은둔 가운데 격정을, 겸손 가운데 비범을, 고통 가운데 행복을 살았습니다.
남루하고 보잘것없는 인간 조건 속에서도 찬란한 기쁨을, 거듭되는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환희로 충만을 삶을 엮어갔습니다. 그들의 내면에는 활화산처럼 활활 타오르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대표적인 인물이 아빌라의 데레사라로도 불리는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1515~1582)입니다.
데레사 수녀님께서 오늘 우리 후배 수도자들과 신앙인들, 그리고 교회에 남긴 가장 큰 업적과 유산을 꼽으라 한다면, 그녀의 ‘개혁과 쇄신을 향한 열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녀가 살았던 중세 시대는 외적으로는 수도생활의 부흥기처럼 보였습니다. 엄청난 규모의 대수도원들 안에는 당대 잘 나가던 선남선녀들이 우글우글했습니다. 당시 수도원들은 신앙뿐이 아니라, 학문이나 문화의 중심센터 역할을 톡톡해 해내고 있었습니다.
자연히 부작용도 뒤따랐습니다. 복음삼덕의 실천이나 깊이 있는 영적 생활, 형제적인 봉사와도 같은 수도생활의 본질적인 측면은 안중에도 없이, 그저 생계나 출세의 방편으로 수도원 문을 두드린 사람도 없지 않았습니다.
이토록 어려운 순간에 봉착한 교회를 위해 하느님께서 보내신 여인이 바로 아빌라의 데레사였습니다. 그녀는 개혁 과정에서의 고통이 크면 클수록 더 열렬한 기도와 관상, 침묵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녀는 메마르고 삭막한 삶 속에도 주님으로 인한 흔들리지 않는 기쁨은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을 온 몸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녀는 계속되는 박해와 탄압 앞에서도 봄꽃처럼 화사하고 빛나는 얼굴 표정을 잃지 않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녀는 자주 이런 지향의 기도를 바쳤습니다.
“주님, 저를 뿌루퉁한 표정의 우울한 성녀가 되지 않게 해 주세요” “항상 기다릴 줄 알게 하시고, 가장 순수한 뜻을 가지고, 가장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데레사 수녀님께서 남겨주신 그 아름다운 덕행들을 오늘 우리들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조금이라도 실천해볼 수 있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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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2ZUas-XPSV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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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 보지 않으면 외톨이가 되고, 눈치 보면 위선자가 된다. 그러면 어쩌란 말인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위선이란 본래는 그렇지 않은데 사람들에게 그런 것처럼 보이려는 행동을 말합니다. 위선은 사람을 두려워함으로써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을 의식하고 살면 위선자가 됩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자신을 변형시키고, 사람들이 보지 않을 때는 ‘휴식’이 되기에 다른 행동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내가 주체가 되어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내가 원하는 대로 살면 좋을까요? 그 사람은 ‘외톨이’가 됩니다. 그 지독한 외로움을 이겨낼 자신이 있다면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됩니다. 어차피 한 번 보고 안 볼 사람이라고 여기고 마음대로 사람을 대해보십시오. 일주일도 안 돼서 혼자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저도 강론하다가 신자들에게 거슬리는 말 한 번 하면 그동안 쌓아놓은 대부분의 우정은 그 한순간에 끝난 것을 압니다.
미국 드라마 ‘더 라스트 맨 온 어스’(2015)는 바이러스로 인류가 멸망한 후 남겨진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2년 동안 홀로 버텼으나 외로움에 자살을 결심합니다. 그러다 한 여자를 만납니다. 문제는 자신이 생각하던 예쁜 여인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둘은 결혼합니다. 그 며칠 후 이상형의 여자를 만납니다. 주인공은 결혼했으면서도 위선적인 행동을 합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좋아할 또 다른 남자가 나타나자 주인공은 실망합니다. 그런데 또 예쁜 여자 둘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멋진 남성도 나타납니다. 남자는 위선을 떨지 않기 위해 이혼을 신청하고 여자들에게 수작을 부립니다. 여자들은 이 남자가 유일한 생존자라 믿었는데 다른 사람들도 있고 결혼까지 했음을 알고는 주인공을 밀쳐냅니다. 그러다 결국, 마을에서 쫓겨납니다. 이 드라마는 그냥 외로움과 위선을 반복하며 살아야 하는 관계의 굴레를 묘사한 것입니다.
사람을 의식하고 눈치 보지 않으면 혼자가 되고 의식하면 위선자가 되니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말일까요? 사람을 의식하되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눈치를 보면 됩니다. 이것이 양심이든 주님의 존재이든 사람을 위한 사랑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어떤 존재에 대한 눈치 때문에 사랑할 때 그 사람이 있는 공동체는 천국의 공동체를 닮아갑니다.
영화 ‘싱크홀’(2021)은 동원이 10년 넘게 걸려 마련한 자기 집이 500m가 넘는 싱크홀로 인해 내려앉으며 벌어지는 사건을 다루었습니다. 동원이 이사 올 때부터 항상 걸려 넘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만수입니다. 만수는 아들 하나 잘 키우기 위해 조금은 이기적인 삶을 살아서 외톨이 아빠의 모습을 보입니다. 이삿짐 차가 와도 차도 안 빼주고 되려 늦게 나와서는 주말에 왜 이사를 하느냐며 짜증을 냅니다. 주위 시선을 하나도 의식하지 않는 외톨이형 인간입니다.
동원은 사람의 눈치를 많이 봅니다. 회사 동료들에게 성공한 직장인처럼 보이고 싶습니다. 하지만 집들이를 할 때 돈 8만 원이 아까워서 만수가 제안하는 대리운전을 거부하고 직원 김대리와 은주를 자신의 집에서 재웁니다. 은주는 신입 인턴사원으로 시키면 뭐든지 하는 김대리를 짝사랑하는 인물입니다. 김대리가 다른 사원을 좋아하는 것을 알지만 사람 눈치보지 않고 필요할 때는 목숨까지 아끼지 않고 도와줍니다. 도와주어야 할 이유가 없지만 도와줍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자기 마음이 아플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은주의 조건 없는 희생 때문인지 만수도 조금씩 이웃을 위해 희생하게 되고 동원도 남들을 도와주기 위해 자기 집 안에 있는 소중한 것들을 가차 없이 집어던집니다. 김대리도 은주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서로의 희생으로 결국엔 탈출하게 되고 전에 없이 끈끈한 공동체가 형성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누구에겐가 ‘속하기를 원하는 존재’로 태어납니다. 남자는 여자에게 속하기를 원하고 여자는 남자에게 속하기를 원합니다. 자녀는 또한 부모에게 속하기를 원하고 우리는 어떤 친구집단이나 공동체에 속하기를 원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공동체성’이라 합니다.
다만 관계를 맺을 때 눈에 보이는 자기 자신이나 타인을 위해 사랑하면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사랑하면 이기적인 나뿐인 놈이 되고 타인을 위해 사랑하면 위선자가 됩니다. 혼자 있을 때는 다른 모습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사람들의 눈치 좀 그만 보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그분 때문에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사람들이 보는 것처럼 행동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시선은 항상 내 위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외로움과 위선의 관계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 보이지 않는 존재의 눈치를 보며 살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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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12,1-7 : 너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여라.”(1절)고 말씀하신다. 그들의 누룩이란 그들의 겉꾸밈, 즉 위선을 말한다. 위선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런 보상도 없으며, 구원에도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오히려 저주를 부른다. 위선으로 잠시 동안 자신을 숨길 수 있으나, 결국은 본 모습이 드러나 망신을 당한다. 호박에 줄을 긋는다고 수박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해야 할 대상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대상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 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 너희에게 알려주겠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4-5절)고 하신다. 그분은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마태 10,28) 분이시다.
그분만이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셨다. 그러므로 육신을 죽일 수 있을 뿐인 자를 두려워하고,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을 그분은 지옥에 던져버릴 것이다. 그분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분의 자녀로서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할까, 혹은 하느님의 말씀을 올바로 실천하지 못할까 나 자신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참으로 그분을 두려워할 때, 즉 당신의 말씀과 뜻 그리고 당신의 일을 올바로 선택할 수 있을 때,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두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지혜를 차지할 수 있게, 당신의 생명에 참여하게 해주실 것이다. 율법 교사나 바리사이들의 위선적인 삶이 아니라, 참으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랑을 실천하며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우리에게 또 다른 위로를 주시려고 주님께서는 단돈 두 닢에 팔리는 참새 다섯 마리조차 하느님께서 돌보아 주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두셨다고 하신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자상하게 보살펴주시는지 알 수 있다. 미물들까지 보살펴주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잊지 않으신다. 그분은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우리를 찾아오신 분이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그분을 알고 또 올바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우리는 여러 가지 구실 때문에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하느님을 외면하고 있지나 않은지? 아니, 외면하고 있는 것조차도 모르고 있지나 않은지? 우리의 신앙생활 안에 바리사이파 사람의 모습이 재현되지나 않은지? 그분을 안다고 하지만 우리의 삶을 통하여 진정으로 그분을 알고 증언하고 있는지? 이러한 여러 가지를 반성하면서 우리의 삶을 이루어가야 할 것이다.
하느님을 선택하고 사랑해 드리는 것이 우리의 성소이며, 하느님의 참된 자녀로서 하느님의 모상을 완성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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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여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에서 한 말을 사람들이 모두 밝은 데에서 들을 것이다.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인 말은 지붕 위에서 선포될 것이다."(루카 12,1ㄷ-3)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여라.”라는 말씀은, “너희는 바리사이들처럼 살지 마라.”라는 뜻입니다. (위선자가 되지 말라는 뜻입니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라는 말씀이 앞의 말씀에 연결되어 있는 말씀이라면, 이 말씀은, ‘위선’은 언젠가는 모두 드러나게 된다는 뜻입니다. (심판 때에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고, 엄한 심판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이 뒤의 말씀에 연결되어 있는 말씀이라면, 이 말씀은, 복음을 선포하라는 명령입니다. (“너희는 복음을 숨기지 말고 드러내라. 복음을 감추지 말고 알려라.”) 이 말씀에서 ‘마련이다.’라는 말에 초점을 맞추어서, “너희가 복음을 숨기고 감추어도, 복음은 드러나고 알려지기 마련이다.”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러면 이 말씀은, “언젠가는 온 세상 모든 사람이 복음을 알게 되는 날이 올 텐데, 그날이 되면 자기가 받은 복음을 숨기고 감춘 사람들은 받을 몫이 없게 될 것이다.”라는 뜻이 됩니다. “너희가 어두운 데에서 한 말을 사람들이 모두 밝은 데에서 들을 것이다.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인 말은 지붕 위에서 선포될 것이다.”라는 말씀은, “온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라는 명령입니다.(마르 16,15)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루카 12,4)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라는 말씀은 요한복음 15장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요한 15,13-15ㄱ.공동번역) 예수님은 당신의 벗인 제자들(신앙인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심으로써 당신의 ‘큰 사랑’을 드러내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받게 될 박해를 예고하시면서 그들을 특별히 ‘나의 벗’이라고 부르신 것은, 제자들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신 것이고, 또 그들을 보호하겠다는 당신의 의지를 나타내신 것이기도 합니다. (이 사랑과 보호는 사도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신앙인들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보호를 믿는 사람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라.”입니다.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박해자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신앙생활의 목표는 무병장수도 아니고 만수무강도 아니고, 영원한 생명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이쪽 세상에서 안 죽는 것이 아닙니다. 이쪽 세상에서의 죽음을 지나서 저쪽 세상에서(하느님 나라에서) ‘죽음이 없는 영원한 삶’을 사는 것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보호는, 이쪽 세상에서 안 죽게 해 주겠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해 주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박해로 인한 죽음이든지, 병으로 인한 죽음이든지, 어떤 죽음이든지 간에, 죽음 자체가 두려운 일이라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영원한 생명’을 믿는 것뿐입니다.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바로 그분을 두려워하여라."(루카 12,5)
이 말씀의 뜻은, “영혼의 멸망을 두려워하여라.”입니다. (하느님을 무서워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아버지 하느님은 우리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요한 3,16-17). 누구든지 구원받기를 희망하고, 회개하고,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구원받기를 포기하는 사람이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요한 3,18)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 더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두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루카 12,6-7)
이 말씀의 뜻은, “너희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존재다. 하느님께서는 너희를 세심하게 보살피신다.”입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요한 3,1-2)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로마 8,14-17)
우리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들이고,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의 공동 상속자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사랑에 충실하게 응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그 사랑에 응답하는 사람만이 그 사랑 안에서 살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안 하면,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사랑에 응답하는 방법은 사랑입니다. 복음 선포 활동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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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직원들과 ‘어떤 남편이 더 좋은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아내를 공주처럼 아껴주는 남편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남편이 해 주기 때문에 아내는 좋지만 남편이 없으면 어린아이처럼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운전도 배우지 않았고, 은행 업무도 해 보지 않았고, 예약도 해 보지 않았습니다. 안타깝게도 남편이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거나, 입원하게 되면 아내는 남편이 없는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지만,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두려움도 커지게 됩니다. 군인처럼 아내가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엄하게 알려주는 남편이 있습니다. 자동차의 타이어도 교체할 수 있게 해 주고, 웬만한 일은 공구로 고칠 수 있도록 해 주고, 장거리 운전은 교대로 합니다. 아내는 남편이 때로 야속하기도 하지만, 돌발 상황이 생겨도 당황하지 않고 해결 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남편이 더 좋은 남편일까요?
궁금하면 구글에 물어보지만, 신앙인은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는지 생각하면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풍랑에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이 있지만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울 때야 일어나셔서 풍랑을 잠 재우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다지 믿음이 약하냐?’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께서는 물 위로 걷고 싶다는 베드로에게 그럼 걸어오라고 하셨습니다. 물 위를 걷던 베드로는 두려움 때문에 물에 빠집니다. 베드로가 ‘주님 살려 주십시오.’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십니다. ‘왜 두려워했느냐?’ 5000천명을 배불리 먹이실 때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먹을 것이 있는지 알아보아라.’ 제자들은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를 가져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강하게 키우셨습니다. 둘씩 짝을 지워서 복음을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병자들을 치유하라고 하셨습니다. 마귀 들린 사람들을 고쳐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길을 떠날 때는 전대에 돈도 지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옷도 많이 가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지팡이만 가지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때로 박해를 받고, 모욕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오히려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병자를 고치지 못하고, 나약해 질 때면 엄하게 꾸중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느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고픈 제자들에게 물고기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이제 사람 낚는 어부가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혼인잔치에 신랑을 기다리는 10처녀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등잔에 기름을 준비한 처녀들은 신랑을 기쁘게 맞이하였습니다. 그러나 등잔에 기름을 채우지 못했던 처녀들은 신랑을 맞이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채워야 할 등잔의 기름은 무엇입니까?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채우려 했던 위선, 가식, 교만, 권위는 구원의 등불을 결코 밝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것들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채워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채워야 할 기름은 인내, 온유, 친절, 나눔입니다. 그것들은 구원의 등불이 되어 믿음, 희망, 사랑을 밝힐 수 있습니다. 오늘은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기념일입니다. 성녀는 무너져가는 교회, 빛을 잃어가는 교회, 신앙이 식어버린 교회에 영성의 기름을 채웠습니다. 오늘은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의 기도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아무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지니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다 지나가는 것
오- 하느님은 불변하시니 인내함이 다 이기느니라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네 소원이 무어뇨 네 두려움은 무엇이뇨
네 찾는 평화는 주님께만 있으리
주님 안에 숨은 영혼이 무얼 더 원하리
오- 사랑하고 사랑하여 주님께 모든 사랑 드리리
주님만을 바라는 사람은 모든 것을 차지할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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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진실은 언제나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비록 진실을 감추고 역사를 왜곡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세상을 지배하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언젠가 진실은 밝혀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누룩처럼 번져 가는 위선의 허울이 벗겨지고 진실을 밝혀낸다고 모두가 행복해지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살다 보면 때로 모르는 편이 더 나은 경우도 있고, 감추는 것이 모두에게 평화로운 일도 있습니다.
숨겨진 자식의 비밀, 내 과거의 치부, 밝히고 싶지 않은 죄의 실체들을 내 주변 사람들이 알게 되면, 사람들은 충격을 받고, 실망하며, 분노에 이르는 좌절을 맛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경계하라고 하신 것은, 사람들 앞에서 나의 죄스러운 실체를 드러내고 싶지 않아 애써 감추려는 위선의 행위들이 결국 자신의 양심을 무디게 하거나, 죄를 합리화하는 유혹에 쉽게 빠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진정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나를 무시하고 외면할 세상의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신” 하느님이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성령의 인장’을 받았음을 강조합니다. ‘성령의 인장’이란 내가 죄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이지만, 가슴을 치며 주님께 자비를 청하는 겸손한 죄인의 모습으로 하느님께 의탁할 수 있는 은총의 표지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당신 소유로 뽑으신 백성’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예수님의 위로는, 바리사이처럼 하느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 되지 않는 한 하느님께서 나약한 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받아 주신다는 믿음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잊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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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성호 라우렌시오 신부님]
예수께서 바리사이의 집에서 행한 일들이 큰 파장을 일으켰나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주변으로 몰려들어 서로 밀치고 난리 났습니다.
하기사 그렇게 기득권에 대해서 당당하게 독설을 퍼부을 수 있는 이가 누가 있겠습니까? (이미 세례자 요한이 보여주었었지만) 예나 지금이나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진정 용기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곧 풀이해주시는 바대로 위선입니다. 내가 실제로 행하는 일과 사람들 앞에서 행하는 일이 서로 다른 모습은 사람의 눈을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 아무리 주의 깊게 감추려 한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눈은 속일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은 속지 않는 분이십니다. 만약 그분께서 속는 것처럼 보이거든 그것은 그분께서 자비로이 기다려주시는 것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심판의 때가 되었을 때 주 하느님 앞에서 그 행한 일을 심판 받을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느님을 믿는 우리도 속지 말고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박해를 당할 당신의 제자들을 향해 진실할 것을 당부하시며, 하느님을 믿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이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이미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 앞에서 강한 어조로 그들에게 반박하셨습니다. 그분의 당당함을 제자들도 이어받아 죽음을 당하게 되는 현실이 다가오더라도 결코 두려움으로 그들에게 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승리의 그리스도이시듯, 믿는 이가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박해자들은 지금의 육신을 해칠 권한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의 삶은 지금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유한한 현재의 삶이 아니라 죽음 이후의 무한한 삶이 기다리는데 그 무한함에서 예수를 믿는 이들은 승리를 거둘 것입니다.
지금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주님을 경외하는 것)은 영광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주님을 믿는 이들을 박해하는 것은 멸망에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결과 앞에서 누구를 선택할지는 명확한 것입니다.
지금 내가 어려움을 당하고 박해를 받는다고 해서 실망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잊은 듯이 보이겠지만, 그분은 우리의 머리카락 수를 세어두신 분이십니다.
시장에서 가장 싸게 파는 참새마저도 잊지 않으시는 분이 하느님이시라면, 당신께서 사랑하시고 당신을 사랑한 이들을 잊으실 리 없습니다.
우리는 그 어떤 것보다 더 귀한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을 향해 내 사랑(나의 벗-4절)이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나는 내 머리카락을 귀찮아서라도 세지 않지만, 그분께서는 사랑하는 사람의 머리카락을 세어두십니다. 너무 사랑하기에 '뭐 그런 것까지'라는 것도 당신 안에 담아두시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이 박해는 없다 하더라도 살아가는 데 있어 여러 어려움들이 짓누르기도 합니다. 그 무엇인가가, 그 누군가가, 그 어떤 상황이 나를 힘들게 합니다. 때론 하느님께서 계시는가? 라고 물음을 던지며 공허함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의 모든 것을 아시며 나의 믿음의 삶, 사랑의 삶을 세어두신 분이십니다. 힘든 이들이여! 용기를 내십시오. 이것을 끝까지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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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인환 히폴리토 신부님]
제가 사는 양산은 지금 한창 성당 신축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있습니다. 지난 여름 신앙학교를 준비하면서 아이들이 성당에 자주 왔었는데 마침 그 때가 포크 레인부터 해서 적지 않은 장비들이 성당에 와서 작업을 하던 시기였습니다.
만일 아이들과 포크 레인이 누가 누가 머리가 더 쎈가 하고 서로 부딪힌다면 피나는 쪽은 당연히 아이들입니다. 그래서 모래 쌓아놓은 곳, 곳곳에 사고의 위험이 있는 곳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 ‘그만해라’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평소 제가 하나도 무섭지 않았는지 뛰어노는 아이들의 행동은 전혀 미동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버럭합니다. 목소리의 톤이 높아져서야 이제 자기들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먹었나 봅니다. 그제서야 쭈삣 쭈삣 위험한 곳에서의 놀이를 멈추는 아이들. 그러면서 저는 속으로 ‘꼭 이렇게 큰소리를 내야만 말을 드는 것일까?’라는 회의 섞인 생각을 합니다. 분명히 그것은 아이들에게 심리적 공포를 조장해서 따낸 결과입니다. 따라서 참사랑도 참교육도 될 수 없습니다.
물론 철없는 아이들이라 제가 화를 낸 것도 별 생각 없이 잊어버릴 가능성도 없진 않지만 그렇게 하고 나서 또 후회하는 저의 마음과 '어떻게 하면 부드럽게 이야기를 해도 아이들이 알아먹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 끝에 그들이 느낀 두려움이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두려움이라는 단어를 공포 또는 무서움이라는 단어와 흔히 연관시킵니다. 그래서 저는 중학교 때 성령칠은 중에 있는 두려움이라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우습지만 그 당시 성령강림 대축일에 은사 뽑기를 하다가 속으로 ‘신부님이 성령은 하느님이라고 했는데 하느님이 공포심을 은사라고 내려주시다니’라는 생각을 했었던 때가 있습니다. 지금도 성령강림 대축일이 되면 이것이 머릿속에 떠올라 속으로 웃곤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두려움이 사랑의 두려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 속에서 예수님께서 일러주시는 하느님께 가지는 두려움이라는 것도 제가 아이들에게 화를 내서 조장한 두려움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그 둘은 바라만 보아도 너무나 좋은 사이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즐겁게 해서 점수를 딸 수 있을까 고민합니다. 그런데 어쩌다보니 상대방이 알면 상처받을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 사람이 몰랐으면 하지만 막상 그 사람을 만나도 속으로 너무나 미안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행동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다치게 하기 싫은 그 마음, 사랑하는 사람이 알면 싫어할 그것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 하는 것이 사랑의 두려움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인간적인 감정으로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대상 곧 나를 해할 수 있는 자에 대해 가지는 두려움에 가치를 두지 마라는 말씀입니다.
그보다는 원초적인 사랑의 관계에 있는 하느님과의 사랑을 더 키우기 위해 그것을 깨뜨릴 수 있는 것을 두려워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사랑의 두려움을 가진 사람은 하느님께서 하지 마라는 행동을 스스로 멀리할 것입니다. 더 남을 배려하려 할 것이고, 더 참아 받는 사람이 될 것이며, 이웃에게 웃음을 주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나의 머리카락의 개수까지 다 세어 두셨다고 복음은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세세한 부분까지도 알고 싶어 하고 또 함께 하고 싶어 하는 것이 바로 깊은 사랑에 빠진 사이가 아닙니까? 하느님은 그렇게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나도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할 것입니다. 하느님이 나와의 사랑이 더 크게 영글어 지시길 바라는 것처럼 나도 하느님과 나의 사랑이 깨어질세라 더 아끼고 키워나갈 것입니다.
오늘 하루 매일 같이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기만 하는 내가 아니라 하느님께 무언가 하나를 선물하는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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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한 전도여행 중에, 제자들의 믿음을 굳건히 세우기 위하여 그들을 교육하시는 장면입니다. 그 내용은 두 가지 입니다. 한 가지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해야 한다(루가 12,1)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그들로부터 장차 어떤 핍박을 당하더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로지 한 분 하느님만을 두려워하라(12,2-7)는 것입니다.
오늘은 두 번째 내용만 보고자 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진정 두려워해야 할 분이 누구인지, 그리고 왜 그분을 두려워해야 하는지를 깨우쳐주십니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루카 12,5)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해야 할 분은 육신을 핍박하고 죽일 수 있는 이가 아니라, 죽은 뒤의 권한까지 가지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이시라고 가르쳐주십니다. 마치 당신께서 당시의 종교지도자나 정치지도자를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오직 아버지만을 진정 사랑으로 두려워하셨듯이 말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두려움을 <히브리서>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으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에게 큰 소리와 눈물로 간구하 셨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보시고 그 간구를 들어 주셨습니다.”(히브 5,7)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은 오직 한 분, 아버지 하느님뿐인 것입니다. 이러한 두려움에 대해 <시편>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께 대한 두려움은 순결하고 영원히 남는다.”(시편 18,10)
그래서 <집회서>와 <시편>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함이 주님을 사랑함의 시작이며, 주님에 대한 사랑의 시작은 믿음이다.”(집회 25,12)
“하느님을 경외함이 지혜의 근원이요 그대로 사는 사람이 슬기를 깨친 사람이다.”(시편 111,10)
이처럼, 성경에서는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과 사랑이 서로 모순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하느님만을 “두려워하라”(루카 12,5)고 하시면서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두려워하지 마라”(루카 12,7)고도 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그 참새보다 훨씬 귀하지 않느냐?”(루카 12,7)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귀하고 소중히 여기시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귀한 존재들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목숨을 바쳐 사랑할만한 가치가 있는 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니, 그 어떤 핍박이 닥친다 하더라도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는 하느님께서 구해주실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의 길을 가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두려워하되 주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두려워하고,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되 우리를 소중히 여기시는 주님에 대한 믿음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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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여라.”(루카 12,2)
주님!
위선의 누룩이 아니라, 믿음의 누룩을 지니게 하소서.
말만하고 실행하지 않으며 윗자리에 앉으려하고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스승이라 불러주기를 바라는
위선의 누룩이 아니라, 열매를 맺는 말씀의 누룩을 지니게 하소서.
그릇된 생각과 의혹과 불신을 부풀리는 누룩이 아니라,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부풀리는 생명의 누룩을 지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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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루카12,7)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여라.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루카 12,1.4-5.7-8)
결론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무엇을 두려워할까?'
'그것이 '죽음'이지 않을까?'
죽음의 일반적인 의미는 '영원한 끝'이요 '영원한 없음(무)'이고, '영원한 이별'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믿는 이들에게는 이 두려운 죽음이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새로운 시작'이요, '새로운 있음(유)'이고, '새로운 만남'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믿음이 강한 사람들은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자매인 죽음이여, 어서 오세요."라고 말한 것처럼, 죽음을 기쁘게 맞이합니다.
'오두막'이라는 영화는 유괴범에게 납치되어 오두막 살해된 사랑하는 딸 미시를 잃어버린 아빠가 죽음의 상태에서 다시 부활하는 모습, 세 천사의 인도로 죽음 저 너머의 세상에서 기쁘게 살아가고 있는 딸 미시를 보고, 다시 부활하는 모습을 담은 영화입니다.
'믿음'이 우리를 죽음의 상태에서 부활하게 하고,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닮은 존재로서, 참새들보다도 훨씬 더 귀한 존재들입니다.
"행복하여라, 불법을 용서받고, 죄가 덮어진 사람들! 행복하여라, 주님께서 죄를 헤아리지 않으시는 사람!"(로마4,7-8)
바로 이런 행복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이 '영원한 생명'이고, 이런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지금부터 이런 행복한 사람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기쁘게 맞이하는 행복한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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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숨김없는 사람과 세상을 바라다>
루카 12,1-7 (바리사이들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여라)
그때에 수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서로 밟힐 지경이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여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에서 한 말을 사람들이 모두 밝은 데에서 들을 것이다.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인 말은 지붕 위에서 선포될 것이다.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바로 그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 더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숨김없는 사람과 세상을 바라다>
숨길 것이 없는
사람이면 좋겠다
그만큼 나이니까
숨기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면 좋겠다
그만큼 모두이니까
숨을 데를 찾지 않는
사람이면 좋겠다
그만큼 떳떳하니까
숨을 데가 없는
세상이면 좋겠다
그만큼 밝으니까
숨지 않는
사람이면 좋겠다
그만큼 드러나니까
숨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면 좋겠다
그만큼 열려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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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떤 승려가 수양을 위해 산속 토굴에 들어갔습니다. 깊은 산속이라 사람도 없고 어떤 시끄러움도 없는 고요함 속에서 깨달음을 얻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산나물 캐는 아주머니를 우연히 만났습니다. 이 아주머니는 이렇게 묻습니다. “조용히 공부하러 왔나 보네요. 그런데 물소리, 새소리는 안 시끄러운가요?”
이 말을 듣는 순간에 그 전에 전혀 느끼지 못했던 물소리와 새소리가 시끄럽게 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승려는 이 순간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세상에 시끄럽고 조용한 데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에 달렸다는 것을 말입니다.
저 역시 비슷한 체험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개인 피정을 위해 어느 피정의 집에 들어갔는데, 피정의 집 앞으로 차 지나가는 소리가 너무 큰 것입니다. ‘잘못 왔구나’ 싶었습니다.
그러나 피정에 집중하면서, 차 지나가는 소리가 어느 순간 들리지 않았습니다. 고속도로 앞이라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그렇게 많았는데도 말이지요.
자기 마음이 이렇게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은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요? 하느님입니까? 세상입니까?
하느님께 있다면 하느님을 두려워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이라면, 하느님께 불평불만 하는 일이 계속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 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고 하십니다. 바로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이신 하느님을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유대인이라면 모두 잘 알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철저히 지킨 이유가 무엇이었겠어요? 바로 하느님을 두려워했기에 율법을 철저히 지켰던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치 새로운 말씀을 하시듯이 이야기하십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한다고 말하면서도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따르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자신의 이기심과 욕심을 채우는 데에 더 큰 관심이 있었고,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만 율법의 준수를 강요하면서 정작 본인은 보여주는 식의 모습만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머리카락을 다 세어 두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따라서 그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 하느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느님께 마음이 향하는 우리가 될 때, 세상의 어떤 유혹도 우리를 침범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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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할 수 있는 이유를 찾으세요.>
학창 시절 제일 자신 없는 과목 하나를 고르라면 조금의 망설임 없이 ‘미술’이라고 말합니다. 그리는 것, 만드는 것 모두 소질이 없어서 미술 자체가 싫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미술 전시회에 가는 것도 별로 재미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싫어했던 미술인데, 성지순례 가서 성화를 보며 새로운 세계에 접어들 수 있었습니다. 화가가 표현하려고 했던 내용을 설명 들으면서 그 안의 깊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즘에는 미술 관련 책도 많이 읽게 됩니다.
미술을 잘하지 못하더라도 보고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긴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한다고 노래를 들어서는 안 된다는 법이 없으니까요. 어떤 방식으로도 좋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잘하지 못한다고 아예 관심을 끊어버리는 예가 얼마나 많습니까? 신앙생활을 잘할 수 없다는 사람들은 꼭 이유가 있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종교에 대한 회의감이 생겨서, 신앙인으로부터 받은 상처…. 등등의 이유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좋아할 수 있는 이유는 만들 수 없을까요? 예수님만으로도 충분히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는데, 부정적인 몇 가지만으로 좋아할 수 있는 이유를 끊어버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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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참으로 소중한 존재>
무엇인지 몰라서 말하지 않는 것은 사람을 답답하게 하고, 알면서도 말하지 못하면 조바심이 나고, 알지만 말을 않는다면 힘이 든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침묵을 압니다. 하느님 안에서 고요를 찾는 것입니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알면 아는 대로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며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소연도, 감사도, 침묵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침묵은 곧 기도입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고 인정해 주지 않아도 서운함 없이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신(루카 12,7)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분 앞에 숨겨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위선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위 잘나고 똑똑한 그들은 그들의 내면적인 모습과는 달리 어떤 것을 아는 체, 가지고 있는 체하기 때문입니다. 향을 싼 종이에서는 향내가 나고, 생선을 싼 종이에서는 비린내가 나기 마련입니다. 생선을 만져놓고서는 향내가 나기를 바랄 수는 없는 법입니다. 마찬가지로 내적으로 변하지 않고 겉꾸민다면 그와 다를 바 없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들은 바를 가슴에 새기고 또 가르치며, 가르치는 바를 살아야 할 소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 1,22)
본당 생활을 하다 보면 피정이나 기도회에 열심히 참여하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중의 어떤 사람은 하느님의 은총을 많이 받았다고 호들갑을 떨며 자랑을 하고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오히려 많은 사람에게 걸림돌이 됩니다. 은총을 많이 받았다고 하면서도 그들의 삶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더 교만해지고, 뻣뻣해지며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낫다는 마음이 은연중에 자리하게 됩니다. 받은 은총을 말하지 못해 조바심을 내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은총을 받았는지는 그가 말하지 않아도 삶의 태도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사실 “사람이 하는 일이 제 눈에는 옳게 보이지만, 야훼께서는 그 마음을 헤아리십니다.”(잠언 21,2)
“구술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은총을 받은 만큼 삶의 모범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은총을 증거 하지 못한다면 바리사이의 위선이 우리 안에 자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귀한 존재입니다. 각자는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있고 그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는 이들을 하느님은 귀하게 여기십니다. 괜한 욕심과 바램 때문에 위선을 떠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큰 만큼 정의도 살아있습니다. 정의로우신 분은 불의를 심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학자' “하느님만으로 충분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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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6,20)">
-믿음의 전사-
“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그리나이다.
제 영혼이 하느님을,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 하나이다.”(시편42,2-3)
입당송 시편처럼, 주님의 믿음의 전사들인 성인들의 영혼이 늘 그러했습니다. 오늘은 16세기 스페인 출신 가르멜 수도회의 개혁자이자 제 2창립자로 일컫는 일명 ‘아빌라의 데레사’, ‘대데레사’라 칭하는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학자 기념일입니다. 생몰연대를 보니 만67세, 수도회의 개혁을 위해 시종일관 치열한, 가열찬 삶을 살았던 참으로 멋지고 매력이 넘치는 믿음의 여전사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였습니다. 성녀를 생각하면 즉시 떠오르는 ‘아무 것도 너를’이란 성가입니다.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지니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다 지나가는 것
오 하느님은 불변하시니 인내함이 다 이기느니라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참고로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Nada te turbe
아무것도 너를 흔들지 못하리라
Nada te espante
아무것도 너를 놀라게 하지 않으리라
Todo se pasa
모든 것은 지나가는 것
Dios no se muda
하느님은 변치 않으시니
la paciencia
인내가
todo lo alcanza
모든 것을 얻게 하리니
quien a Dios tiene
하느님을 소유하는 이는
nada le falta
아무런 부족함 없고
sólo Dios basta
하느님만으로 충분하다”-
성녀가 죽은 뒤 성녀의 성무일도에서 발견된 이 시를 바탕해 작사한 감동적인 ‘아무것도 너를’ 이란 성가입니다. 제 죽어 장례미사때에 입당성가는 위의 데레사 성녀의 ‘아무것도 너를’ 성가를, 퇴장성가는 성 프란치스코의 ‘태양의 찬가’를 부탁하고 싶습니다. 시간되면 이 두 성가를 감상해 보세요. 정말 좋습니다. 성녀에 대한 다음 글도 인상적입니다.
-데레사는 이상주의자idealist일뿐 아니라 ‘아주 땅에 밀착된 현실주의자a very down to earth realist’였다. 성녀는 일에나 모든 활동에서나 상식과 지혜, 하느님 섭리에 대한 신뢰가 결합된 엄청난 능력으로 성녀가 직면한 온갖 장애물을 극복했다. 도전적인 삶의 수도생활의 입회자를 선발하는 데 성녀는 지성과 좋은 판단력을 강조했다.
“하느님은 우리를 아둔한 수녀들로부터 지켜주소서!”, 성녀의 진심이 담긴 유머다. 성녀는 “슬기로운 사람들은 자기의 잘못을 잘 알아 동시에 안내의 필요를 안다. 그러나 이렇지 못한 편협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변화를 위한 필요를 알지 못한다.”라고 말한다.’
성녀는 1582년 9월2일 여행은 하던 도중 돌연히 중병에 걸려 병석에 눕게 되었으며, 10월4일 밤중에 임종의 때가 가까웠음을 알자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뻐하며, “주여, 저는 성교회의 딸입니다.”라고 고백하면서 67살의 나이에 숨을 거둡니다. 참으로 거룩한 성녀의 생애였습니다. 그대로 한권의 살아있는 성경책 같은 삶이었고 성녀의 기도문과 임종어가 성녀의 삶을 요약합니다.
얼마나 하느님을 사랑한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전사로 일관한 성녀의 삶이었는지요!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믿음의 전사들인 우리 모두에게 세상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말고 참으로 하느님만을 두려워 할 것을 강력히 권합니다. 공포의 두려움이 아니라 경외의 두려움입니다.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 서두의 말씀도 고맙습니다. 주님은 당신 믿음의 전사들인 우리 모두를 당신의 벗이라 부르십니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바로 그분을 두려워하여라.”
수도원 십자로 중앙 예수님 부활상 아래 바위판에 새겨진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역설적으로 하느님을 두려워할 때 세상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경계해야 할 자는 그리스도를 또 그리스도가 뜻하는 모든 것을 부정하게 하는 이들이나, 부정의 상태로 죽게하는 이들입니다. 그밖에 우리를 위협하는 그 누구든, 그 무엇이든 두려워할 것은 없습니다.
여기서 잠시 언급하고 싶은 것이 현대인들이 잊고 지내는 ‘두려움’과 ‘부끄러움’의 감정입니다. 두려움과 부끄러움의 감정을 잃어버린 적반하장, 인면수심의 뻔뻔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건강한 믿음에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하느님 앞에서 부끄러워할 줄 아는 감정은 너무 중요합니다. 인간의 무질서한 폭력적 내적 욕망을 제어할 수 있는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하느님 앞에서 부끄러워할 줄 아는 감정을 지녀야 온전한 믿음이겠습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에 앞서 평화중에 주저함없이 죽음을 맞이한 많은 모범의 순교성인들을 모시고 있습니다. 그들은 ‘죽음이냐 진리냐’의 둘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알았습니다. 진리이신 주님을 택함으로 영원히 사는 길을 택한 순교성인 선배들입니다. 이어 주님은 결정적 말씀으로 우리의 믿음을 북돋우십니다.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 더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문제는 믿음입니다. 일어나는 것이 모두 하느님의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무엇도 하느님 허락없이 일어나는 일은 없습니다. 참으로 진짜 죽음은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하느님을 떠난 영혼의 죽음이 진짜 죽음임을 믿고 알아야 합니다. 주님 사랑 안에서 사는 영혼에게는 죽음이 없다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의 철석같은 믿음입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하느님 수중 안에 있다는 믿음의 아브라함처럼,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처럼 우리의 믿음을 끊임없이 업그레이드시켜 새롭게 해야 합니다. 정말 주님께 청할 것은 믿음의 은총뿐입니다. 탓할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 부족입니다.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게 되었더라면 자랑할 만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으니, 하느님께서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다윗도 하느님께서 행위와는 상관없이 의로움을 인정해 주시는 사람의 행복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바로 오늘 화답송 시편입니다.
“행복하여라, 죄를 용서 받고, 잘못을 씻은 이! 행복하여라, 주님이 허물을 헤아리지 않으시고, 그 영에 거짓이 없는 사람!“(시편32,1-2)
그러니 진짜 믿음의 전사는 죄책감에 마음 아파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열렬히 온힘을 다해 하느님을 믿고 사랑합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믿고 사랑할 때 죄의 용서와 더불어 삶도 점차 변화되어 주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그리하여 믿음의 여정은 주님을 닮아가는 ‘주닮의 여정’이 됩니다. 해바라기꽃처럼 주바라기꽃의 아름답고 멋진 삶이 펼쳐집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삶의 궁극 목표이자 보람이요 행복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믿음을 북돋아 주시어 한결같은 믿음의 전사로 영적 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의 자애를 영원히 노래하오리다. 제 입은 당신의 진실을 대대로 전하오리다.”(시편89,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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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두려워 말고 주님만 믿으라'고 격려하십니다.
오늘 복음 대목의 시작은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라"는 말씀으로 지난 며칠간 이어졌던 불행 선언을 마무리하십니다. 그리고는 앞으로 선교 사명을 실행하게 될 제자들에게 용기가 되는 말씀을 하시지요. 당장은 제자들이 서로 나누는 이야기가 언젠가는 "지붕 위에서 하느님의 말씀으로 선포될"이기에 제자들은 어떤 외압이나 저항, 박해에도 꺾이지 말고 꿋꿋이 주님의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루카 12,4)
제자들이 두려워해야 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사람들은 고작해야 육적인 목숨을 훼손하고 빼앗을 수 있을 뿐이지만, 하느님은 영적인 생명까지 좌지우지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루카 12,7)
한두 푼에 팔리는 참새 한 마리도 잊지 않으시는 하느님께 우리들 각자가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지 예수님께서 일깨워 주십니다. 너무 당연한 말씀 같은데, 사실 우리 스스로 자주 잊는 진실이기도 하지요.
우리는 자신이 정한 이상적 기준에 못 미치는 스스로를 못마땅해하며 다그치기도 합니다. 사소한 약함에서부터 윤리적 도덕적 결함에 이르기까지 건강한 성찰이 아니라 스스로를 난도질하며 단죄하고 심판하기도 하지요.
그뿐입니까? 자신이 참새보다 훨씬 귀하다는 걸 망각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그 잣대를 타인에게 적용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오류들이 어쩌면 두려움에 기인하는 것일지 모릅니다.
자신이 하느님의 사랑받는 존재임을 믿지 못할 때 두려움이 가중됩니다. 그분의 용서와 자비를 확신하지 못하니 수치심과 자괴감만 늘어가지요. 결국 스스로도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어둠의 쳇바퀴에 갇혀 버리게 됩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 악순환을 끊을 방법을 제시합니다.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게 되었더라면 자랑할 만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로마 4,2)
하느님 앞에서는 율법이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 인간이 하는 어떤 행위도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새롭거나 완벽할 리 없지요. 그분은 서툴고 미숙한 죄인인 인간의 실존을 아시기에 우리에게 당신과 같아지라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그분은 인간이 모든 부족함 가운데서 영육의 힘을 다해 당신을 믿는 그 자체를 귀하게 보아 주시고 "참 좋구나, 애썼다. 의롭다." 하시는 아버지십니다.
"행복하여라, 불법을 용서받고, 죄가 덮어진 사람들! 행복하여라, 주님께서 죄를 헤아리니 않으시는 사람!"(로마 4,7-8)
사도 바오로는 믿음으로 죄를 씻고 주님 앞에 의로움을 인정받은 다윗의 예를 들어 우리의 움츠러든 어깨를 두드려 줍니다. 구약성경은 다윗의 허물과 약점을 있는 그대로 전하면서, 그에게 내린 사랑을 거두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더욱 부각시킵니다. 다윗은 하느님 앞에 자신을 낮추어 죄를 용서 받은 이의 전형 중 하나입니다.
"하느님께서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로마 4,3)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를 믿는 이는 의롭게 되어 구원을 받습니다.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을 믿는 이는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는 하느님이 자신을 귀하게 보아 주시고 사랑해 주시듯이 자신을 귀하게 보며 사랑합니다. 그리고 형제와 이웃도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며 기꺼이 다가가 손을 내밉니다. 이로써 그는 이미 의롭게 되었음을 증명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살다 보면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 갈피를 잡기 어려울 만큼 관계의 실타래가 엉킨 순간도 닥칩니다. 신뢰가 위협 받고 영육으로 회복하기 어려운 실패와 좌절로 무너지기도 하지요. 사람에 대한 두려움마저 몰려올 때면 도무지 답을 찾기 어려운 나락으로 빠져듭니다. 두려움에는 끝이 없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예수님께서 반복해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믿고, 곡선으로도 직선을 그으시는 그분께 의탁해 앞으로 나아가라고 격려하시는 겁니다. 한없이 어리석고 나약한 우리에게도 의롭게 될 기회가 남아 있으니, 믿음으로 두려움의 장막을 뚫고 주님께 나아갑시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가 우리를 위해 기도합니다.
아무것도 너를 슬프게하지 말며,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하지말지니,
모든것은 다 지나가는 것 다 지나가는 것,
오, 하느님은 불변하시니 인내함이,
다 이기느니라.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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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NmYNlSRyX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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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루카 12, 5)
울긋불긋한
단풍이 하루가
다르게 번져갑니다.
가장 좋으신
하느님으로
이미 우리는 충분합니다.
살아가는 일이
하느님을 향한 감사이며
하느님을 향한 외경임을
배우게 됩니다.
생명의 신비와
자연의 아름다움에
눈 뜨게 됩니다.
무엇이 우리를
살게 하는지를
알게됩니다.
하느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두려움이 우리를
씻어주고 있습니다.
마음이 맑아진 후에야
하늘을 보게됩니다.
두려움이 진정한
감사로 변하게 됩니다.
우리를 한 순간도
잊지 않고 기억하시는
하느님 사랑이
우리를 여기에서
살게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모든 것을 넘어
두려움까지도 넘어
우리 삶에 들어오셨습니다.
하느님의
소중한 이웃들이며
하느님의 소중한
자녀들입니다.
두려움보다
더 강력한 힘은
하느님의 소중함임을
믿습니다.
소중한 이들이며
소중한 순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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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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