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광범위한 뇌물 스캔들로 몰락한 전문경영인 신토 히사시(新藤恒)
https://youtu.be/6bbZ_jJ_2Po?si=bsNLK7zDXLiIoud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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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庚 | 己 | 戊 | 丁 | 丙 | 乙 | 甲 | 癸 |
| 寅 | 丑 | 子 | 亥 | 戌 | 酉 | 申 | 未 |
1 인물에 대한 평가
이 명조는 조선업계에서 명성을 누렸으나 만년을 지키지 못한 경영자이자 전 일본전신전화공사 총재였던 신토 히사시(新藤恒)의 팔자이다. 그는 하리마 조선소에 입사하여 1972년 이시카와지마-하리마 중공업(현 IHI) 사장이 되었다. 그 후에 1981년에는 닛폰 텔레그래프 전화 공기업(NTT) 사장이 되어 회사의 민영화를 적극 추진했고 1985년부터 1988년까지 닛폰 텔레그래프 앤 텔레그래프 코퍼레이션(NTT)의 초대 사장으로 재직했다. 그의 경영 능력은 경영 합리화에 기여한 점에서 높이 평가받았으나 리크루트 사건에서 비상장 주식을 이전한 사실이 드러났고 1990년 도쿄 지방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비록 1988년 뇌물 스캔들로 인해 물러나야 했으나 투쟁적인 사업 스타일과 실용적인 노동 태도를 바탕으로 일본 산업계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신토 히사시는 1910년 후쿠오카현 쿠루메에서 마을의 개척자였던 부유한 지주 가문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할아버지 시절, 재정이 거의 파탄 나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러일 전쟁 이후 군대가 그의 가문 땅을 캠프 용지로 구입하면서 할아버지는 갑자기 부자가 되었으나, 경영 능력이 없던 탓에 여러 회사를 무분별하게 시작하거나 은행을 인수하는 등 방만한 경영을 일삼았고 이는 모두 역효과로 돌아왔다. 그 결과 그의 아버지가 입양되었을 당시 신토 가문은 자산을 모두 잃고 쇠락한 상태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신토 히사시는 저택조차 초등학교 입학 시기에 잃는 경험을 했으며, 몰락한 가문의 수장으로서 어린 시절부터 가문을 부흥시켜야 한다는 큰 책임을 짊어졌다.
그는 규슈 제국대학교 공학부 조선공학(造船工學)를 졸업하였고 나중 1968년에 공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34년 하리마 조선소에 입사하며 본격적인 경력을 시작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미국 내셔널 벌크 캐리어(NBC) 구레 조선소로 자리를 옮겨 세계 최대 규모의 유조선들을 다수 진수시키는 성과를 냈다. 이후 이시카와지마-하리마 중공업에서 전무이사, 부사장 등을 역임하며 회사를 세계 최고의 조선소로 성장시키는 데 기여하였으나 1954년 조선업 침체로 인해 자문직으로 물러났다.
1956년, 당시 게이단렌 회장인 도코 도시오의 요청에 따라 민간인 출신으로서 처음으로 전신전화공사의 사장에 취임하였다. 1960년에는 기업의 민영화와 함께 닛폰 텔레그래프 앤 텔레폰(NTT의 전신)의 초대 사장이 되었으며 인력 감축 등을 통해 민영화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1963년 6월에는 회장직에 올랐으나 같은 해 12월 리크루트 스캔들에 연루되면서 사임하였다. 이후 1989년 3월 뇌물 수수 혐의로 체포 및 기소되었으며 1999년 10월 도쿄 지방법원으로부터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 벌금 2,270만 엔을 선고받았다. 형량이 확정된 뒤에는 비즈니스 현장에서 물러나 정보통신연구소와 NTT 커뮤니케이션웨어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신토 히사시는 2003년 1월 26일에 세상을 떠났다.
2 명조(命造) 분석(分析)
이 명조(命造)는 무토(戊土) 일간이 오월(午月) 출생이므로 인수격(印綬格)이다. 그런데 오술(午戌)이 합(合)을 하는데 병화(丙火)가 투간(透干)하므로 인수국(印綬局)을 구성하여 강성(强盛)하니 임수(壬水) 편재(偏財)로 제복(制伏)하는 형국이다. 인수는 본래 사길신(四吉神)이므로 순용(順用)함이 마땅하지만 태과(太過)가 되는 경우에는 사길신이라 해도 재성(財星)으로 역용(逆用)함을 알아야 한다. 고로 이 사주는 인수용재격(印綬用財格)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금수(金水)가 희신(喜神)이 되고 화(火)는 기신(忌神)이 되는데 토운(土運)은 금(金)을 생조(生助)하지만 수(水)를 극(剋)하기도 하므로 희기(喜忌)는 배치에 따른다.
신토 히사시는 초년운이 서방(西方) 금운(金運)을 만난 시기이니 운로(運路)가 좋았다. 규슈 제국대학교 공학부 조선공학을 졸업하였고 1934년(甲戌) 25세에 하리마 조선소에 입사하며 첫 사회 경험을 시작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미국 내셔널 벌크 캐리어(NBC) 구레 조선소로 자리를 옮겨 세계 최대 규모의 유조선들을 다수 진수시키는 성과를 냈다. 이후 이시카와지마-하리마 중공업에서 전무이사, 부사장 등을 역임하며 회사를 세계 최고의 조선소로 성장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정화(丁火) 기신운(忌神運)이 되는 1954년(甲午) 45세에 조선업 침체로 인해 중공업에서 자문직으로 물러난다. 해수(亥水) 희신운 (喜神運)이 되는 1956년(丙申) 47세에 전신전화공사(電信電話公社) 사장에 취임한다. 1960년(庚子) 51세에는 기업의 민영화와 함께 닛폰 텔레그래프 앤 텔레폰(NTT의 전신)의 초대 사장이 되어 인력 감축 등을 통해 민영화를 성공적으로 이끈다. 자수(子水) 대운이 되는 1968년(戊申) 59세에는 공학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인목(寅木) 대운이 되는 1988년(戊辰) 79세 6월에 회장직에 오르나 같은 해 12월 리크루트 스캔들에 연루되면서 사임한다. 이것은 인오술(寅午戌) 삼합(三合)으로 기신국(忌神局)을 형성한 까닭에 편재(偏財)가 이를 제압하지 못하므로 흉상(凶象)이 나타난 것이다.
3 신토 히사시(新藤恒)의 주요 연혁
1910년 (庚戌) 1세: 후쿠오카현 쿠루메에서 출생한다.
1922년 (壬戌) 13세: 메이젠 중학교에 입학한다.
1934년 (甲戌) 25세: 규슈 제국대학 조선공학(造船工學)를 졸업하고 하리마 조선소에 입사하며 본격적인 경력을 시작한다.
1945년 이후 (乙酉 이후) 36세 이후: 미국 내셔널 벌크 캐리어(NBC) 구레 조선소로 자리를 옮겨 세계 최대 규모의 유조선들을 다수 진수시킨다.
1954년 (甲午) 45세: 조선업 침체로 인해 이시카와지마-하리마 중공업에서 자문직으로 물러난다.
1956년 (丙申) 47세: 게이단렌 회장 도코 도시오의 요청에 따라 전신전화공사 사장에 취임한다.
1960년 (庚子) 51세: 기업 민영화와 함께 닛폰 텔레그래프 앤 텔레폰(NTT의 전신)의 초대 사장이 되어 민영화를 성공적으로 이끈다.
1968년 (戊申) 59세: 공학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1972년 (壬子) 63세: 이시카와지마-하리마 중공업(IHI)의 사장으로 취임한다.
1977년 (丁巳) 68세: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상한다.
1979년 (己未) 70세: 이시카와지마-하리마 중공업(IHI)에서 사임한다.
1988년 (戊辰) 79세: 6월에 회장직에 오르나 12월 리크루트 스캔들에 연루되어 사임한다.
1989년 (己巳) 80세: 3월 뇌물 수수 혐의로 체포 및 기소된다.
1999년 (己卯) 90세: 10월 도쿄 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 벌금 2,270만 엔을 선고받는다. 이후 정보통신연구소와 NTT 커뮤니케이션웨어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한다.
2003년 (癸未) 94세: 1월 26일 도쿄에서 폐렴으로 사망한다.
명식출처는 대만 진백유선생의 전론기업가팔자학에서 가져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