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철 씨는 왜 요절했나’ 1장 한을 품고 죽다 ④ |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
안창 마을 사람들은 기철 씨를 ‘과거에 무슨 일로 형무소에 갔다 나온 사람’으로 알고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 그래서 기철 씨와 가까이하기를 꺼린 사람들도 많았다. 기철 씨와 가깝게 지냈던 박덕구 노인은 “그 사람은 자기의 과거 이야기는 한 번도 입에 올리지 않았으므로 몇 년 친하게 지냈지만 옥살이가 억울한 것이었다는 사실은 몰랐다”고 했다.
“언젠가 한번 술을 마시더니 서류 보따리를 꺼내 보여주면서 이걸 읽어보겠느냐고 합디다. ‘좋다, 보자’고 했더니 다시 서류를 집어넣으면서 ‘나중에 보여주겠다’고 발뺌하더군요. 그것이 무엇인지 그 뒤로는 관심도 두지 않았습니다.”(이웃 전치근 씨의 증언)
이웃 사람들에겐 ‘형무소 다녀온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고 그래도 변명 한 마디 늘어놓지 않았던 기철 씨였지만 그 억울과 고통의 기록만은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이것만 있으면 변명을 구차하게 늘어놓지 않아도 나의 결백은 증명된다’고 생각했던지 기철 씨는 늘 그 문서 보따리를 머리맡에, 또는 요 밑에 깔고 잤다는 것이다. 기철 씨가 교도소를 나올 때 왼손에 들고나온 이 서류 보따리엔 재판 기록과 함께 그가 감방 안에서 써둔 두툼한 수기가 들어 있었다.
안창 마을 사람들에게 기철 씨는 또 ‘술을 밥 먹듯 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술친구 노릇을 여러 번 했다는 박덕구 씨는 “퇴근하는 길에 자주 나를 찾아와 소주를 마셨는데 주정하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말했다. 술이 들어가면 더욱 과묵하게 되는 그는 時局談(시국담)이나 자기 과거사는 절대로 입에 담지 않았으며 꼭 필요한 농담만 몇 마디 하다간 “자러 갈랍니다”며 자리를 털고 일어나 불 꺼진 그의 오막살이로 가버리곤 했다는 것이다.
“서울에 한번 올라가야 할 텐데… 서울에 꼭 한번 가야 하는데….”
술로 고통의 기억을 씻어내려고 폭음을 거듭하던 기철 씨는 가끔 이렇게 중얼거리곤 했다. 서울에 올라가 김태현 검사를 만나야겠다는 뜻이었다. 양아들 창식에게는 딱 한 번 “금식이 때문에 내가 이 지경이 됐다”면서 자기를 근하 군 살해사건의 범인 조작극에 물고 들어간 친구를 원망했다고 한다[금식 씨는 “前科(전과)가 없는 깨끗한 기철 씨를 끌고 들어가면 나중에 이 각본에서 발뺌하여 나의 무죄를 입증하는 데도 수월할 것 같아서 그렇게 했다”고 말했었다].
이만 씨에 따르면 출소 얼마 뒤 김금식 씨는 정종을 한 병 사들고 자기에게 사과하러 왔더란 것이다. “금식이의 얼굴을 보니 갑자기 가슴이 꽉 메이고 눈앞이 캄캄해지고 말이 안 나오더군요. 꿇어앉아 있는 금식이에게 겨우 ‘그러면 못 쓴다’고 한마디 했더니 슬금슬금 달아나버립디다. 그 자리에 더 있었다면 내 손에 맞아 죽었을 겁니다.”
기철 씨는 1979년 가을 봉제공장 경비원 자리도 그만두었다. 몸이 더 지탱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뒤 그는 본격적으로 드러누워 버렸다. 이제 그는 급속도로 쇠약해져갔다. 몸은 바짝바짝 마르고 밤만 되면 가슴이 쑤신다고 했다. 비탈길을 오르면 숨이 가빴고 기침을 길게 자주 했다. 100미터쯤 떨어진 큰형 집까지 내려오는 데도 여섯 번이나 쉬어야 할 정도였다. 그래도 병원에 입원할 여유가 없었다. 한의원에서 약을 지어와 먹는 것이 고작이었다. 기철 씨는 病中(병중)에도 친척이나 이웃의 금전적인 도움을 일체 받지 않았다. 경비원 근무 때 모아둔 돈으로 그는 생계비와 약값을 대었다. 남에게 신세를 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던 기철 씨는 혼자서 몸을 일으키기도 어려울 만큼 병세가 악화되자 머리맡에 전등 스위치와 溫水(온수)를 끓이는 커피포트 비슷한 시설을 해놓고 될 수 있는 대로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생활하려 했다. 양아들이 오면 벽에 비스듬히 기대게 해달라고 해서 책을 읽거나 볼펜으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그가 病席(병석)에서 즐겨 읽던 책은 무협소설과 애정소설이었다.
힘과 사랑. 둘 다 그가 이 세상에서 진정하게 소유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주제였다. 그래서 상상으로나마 이 세상에서 ‘힘’이란 것이 정말 어떤 것인지, 正義(정의)란 것은 힘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사랑이란 무슨 맛을 가졌는지를 알고 느껴보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즈음부터 기철 씨는 “내가 빨리 나아야 서울에 올라갈 텐데…”란 말을 자주 되풀이했다.
“한번은 만나야 된다, 한번은 올라가야 한다….”
未決(미결)로 남겨놓은 恨(한)을 빨리 풀어야 하겠다는 조바심은 자신의 생명에 대한 어떤 예감 때문에 더욱 강해졌을 것이다.
1980년 2월 기철 씨는 창식 씨의 부축을 받고 이만 씨의 집으로 내려왔다. 祖母(조모)의 제삿날이었다. 이 자리에서 기철 씨는 큰형에게 “형님, 아무래도 여름을 넘길 수 없을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
“형제들 앞에서 그게 무슨 말이냐!”
이만 씨는 호통을 쳤지만 자지러지는 기침을 조카들 앞에서 보이기 싫다면서 비탈길을 허우적거리며 자기 집으로 올라가는 동생의 뒷모습에서 그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기철 씨는 그 무렵 집을 팔았다. 45만 원을 받고 마산에 사는 전병길 씨에게 판 뒤 다시 20만 원을 주고 같은 방에 專貰(전세) 들었다. 나머지 25만 원으로 그는 동네 구멍가게에 진 빚을 다 갚고 잉어국을 끓여달라고 형수에게 몇 만 원을 주었다.
양아들 창식에겐 “죄짓고 살아선 안 된다”, “형수가 나 때문에 고생했다. 할아버지에게 잘해드려야 한다. 내 제사를 부탁한다”는 유언 비슷한 말을 하기도 했다. 서류 보따리를 가리키면서 “내가 죽더라도 이걸 잘 보관하고 있어라. 너에게 혹시 큰 득이 될지 모른다”고 당부도 했다.
再起에 성공한 ‘초대 眞犯’
한편 전경렬 씨는 세파를 꿋꿋하게 헤치며 나갔다. 1976년에 회사를 옮겨 사상공단에 있는 큰 식품제조업체의 총무과에 들어갔다. 1978년 1월엔 옷 맞춤집을 경영하던 처녀와 중매결혼을 했다.
“결혼 같은 것은 생각도 안 했는데 선을 본 뒤 저 여자 같으면 나를 이해해줄 것이란 믿음이 생겼습니다.”
결혼 뒤에도 두 부부는 맞벌이를 계속했다. 두 해 전에는 비록 빚을 내기도 했지만 부산대학교 부근에 時價(시가) 3000만 원쯤의 ‘내 집’도 장만했고 딸도 갖게 됐다. 동대신동에 살던 노부모와 남동생들까지 데리고 와 一家(일가) 3대가 단란하게 살고 있다.
“그렇게 봐주시니 고맙습니다만 저는 아직도 그 악몽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약과 떨어질 수 없는 병자입니다. 내가 누워버리면 집안이 엉망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깡으로 버티는 겁니다. 젊은 놈이 신경통에 걸려 있질 않습니까, 책이나 신문을 읽습니까? 활자나 숫자를 보면 자꾸만 골똘한 생각에 빠져들어 머리가 이상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무엇을 읽는다는 게 겁이 나요. 선생님에게 오늘 이렇게 말씀드린 죄로 해서 오늘 밤엔 잠을 못 이룰 겁니다. 간혹 그 나흘간의 기억이 되살아납니다. 그러면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휘말려 드는 것을 느껴요. 그 사건은, 저에게 4년보다도 더 긴 나흘이었습니다.”
요즘도 자기 이름을 보고 그 사건을 얘기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다고 한다. 동대신동엔 그가 죽었다는 말도 퍼져 있다고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나흘간의 기억은 새로워지기만 한다고 했다.
“저는 신문에 대해선 별 유감이 없습니다. 저를 범인으로 꼽고 사진까지 실었던 그들이지만 그렇게 떠들어주지 않았으면 저는 더 오래 끌려다니며 고통을 당했을 겁니다. 또 저의 가정교사 제자들을 찾아가 저의 알리바이를 증명해주신 분들도 기자들 아니었습니까? 6·25 상이용사인 아버지를 기자들이 불구자라고 쓰고, 그렇기 때문에 나의 성격이 비뚤어졌을 것이라고 거짓말을 해갈 땐 원통했습니다만 모든 것이 배경이 없었던 때문이 아니었겠습니까? 이런 얘기는 다시 하고 싶지 않지만 나의 교훈이 기록으로 남겨져 경찰의 마구잡이 수사를 고치는 데 보탬이 된다면 좋겠습니다.”
담담하게 말하는 아들 옆에서 그의 어머니가 “며느리가 알게 되면 어쩌나?”라고 울상을 짓는다.
“그 사람도 알고 있어요. 몇 달 전에 내 문패를 보고 누가 그 사건을 아느냐고 집사람에게 묻더랍니다. 그때 비로소 저도 결혼 뒤 처음으로 그 일을 아내에게 털어놓았죠.”
아내에게조차 말하기 싫은 기억을 되살려낸 미안감에서 나는 서둘러 일어났다. 저녁을 먹고 가라는 경렬 씨 一家의 권유를 뿌리친 나는 비교적 밝은 마음으로 대문을 나설 수 있었다.
“벌써 14년이나 됐습니까? 1년만 지나면 그놈을 잡아도 벌을 줄 수 없다는 말이죠?”
55세의 半노인이 된 최형욱 씨는 감개무량한 듯 이렇게 입을 뗐다가 김태현 검사와 김금식 씨의 근황부터 나에게 물었다. 1981년 7월 서울 교외에서 아내와 함께 나를 만난 최 씨는 억센 함경도 사투리로 연옥 같았던 일 년 두 달을 얘기했다. ‘소설 꾸미는 짓’이란 말을 되풀이 써가며 그는 “범행을 수사 단계에서부터 부인한 것은 나와 기철 씨뿐이었고 그 때문에 우리 두 사람이 가장 많이 당했다”고 말했다.
최 씨는 부산을 뜬 뒤 대구에 몇 년 있다가 서울로 올라와 작은 음식점을 경영하고 있었다. 깡마른 몸집에 검게 탄 얼굴이 건강체인 것처럼 보이게 하지만 그도 전경렬 씨처럼 속병을 앓고 있었다. 신경통에다가 허리가 성하지 못해 날씨만 찌푸려지면 뼈마디가 쑤시고 그때마다 기억하기도 싫은 그 생각이 자꾸 떠올라 울적해진다는 것이었다. 수사관과 신문기자들의 이간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근하 집과는 지금도 자주 교류가 있다고 했다.
그도 교도소를 나올 때 재판 기록을 갖고 왔다. 그러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하여 그 문제를 다시 곱씹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이 커가자 혹시 재판 기록을 보게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생겼다. 그래서 몇 년 전 최 씨의 아내가 그 기록을 불태워 없애버렸다고 한다.
“딸애가 중학교에 다니는데 무척 영리하단 말이에요. 그걸 읽으면 나를 동정하기 전에 못난 아빠라고 비웃지 않겠어요?”
가장 가까운 혈육과도 나눠 가질 수 없는 원한의 응어리를 가슴에 간직한 채 그는 살아갈 모양이었다.
“한번 멋지게 살아보지도 못하고…”
모진 추위가 물러가고 안창 마을에도 봄이 찾아왔다. 놀이터에서는 다시 어린이들의 생기 찬 소리들이 들려왔고 하늘과 가까운 기철 씨의 두 평짜리 집 근처 언덕에서도 파란 새싹들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생명의 존귀함과 끈질김을 다시 한 번 깨우쳐주는 화사한 봄의 나날들 속에서 기철 씨는 외롭게 시들어가고 있었다.
교도소를 나온 뒤 그 스스로가 사람들을 멀리한 탓으로 찾아오는 친구들은 아무도 없었다. 안창 마을에 이사 온 이후 사귄 사람들, 나이가 모두 기철 씨보다 훨씬 많은 그들이 가끔 음식을 해와 억지로 먹이곤 했다. 이틀에 한 번씩 찾아오는 양아들 창식이 대소변을 받아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웃에 사는 전치근 씨와 박덕구 씨, 둘 다 몸이 성치 못한 사람들이 가끔 기철 씨의 방을 찾아와 말동무가 돼주기도 했다.
어느 날 기철 씨는 창식 씨 앞에 장부를 내놓았다. 홀로 살면서 꼼꼼하게 적은 가계부였다. 기철 씨는 조카에게 외상 진 상점과 돈 받을 사람들을 가르쳐주었다. 나중에 기철 씨의 빚을 다 갚고 나니 받을 돈이 15만 원쯤 남더란 것이다. 기철 씨는 그를 파멸로 이끈 이 사회에 조그마한 빚도 남기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기철 씨는 또 창식 씨에게 “내가 죽거든 시계, 라디오, 텔레비전을 네가 가져라”고 말하고 거듭 “내 제사를 부탁한다”고 했다.
기철 씨의 병세가 위급해지자 아버지 김우근 씨도 자주 들르게 됐다. 기철 씨 때문에 아내와도 일찍 死別(사별)하고 가슴에 못이 박혀버린 김 노인은 용호동의 어느 주차장에서 계수원으로 일하며 혼자 지내고 있었다. 그는 죽어가는 아들의 머리를 쓸면서 “연애도 한번 못 해본 이 자식아…”라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기철 씨는 이제 서서히 정신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헛소리가 자주 새 나왔다. 주로 간호를 하는 양아들에게 하는 말이었다.
“죽어도 물려줄 것이 없구나….”
“한번 멋지게 살아보지도 못하고….”
“네 어머니에게 잘해드려라.”
“나으면 나하고 서울 가자. 내 한 몸 죽더라도 너 하나는 호강시켜주겠다.”
이런 헛소리 사이사이로 그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래도 원한에 사무친 악담은 한 번도 하지 않더라고 가족들과 이웃들은 증언하고 있다. 창식 씨에게만은 ‘그놈의 자식 때문에…’라고 신음하듯 내뱉기도 했으나 긴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날도 창식 씨는 나무토막들을 주워 모아 감싸 들고 비탈길을 올라갔다. 신발 공장에 다니는 그는 어머니와 번갈아 가며 기철 씨를 간호하고 있었다. 아궁이에 나무토막을 쑤셔 넣어 불을 피운 뒤 방에 들어갔더니 기철 씨가 힘없이 말했다.
“창식아 너 어디 있었노? 얼마나 찾았다고….”
그리고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다. 창식 씨는 밤늦게까지 기철 씨를 지키고 있다가 집으로 내려왔다. 이웃에 사는 전치근 씨가 문병 왔다가 기철 씨 옆에서 같이 잠에 빠졌다. 새벽 네 시쯤 됐을까, 눈을 뜨고 기철 씨를 불러 보니 대답이 없었다. 흔들어 봐도 기척이 없다. 벌떡 일어나 정강이를 만져보니 싸늘하게,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그의 마흔세 번째 생일을 두 달 앞둔 춘삼월의 새벽이 부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총각 귀신’이 되다
1980년 3월14일 오후 <국제신문> 사회부장 장양수 씨는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김금식 씨 아시죠?”
“알지요.”
장 부장은 근하 사건 재판을 취재하면서 김금식 씨와는 낯이 익었던 것이다.
“그분 부탁으로 전화를 거는데요. 김기철 씨가 지금 다 죽어가고 있답니다. 신문에 내서 치료비라도 좀 보태주는 게 좋겠다고 합디다….”
다음날 장 부장은 기철 씨 집에 이문섭 기자를 보냈다. 李 기자가 알려온 것은 기철 씨가 마침 그날 새벽에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백지처럼 깨끗한 청년이었는데….”
장양수 씨는 조사부에서 갖고 온 기철 씨의 천진난만한 ‘童顔(동안)’을 바라보며 가슴에 닿는 슬픔 같은 것을 꾹 눌렀다.
기철 씨의 시체는 가벼웠다. 창식 씨는 “50킬로그램밖에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고 했다. 한창 때 80킬로그램에 육박했던 몸이었다.
“옷을 벗겨보니 어깻죽지와 가슴 전체에 울긋불긋한 멍 같은 반점이 퍼져 있더군요. 삼촌이 저것 때문에 밤만 되면 아프다고 술을 잡수셨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납디다.”
가족들은 기철 씨의 거의 비틀어진 목과 내려앉은 어깨를 바로 펴고 염습을 끝낸 뒤 관 속에 넣었다. 한의사가 사망진단서를 뗐지만 기철 씨의 病名(병명)을 가족들도 아직 모르고 있다. 엑스선 사진에는 폐가 이상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느니, 죽기 전에 황달기가 있었다느니 하지만 진찰다운 진찰을 받아본 적이 없는 기철 씨였으므로 직접 死因(사인)이 된 病名은 확실치 않다. 이웃에선 폐결핵으로 알고 있지만.
다음날 기철 씨의 시신은 당감동 화장장에서 한 줌 재로 변했다. 무지막지한 폭력 수사에도 몸으로 때우며 조금도 굴하지 않고 시종일관 ‘나는 결백하다’고 버티었던 그 육체는 수천 도의 불길 속에서 연기가 돼 사라져갔다. 창식 씨는 화장장 뒷산으로 올라가 파릇파릇 돋아나는 새 생명들 위에 묵은 생명의 파편들을 뿌렸다. 김우근 씨는 ‘아비보다 먼저 간 불효자식’의 주검을 떠나보내며 실성한 듯 몸부림치며 울부짖었다.
가족들은 개금동의 어느 절에 기철 씨의 위패를 안치, 총각 귀신의 원혼을 달래줄 것을 부탁했다.
몇 달 뒤 큰형 이만 씨는 또 한 번의 화장식을 가졌다. 기철 씨의 그 기록집을 부산항이 눈 아래 보이는 마당에서 불질러버린 것이다. 이만 씨는 바위 같은 주먹으로 자기 머리를 꽝꽝 치고 눈물을 펑펑 쏟으며, 불꽃과 연기를 노려봤다. 기철 씨가 감방에서 편지지와 갱지 위에 깨알처럼 적어 넣은 뒤 세 권으로 묶어두었던 그의 手記(수기)는 출소 뒤 한 번도 남에게 읽히지 못하고 재로 변해버린 것이었다.
“그 기록 뭉치만 보면 진절머리 나는 생각이 떠올라 못 견디겠습디다. 누구는 그걸 가지고 검사를 찾아가자고 했습니다만 손해배상청구까지 포기한 우리가 이제 와서 이것으로 흥정을 할 수 있겠습니까? 집안에 두면 잡념만 생길 것 같아서 불태웠죠. 선생님 같은 사람이 찾아오실 줄 알았더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내 앞에서 김이만 씨는 혀를 끌끌 차면서 자신의 경솔한 행동을 후회했다.
1981년 7월12일 기철 씨의 아버지마저 뇌출혈로 세상을 하직했다. 향년 69세였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덮어 씌워진 ‘살인마의 가시관’이 벗겨지는 것도 못 보고, 아들은 그 누명의 굴레에서 영원히 탈출하지 못한 채 恨(한)을 품고 죽어갔으며 아버지는 두 사람의 죽음이 준 전기고문 같은 고통을 쓸어안고 걷다가 고목처럼 쓰러져버린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