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디 자식 앞세우지 말고, 자는 듯이 가고 싶다. 우리 할머니 살아생전에 늘 하시던 말씀이다. 인명이 재천이라 아들 둘을 먼저 보내셨으나 자는 길로 가고 싶다는 소원은 원대로 되셨다. 사람이 마흔이 넘으면 먼저 가는 사람이 형님이다. 나이순으로 가는 것도 아니고 반드시 약골(弱骨)부터 가는 것도 아니며 아무리 자본주의라도 가난뱅이부터 가는 것도 아니다. 누가 언제 어떻게 갈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므로 마흔 넘어 우리가 성심으로 기도할 바는 그저 곱게 가게 해 달라는 것일 뿐이다.
내 지인의 부친은 일흔넷에 암 수술을 받고 7년 뒤에 돌아가셨는데, 그 기간 동안 온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하루걸러 비상을 거는 바람에 아들 딸 다섯이 편할 날이 없었고, 이 과정에서 간병을 둘러싸고 형제간에도 의가 상했다. 수중에 있던 최소 3억 원 이상을 보약과 약값으로 다 쓰셨다. 아들 되는 사람은 부친이 더 사셨으면 집까지 날릴 뻔 했다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가 하면 3억원은커녕 버스 값 3백 원으로도 행복해 했던 시인 천상병은 귀천(歸天)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우리는 죽음을 모른체 하며 살아간다. 죽음은 필경 일생일대의 중대사인데 우리는 죽음에 대해 길게 말하지 않는다. 햇살에 빛나는 잔설(殘雪)처럼 죽음이 가끔 우리의 옆구리를 시리게 찌를 때도 우리는 그저 큰 숨 한 번 내쉬고 우리가 만들어놓은 분주한 일상 속으로 돌아간다. 공자님도 죽음을 외면했다. 계로(季路)가 귀신 섬기는 방법을 물었을 때 공자님은 “사람 섬기는 것도 모르는데 귀신 섬기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라고 대답하셨다. 약간 미련한 자로(子路)가 다시 죽음에 대해 묻자 공자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는 것도 모르겠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未知生 焉知死).”
죽음에 대한 관심과 대책이 없었으므로 공자님은 우리와 별반 다름없이 ‘태산이 무너진다’고 탄식하면서 죽음을 맞았다. 4대 성현 중 공자님을 제외한 나머지 분들에게는 죽음이 삶 못지않게 중요하다. 예수와 마호메트는 사후세계를 철석같이 믿었고, 석가모니는 죽음을 중심에 놓고 삶을 재구성했다. 그러므로 불교도라면 생사일여(生死一如)요 죽음은 다만 육신의 옷을 벗는 것이니 홀가분할 것이고, 신을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곧 천국에 드는 일이니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찬송할 뿐이다.
관념으로서의 죽음에 대해서는 그렇더라도 죽는 방식이나 죽어가는 과정에 대한 걱정은 신자나 비신자나 매일반일 것이다. 모두들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키며 죽기를 바란다.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꼽는 웰다잉(well-dying)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가족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누구에게든 폐를 끼치지 않고 가려면 성능 좋은 배터리처럼 죽기 전까지는 씽씽했다가 어느 한 순간 명줄을 놔야겠는데, 그래야 본인도 편하고 가족도 편할 텐데 그게 어디 쉬운가.
웰다잉하기 위해 웰빙해야 한다거나, 웰빙하면 저절로 웰다잉한다는 말은 필시 훌륭한 말일 것이지만 내게는 잘 와 닿지 않는다. 잘 먹고 잘 살자는 것이 죽음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잘 모르겠다. 나는 잘 죽기 위해서는 사는 동안에 가끔씩 죽음을 불러내서 죽음과 노닥거리고 죽음과 친숙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일상이 치열하거나 말거나 마침내 죽음 뒤에 올 저 천길만길 낭떠러지와 끝 간 데 없이 막막한 어둠과도 친해져서 언제 죽음이 오더라도 담담해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 좋은 방법은 훌훌 털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죽음의 창날은 도시에서, 문명 속에서 더 날카롭게 번득인다. (내 개똥철학으로는 문명은 죽음의 자식이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길게 말하지 않겠다.) 자연과 더불어 살았던 우리 조상들은 구태여 죽음을 불러내지 않아도 하루에도 몇 번씩 죽음을 목격하고 체득하여 노력하지 않고도 저절로 잘 죽을 수 있었다. 해는 솟았다 지고 꽃은 피는 듯 지기를 거듭하니 자연에서는 삶과 죽음이 한통속이다. 자연이야말로 생사일여의 경지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