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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6년 전에 제가 비슷한 글을 올린 바 있었으나,
요즘 백제사 시리즈를 읽어본 결과 제 지식 자체가 상당 부분 업데이트되어, 이에 해당 글을 삭제하고 수정한 후 다시 올립니다.
그래봐야 제 자의적 재구성인 건 변함이 없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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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가 실질적으로 건국된 연대, 즉 고구려 계루부 집단이
경기도 일대에 내려온 건 대단히 호의적으로 봐줘도 2세기 중반이고,
적어도 3세기 후반은 내려와야 학계에서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게 현실입니다. 또한 석촌동의 고구려식 묘제라는 기단식 적석총도 실인즉슨 원래는 분구묘였던 무덤들을 훗날 적석총으로 개장했다는 의혹이 강합니다.
저는 범인(?)이 고이왕 아니면 비류왕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백제에서 고구려 계루부 계열이 최종 헤게모니를 틀어쥔 건 변함이 없으나, 그 지배집단이 계루부로 일원적이진 않다는 심증은 피할 길이 없는거죠.
해서 대강 온조부터 고이왕까지의 기년을 약간 손 봐서 맞춰봤습니다.
물론, 이 맞춤은 제가 자의적으로 한 것임을 다시 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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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봐도 고의적으로 49 +51인 다루왕과 기루왕 같은
비정상적으로 긴 재위 년도들은 물론이요, 기년이 확실해지는 근초고왕 이후의 평균 재위 년도에 비슷비슷하게 맞춰주니 대강은 견적이 나오네요.
또한 고구려에서 혼란이 있을 때마다 고구려를 떠난 흐름들이 적어도 세 부류는 있었다는 걸 감안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번째는 주몽이 졸본부여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떠난 소노부 계열인데 아마 이들이 훗날 비류 집단과 연계가 있을 걸로 저는 생각합니다.
두번째는 모본왕 사후 태조왕, 차대왕, 신대왕 시기에 있을 때까지 2세기 경에 고구려에서 있던 혼란 와중에 고구려를 떠난 집단이 있었고,
세번째는 197년에 고국천왕 사후 벌어진 고구려의 혼란 와중에서 고구려에서 벗어나 공손 정권에게 온 고구려 출신 이주민들이 있었던 것도 백제의 형성과는 무관하지 않았을 걸로 생각합니다.
247년 기리영 전투에서 활약한 임진강 이북 마한 세력(신분고국을 비롯한)은 즙석식 적석총 혹은 무기단식 적석총을 임진강 이북에서 2세기 경부터 만들었던 집단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고, 이 집단이 낙랑군과의 투쟁에서 패배한 후 그 일부가 임진강 이남으로 도피하여 伯濟국과 연합했을 개연성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편의상 이들을 十濟라고 일컫습니다. 十濟는 기리영 전투에서 패배한 후 한성에 있는 백제국으로 넘어가서 연합했으며, 이는 충주에 자리잡았던 김씨 집단이 사로국으로 넘어갔을 때와 대강 비슷한 패턴이라고 생각합니다.
백제 왕계는 온조-초고 왕통과 비류-고이 왕통이 경쟁 혹은 연합했다는 학설도 있는데, 아예 두 왕통이 본래는 별개의 나라를 운영했다가 나중에
합쳐진거란 설명도 꽤 매력적이지만 적어도 고이왕은 합쳐진 이후의 임금이 분명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저는 고이왕 이전의 연합하기 전 비류계열 임금들은 다루-기루-개루 등이었고, 가상 인물이란 혐의마저 있는 온조는 아마 있었어도 연합하기 전 시점 임금이었을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루-기루-개루 등은 이름들이 비슷비슷한데 어쩌면 부자 관계가 아니라 각기 형제 관계가 아니었나 그냥 제 멋대로지만 망상해봅니다. 그래서 가상 재위 기간은 많이 줄였습니다.
초고왕 때부터 아마 이 가상 十濟국은 伯濟국과 혼인 등의 관계가 있었고 고이왕도 따라서 十濟와 혈연은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초고왕 당시 十濟가 낙랑-대방군에게 밀려 한강 이남으로 집단 이주하여 개루왕 휘하로 들어가 연합 왕국을 이뤘고, 연합하기 전의 초고왕은 개루왕의 사위 자격으로 휘하에 있다가 마치 석탈해가 그러했던 것처럼
연합 왕국의 수장이 되지 않았나 그 생각은 듭니다.
그렇게 개루왕 사후 초고-구수가 연합 왕국의 대표였으나 이후 사반왕이 어린 틈을 타 개루왕 아들이자 초고왕의 처남인 고이왕이 왕위를 되찾아오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해봅니다.
한편 온조는 아마 실제로는 주몽 아들이 아닌, 고국천왕의 동생 고발기의 알려지지 않은 아들이거나 혹은 그 동조 세력인 계루부 왕실 자손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어쩌면 아예 가공인물이었을 수도?
가상 즉위년 | 가상 재위 기간 | 삼국사기상 재위기간 및 비고 | |
온조(十濟) | 207 | 20 | 46 |
비류(伯濟) | ??? | ?? | X 다루왕은 비류의 후손일 것으로 가정 |
다루(伯濟) | 192 | 10 | 49 |
기루(伯濟) | 202 | 10 | 51 |
1대 개루(伯濟)(百濟)(24?이후 연합) | 212 | 38 | 38 |
2대 초고(十濟)(百濟) 24? 년 이후 연합 왕국 2대 | 227 | 24 | 48 |
3대 구수(百濟) | 251 | 15 | 20 |
4대 사반(百濟) | 266 | ||
5대 고이(百濟) | 266 | 20 | 52 |
6대 책계(百濟) | 286 |
풍납토성 방사성 측정 연대
분석과학 제25권 제5호, 2012.10, 324-332 (9 pages)
OSL 연대측정을 통한 풍납토성 축조연대 산출
풍납토성의 축조연대 편년을 위해 각 토기 시료의 OSL 연대와 고고학적 맥락, 14C 연대 등을 종합하여 판단한 결과, 풍납토성의 초축시점을 294±52 yrs AD (1σ SE), 제 III 단계 증축을 328±30 yrs AD (1σ SE), 최종성벽의 완성을 400±76 yrs AD (1σ SE)로 비정하였다. 따라서 풍납토성은 서기 3세기 후반에 초축된 이후 475년 백제의 웅진천도 이전까지 여러 번의 중축 및 개축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한편 신라는 제대로 국가가 건국된 건 아무리 올려잡아도 고고학적으로는 2세기라고 합니다.
신라도 기년이 여러모로 이상한 건 백제와 마찬가지인데, 일단 눌지 마립간부터는 기년 조작이 없었다고 보고 대강 맞춰봤습니다. "한울리카"님 및 "라이트온"님의 글을 대부분 참조했고, 최근 제가 강종훈 선생님의 저서를 보고 깨달은 바 있어서
(1. 기년은 믿을 수 없으나, 혈통과 계보 관련한 언급은 취신할 만하다.
2. 자의적으로 몇몇 왕을 재위한 왕에서 빼는 건 옳지 못하다.
3. 소속 족단의 대표였던 기간과 신라 전체의 대표였던 기간을 재위기에 합산한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관련한 부분은 재위 기간은 박혁거세, 흘해, 실성 외엔 건드리지 않되 실제론 상당 부분 겹치는 걸로 봤습니다. 다음은 고고학이 아니라 문헌만 봐도 드러나는 삼국사기 기년의 문제입니다.
1.박제상 (363 출생 ~ 419 사망)
三國史記卷第四十五 열전 제 5 박제상
파사 이사금 5세손이고 조부는 아도 갈문왕이었으며, 아버지는 물품 파진찬이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파사이사금은 A.D 112년에 죽었고 박제상은 A.D 363년에 출생했다.
파사이사금과 박제상은 5세대 차이인데도 불구하고 생몰이 241년 가량 차이가 난다.
비슷한 사례를 근세라 생몰이 정확한 조선 왕조의 예를 통해 참조해보자.
조선 왕조의 현종은 1674년에 사망했는데 그 5세손 순조는 1790년에 출생했다.
현종-숙종-영조-사도세자-정조-순조
이중 사도세자와 순조가 상당한 늦둥이였고 영조는 차남이었으며 숙종이 그렇게 빨리 본 자손이 아닌데도 116년 차이다.
또 보자. 이자춘은 1361년에 사망했는데 그 5세손 예종은 1450년에 출생했다. 91년 차이. 다른 사례가 더 있다. 비교적 역시 근세고, 효종의 동생인 인평대군은 1658년에 죽었다. 한편 대원군의 부친이자 인평대군의 5세손인 남연군은, 1788년 생이다.
인평대군은 요절한 편이고 남연군의 가계는 별로 적장자 가계가 아닌데도-남연군의 3대조는 인평대군의 장남 복녕군의 3남이다 -차이가 130년에 불과하다.
삼국사기의 기년이 확실히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다.
2. 아달라 이사금의 기년 문제
고대 왜왕국에서 히미코(卑彌呼, 비미호)라는 전설적인 여왕이 있었음이 중국의 사서와 삼국사기에 나온다.
삼국지 위지왜인전(魏志倭人傳)
238년 중국의 魏가 공손씨를 멸망시킴으로써 낙랑대방 2군이 魏에 속하게 되자 여왕 히미코는 대방군을 통하여 위의 수도 낙양에 사절을 파견했다. 魏의 황제는 이들을 환대했으며 여왕에게 ‘親爲倭王’이란 칭호를 ?授했다
경초(景初) 2년(239년) 6월에 왜의 여왕이 대부 난승미 등을 보내 군에 찾아들어 천자를 예방하고 공물을 바치기를 바랐다. 태수 유하가 관리로 하여금 인솔케 하여 경도에 이르렀다. 그해 12월에 조서를 내려 왜 여왕에게 답했다. "친위왜왕 비미호에게 조서를 내린다.
정시(正始) 8년(247년)에 태수 왕기가 관에 도착하였다. 왜 여왕 비미호가 구노국의 남자 왕인 비미궁호와 평소 화목하지 못했는데, 왜의 재사와 오월 등을 찾아들게 하여 서로 공격한 상황을 설명하게 하였다.
본래 그 나라는 또한 남자가 왕이 되어 7-80년을 지낸 뒤에(住七八十年)[집해5] 왜국(倭國)에 난이 일어 여러 해 동안 서로 공벌(攻伐)하니 이에 함께 여자 한명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그녀의 이름은 비미호(卑彌呼, 히미코)라 하는데, 귀도(鬼道, 술법)를 행하여 뭇 사람들을 능히 미혹하고 나이가 이미 많으나 남편은 없고 남동생이 있어 치국(治國)을 보좌하였다. 왕이 된 이래로 그녀를 본 사람이 적었고 계집종 천명에게 시중들게 하며 오직 남자 한 명이 있어 음식을 공급하고 (비미호의) 말을 전하면서 출입하였다. 거처(居處)하는 궁실(宮室)에는 누관(樓觀, 누각), 성책(城柵)을 엄히 설치하였고 늘 병기를 지니고 수위(守衛)하는 자가 있었다.
집해5]沈家本曰御覽作漢靈帝光化中六字范書作桓靈間。
[집해5] 심가본(沈家本) 왈, 「태평어람」(권782의 위지 인용문)에는 ‘ 漢靈帝光化中 ’(한 영제 광화 연간에)의 여섯 글자가 적혀있고, 범엽의「후한서」에는 ‘ 桓靈間 ’(환제, 영제 사이에)으로 적혀 있다.
※ 태평어람 - “(위지 왈) 후한 영제(靈帝) 광화(178-183년) 연간에 왜국에 난이 일어 서로 공벌하여 안정되지 못하니 이에 여자 한 명을 세워 왕으로 삼았으니 그녀의 이름은 비미호였다. (漢靈帝光化中, 倭國亂 ,相攻伐無定,乃立一女子 爲王,名 卑彌呼) / 후한서 동이열전 왜전(倭傳) - “ 환제, 영제 사이에 왜국(倭國)에 대란이 일어 서로 공벌했다 ”(桓、靈閒, 倭國大亂, 更相攻伐)
景初二年六月,倭女王遣大夫難升米等詣郡,求詣天子朝獻,太守劉夏遣吏將送詣京都
(위나라 명제) 경초(景初) 2년(238년) 6월[집해6](※), 왜여왕(倭女王)이 대부(大夫) 난승미(難升米) 등을 (대방)군(郡)으로 보내 천자에게로 와서 조헌(朝獻)하기를 청하니(대방)태수 유하(劉夏)가 사자를 보내 그들을 데리고 경도(京都)까지 호송하게 했다
아달라이사금 20(173)년조, “5월에 왜국(倭國) 여왕 히미코(卑彌乎)가 사신을 보내 예방해 왔다”는 기록이 있다.
히미꼬가 위에 사신을 보낸것이 238년 무렵이고 247년에도 기록에 나타난다. 그런데 신라의 아달라이사금 20년에 신라에 사신을 보낸 것이 삼국사기에 나타나는데 이때는 173년으로서 히미꼬의 재위기간이 너무 길고 중국사서의 기년이 틀리지 않으므로 삼국사기의 기년에 문제가 있음을 알수 있다.
3.벌휴왕이 탈해왕의 손자라는 문구
伐休<一作發暉>尼師今立 姓昔 脫解王子仇鄒角干之子也 母姓金氏 只珍內禮夫人 阿達羅薨 無子 國人立之 王占風雲 預知水旱及年之豊儉 又知人邪正 人謂之聖」
벌휴이사금(A.D 184~196년) [발휘라고도 함]의 성은 석씨요, 탈해왕의 아들인 각간 구추의 아들이요, 어머니의 성은 김씨니 지진내례부인이다. 아달라왕이 돌아가고 아들이 없으니 나라 사람이 추대하여 세웠다. 탈해왕은 A.D 80년에 죽었는데, 그 손자인 벌휴이사금은 A.D 196년에 죽었다고 적혀 있어, 조부가 죽은지 116년 후에 손자가 죽었다고 적혀 있다. 불가능하진 않으나 썩 믿기 어렵다.
4.눌지왕이 말구 각간의 손자라는 문구
八年 春正月 拜末仇爲伊伐 末仇忠貞有智略 王常訪問政要.
유례이사금:A.D 283~298년) 8년 봄 정월, 말구를 이벌찬에 임명하였다. 말구는 충직하고 지략이 많았다. 왕은 자주 그를 찾아가서 정사의 요령을 물었다
奈勿一云那密尼師今立 姓金 仇道葛文王之孫也 父末仇角干 母金氏休禮夫人 妃金氏 味鄒王女 訖解薨 無子 奈勿繼之 末仇味鄒尼師今 兄弟也」
내물이사금(A.D 356~402년) [나밀이라고도 함]의 성은 김씨요 갈문왕 구도의 손자다. 아버지는 각간 말구요, 어머니는 김씨 휴례부인이요, 비는 김씨 미추왕의 딸이다. 내물왕이 돌아가고 아들이 없어, 내물이 계승하였다(말구는 미추이사금 과 형제간) 말구末仇는 미추의 동생으로 미추이사금의 재위기간은 (A.D 262~283년)이고 유례이사금이 그를 이벌찬에 임명한 해가 291이다. 그런데 손자인 눌지마립간의 재위기간은 (A.D 417-458년) 으로 2세대에 생존시기가 150년 가량 차이가 난다.
이는 말도 안된다.
5. 내물왕과 실성왕이 미추왕의 사위라는데?
奈勿一云那密尼師今立 姓金 仇道葛文王之孫也 父末仇角干 母金氏休禮夫人 妃金氏 味鄒王女
내물이사금(A.D 356~402년) [나밀이라고도 함]의 성은 김씨요 갈문왕 구도의 손자다. 아버지는 각간 말구요, 어머니는 김씨 휴례부인이요, 비는 김씨 미추왕의 딸이다
미추왕의 딸중 1명은 내물왕비가 되었고 또 한명은 실성왕비가되었다.
미추왕은 A.D 284년에 사망했고 내물이사금은 A.D 402년, 실성이사금은 A.D 417년에 사망했다. 장인이 죽은지 120~130년이나 지나 사위들이 죽었다?
또 보자.
18대 실성 이사금 (實聖尼師今 402~417 재위기간 15년)
실성 이사금 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알지의 후손이며, 대서지 이찬의 아들이다. 어머니 이리부인['伊'를 '企'라고도 한다.]은 석등보 아간의 딸이다. 왕비는 미추왕의 딸이다. 실성은 키가 7척 5촌이요, 총명하여 미래를 예견하는 식견이 있었다. 내물이 붕어하였으나 그의 아들이 어렸기 때문에 백성들이 실성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였다.
여기에서 미추이사금의 재위기를 살펴보면 실성이사금의 왕비의 나이를 알 수가 있다.
제13대 미추 이사금 (味鄒 尼師今 262~283 재위기간 21년)
미추 이사금[미조라고도 한다.]이 왕위에 올랐다. 성은 김씨이다. 어머니는 박씨이다. 그녀는 갈문왕 이칠의 딸이다. 왕비는 석씨 광명부인이다. 그녀는 조분왕의 딸이다. 미추의 조상 알지가 계림에서 태어나자 탈해왕이 데려와 궁중에서 길렀고, 뒤에 대보로 임명하였다. 알지가 세한을 낳고, 세한이 아도를 낳고, 아도가 수류를 낳고, 수류가 욱보를 낳고, 욱보가 구도를 낳았으니, 구도가 곧 미추의 아버지이다. 첨해가 아들이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미추를 왕으로 세웠다. 이것이 김씨가 나라를 다스리는 시초가 되었다
위의 두 가지의 기록을 비교해보면 실성왕비의 나이를 실성왕 원년을 기준으로 최소한 119세!!!!
고로 미추 이사금의 기년도 분명코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6. 흘해왕은 석우로의 아들이라는 문구
삼국사기 흘해왕
訖解尼師今立 奈解王孫也 父于老角干 母命元夫人 助賁王女也 于老事君有功 累爲舒弗邯 見訖解狀貌俊異 心膽明敏 爲事異於常流 乃謂諸侯曰 “興吾家者 必此兒也” 至是基臨薨 無子 群臣議曰 “訖解幼 有老成之德”乃奉立之
흘해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나해왕의 손자이다. 그의 아버지는 우로 각간이다. 그의 어머니는 명원부인이니, 조분왕의 딸이다. 우로는 임금을 섬기는 데에 공로가 있었으므로 여러 번 서불한이 되었다. 그는 흘해의 용모가 준수하며, 심기가 강직하고 두뇌가 명민하여 일을 처리하는 것이 보통 사람과 다른 것을 보고 여러 제후들에게 말했다. “내 집안을 흥하게 할 자는 반드시 이 아이다.” 이 때 기림이 죽고 아들이 없었다. 여러 신하들이 의논하여 말하기를 “흘해가 어리기는 하지만 나이든 사람이 갖출 수 있는 덕을 지녔다”라 하고 그를 받들어 왕으로 세웠다.
석우로는 AD 249년(또는 253년)에 죽었는데, 아들인 흘해이사금은 AD 310년에 즉위하여 A.D 356년에 죽었다.
우로의 나이는 100살이 넘고 아들 흘해와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난다.
三國史記 新羅本紀
沾解尼師今 三年 夏四月 倭人殺舒弗邯于老
3년(A.D 249년) 여름 4월 왜인이 서불한 우로를 죽였다.
그러나 三國史記 석우로 列傳에는 沾解尼師今 7년 癸酉(A.D 253년)에 죽었다고 적혀 있다
(첨해왕) 7년 계유(253)에 왜국의 사신 갈나고(葛那古)가 객관(客館)에 와 있었는데 [석]우로가 대접을 맡았다. 손과 희롱하여 말하기를 “조만간에 너희 왕을 소금 만드는 노예[鹽奴]로 만들고 왕비를 밥짓는 여자로 삼겠다.”고 하였다. 왜왕이 이 말을 듣고 노하여 장군 우도주군(于道朱君)을 보내 우리를 치니, 대왕이 우유촌(于柚村)으로 나가 있게 되었다. [석]우로가 말하기를 “지금 이 환난은 내가 말을 조심하지 않은 데서 생긴 것이니, 내가 당해내겠다.” 하고 왜군에게로 가서 말하였다. “전일의 말은 희롱이었을 뿐이었다. 어찌 군사를 일으켜 이렇게까지 할 줄 생각하였겠는가.”왜인이 대답하지 않고 잡아서, 나무를 쌓아 그 위에 얹어놓고 불태워 죽인 다음 돌아갔다.
다음은 "라이트온"님의 의견.
고고학적 편년으로 재위시기를 추정가능한 신라 임금들이 몇 분 계십니다.
파사 이사금 - 3세기 전반 - 읍즘벌국와 실직곡국의 영토분쟁 기사에 수로왕 등장. 고고학적 편년으로 구야국 건국 시기는 3세기 초중엽으로 나타남.
내해 이사금 - 3세기 후반 - 포상팔국의 난의 결과로 보이는 화기문투창고배의 확장이 3세기에서 4세기로 넘어가는 무렵에 일어남
강종훈 선생은 첨해~흘해의 재위 시기는 350~370년에 몰려 있다고 언급.
흘해는 370년으로 잡고 있으며, 내해는 310년대 후반에 즉위했다고 봄.
1대 박혁거세(赫居 世) 164~194
2대 남해 차차웅(南解) 194~214
3대 유리 이사금(儒理) 214~248 남해 차차웅의 아들
4대 탈해 이사금(脫解) 234~258 남해 차차웅의 사위
유리 이사금 재위기의 후반 14년은 별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탈해에게 대표 이사금 자리를 물려주고 물러난 것으로 추정.
5대 파사 이사금(婆娑) 248~270 유리 이사금의 아들
유리 이사금이 죽자 박씨 족단 대표가 되었다가, 탈해 이후 대표 이사금이 된 것으로 추정. 탈해와 벌휴 사이의 간극이 너무 큰 것을 감안, 재위기를 20년 줄임.
6대 지마 이사금(祇摩) 270~282 파사 이사금의 장남 파사와 비슷한 이유로 10년 줄임.
7대 일성 이사금(逸聖) 282~302 파사 이사금의 조카.
8대 벌휴 이사금(伐休) 302~314 탈해 이사금의 손자.
벌휴의 경우 파사처럼 탈해 이후 바로 석씨 족단 대표가 되었을 수 있으나, 재위 기간도 적고 탈해의 손자라서, 탈해나 파사와는 달리 기록된 재위 기간 내내 대표 이사금이었다고 추정.
9대 아달라 이사금 302~323 일성 이사금의 장남
일성 이사금 사후 박씨 족단 대표였다가 벌휴 사후에 대표 이사금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
재위기를 10년 깜
10대 내해 이사금(奈解) 314~338 벌휴 이사금의 손자
벌휴 사후에 석씨 족단 대표였다가 아달라 사후에 대표 이사금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 재위기를 10년 깜
11대 조분 이사금(助賁) 338~ 345 내해 이사금의 사위 & 벌휴 이사금의 손자 재위기를 10년 깜
12대 첨해 이사금(沾解) 345~352 조분 이사금의 동생 재위기를 7년 줄임
13대 미추 이사금(味鄒) 352~374 조분 이사금의 사위
첨해에게서 대표 이사금을 넘겨 받았다가, 첨해 사후 어느 시기에 유례에게 돌려준 것으로 추정
14대 유례 이사금(儒禮) 352~367 조분 이사금의 장남
15대 기림 이사금(基臨) 367~373 조분 이사금의 손자 재위기 반띵
16대 흘해 이사금(訖解) 373~388 15 내해 이사금의 손자. 석우로의 아들. 마지막 석씨 임금
흘해의 경우 재위 기간이 나물과 똑같은 걸로 봐선, 재위 기간을 나물과 똑같이
복붙해서 늘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듬.
또한 나물이 390년 경엔가 실성을 인질로 고구려로 보낸 걸로 봐선 대강 나물은 388년부터
고구려의 입김으로 즉위했다고 생각됨
17대 내물 마립간(奈勿) 374~407 미추 이사금의 사위
미추 사후 김씨 족단 대표였다가 앞서 추측한 경위로 대표 마립간이 되지 않았나 추정
미추와의 지나치게 큰 세대차 간격을 감안, 재위기를 13년 줄임
18대 실성 마립간 407~420 미추 이사금의 사위 내물 마립간의 동생
실성 마립간은 402~417년으로 되어 있긴 한데, 강종훈 선생의 추정으론 실성은 402~409년의
어느 시기에 실제로 즉위한 걸로 되어 있어서, 대강 계산하기 편하게 407년으로 때려박음.
강종훈 선생 저서를 보면, 실성부터 진흥왕 때까지는 적어도 3년 정도의 오차가 있는 것으로 생각됨. 봉평 냉수리비의 지증왕 즉위기와 삼국사기와는 3년의 오차가 있음.
삭제된 댓글 입니다.
백제는 기원전후 1세기부터 비류 계열 왕통이 소국 추장부터 주욱 한성에 자리잡았을 개연성이 있습니다. 흡사 졸본부여-고구려의 관계를 방불하게 합니다.
갑자기 저도 궁금해져서 강종훈 교수의 신라초기사 저서를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그 전에도 경주에 비파형 동검을 쓰는 공동체들이 있었긴 했는데 유물 량이 풍성해지고 이런저런 조직체들이 들어선 걸로 보이는게 2세기 말~3세기 초라고 합니다. 고조선 유민들이 이런저런 공동체를 세우고 살았는데
아마 동한 말기 혼란 때 낙랑군 쪽이 시끄러워지니 낙랑인들이 한반도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나가는데
박혁거세가 그 중 하나인 꽤 큰 세력족단이었던 걸로 보입니다.
@달마시안TV 그 이주민 세력이 주요 영도 세력으로 드러나고 있고, 그 시기부터 갑자기 유물 량이 풍성해져서 고대 국가로 진입하는 주요 단계로 보이니까요.
마찬가지 이유 때문에 백제의 고대 국가 시기는 고이왕 이전 시기론 도저히 봐줄 수 없고 고고학적으론 비록 거주지 유적이 기원전 1세기로 있긴 하지만 아예 거론조차 되지 못합니다.
사실 고이왕의 연대조차도 정확하지 못하다는 혐의가 있어서, 제가 그걸 토대로 자의적인 설정을 했던 것이기도 하고요.
@달마시안TV 이례적으로 빠른 게 아니라, 고구려가 오히려 정상적인 경우고 신라나 백제가 늦게 시작했는데도 고대 국가를 꽤 빠르게 세워나간 경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신라와 백제의 근간에 공헌한 이주민 세력이, 이미 다른 체제에서 발달된 정치체제 경험을 했기에 가능했던 걸로 생각합니다.
@달마시안TV 제가 일본사는 잘 모르지만, 3세기에 위나라에 사절까지 보낼 정도로 성장한 걸 보면 신라-백제와 그렇게까지 진도(?)가 차이 나진 않았던 걸로 생각합니다.
@달마시안TV 네 그렇습니다
@달마시안TV 히미꼬가 큐슈 정권이었는지 야마토 정권이었는진 분명하지 않습니다.
초기적인 정치체제가 계속 발전하고 있었고, 어느정도 각 지역에서 큰소리 낼 만한 와꾸가 갖춰진게 2-3세기라는 말씀이시군요. 다만 박혁거세는 기록에 나타난 탄생신화를 본다면 이건 왕인지 동네 이장인지(...) 분간이 안될 수준이라 고고학적으로 나오는 2세기경 신라의 역량을 잘 비교해야 할 듯 합니다.
즉위기간을 인위적으로 늘린게 역사를 뻥튀기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반대로 (정치투쟁으로 축출되거나 역사집필 당시 세계관에 맞지 않는) 몇몇 왕을 기록에서 까버린 흔적이라 볼 순 없을까요?
그렇게 보긴 힘듭니다. 연대는 몰라도 임금들이나 가계도는 그럭저럭 취신할만한 것으로 볼 수 있는걸로 압니다. 다만 아파트대책위 수준으로 돌아가면서 역임한 대표들은 누락되었을 개연성이 있으나 이런 사람들은 아예 왕도 추장도 군주도 아니라고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