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1943년 3차 하르코프 전투-독일의 마지막 대승
소련군의 퇴각과 함께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은 막을 내렸다. 5배나 많은 적을 상대로 축출 위주의 작전을 펼친 덕에 인명 손실이 10만에 불과했지만 소련은 충격에 빠졌다. 만슈타인은 쿠르스크까지 점령하려 했지만 보급 여건과 기후 등의 이유로 진격을 멈추어야 했다.

하르코프 도심을 청소하기 위해 돌격하는 제2친위사단 소속의 4호 전차.
충격적인 결과
만슈타인은 1942년에 있었던 세바스토폴(Sevastopol) 전투 당시처럼 소련군이 독일군의 화력에 녹아내리도록 내버려 두었다. 엄밀히 말하면 이곳을 고립시키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더욱 좋은 전략이었지만 히틀러가 이를 용인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기에 택한 차선책이었다. 열흘간 도시를 봉쇄하고 공격을 가하면서 소련군의 방어 능력을 현저히 감소시킨 후인 3월 11일, 마침내 친위장갑군단이 도심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하르코프에서 후퇴할 때 총통의 명령도 무시했던 하우서답게 이번에도 그는 만슈타인의 의도대로 진격하지 않았다. 만슈타인은 하우서가 성급하다고 판단했지만 이미 치열한 시가전이 시작되고 있었다. 만슈타인의 우려대로 상당히 혼란스러웠지만 다행히도 겁먹은 소련군이 3월 14일 도시에서 물러났다. 거의 동시에 배후의 벨고로드마저 독일군에 의해 재점령당하면서 격렬했던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은 막을 내렸다.
포포프 전차군, 제3전차군, 제6군, 제69군 예하의 20여 개 사단을 궤멸시키면서 독일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패배를 멋지게 보복했다. 5배나 많은 적을 상대했던 만슈타인이 무리한 섬멸보다 축출을 위주로 작전을 펼친 덕분에 소련군의 인명 손실은 다른 전투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10만에 불과했다. 거기에다가 이미 소련군 사단의 대부분이 인가된 병력의 절반도 보유하지 못하고 있었을 정도로 그동안 소모가 많았던 상태였다.

도심을 점령한 후 잔적 소탕 임무를 수행 중인 제1친위사단 소속의 하노마그 장갑차.
소련은 지난 1942년 제2차 하르코르 전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게 분명했다. 초전의 승리에 들떠 앞뒤 가리지 않고 돌격만 하다가 역포위당해 패한 상황이 그대로 재현되었던 것이다. 전쟁의 주도권을 잡았다고 생각했던 소련은 충격에 빠졌다. 만슈타인이 이룬 전과에 히틀러는 열광했고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침체에 빠져 있던 독일의 선전 매체들은 앞다투어 승전 소식을 보도하기 바빴다.
만족하지 못한 승장
황급히 전선을 떠나던 날, 바로 앞에 포탄이 떨어지는 참담한 경험을 했던 히틀러의 감격은 실로 대단했다. 불과 한 달 전에 자신의 엄명을 어기고 부대를 하르코프에서 후퇴시켜 자포리자까지 직접 날아가도록 만든 당사자인 친위장갑군단장 하우서에게 훈장을 내려 치하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만슈타인을 끝까지 신임했던 자신의 결정에 스스로 만족스러워했다.

1940년 행사 중 히틀러, 친위대장 히믈러와 자리를 함께한 하우서. 항명에 분노한 히틀러가 해임시키려 했으나 결국 훈장을 수여했을 만큼 하르코프 전투에서 그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한마디로 놀라운 결과였는데, 그것은 소련이 대패를 당한 이유이기도 했다. 히틀러도 기대하지 않을 정도였으니 소련이 이런 최악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았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독일에게 이 전투는 제2차 대전사에 마지막으로 승리한 공세로 기록되었다. 이후 쿠르스크 전투나, 벌지 전투처럼 몇 차례의 공세를 더 벌였지만 모두 실패로 막을 내렸다. 결론적으로 이후 독일은 몰락할 일만 남은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기쁨과 별개로 만슈타인은 상당히 불만족스러웠다. 그가 원대한 반격전을 구상했을 때, 하르코프는 목적이 아니라 단지 과정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는 계속 북동진해 쿠르스크까지 점령해 독소전선 중앙부에 위치한 소련 보로네시 전선군과 중앙전선군(Central Front)마저 섬멸할 생각을 처음부터 갖고 있었다. 하지만 만슈타인은 하르코프에서 진격을 멈추어야 했다.

만슈타인은 쿠르스크까지 진격하려 했지만 공세를 멈추어야 했다. 소련군의 상황만 놓고 보자면 좋은 기회였지만 독일군의 여건으로는 공세를 지속하기가 불가능했다.
70만으로 추정되는 전선 중앙부의 소련군은 남부집단군만으로 무너뜨리기에는 너무 큰 규모였다. 비록 정면에 마주했던 소련 남서전선군과 보로네시 전선군이 이번 전투로 엄청난 타격을 입었지만 지금까지 보여준 소련군의 놀라운 복원력을 생각한다면 그 효과가 오래가지 않을 게 분명했다. 따라서 남부집단군만으로 쿠르스크까지의 진격은 무리였고 만일 거기까지 북상한다면 도네츠 강 일대의 방어선이 위험했다.
독일의 한계
때문에 만슈타인의 구상을 실현하려면 중부집단군의 협공이 필요했다. 당시 오렐(Orel) 돌출부를 장악하고 있던 중부집단군이 쿠르스크로 남하한다면 소련군을 거대한 포켓에 가두어 궤멸시킬 수 있다고 본 것이었다. 하지만 제안을 받은 중부집단군 사령관 클루게(Günther von Kluge)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며 반대했다. 만슈타인은 절호의 기회라며 다시 히틀러를 설득했지만 이번에는 총통이 클루게의 손을 들어 주었다.

독일의 재점령 직후 촬영된 하르코프 도심의 자유광장. 1편에서 소개한 것처럼 지금까지도 그대로 보존된 역사의 현장이다.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집중도 필요하지만 기회를 제대로 포착해야 한다. 하르코프에서의 기적도 전력이 압도적으로 강해서가 아니라 기회를 잘 포착해 얻은 결과였다. 지금이 전황을 결정적으로 반전시킬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던 만슈타인은 한탄했다. 그의 구상은 넉 달이 지난 7월에 성채 작전(Unternehmen Zitadelle)으로 현실화되었지만 이미 소련이 만반의 준비를 완료하고 난 이후였다.
이처럼 중부집단군의 협력 없이 목표를 달성하기 어려웠던 만슈타인은 벨고로드까지 진격한 것으로 만족하고 작전을 종결해야 했다. 역사는 결과만 놓고 이야기하므로 독일로서는 이때를 아쉬웠던 순간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때문에 히틀러와 클루게를 비난하는 자료가 많다. 하지만 만슈타인의 신념과 별개로 독일의 진격은 구조적으로 어려웠다. 우선 전선 전체를 관할하던 OKH도 반대를 했다.

전투 종결 직후의 무장 친위대원들. 놀라운 대승을 이끌었지만 더 이상 공세를 지속하기 어려울 만큼 지쳐 있었다.
당시 독일의 보급 여건을 고려했을 때 3월 이후에 공세를 지속하기가 상당히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르코프에서의 기적은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것은 남부집단군 스스로가 보일 수 있었던 능력의 최대치였다. 그 이상을 달성하려면 보다 많은 후방의 지원이 필요했지만 당시 독일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했다. 설령 히틀러가 공세를 허락했어도 남부집단군이 앞으로 더 나아갈 여력이 없는 상태였다.
예고된 다음 격전
더구나 중부집단군도 함께 공세에 나서려면 더욱 많은 후방의 지원이 필요했는데, 이는 독일의 입장에서는 1941년 바바로사 작전 초기에나 가능했던 일이었다. 사실 놀라운 승리를 계속 거머쥔 만슈타인의 생각이 틀렸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4개월 후에나 그가 주장했던 방식으로 성채 작전이 실시되었다는 사실은 독일이 준비를 갖추는 데 그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는 의미였다.

강제적으로 휴전을 하게 만들 만큼 이제 라스푸티차는 독일군에게도 낯선 광경이 아니었다. 이런 여건이 하르코프 전투 직후 곧바로 독일이 공세를 지속할 수 없었던 요인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이와 더불어 현실적인 또 다른 이유는 기후였다. 쿠르스크로 향하는 초입인 벨고로드를 점령한 3월 15일이 되었을 때, 1942년 겨울이 마지막 인사를 하면서 단단하게 얼었던 소련의 동토가 풀렸다. 혹한과 더불어, 아니 그 이상으로 독일군을 괴롭혀온 라스푸티차(Rasputitsa, 봄에 눈이 녹거나 가을에 눈이 왔을 때의 노면이 질척한 시기)가 시작된 것이었다. 사방이 온통 진흙탕으로 변하면서 독일군의 주특기인 기동전을 발휘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게다가 후방에서 보급이 원활하지 않아 자칫 부대들이 고립되기 일쑤였다. 흔히 라스푸티차가 되면 독일군만 애를 먹었던 것으로 알지만 어렵긴 소련군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라고 특별히 진흙 구덩이를 쉽게 헤집고 다닐 방법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다만 상대적으로 보급 거리가 짧다는 이점만 누렸을 뿐이었다. 본의 아니게 강제로 휴전 상태가 될 정도로, 사람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극한 상황이었다.

하르코프 전투 후에 형성된 동부전선의 모습. 쿠르스크 일대에 형성된 거대한 돌출부는 다음 격전이 어디서 벌어질지 예고하고 있었다.
결국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은 독일의 승리로 막을 내렸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말미암아 만슈타인이 구상했던 원대한 꿈을 이루진 못한 절반의 성공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토네이도 같았던 독일의 맹공은 그렇게 막을 내렸고 전선은 쿠르스크 일대에 거대한 돌출부를 남긴 채 조정기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것은 독일과 소련의 다음 격전이 어디서 벌어질 것인지를 예고한 것과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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