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9번째 편지 - 우리 세대와 같이 늙어 가는 가수
며칠 전 유튜브를 이리저리 서핑하다가 우연히 어느 유튜브에 눈을 떼지 못하고 순식간에 45분이 흘렀습니다. "우리 시대에 이런 가수와 같이 늙어 간다는 것은 행운입니다."라고 MC 배철수가 지칭했던 바로 그 가수 최백호를 다룬 프로그램 EBS의 <스페이스 공감>입니다.
저는 노래를 음으로 듣는 것도 좋아하지만 가사를 글로 곱씹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노래를 음으로 듣다 보면 리듬에 취해 가사를 제대로 전달받기 어렵습니다. 사실 글로 된 가사에는 우리를 깊은 사색의 세계로 데려다주는 보석 같은 구절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저와 함께 음악 없이 글로 최백호의 노래를 감상하면 어떨까요.
최백호가 맨 처음 부르는 노래는 현미의 <보고 싶은 얼굴>입니다.
<눈을 감고 걸어도 눈을 뜨고 걸어도/ 보이는 것은 초라한 모습 보고 싶은 얼굴> 초라한 모습은 우리 눈에 비친 사람들의 모습일까요? 아니면 나 자신의 모습일까요? 보고 싶은 얼굴은 우리가 그리워하는 그 누군가의 모습일까요? 아니면 이제는 만날 수 없는 그 옛날의 나 자신 모습일까요?
저는 이 노래에서 '허황'이라는 단어를 배웠습니다. 비어있다는 허(虛)에 거칠다는 황(荒) 자가 붙은 단어입니다.
<거리마다 물결이 거리마다 발길이/ 휩쓸고 지나간 허황한 거리에>
수많은 사람이 물결처럼 지나가지만 그 길은 비어있고 거칩니다. 실제로 그럴까요? 아니면 내 마음이 그리 생각되는 걸까요?
다음 곡은 '거친 세월을 이겨낸 남자의 회고를 잔잔하게 노래했다.'는 최백호의 설명이 붙은 2012년작 <길 위에서>입니다.
처음 들어 보는 노래입니다. 리듬이 귀에 익지는 않지만 최백호 특유의 리듬감이 가사를 느릿느릿 제 귀에 전해 줍니다. 후반부 가사입니다.
<푸른 하늘 위로/ 웃음 날아오르고/ 꽃잎보다 붉던/ 내 젊은 시간은 지나고/ 기억할게요 다정한 그 얼굴들/ 나를 떠나는 시간과 조용히 악수를 해야지/ 떠나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면/ 이 밤 마지막 술잔에 입술을 맞추리>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이런 시절이 있습니다. 지금 그 시절을 지나는 젊은이도 있고 그 시절이 아련한 제 또래도 있습니다. 그땐 웃음이 하늘을 막 날아다녔지요. 그 또래의 얼굴은 누구나 꽃잎이었습니다.
시간은 늘 우리 곁을 떠납니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렇고, 내일도 그럴 것입니다. 젊은 날에는 떠나는 시간에 투정도 부리고, 잡으려 안간힘도 썼지만 다 부질없고 무망한 짓임을 이제는 압니다. 그래서 그저 '조용한 악수'로 '입술의 술잔'으로 그 시간들을 놓아주려 합니다.
바이올린 연주로 다음 곡이 이어집니다. 1977년도 노래 <그쟈?>입니다. 제가 대학교 입학하던 해입니다. 이런 노래가 있었나 싶습니다.
<봄날이 오면은 뭐하노 그쟈/ 우리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데/ 꽃잎이 피면은 뭐하노 그쟈/ 우리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데>
'봄날이 오면 뭐하노 그쟈'는 무슨 뜻일까요? 영어로 번역한 것을 보면 그 뜻을 더 정확하게 알 것 같습니다. 'Yeah, new time of hope might be coming, but it wouldn't matter to us, don't you agree?'
희망의 시간 봄날이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에요. 안 그렇게 생각해요. 왜 그럴까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좋은 시간', '좋은 장소'가 아니라 그것을 '함께 즐길 그 사람'입니다. 1950년생 최백호는 27살 나이에 그 사실을 정확하게 알았던 것 같습니다.
이 프로그램에는 최백호의 인터뷰가 노래 중간중간 삽입되어 있습니다. 이런 대목이 눈길을 끕니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변화해야 하고, 공부해야 해요. 그게 참 흥미롭고 즐거워요. 나이 든 목소리에도 매력이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야 해요."
최백호의 히트곡이 몇 곡 이어집니다. 다 좋은 노래입니다. 그러나 저는 2022년 곡 <책>에 필이 꽂히고 말았습니다.
<책을 읽으면 머리카락 몇 올이 돋아나는 것 같아/ 아주 큰 무엇은 아니고 딱 그만큼만/ 아주 작은 그만큼만>
저는 이 가사에서 소름이 돋았습니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저도 가끔은 회의가 들 때가 있습니다. 읽으면 곧바로 잊어버리는 데 뭐 하러 읽지. 콩나물시루에 물 주는 것이라지만 콩나물이 자라지도 않는 것 같아. 그런 저에게 책을 읽으면 머리카락 몇 올이 돋아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난 것입니다. '소름'은 '고개 끄덕임'으로 바뀝니다.
<그래도 옷에 묻은 흙을 털고/ 신발 끈을 조여 매는 힘은 생기지>
독서의 힘을 이렇게 감각적으로 표현한 사람이 또 누가 있을까요? 지나간 세월과 같은 '옷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버리고, 미래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기 위해 '신발 끈을 조여 매는 힘'을 주는 독서.
<노래도 그래/ 먼 기적소리처럼/ 가슴 뛰던 젊은 날의 울림은 아냐/ 그냥 헌 모자 하나 덮어쓰고 바다가 보이는/ 언덕으로 가고 싶은 정도이지>
노래의 힘도 이제는 가슴을 뛰게 만들지 못하지만 그저 헌 모자 하나 꾹 눌러쓰고 더는 항해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바다를 향한 동경이 남아 있는 그 언덕을 찾아 그 옛날을 회상하며 심장을 벌렁이게 할 정도는 되지.
2022년의 최백호는 시인이자 철학자입니다. 독서와 노래의 힘을 어찌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배철수는 우리가 최백호와 같이 늙어 갈 수 있음을 행운이라 표현한 것 같습니다.
최백호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노래가 <낭만에 대하여>입니다.
최백호에게 낭만을 물었습니다. "청춘의 시절에는 청춘 그 자체가 낭만이죠. 젊었을 때는 그게 낭만인 줄 잘 몰라요. 젊었을 때 충분히 낭만이라고 느끼고 즐겨야 하는데 그건 안되더라고요. 나이가 들어서 옛날 일을 추억하면서 청승맞게, 낭만은 청승하고도 연관이 있네요."
'청승'은 '궁상스럽고 처량하여 보기에 언짢은 태도나 행동'을 말합니다. 그러나 최백호의 '청승'은 좀 다릅니다. '폭우가 쏟아지는 날, 아무도 없는 다방에 혼자 앉아 우연히 들은 '에이스 캐논'의 '로라'를 DJ에게 수없이 신청해서 듣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설명이 더 직관적입니다.
그 청승맞은 최백호가 만든 노래가 <낭만에 대하여>입니다.
<궂은비 내리는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 잔에다/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보렴>
그 색소폰 소리는 '에이스 캐논'의 '로라'입니다.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가버린 세월이 서글퍼지는/ 슬픈 뱃고동 소릴 들어보렴/ 이제 와 새삼 이 나이에/ 청춘의 미련이야 있겠냐만은/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가슴에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이 노래, 이 가사를 듣고 눈시울을 적신 적이 없는 사람은 아직 젊은 사람입니다. '첫사랑 그 소녀', '가버린 세월', '슬픈 뱃고동 소리', '청춘의 미련' 모든 표현이 <청승> 그 자체입니다.
최백호는 1994년 어느 비 오는 날 다방에서 청승을 낭만으로 승화 시켜버립니다. 그 청승이 우리 시대에게 명곡 <낭만에 대하여>를 선물했습니다. 그날 비가 오지 않았더라면, DJ가 '에이스 캐논'의 '로라'를 틀지 않았더라면, 다방 손님이 많아 그 곡을 여러 번 들을 수 없었더라면, 우리는 <낭만에 대하여>를 가지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이제 낭만은 <낭만>이라는 단어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낭만에 대하여> 자체가 고유명사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최백호의 공감은 끝이 났습니다. 그 감동을 혼자 간직하기는 너무 아쉬워 글로 그 감동을 전합니다.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23.6.26. 조근호 드림
첫댓글 최백호 하면 낭만에 대하여 가수로 모르는 사람이없죠!
구수하고 특유한 목소리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