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9. 23. 월요일
임은미(유니스) 선교사 묵상
최고의 날 ~ "내가 갇힌 곳이 있을까요? 자유함을 선언합니다!" 시편 68편
나는 주일이면 보통 설교하는 것이 나의 생활의 루틴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어제 아침에는 남편이 "어린이 예배"에서 설교하는 것을 들으면서 남편이 설교 잘하게 해 달라고! 우리 듣는 어린이들이 집중해서 설교를 잘 듣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아침 "어린이 예배"를 드렸고
오후에는 사위가 설교하는 영어예배 뒷자리에 앉아서 사위 쟈니 목사가 설교하는 것을 주님이 도와주십사 기도하면서 오후 예배를 드렸다.
"어린이 예배"에서는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많은 교사가 어린이들을 조용히 시키고 자리에 앉히고 율동 함께 하고 등등 그들이 하는 사역을 보면서 "어린이 사역"이 참 귀하구나.. 그리고 쉽지 않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니 주일마다 각 부서에서 맡은 바 일을 하는 주일날 섬김이들의 손길들.. 어린이 사역은 어린이 사역대로..
다른 모든 부서에 주일날의 예배를 위해 힘쓰고 수고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주일날 교회에 출석도 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주일날에는 예배만 그야말로 달랑(?) 드리고 교회에서 무슨 일 하라고 시킬까 봐 얼른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1부 예배 아침 일찍 드리고 오후에는 하루 종일 골프장에 가서 골프를 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일주일에 하루 있는 "주일"이라고 하는 이날!
이날을 어떻게 우리가 보내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실까?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교회에서 "섬기는 많은 이들"!! 그들이 하늘나라에 가면 어떠한 상들을 받게 될까?
주일날 하루!
교회에 가서 섬기는 것보다는 무엇인가를 받을 것에 대한 생각 외에 다른 생각이 없는 교인들!
과연 그들 중 천당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몇 퍼센트가 될까?
하나님을 "정말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주일을 대하는 태도 하나로서도 우리는 "하나님을 잘 믿고 잘 안 믿고" 그런 것을 분별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얼마 전 어느 분이 나에게 한국에 선교사님으로 오셨던 어느 외국 여자 선교사님에 대한 글을 보내왔다.
그 선교사님의 한국 이름은 서서평이라고 한다.
그분이 한 이야기 중 마음에 많이 와닿은 글이 있어 여기 몇 구절만을 옮겨본다.
***
그녀는 1930년 마지막 선교 보고서를 썼다.
어느 추운 겨울날, 서평은 광주천 부동교 밑 어느 움막 속으로 불쑥 들어갔다. 그곳에는 거지 노인이 있었다. 서평은 아무 거리낌 없이 다리 아래서 거적을 덮고 잠을 청하던 그를 깨우며 말했다.
"최씨 아저씨 아직 안 죽고 살았소. 이불을 가져왔으니 덮고 주무시오."
서평은 이불과 요를 나눠주고 어둠 속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추운 겨울 한밤중 빈민들을 생각하며 자신이 덮고 쓰던 이불과 요를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다 보니 정작 자신의 이불은 없었고 옷만 단 두 벌뿐이었다.
서평은 이렇게 말했다.
"남을 불쌍히 여기는 사랑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 사랑의 종교에서 구제를 제해버린다면 남는 것이 무엇일까? 타의 구제는 사랑의 발로이다.
제아무리 십자가를 드높이 치켜들고 목이 터져라 예수님을 부르짖고 신자라 자처한다 할지라도 구제가 없다면 그는 참 기독교인이 아니다."
서서평이 22년간의 조선에서 선교사의 생활을 하는 도중 언제나 어려운 사람들에게 전부 나눠 주고 베풀다가 정작 자기 자신은 영양실조로 1934년 6월 26일 5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 남긴 것은 [강냉이 가루 2홉, 현금 7전, 반쪽짜리 담요 한 장...]
이것이 유품의 전부였다.
시신마저 기증하고 떠나는 그녀의 장례식은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장례 행렬을 뒤따르던 천여 명은 통곡하며 한목소리로 외쳤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그로부터 90여 년이 흐른 오늘까지도 서서평이 묻힌 광주광역시 양림동 뒷동산에는 그의 참사랑과 헌신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그녀가 사용하던 침대맡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Not Success, But serve"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
***
교회를 다닌다고 해도 "섬김"이 없는 자의 삶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해 주는 글이라고 하겠다.
개역개정 시편 68편
6. 하나님이 고독한 자들은 가족과 함께 살게 하시며 갇힌 자들은 이끌어 내사 형통하게 하시느니라 오직 거역하는 자들의 거처는 메마른 땅이로다
"갇힌 자들은 이끌어 내사"라는 이 말씀이 마음에 와닿는다.
나에게는 억울한 일로 감옥에 들어가 있는 지인이 있다. 나는 지금도 시시때때로 그 사람을 기억할 때마다 기도드린다.
받은 형은 3년 6개월인가 그렇다.
그 이전에 나올 수 있는 길도 있는 것 같다. "합의"를 봐야 하는 일인데 "합의"를 해 주어야 하는 사람들이 돈을 너무나 많이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이 일은 내 지인이 책임을 져야 할 일이 전혀 아닌 것이다.
사건의 경위를 다 내가 글로 적을 수는 없지만 이렇게 억울하게도 감옥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이 지인의 경우를 보면서 깨달았다고 하겠다.
그래서 오늘 같은 성경 구절을 대하면서
나는 저절로 나의 "담장 안 식구"가 된 나의 지인을 떠올리게 된 것 같다.
감옥에 들어가 있는 이들을 "갇힌 자들"이라고 표현한 성경 구절이지만 우리는 감옥이라고 하는 곳 외에도 "갇혀 있는 곳"은 다양하다는 생각도 해 본다.
재물의 욕심에 갇혀 있는 자들
인정받고자 그 굶주림에 갇혀 있는 자들
명예
장수 등등
하나님 섬기는 것을 우선순위로 하지 못하게 만드는 많은 것들에 "갇혀 있는 자"들이 우리 가운데 있지 않을까?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 있는 자들이 자유하게 그 갇힘에서 나올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만큼이나
눈에 보이는 감옥이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들의 삶에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으로 마땅히 누려야 하는 자유함을 못 누리고 갇혀 있는 그곳으로부터
우리는 "자유함" 얻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주님 오늘도 최고의 날입니다.
섬김이 없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열매가 없는 삶임이 당연하고
성경은 열매가 없는 나무들은 나중에 다 찍어 버려져서 아궁이의 불쏘시개가 된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열매 없는 삶"을 안이하게 생각하지 않기를 기도드립니다.
자신이 갇혀 있는 곳이 어떠한 곳인지도 모르는 채 살아가는 "영적 무지함 내지는 무관심"은 없기를 기도드립니다!
섬김을 하면서도 불평하고 불만하고
왜 나만 섬기면서 살아야 하는가? 그런 비교 역시 하지 않기를 기도드립니다.
그렇게 하는 수고는 결국 "헛수고"가 될 테니까요!
"섬길 수 있음이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을 섬기는 시간 시간 잊지 않을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이곳은 참 덥네요. 주님 ^^
케냐는 넘 추웠는데 이곳은 너무 덥고!!
이 땅 어디에도 "파라다이스"는 없겠지요?
없다는 것을 느껴야 우리는 천국에 대한 소망을 더 간절하게 갖게 되는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도 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 저를 보시면서 하루 종일 기쁘시면 참 좋겠습니다.
외울 말씀
개역개정 시편 68편
6. 하나님이 고독한 자들은 가족과 함께 살게 하시며 갇힌 자들은 이끌어 내사 형통하게 하시느니라 오직 거역하는 자들의 거처는 메마른 땅이로다
💕 사랑하는 그대여 💕
2024. 9. 23.
사랑하는 그대여~ 사랑하는 그대여~
출. 석. 부르고 있습니다.
대답하셔야죠?
그대는 주일을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오늘 제 묵상을
읽으시면서
또는 들으시면서
그대의 주일을 섬기는
그 태도에 대해서
한 번쯤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사랑하는 내 아들
사랑하는 내 딸
주일은 거룩하게
지켜야 하는 것이니라.
그리고 주일은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거하기를
사모해야 하는 날인 것이라.
또한, 주일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고
경외하듯이 그 열매로
이웃을 돌아보면서
섬기는 것을 마음에
기도해야 하는
그러한 날인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여호와의 음성
우리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딸, 사랑하는 아들”
이라고 부르는 우리
모든 지체에게 정확하게
잘 들려왔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고
이웃을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우리의 매일이 아닌가 합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축복합니다.
오늘도 그대의 최고의 날입니다.
(* '사랑하는 그대여' 말은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대사여'를 줄여서 말하는 것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