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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브의 멍에>
사실 카잔 칸국에 러시아가 개입한 것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던 일이었다. 카잔 칸국의 칸 자리는 자주 바뀌는 편이었고 이는 이반 3세나 바실리 3세 같은 모스크바의 군주들이 개입했었던 것이 가장 컸다. 이들은 주로 모스크바 공국의 괴뢰국이었던 카심 칸국의 칸들을 카잔 칸국의 칸 자리에 앉히려고 했다.
이반 4세 역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정책을 계승했었다. 그는 이미 몇 차례 군사적 행동을 개시해 카잔을 점령하고 카심 칸국의 칸이었던 샤 알리를 카잔의 칸으로 앉혀놓았다. 문제는 항상 러시아 군대가 떠나는 즉시 카잔 칸국의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크림 칸국 등을 끌어들여 샤 알리를 폐위시키고, 새로운 칸을 옹립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1551년, 러시아 군대가 카잔 칸국을 침공하여 다시 한 번 샤 알리를 앉혔으나, 러시아 군대가 떠나자마자 카잔의 귀족들과 성직자들이 반란을 일으켜, 샤 알리를 쫓아내고 아스트라한 칸국 출신의 야디야르(1)를 옹립했다.
- "이것들이 보자보자 하니까! "-
이반 4세는 결국 이런 상황에 질려버렸다. 괴뢰국으로 만들어도 항상 독립해버리니 계속 괴뢰국으로 만드는 건 국력의 낭비이자, 시간의 낭비라고 인식한 것이었다. 그는 아예 카잔 칸국을 지도에서 지워버리기로 하고 1552년 8월, 150문에 달하는 대포와 함께 안드레이 쿠릅스키 등의 심복을 데리고 직접 카잔으로 원정을 떠났다.
카잔 칸국은 노가이족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마리족(2) 병사들도 끌어들였다. 그러나 숫적으로도 우세하고 강력한 대포를 다수 보유한 이반 4세의 군대는 카잔 칸국 내 일부 지역들의 항복을 받아내며 금방 카잔을 포위했다.
- "이제 너희가 멍에를 쓸 시간이다!" -
카잔 공성전은 6주 정도 걸렸다. 그러나 결국 러시아의 공성탑과 대포 앞에 성벽은 붕괴되고, 러시아 군이 카잔 성내로 입성했다. 야디야르는 포로가 되어 정교회로 개종했고, 모스크는 파괴되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노예로 끌려갔다. 카잔 칸국은 그렇게 멸망하였다. 비록 카잔 칸국의 주민들 일부가 노가이의 지원을 받으며 볼가강 유역에서 저항했지만 1556년에는 주도자가 모스크바에서 참수되는 등 전부 진압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시비르 칸국은 바로 러시아에 충성을 맹세했다. 그리고 이반 4세는 2년 후 3만의 군대를 동원해 볼가강 하류의 아스트라한 칸국까지 공격, 함락시키고 데르비쉬라는 사람을 칸으로 앉혔다. 하지만 그가 러시아의 종주권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자, 1556년 다시 군대를 동원해 데르비쉬를 쫓아내고 아스트라한 칸국까지 합병했다. 이렇게 한때 러시아인들을 노예로 부렸던 타타르인들은 역으로 자신들이 노예가 되어버렸다.
- 성 바실리 성당의 모습 -
여담으로 카잔 칸국 등을 멸망 시킨 후 이반 뇌제는 너무 기쁜 나머지, 이 승리를 기념할 성당을 짓게 하였다. 그 성당이 바로 성 바실리 성당이었다. 완공 이후 이반은 너무 마음에 든 나머지 참여한 장인들이 다른 곳에서 이런 건물을 만들지 못하게 눈을 뽑아버렸다고 전해지지만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인 것으로 보인다.
<리보니아를 차지하라!>
이반 4세는 동쪽 못지 않게 서쪽에도 관심이 많았다. 특히 그는 유럽과 직접 교역하고 싶었는데 문제는 러시아에 마땅한 항구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1550년, 잉그리아 지역에 이반고로드란 항구 도시를 세웠지만 수심이 얕아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거기다가 이반고로드는 소위 부동항도 아니었다. 결국 항구를 얻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땅을 빼앗아야 했다. 그런데 딱 빼앗기 좋은 땅이 있었다. 얼지 않고, 수심도 적당하고 부유하며, 가까운 항구가 있는 땅이 있었다. 바로 리보니아였다.
- 리보니아 연방, 리가시와 리가대주교령, 세개의 주교령과 기사단령이 결합된 형태로 구성되어있었다. -
운 좋게도 리보니아는 당시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튜튼기사단이 붕괴되고 기사단장 알브레히트가 1525년, 개신교로 개종하고 프로이센 공국을 만들자, 안그래도 자치적이었던 리보니아 지부는 사실상 독립, 리보니아 기사단이 되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리보니아 연방이 조직되었다. 하지만 리보니아 연방은 구성원들간 내분이 잦았고, 종교개혁에 휘말린데다가, 폴란드나 스웨덴 같은 주변 강국들에 이리저리 치이는 신세였다. 러시아는 이를 이용해 1554년에 15년간 리보니아가 폴란드와 동맹을 맺지 않는다는 조약을 리보니아 연방에 강요했고, 도르팟 주교령의 독립을 보장해주는 대가로 6천 마르크를 요구, 1557년에 받아내기도 했다.
- 16세기 러시아군 보병. 1번은 이반 뇌제 시절 모스크바의 화승총병. 2번은 러시아 봉건 영주 군대 소속의 화승총병. 3번은 2번과 같은 소속의 보병 궁수이다. -
거기에 더해 1554년부터는 리보니아에 욕심을 내는 스웨덴과 전쟁을 벌여 3년 후, 스웨덴으로부터 리보니아에 개입하지 않으며, 동시에 폴란드와도 제휴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발트해에 관심이 많던 덴마크가 아직 남아있기는 했지만 덴마크는 리보니아에 대한 관심도는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편이었다. 이렇게 러시아는 리보니아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시키는 듯 했다.
하지만 곧 상황이 달라졌다. 당시 리보니아 연방 내에서 리보니아 기사단과 리가 대주교가 서로 대립하는 상태였는데 1557년 리보니아 기사단이 리가 대주교령을 기습, 리가 대주교를 생포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문제는 리가 대주교는 폴란드 왕의 사촌이었고, 안그래도 폴란드는 러시아의 서진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폴란드는 바로 리보니아 연방 및 덴마크, 신성로마제국, 한자 동맹 등과 함께 뤼벡에서 리가 대주교 문제에 대해 논의했지만, 덴마크와 분쟁이 생겨 중단되었다. 그리고 폴란드는 곧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리보니아를 습격, 리보니아 연방의 각 구성원들을 위협하여 1557년 9월 포즈볼 조약을 통해 러시아에 대항하는 강력한 공수동맹을 맺었다. 이반 4세는 이걸 1554년의 조약을 위반한 것이라고 선언했고, 이듬해 바로 전쟁을 선언했다.
<리보니아 전쟁>
1558년 1월 카심 칸국의 군대를 앞세운 러시아의 군대가 리보니아 연방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독일인들에게 반감이 많았던 리보니아 농민들은 러시아 군대를 환영했고, 많은 요새들이 러시아에 저항도 하지 않고 항복했다. 전쟁이 개시된지 7개월 만에 러시아군은 도르팟과 나르바 등 리보니아의 상당 부분을 장악하고, 레발(3)을 포위했다.
- 리보니아 전쟁 초기 당시의 상황. 붉은 색은 러시아군, 초록색은 리투아니아 군의 진격로이다. -
리보니아 연방은 겨우 란쯔크네히츠 1200명을 고용하여, 이들을 통해 베센베르크 등 몇몇 요새만을 탈환할 수 있었다. 하지만 1559년과 1560년, 다시 침공해온 러시아 군대는 리보니아지역 대부분을 휩쓸었다. 크림 칸국의 침공으로 잠시 휴전이 맺어진 적도 있었지만 여전히 상황은 리보니아쪽에 불리했다. 오죽하면 기사단장이 폴란드로 도주하여, 새 기사단장을 뽑아야 했을 정도였다.
이렇게 되자 리보니아는 외부의 지원을 받으려고 했다. 처음에는 신성로마제국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신성로마제국은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복속하겠다며 지원을 호소했다. 리투아니아는 이를 승인했지만, 국력이 달렸기에 폴란드에게도 개입을 요청했다. 하지만 폴란드의 세짐은 이를 거부했다. 이 사이 러시아 군대는 리가 등 대도시를 점령하기에는 아직 부족하기는 했지만, 충분히 다른 지역들을 장악해나갔고, 1560년 8월, 리보니아 기사단 군대를 몰살시켰다.
-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 -
이렇게 되자 신임 기사단장인 케틀러는 스웨덴에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스웨덴이 이를 거부하자, 1561년에 아예 리보니아 연방을 해체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에 항복했다. 뭐 사실 연방은 이미 꼴이 말이 아니었는데 1559년에 외셀 비크 주교령은 덴마크에 항복해버렸고, 같은 해 스웨덴 군대가 에스토니아에 상륙하자, 레발 등 에스토니아 지역들도 전부 스웨덴에 항복해버린 것이었다. 스웨덴, 덴마크,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이런 식으로 리보니아에 손을 뻗으면서 리보니아 전쟁은 국제전쟁으로 확대되었고, 전쟁도 길어지게 되었다. 이는 훗날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지만 이반 뇌제는 아직 그 사실을 몰랐다.
<무역을 하고 싶어요.>
리보니아 전쟁의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무역로의 확보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그만큼 이반 4세는 유럽과 접촉하고, 무역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실제로 그는 1547년에 자신의 부하를 독일로 보내 무역협상을 시도하려고 했다. 하지만 폴란드 및 리보니아 연방의 방해로 부하가 뤼베크에서 체포되면서 이 시도는 실패했다. 그러자 이번엔 항구를 만들어봤지만 항구도 별 쓸모가 없었다.
한편 대항해시대가 막 개막되고, 수많은 탐험가들이 항로를 찾아 떠나던 1551년. 런던에서 "미지의 지역과 섬과 장소를 발견하러 나가는 모험상인들의 신비한 회사 및 동료들" 이란 꽤나 원피스 스러운 회사가 설립되었다. 이 회사는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고, 이론상으로만 존재하던 북동항로를 통해 중국으로 가는 길을 찾고자 했다. 이를 위해 3척의 탐험선들이 파견되었다. 하지만 2척은 북극해의 유빙에 갇혔고, 이듬해 러시아 어부들이 동사한 그들의 시체를 발견했다. 하지만 리처드 첸슬러가 이끌었던 배 1척은 운 좋게 러시아 어부들에게 발견되었고, 이들의 도움을 받아 아르항겔스크에 입항할 수 있었다. 그리고 리처드 첸슬러는 모스크바로 가서 이반 4세를 알현할 수 있었다.
- 리처드 챈슬러와 이반 4세. 챈슬러는 모스크바가 거대하며 대부분 목조 건물이지만 궁전은 화려했다고 말했다. -
이반 4세는 북극해를 통해 영국과 교역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굉장히 기뻐했고, 리처드 첸슬러를 영국으로 돌려보내주었다. 리처드 첸슬러는 영국으로 귀환한 지 얼마 안 되어 다시 항해에 나섰다가 병사했지만, 이를 계기로 러시아는 영국과 교역하게 되었다. 영국은 러시아에 양모를 수출했고, 러시아는 영국에 가죽을 수출하였다.(4)
한편 1556년에 알렉산드리아의 동방정교회 대주교가 이반 4세에게 시나이산에 있는 성 카타리나 수도원의 보수를 지원해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이반 4세는 그 편지에 긍정적으로 답변한 편지를 보냈지만, 중간에 편지를 가지고 가던 사절이 콘스탄티노플에서 병사해버리는 바람에 스몰렌스크 출신 상인이 대신 전달해주었다.
<불길한 징조>
잠시 시계바늘을 과거로 돌려 1553년, 이반 4세는 중병에 걸렸다. 워낙 병세가 위중하여 사람들은 모두 이반 4세가 곧 죽을거라고 생각했다. 이반 4세도 자기가 곧 죽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신하들에게 자신의 갓난 아들 드미트리에게 충성을 맹세할 것을 명령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신하들이 충성 맹세를 머뭇거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결국 이반 4세가 강요하다시피 하여 어찌저찌 충성 맹세를 맺게 하기는 했지만, 몇몇 신하들은 이반 4세가 죽으면 바로 이반 4세의 사촌인 블라디미르를 차르로 옹립하기로 모의하였다. 그리고 이런 맹세에 대한 머뭇거림이나 차르 옹립 모의에는 보야르들 뿐만이 아니라 실베르테르나 아디셰프 같은 이반 4세의 측근들도 모조리 연루되어있었다.
문제는 이반 4세가 기적적으로 병석에서 일어나버린 것이었다.(5) 그것도 블라디미르와 관련된 음모까지 알아채버린 채로. 다행히 이 때는 마카리우스 대주교나 황후 아나스타샤가 살아있었던 탓에 이반 4세의 분노가 당장 나타나지는 않았다. 이 때는 단순히 블라디미르를 모스크바에 강제로 거주하게 하고, 귀족들과의 접촉을 차단하며, 이반이 급사할 경우 그 아들의 섭정을 맡는다는 문서에 강제로 서명하게 하는 수준으로 끝났다.
- "이제 떠나야 되는데 왜 이렇게 기분이 좋지가 않지..."-
하지만 이 사건 이후 점차 이반은 분노를 자제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도 이 때 까지는 큰 문제가 없었다. 사랑스러운 아내 아나스타샤가 이반을 잘 제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560년 8월. 아나스타샤 로마노프가 세상을 떠났다. 이반 뇌제는 충격을 받았으며, 동시에 그녀가 독살되었다고 믿기 시작했다.(6) 이제 피바람이 부는 일만이 남은 것이다.
(1) 웃기게도 그는 한때 러시아의 용병으로 복무한 적이 있었고 1551년 러시아의 카잔 공격 때도 러시아군으로 참전했던 인물이었다
(2) 핀-우그르 계열의 소수민족.
(3) 지금의 탈린
(4) 참고로 "미지의 지역과 섬과 장소를 발견하러 나가는 모험상인들의 신비한 회사 및 동료들" 이란 회사는 모스크바 회사로 바뀌고 러시아와 영국의 교역을 전담하게 된다.
(5) 정작 이 해에 죽은 것은 어린 아들인 드미트리였다. 드미트리는 유모의 실수로 강에 빠져 익사했다.
(6) 20세기 후반 학자들이 아나스타샤의 머리카락을 채취, 조사한 결과 다량의 수은이 발견되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수은이 화장품으로도 사용되고, 약의 재료로도 사용되는 경향이 있었기에(당장 중국에서도 불로불사약의 재료로 수은이 사용됬다.) 독살의 증거로 보기는 애매하다.
첫댓글 확장되가는 러시아 흥미진진
원피스라니 ㅋㅋ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이것이 광기인가?
성 바실리 성당이 웅장해 보이나요?? 제가 보기엔 조잡하고 놀이동산에 있는 성같아요.. 미적 감각이 소아적이라고 할까?? 파리의 노트르담이나 쾰른 대성당같은 진중한 멋도 없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