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루카 14,25-33
그때에 25 많은 군중이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돌아서서 이르셨다.
26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27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28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29 그러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30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
31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 32 맞설 수 없겠으면, 그 임금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평화 협정을 청할 것이다.
33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복음을 읽다 보면, 예수님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나자렛 사람’이 쓰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히브리어 ‘노쯔리’와 아람어 ‘나즈란’로 쓰는데, 사실 이 단어는 예수님을 비하하는 표현이었습니다. 즉, ‘나자렛 것’, ‘나자렛 놈’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예수님을 비하하면서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이런 비판에 예수님께서 활동을 멈추셨을까요? 이런 비판이 늘어남에 따라 활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현대의 정치인들도 자기의 지지도가 떨어지게 되면, 활동에 제약받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활동을 전혀 멈추시지 않았습니다. 죽음의 위협까지도 느낄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전혀 위축되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의 판단보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윤공희 대주교님의 ‘북한교회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공산 치하에서도 신앙을 버리지 않았던 사람들, 죽음의 위험에서도 신자들과 함께하기 위해 피난 가지 않는 신부님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과거 순교자들이 “나는 천주교인이요.”라고 고백했던 모습을 떠오르게 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우리의 지금 삶 안에서는 분명 종교의 자유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신앙인답지 않게 사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자랑스럽게 “나는 천주교인이요.”라고 말할 수 있는 모습입니까?
많은 사람이 주님을 따르기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이제야말로 하느님 나라가 곧 올 것이고, 주님을 따라가기만 하면 그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는 기대에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영광은 수난과 죽음을 겪은 다음에야 돌아올 영광이었습니다. 즉, 순탄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 길이 어렵다는 것을 오늘 복음을 통해 말씀하시지요.
사실 자기 부모,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그리고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당신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말에 정말로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십계명의 제4계명에 ‘부모에게 효도하라’라고 하지 않습니까? 유교 사회 뿌리가 깊은 우리만큼 조상의 핏줄을 귀하게 여기는 유다인에게 효도는 중요한 사상이었습니다.
‘미워하다’라는 표현은 ‘뒤로 돌리다, 2차적으로 생각하다’라는 뜻의 표현입니다. 결국 극한 상황에서 필요하다면 부모까지도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도 예수님 다음 자리에 두어야 한다는 뜻이고, 궁극적으로 자기 십자가를 질 각오를 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탑과 전쟁의 비유를 통해서 주님으로부터 맡은 일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 심사숙고를 요구하는 진지함과 어떤 난관도 참고 견디어야 하는 인내심이 요구됨을 전해주십니다. 이렇게 주님을 따르는 데는 지혜로움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를 버리지 않으면 지혜로움과 주님께 대한 사랑이 나올 수 없습니다. 이제 “나는 천주교인이요.”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 죽음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겨우살이를 준비하면서도 죽음은 준비하지 않는다(톨스토이).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