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SUNDAY 오피니언
[선데이 칼럼] 정치인에겐 ‘현재 이 상황에서’ 결단이 중요
중앙선데이
입력 2023.03.25 00:28
라종일 동국대 석좌교수
독립운동 투신, 창씨개명 거부한
야당 몫 국회부의장 나의 부친
한국 산업화의 유일한 길로 여겨
한·일 국교정상화 찬성한 데 놀라
미국 측의 반응은 비판적이라기보다 철없는 아이를 책망하는 것 같은 표현들이었다. ‘터무니없는 망상’ ‘가당치 않은 야심’ ‘어떻게 한국이 산업 국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인가’ ‘그 자금을 농우나 벼 품종 개량에 투자했어햐 한다’ 등등. 한국 전쟁이 끝난 후 하와이의 교포들이 모국의 재건에 쓰라고 3만 달러를 모금해서 보냈는데 이승만 대통령은 그 돈으로 공대를 만들었다. 지금은 종합대학으로 성장한 인하공대였다. 당시 미국 외교관들은 공대를 만드는 이승만의 조치를 비현실적인 ‘야심’으로 본 것이다. 오래전에 읽은 외교 문서가 기억이 나는 것은 작금의 한·일 관계에 관한 생각 때문이다.
선데이 칼럼
그때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1960년대 초반 박정희 대통령은 한·일 관계의 정상화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국민의 저항은 거셌다. 정부가 한·일 교섭을 조기에 타결하려는 움직임이 알려지자 야당은 물론 국민들 특히 학생 측에서 반대가 심했다. 국민의 자존심이며 어민들의 생계 터전인 ‘평화선’을 일본에 내어주는 대가로 3억 달러의 청구권 명목의 보상을 받는다는 것은 국민 모두에게 모멸감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재야의 모든 정당들뿐만 아니라 시민단체, 종교단체, 문화단체 대표 등 저명인사 200명을 중심으로 ‘대일 굴욕외교 반대 범국민 투쟁위원회’를 결성해서 반대 투쟁에 나섰다.
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윤보선 투쟁위원회의 의장은 한·일 협상을 반대하는 것이 나라를 구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구국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원로 정치인 장택상도 한·일 협상을 한·일 병합에 비유하면서 이것은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라고 공격하였다. 한·일 협상에 반대하는 인사들은 그 당시 한국의 명망이 높은 분들을 거의 모두 망라하는 것 같았다. 장준하, 함석헌, 유진오 같은 분들이 모두 반대의 대열에 섰다.
대학생들도 적극 반대 운동에 가담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내가 몸담고 있었던 서울대 문리대가 협상 반대 운동의 중심이 되는 것 같았다. 그 당시 학생 운동에 적극적으로 활동하던 분들 중에 후에 대통령이 된 이명박과 국회의원이 된 김덕룡 등이 기억난다. 학생들은 단식 농성 투쟁에 돌입하였고 함석헌, 윤보선 등 지도자들이 문리대의 단식 농성 현장을 방문하여 이들을 위로하면서 격려하던 기억도 있다. 단식 도중 쓰러지는 학생들이 속출하면서 바로 길 건너 서울대 의대학생과 간호학과 학생들이 자원해서 이들을 철야로 돌보고 혹 지쳐서 실신 지경에 이르는 학생들을 의대 부속병원으로 옮겨 가는 모습도 나왔다. 모두가 극적인 관심을 끄는 광경이었다.
문리대의 단식 투쟁 모습에 고무되었는지 다른 대학의 학생들도 거리에 뛰쳐나와 화형식 등을 벌이면서 협상 반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박정희 정권 타도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서 나는 남모르는 고민이 있었다. 적극적으로 회담 반대 투쟁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나름 정부 비판에 열심이었는데 당시 야당 몫의 국회 부의장이신 부친이 한·일 국교 정상화에 찬성 입장을 천명하시는 것이었다. 누가 무어라고 하지 않아도 나로서는 매일 매일이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 그리고 잘 이해를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청년 시절 독립운동에 투신해서 박해를 받고 학업도 제대로 마칠 수 없었던 분이, 그리고 온갖 압력과 유혹에도 불구하고 창씨개명 거부는 물론 일제에 아무런 협력도 하지 않았던 분이, 그리고 단명의 장면 내각을 제외하면 평생을 야당에 몸담았던 분이 왜 거국적인 반정부 투쟁의 와중에서 정부의 편을 드는 것인가.
어느 날 마음을 다져 먹고 아버지에게 따지기 시작했다. 부친은 이런 대면을 예상했었는지 평소의 모습 그대로 조용하게 이야기를 이어가셨다. “우리나라가 농업만으로는 결코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없다. 그런데 미국 등 선진국들은 우리가 산업화 할 수 있으리라고 믿지도 않고 아예 관심도 없다. 실제로 우리는 산업화에 필요한 자본도, 기술도, 숙련된 노동력도 산업 경영의 능력도 박약하다. 유일한 기회가 일본과의 협력에 있고 지금 이 기회를 놓치게 되면 또 언제 다른 기회가 있을지, 아니면 영구히 농사만을 주로 하여 간신히 먹고사는 나라로 남아 있어야 한다. 우리가 필요한 것이 일본에 있고, 일본도 자신의 속셈이 따로 있겠지만 협력을 할 의사가 있다. 정치인의 길은 고려해야 하는 수많은 요인 중, ‘지금 현재 이 상황에서(hic et nunc라는 표현을 이때 처음 들었다.)’ 가장 요긴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물론 나는 쉽게 수긍할 수 없었다. 그리고 불평이 섞인 비판을 이어갔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한국은 산업 국가로 모습을 갖추어 갔다. 반대 투쟁에 앞장 섰던 학생들도 사회인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당시를 기억하는 ‘6·3 동지회’를 만들어 매월 한 번씩 만났다. 주로 인사동 한식집이었다. 한·일 관계에 관한 이야기는 별로 없었고 막걸리만 많이 마셨다.
6·3 항쟁 20여년이 지난 후 미국 외교 문서들을 연구하다가 앞에 인용한 인하공대 설립에 관한 미국 외교관들의 반응을 보았다. 부친이 더이상 이 세상에 계시지 않게 된 뒤였다.
라종일 동국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