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제(百濟)의 요서(遼西)경략(經略)은 사실(史實)! (제2편)
○ 21세기 역사통설(歷史通說)에서 백제(百濟)는, 『반도(半島) 서남(西南) 땅』에 있었다고 말하면서, 「한강(漢江)이남(以南)으로부터 경기(京畿)일부(一部)…충청도(忠淸道)…전라도(全羅道) 땅에서 발굴(發掘)되는 유물유적(遺物遺蹟) 대부분(大部分)은 백제(百濟)의 것」으로 추측(推測), 추정(推定)한다.
반도백제(半島百濟) : 해상(海上)으로 교류(交流)했다고 말한다.
-----------------------------------------------------------------------------------
○ 역사통설(歷史通說)에 의하면 : 백제(百濟)의 건국(建國)은 기원전(紀元前) 18년이라고 한다. 그리고는 생뚱맞게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라는 이해(理解)할 수 없는 용어(用語)까지 만들어 놓고는, ‘기원(紀元) 전후(前後) 약 300년경까지의 시기(時期)를 말한다.’고 이야기한다.
가장 이해(理解)할 수 없는 역사해설(歷史解說)은, 반도(半島) 남(南)쪽 지방에 삼한(三韓)이 있었고, 삼한(三韓)에 속한 78개 나라(國)가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고 이야기하면서도, 그에 속하는 유물유적(遺物遺蹟)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발굴(發掘)되어 나오는 것들은 대부분(大部分) 삼국(三國)의 것일 뿐이다.
유물유적(遺物遺蹟)을 삼국(三國)의 것이라고 하는 것은, 당사자(當事者)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무엇으로 그것을 증거(證據)하고, 증명(證明)하며, 고증(考證)할 수 있는가? 하는 것과는 전혀 별개(別個)다.」 왜냐하면 증거(證據)하고, 증명(證明)하고, 고증(考證)할 수 있는 자(者)도 없고, 그런 시스템도 작동(作動)되지 않는다.
특히 백제(百濟)에 대해서는 더더욱 심각(深刻)한 수준(水準)이다. 반도백제(半島百濟)를 증거(證據)할 수 있는 것들이 너무 없다는 뜻이고, 반도(半島)백제(百濟)란 허황(虛荒)된 이야기일 뿐, 그 실체(實體)가 없다는 것이다.
◇ 특히 백제(百濟)가 「요서지방(遼西地方)을 점거(占據)하고, 스스로 군(郡)을 설치(設置)하고 다스렸다.」는 것이나, 또는 「침공(侵攻)한 북위(北魏)의 수십만(數十萬) 기병군단(騎兵軍團)을 궤멸(潰滅)시켰다」는 이야기만 나오면 거품을 물며 반박(反駁)하는 자(者)들이 바로 대한민국(大韓民國)이다. 거품을 물고 반박(反駁)하는 그 사람들! 진실(眞實)과 거짓을 분별(分別)조차 하지 못하는 자(者)들이 어떻게 “오류(誤謬)”라고 말하는 것일까?
-----------------------------------------------------------------------------------
➊ 그렇다면 말이다. 「일천오백(一千五百)년 전(前)이나, 일천(一千)년 전(前) 또는 삼백(三百)년 전(前)을 살았던 우리들의 선인(先人)들은, 무엇 때문에 기록(記錄)이란 매체(媒體)를 통해 거짓정보(情報)를 흘렸을까? 더더구나 황제(黃帝)의 명(命)을 받고 저술(著述)했으면서도 거짓정보(情報)를 기록(記錄)으로 남겨 논 이유(理由)는 뭘까?」 그들은 왜, 무엇 때문에 거짓으로 사실을 왜곡(歪曲), 또는 조작(造作)하여 기록(記錄)해 놓은 것일까?
➋ 이러한 질문(質問)에 답(答)할 수 있는 자(者)는, 단 한명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이 기록(記錄)해 놓은 것들은, 모두 다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거짓정보(情報)를 흘린 이유(理由)도 없다. 이들이 살아가던 그 시대(時代)는 봉건왕조(封建王朝)때다. 이때의 사회상(社會相)을 생각하지 못하는 우리들이 문제(問題)고, 우리들이 무지(無知)해서 나오는 말이다.
➌ 또 하나는 공교육(公敎育)이란 이름하에 벌어지고 있는 세뇌교육(洗腦敎育)의 탓이다. 「이게 가장 무서운 음모(陰謀)이리라!」 세뇌(洗腦)로 각인(刻印)되어버린 기억(記憶)세포(細胞)는, 「오직 주입(注入)된, 계산(計算)된, 프로그램된 것만을 허용(許容)한다.」 다른 사고(思考)를 전혀 허락(許諾)하지 않는다. 자유(自由)로운 사고는 결코 허락(許諾)되지 않는, ‘맞춤형 인간(人間)’을 만들어내는 것이 그 목적(目的)이다.
-----------------------------------------------------------------------------------
○ 수없이 반복(反復)하는 말이다. 「요동(遼東)·요서(遼西)지방(地方)은 조선사(朝鮮史)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아킬레스건이요, 감초(甘草)와 같은 존재(存在)다.」 이곳을 빼고 나서 조선사(朝鮮史)를 말할 수 없다 할 정도(程度)이니, 그곳이 얼마나 중요(重要)한 곳이었겠는가!
이곳은 어딜까? 「21세기 역사통설(歷史通說)」에서, 요녕성(遼寧省) 심양(瀋陽) 서(西)쪽을 흐르는 요수(遼水)를 기준(基準)하여, 동(東)족은 요동(遼東)이요, 서(西)쪽은 요서(遼西)라고 한다.
재야사학(在野史學) 일부(一部)에서는,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난하(灤河) 또는 영정하(永定河)을 요수(遼水)라고 하며, 이를 기준(基準)하여, 요동(遼東)요서(遼西)를 구분(區分)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요동요서(遼東遼西)는, 고전(古典)이나 원전(原典)에 기록(記錄)된 요동요서(遼東遼西)의 지세(地勢)와 기후(氣候), 특이(特異)지형(地形), 토산물(土産物)등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저 이야기일 뿐이다.
〈고구려(高句驪)가 요동(遼東)을 점거(占據)하여 경략(經略)할 때에, 백제(百濟) 또한 요서(遼西)와 진평(晉平) 2군(郡)을 점거(占據)하여 경략(經略)하였다.〉고 하였다.
◇ 전회(前回)에서 말했듯이 : 당시(當時) 백제(百濟)는 많은 제후(諸侯)들을 거느린 대국(大國)이었다.「면중왕(面中王)·도한왕(都漢王)·아착왕(阿錯王)·매노왕(邁盧王)·매라왕(邁羅王)·벽중왕(辟中王)·불사후(弗斯侯)·불중후(弗中侯)·팔중후(八中侯)·면중후·(面中侯)」등이 있었고,「광양태수(廣陽太守)·조선태수(朝鮮太守)·대방태수(帶方太守)·광릉태수(廣陵太守)·청하태수(清河太守)·낙랑태수(樂浪太守)·성양태수(城陽太守)」등이 있었다. 이들 모두가 반도(半島) 서남(西南) 모퉁이에 있었다고?
반도사학(半島史學)에서 말하는 반도백제(半島百濟) 땅은, 모두를 합해도 위에서 말하는 제후(諸侯) 한 사람의 땅(봉지:封地)만도 못한 크기이다.
이러한 역사적(歷史的) 기록(記錄)은 오늘날에도 생생(生生)하게 살아있어, 이를 보는 이들로 하여금, 눈시울을 적시게 만든다. 반도(半島)조선왕조(朝鮮王朝)란 이야기는 허황지설(虛荒之說)일 뿐이다. 「요동지동(遼東之東) 천여(千餘)리에, 고구려(高句驪)와 함께 있었다는 백제(百濟)가, 반도(半島) 땅 서남(西南)쪽 모퉁이에 있었다.」라는 말은 무언가?
누가 이런 조선사(朝鮮史)를 만들고, 전파(傳播)했는가? 스스로 되돌아봐야 할 때다.
-----------------------------------------------------------------------------------
(1) 송서(宋書) 97 백제(百濟) :《百濟國,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其後,高驪略有遼東,百濟略有遼西,百濟所治,謂之晋平郡,晋平縣. : 백제국(百濟國)은, 본래 고려(高驪)와 함께 요동(遼東)의 동(東)쪽 천여(千餘)리에 있었다. 그 뒤로, 고려(高驪)가 요동(遼東)을 경략(經略)할 때에, 백제(百濟)도 요서(遼西)를 경략(經略)하였다. 백제(百濟)가 다스린 곳은 진평군(晋平郡) 진평현(晋平縣)이라고 한다.》
…〈남조(南朝) 송(宋)의 정사(正史). 제기(帝紀) 10권, 지(志) 30권, 열전(列傳) 60권, 도합 100권. 487년 남제(南齊) 무제(武帝)의 칙명(勅命)에 따라 심약(沈約)이 488년에 편찬을 완성한 것으로 송나라 60년(420∼478)의 역사를 기록하였다.〉고 전해진다. 지금으로부터 ‘1,528년 전(前)’에 기록(記錄)된 역사서(歷史書)이다.
지금(只今)으로부터 1,528년 전(傳)에 기록(記錄)된 송서(宋書)의 내용(內容)을 “맞다, 틀리다”라고 말하는 것, 자체(自體)가 웃기는 얘기다. 누가 1,528년 전(前)의 기록(記錄)에 대해 시시비비(是是非非)를 따질 수 있겠는가! 또 혹자(或者)는 진평군(晋平郡)이나진평현(晋平縣)은, 그 이름부터가 진(晉)나라의 것이 아니냐? 하면서 진(晉)나라의 군현(郡縣)을 어찌 백제(百濟)의 것으로 둔갑(遁甲)시키는가한다.
◇ 이는 무지(無知)에서 나오는 말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그곳에 백제(百濟)가 본시(本是)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점거(占據)하여 통치(統治)했다」는 말이고, 그 땅 이름이 진평군(晋平郡) 진평현(晋平縣)이란 얘기다. 【晉의 속자(俗字) : 晋이다.】
-----------------------------------------------------------------------------------
(2) 남사(南史) 79 열전(列傳) 69 백제(百濟) :《百濟者,其先東夷有三韓國.中略.百濟即其一也. :백제는, 그 선조(先祖)가 동이(東夷)의 세 한국(韓國)인데, 중략(中略), 백제는 곧 그 중의 하나이다. 後漸強大,兼諸小國.其國本與句麗俱在遼東之東千餘里. : 뒤에 점점 강대해저, 여러 소국(小國)을 병합하였다. 백제는 본래 구려(句麗)와 함께 요동(遼東)의 동(東)쪽 천여(千餘)리에 있었다. 晉世句麗既略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自置百濟郡.中略. : 진(晉)나라 때에 구려(句麗)가 앞서 요동(遼東)을 경략(經略)하자, 백제(百濟)도 요서(遼西)와 진평(晉平) 2군의 땅을 점거하여, 스스로 백제군(百濟郡)을 두었다. 중략(中略). 號所都城曰固麻,謂邑曰檐魯,如中國之言郡縣也.其國土有二十二檐魯,皆以子弟宗族分據之. : 도읍지는 고마(固麻)라고 불렀으며, 마을은 담로(檐魯 : 담로 擔魯)라고 하였는데, 중국(中國)의 군현(郡縣)과 같은 말이다. 그 나라는 22개의 담로(檐魯)가 있어, 모두 왕의 자제(子弟)나 종친(宗親)들이 나누어 다스렸다. 其人形長,衣服潔淨.其國近倭,頗有文身者.言語服章略與高麗同,呼帽曰冠,襦曰複衫,褲曰褌.其言參諸夏,亦秦,韓之遺俗云. : 그 나라 사람들의 모습은 크고, 의복은 깨끗하고 말끔하다(潔淨). 그 나라 가까이에 왜(倭)가 있어, 문신(文身)한 자들이 약간 있다. 언어와 의복은 대략 고려(高麗)와 같은데, 모자를 관이라 하고, 저고리(유襦)는 복삼(複衫), 바지(고褲)는 잠방이(곤褌)이라고 하였는데, 그 말은 제하(諸夏 : 중국의 본토)의 말이 뒤섞여 있으니, 이는 또한 진(秦)나라와 한(韓)나라의 습속이 이어진 것이다.》라고 하였다.
(3) 양(梁) 직공도(職貢圖) : 《百濟舊來夷馬韓之屬. : 백제(百濟)는 옛 래이(來夷)로 마한(馬韓)에 속해 있었다. 晉末駒驪略有遼東樂浪,亦有遼西晉平縣.中略. : 진(晉 : 265∼317)나라 말(末)에 구려(駒驪)가 요동(遼東) 낙랑(樂浪)을 경략(經略)할 때, (백제) 또한 요서(遼西)와 진평현(晉平縣)을 다스렸다. 중략(中略). 所治城曰固麻.謂邑檐魯於中國郡縣有二十二檐魯分子弟宗族爲之. : 다스리는 성(城)을 고마(固麻)라고 불렀다. 읍(邑)을 담로(첨로 : 檐魯 : 淡路)라고 불렀는데, 중국의 군현에 해당하는데, 22개의 담로(檐魯)가 있어, 자식과 형제 및 종친(宗親)들이 나누어 다스렸다. 旁小國有叛波卓多羅前羅斯羅止迷麻連上巳文下枕羅等附之. : 주위에 소국(小國)들이 있는데 반파(叛波), 탁(卓), 다라(多羅), 전라(前羅), 시라(斯羅), 지미(止迷), 마연(麻連), 상사문(上巳文), 하침라(下枕羅) 등이 부속되어 있다. 言語衣服略同高麗行不張拱拜不申足. : 언어(言語)와 의복은 대략 고려(高麗:고구려)와 같은데, 걸을 때 두 팔을 벌리지 않고, 절을 할 때 다리를 펴지 않는다. 以帽爲冠襦曰複袗袴曰褌其言參諸夏亦秦韓之遺俗. : 모자를 관이라 하고, 저고리는 복진(複袗), 바지는 곤(褌)이라 부르는데, 그 말에는 하(夏)의 말이 섞여있으니, 이것은 진(秦)과 한(韓)의 습속이 남아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6세기 전반)
➊ 양(梁) 직공도(職貢圖) : 〈통상 ‘양직공도(梁職工圖)’라고 불린다. 예문유취(藝文類聚)에 따르면, 양(梁) 무제(武帝)의 아들이었던 상동왕(湘東王) 소역(蕭繹, 훗날의 元帝)이 형주자사(荊州刺史) 재임(526~539) 중에, 무제의 즉위 40년을 맞아 주변 제국이 양나라에 조공한 성황을 기록하기 위해 외국 사신의 용모를 관찰하고 풍속을 물어 제작하였다고 전한다. 원본은 전해지고 있지 않으며, 현재 알려진 것은 세 종류의 모사본이다.〉 출처 : 역사용어사전. 인용/끝.
➋〈其 言 參 諸 夏 亦 秦 韓 之 遺 俗 : 그들의 말(言)에는 하(諸夏)의 말이 섞여있으니, 이것은 진(秦)나라와 한(韓)나라의 습속이 남아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곧 『백제(百濟)의 말(言語)은, 중국(中國 : 제하諸夏)의 말이 많이 섞여 있는데, 이는 〈진(秦)나라와 한(韓)나라의 풍속(風俗)이 이어진 것이다.〉라고 한다.』
진(秦)·한(韓)은 누군가?
…출처 : 네이버지식백과 / 두산백과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 〈역사통설(歷史通說)에서 주장(主張)하는 것이므로 오직 참고(參考)만 할 뿐이다.〉
➌ 위의 지도(地圖)에서 보듯이, 진(秦)은 시황제(始皇帝)의 진(秦)나라를 뜻하고, 한(韓)나라는 중원(中原)의 핵심(核心) 요충지(要衝地) 땅에 있었던 한국(韓國)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나라들의 백성(百姓)들이 곧 백제(百濟)의 백성(百姓)들이었다는 이야기고, 소위(所謂) 대륙(大陸)이라고 하는 곳은, 옛 조선왕조(朝鮮王朝)의 터전이었다는 확인(確認)해 주는 내용(內容)이다.
시황(始皇) 영정(嬴政)도 동방(東方)의 이족(夷族)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➍ 임하필기(林下筆記) : 근대조선(近代朝鮮) 문신(文臣) 이유원(李裕元 : 1814∼1888)에 의해, 1871년(고종 8)에 탈고(脫稿)되었다고 전해진다.
12권 창녀(倡女)편에서 : 《고려 숙종(肅宗) 때에 송(宋)나라 사신 유규(劉 )와 오식(吳拭)이 와서 관(館)에 머물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잔치 자리에 나왔다가 향장(鄕粧)을 한 창녀(倡女)를 보고 불러서 섬돌 위로 올라오게 한 다음, 그 여자가 입은 소매가 넓은 저고리의 색깔과 초록색의 띠를 맨 큰 치마를 가리키면서 감탄하여 말하기를, 「이것은 모두 삼대(三代) 시절의 복장인데, 뜻밖에도 아직도 여기에서 시행되고 있구나.(此 皆 三 代 之 服. 不 意 南 行 於 此)」》하였다.
※ 창녀(倡女)란 : 몸을 파는 여자(娼女)가 아니라, 창(倡 : 배우俳優 창)이라 하여 광대 또는 관(官)에 소속(所屬)되어 있으면서 접대(接待) 또는 시중(侍中)을 드는 여자를 말하는 것이고, 삼대(三代)란 : 하(夏). 은(殷). 주(周)의 삼 왕조(王朝)를 말한다.
번역(飜譯)을 다시 해보자 :〈此 皆 三 代 之 服. 不 意 南 行 於 此 : 이것은 모두 삼대(三代)의 복장이다. 이것이 남(南)쪽으로 가 뜻밖에 생각지도 않았던 일을 시행(施行)하고 있구나.〉하였다. 이 말은, 결과적(結果的)으로 당시(當時) 송(宋)나라에서는 이러한 삼대(三代) 왕조(王朝)의 복장(服裝)과는 전혀 다른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고, 고려(高麗)에선 하. 은. 주(夏殷周)의 복장(服裝)을 이어받아 개량(改良)하여 입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특히 주목(注目)할 점은 송(宋)나라 사신(使臣)이 말한 대목 “남쪽으로 가(南行)” 라는 구절이다. 당시 고려(高麗)는 반도(半島)가 아닌 대륙(大陸)의 옛 천자국(天子國)이었던, 『하. 은. 주(夏殷周)의 남쪽지방으로 내려가 있었다.』는 말과 똑같다. 하. 은. 주(夏殷周)의 왕기(王畿)지방은 황하(黃河)와 위수(渭水) 주변이다. 이곳의 남(南)쪽 지대는 어디를 말하는 것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다 알 수 있다.
◇ 또한 역사통설(歷史通說)에서 말하는 천자국(天子國) 송(宋)나라는 「하. 은. 주(夏殷周)의 남쪽지방에 없었다.」는 이야기인데, 이게 팩트(fact)다. 또한 사실(史實)이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당시(當時)에, 왕건(王建)의 고려(高麗)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내용(內容)은, 위에서 말하는 백제(百濟)와 고구려(高句驪) 뒤의 역사(歷史)이야기다. 즉(卽) 그 땅(地)에서, 그 백성(百姓)들로 이루어진 나라(國)가 곧 왕건(王建)의 고려(高麗)라는 뜻이다.
-----------------------------------------------------------------------------------
(4) 통전(通典) 185 백제(百濟) :《晉時,句麗旣略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晋平二郡.今柳城北平之間. : 진(晉)나라 때, 구려(句麗)가 앞서 요동(遼東)을 경략(經略)하자, 백제(百濟) 또한 요서(遼西) 진평(晋平) 2군의 땅을 점거하여 차지하였다. 지금의 유성(柳城)과 북평(北平) 사이이다.》
➊ 백제(百濟)의 〈‘요서(遼西)점거(占據) 및 경략(經略)’에 대해여, 두우(杜佑)는 그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까지 상세(詳細)하게 기록(記錄)해 놓았다. 유성(柳城)과 북평(北平)사이에 있었다.〉고 말이다. …열도(列島) 동경대학교(東京大學敎) 소장본 “통전(通典)”에는 “유성(柳城)과 안평(安平)사이(今柳城,安平之間)”라고 하였다.
또한 「요서군(遼西郡)과 진평군(晋平郡)의 두 군(郡)을 점거(占據)하여 다스렸다.」고 하였다. 서력(西曆) 801년에 편찬(編纂)되었다고 하니, 지금(只今)으로부터 「1,215년 전(前)」에 기록된 이야기다. 무엇을 가지고, 이런 사실(事實)이 “오류(誤謬)”라고 한다거나, “잘못된 기록(記錄)”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➋ 백제(百濟)의 요서(遼西)경략(經略)은, 설(說)아 아닌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이다.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을 호도(糊塗)하자 말자. 은근 슬쩍 “설(說)”이란 말을 끼워 놓고, 장난하지 말자는 거다.
➌ 〈백제(百濟)가 「유성(柳城)과 북평(北平)사이」의 땅에 「요서군(遼西郡)과 진평군(晋平郡)」등 2 군(郡)을 설치하고 다스렸다.〉는 뜻이다. 많은 고전(古典)속에 이런 내용(內容)이 기록(記錄)되어 있다. 그러나 반도사학(半島史學)은 애써 이를 인정(認定)하지 않으려는 태도(態度)를 보인다. 이는 반도백제(半島百濟)가 당시(當時)의 북위(北魏)와 고구려(高句驪)의 국력(國力)을 생각하면, 해상(海上)으로만 가능(可能)한 요서지방(遼西地方)을 무슨 제주로 점거(占據)하고, 다스릴 수 있었겠는가? 하고 생각하니, 인정(認定)하지 못하는 거다.
식민사학(植民史學)의 반도백제(半島百濟) 때문이다.
-----------------------------------------------------------------------------------
(5) 자치통감(資治通鑑) 97권 진기(晉紀) 顯宗成皇帝下永和二年.丙午,公元三四六年 :《初,夫餘居於鹿山,為百濟所侵,部落衰散,西徙近燕,而不設備. : 처음 부여(夫餘)는 녹산(鹿山)에 있었는데, 백제(百濟)의 침략으로 부락이 쇠하여 흩어졌다. 서쪽 연(燕)나라 근처로 옮겨갔으나, 아무런 방비도 없었다. 燕王皝遣世子俊帥慕容軍,慕容恪,慕輿根三將軍,萬七千騎襲夫餘.中略. : 연(燕)나라 왕(王) ‘모용황(慕容皩)은 세자(世子) 준(俊)을 모용군(慕容軍)의 우두머리로, 모용각(慕容恪), 모여근(慕輿根)등의 세 장군과 17,000기로 부여(夫餘)를 습격하였다. 중략(中略).》
➊ 자치통감(資治通鑑)은, 북송(北宋) 사마광(司馬光)이 서력(西曆) 1,084년 저술(著述)했다고 전(傳)하며, 이 책은 “제왕학(帝王學)의 책”이라고 불릴 정도이니, 그만큼 값어치가 있다는 말일 것이다.
〈백제(百濟)는 부여(夫餘)의 동(東)쪽에 접(接)해 있었다.〉 백제(百濟)가 부여(夫餘)를 자주 침공(侵攻)하자, 부여(夫餘)는 서(西)족으로 이동(移動)했으나, 연(燕)나라가 가까이에 있어, 이들을 방비하지 못해, 결국 왕(王)과 5만 여 가(家)가 포로(捕虜)로 잡혀갔다고 역사서(歷史書)는 전한다.
이런 이야기는 ‘요동지동(遼東之東) 천여(千餘)리에 고구려(高句驪)와 백제(百濟)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➋ 여기서 ‘반도(半島) 서남(西南) 백제국(百濟國)’이라는 방정식(方程式)은 깨진다. 왜냐하면 ‘옛 부여(夫餘)는 반도(半島) 북방(北方)의 오늘날 북방삼성(北方三省) 땅에 있었다.’고 지들 스스로(식민사학植民史學)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
(6)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 172 百濟國 :《時,句麗旣畧有遼東,而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今營,平二州之間也.中略. : 때에, 구려(句麗)가 벌써 요동(遼東)을 경략할 때, 백제(百濟) 또한 요서(遼西)와 진평(晉平) 2군을 점거하였다. 영주(營州)와 평주(平州) 두 주(州)의 사이이다. 중략(中略). 後魏孝文帝遣衆征破之,後其王牟大,爲高句麗所破,衰弱累年,遷居南韓舊地. : 후위(後魏) 효문제(孝文帝)가 보낸 무리들을 깨뜨렸다. 뒤에 그 나라 왕 모대(牟大)는, 고구려(高句麗)에 패하여, 해마다 쇠약해져, 남한(南韓)의 옛 땅으로 옮겨 살았다.》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 : 〈송(宋)나라 때, 태상박사 직사관(太常博士直史館) 악사(樂史 : 930-1007)가 지은 지리지(地理志)인데, 현재(現在) 전하는 세계(世界)에서 가장 오래된 지리서(地理書)〉라고 하니, 지금(只今)으로부터 일천(一千)년 전(前)에 이미 기록(記錄)된 지리서(地理書)이다.
이곳에서도 「백제(百濟)의 요서(遼西)경략(經略)과 함께 ‘요서군(遼西郡)과 진평군(晉平郡) 2군(郡)’ 의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까지도 기술(記述)해 놓고 있는데, 그곳은 ‘영주(營州)와 평주(平州)’사이에 있었다.」라고 했다. 이러한 일천(一千)년 전(前)의 기록(記錄)과 설명(說明)을 누가 “No”라고 말할 수 있는가?
특히 ‘영주(營州)와 평주(平州)’ 는 고구려(高句驪) 장수왕(長壽王)이 “영·평(營平) 2주 도독(都督)”을 역임(歷任)했다고 하는 곳이다. (以璉爲使持節都督營州諸軍事征東將軍高句驪王樂浪公)〉
-----------------------------------------------------------------------------------
(7) 문헌통고(文獻通考) :《晉世句驪既略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自置百濟郡.中略. : 진(晉)나라 시대, 구려(句麗)가 앞서 요동(遼東)을 경략(經略)하자, 백제(百濟)도 요서(遼西), 진평(晉平) 2군의 땅을 점거하여, 스스로 백제군(百濟郡)을 두었다. 중략(中略).》
(8) 欽定滿洲源流考卷三.部族.百濟.一作伯濟 :《通考.中略.初以百家濟因號百濟後漸强大兼諸小國.晉時句麗既畧有遼東百濟亦畧有遼西晉平(唐栁城北平之間)自晉以後吞併諸國據有馬韓故地.中略. : 통고(通考), 중략(中略), 처음에 백가(百家)가 건너서 이로 인해 백제라 부르게 되었는데, 뒤에 점점 강대해져 여러 작은 나라들을 병합하였다. 진(晉)때에 구려(句麗)가 이미 요동(遼東)을 경략하고 있을 때, 백제(百濟) 또한 요서(遼西)진평(晉平)을 다스렸다. (당(唐)의 유성(柳城)과 북평(北平)사이이다). 진(晉)나라 이후 스스로 여러 나라를 삼켜 병합하고 마한(馬韓)의 옛 땅에 있었다. 중략(中略).》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 : 청(淸)나라 때의 만주풍속지리지(滿洲風俗地理志)이다. 아계(阿桂)등이 황제(皇帝)의 명에 따라, 부족(部族), 강역(疆域), 산천(山川), 나라(國)의 풍속(風俗) 따위의 네 부분으로 나누어 상세히 기록하였는데, 서력(西曆) 1,739년에 간행(刊行)되었다. 20권이다.
➊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는 청(淸) 황제(皇帝)의 명(命)으로, 지금(只今)으로부터 277년 전(前), 서력 1,739년에 편찬(編纂)된 풍속(風俗)지리서(地理書)라고 한다. 이곳에서도 「백제(百濟)의 요서(遼西)경략(經略)을 말하며, 그 위치(位置)를 “당(唐)나라 때의 유성(柳城)과 북평(北平)사이에 있었다.”」라고 말한다. 통전(通典)에서 말하는 곳과 똑같은 곳을 말하고 있다.
➋ 누가, 어느 누가 감히 이러한 기록(記錄)을 “오류(誤謬)”라거나 “No”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오류(誤謬)”라고 한다면 많은 역사서(歷史書 : 古典)가 이런 오류(誤謬)를 반복(反復)하고 있는 이유(理由)가 무엇이며, “No”라고 한다면, “No”라고 말할 수 있는, 논거(論據)가 필요(必要)한 것이다.
시대(時代)를 초월(超越)하여 기록(記錄)된, 봉건왕조(封建王朝)가 바뀜에 따라 필요(必要)에 의해 편찬(編纂)된 역사서(歷史書)에 반복(反復)되어 기록(記錄)된 이야기들은, 당시(當時)의 편찬(編纂)에 참여(參與)한 많은 학자(學者)와 관리(官吏)들에 의해, 검증(檢證)된 것들을 서술(敍述)하여, 마지막 교열(校閱)을 거쳐 편찬(編纂)되었을 것이다.
➌ 또한 무엇으로 ‘반도(半島)조선왕조(朝鮮王朝)’를 증거(證據)할 수 있겠는가? 고전(古典)에 기록(記錄)된 이야기대로라면 :「요동지동(遼東之東) 천여(千餘)리에 고구려(高句驪)와 함께 백제(百濟)가 있었다.」는 말은, 오늘날의 식민사학(植民史學) 역사해설(歷史解說)로 봐도, 만주(滿洲) 땅은, 마한(馬韓)의 옛 땅이란 이야기다. 이러함에도 전라도(全羅道) 땅이, 마한(馬韓)이란 이야기는 뭔가?
천지(天地)가 개벽(開闢)할 일이 아닌가! 이게 대한민국(大韓民國) 오늘의 현실(現實)이다.
-----------------------------------------------------------------------------------
(9) 백제(百濟)가 ‘요동(遼東)지동(之東) 천여(千餘)리에 고구려(高句驪)와 함께 있었다.’는 문헌적(文獻的) 증거(證據)는 또 있다.
진서(晉書) 재기(載記) 모용황(慕容皝) 본문(本文)을 보면 : 서력(西曆) 345년 정월(正月), 모용황(慕容皩)의 기실참군(記室參軍) 봉유(封裕)가 상소하기를 : 《句麗,百濟及宇文,段部之人,皆兵勢所徙,非如中國慕義而至,鹹有思歸之心. : 구려(句麗), 백제(百濟) 및 우문(宇文), 단부(段部)의 사람들은, 모두 병세(兵勢)에 따라 이곳으로 옮겨져 왔을 뿐, 의를 사모하여 중국(中國)으로 오고자 하여 온 것이 아니므로, 고향을 그리워하고 돌아가려는 마음이 있다. 今戶垂十萬,狹湊都城,恐方將為國家深害,宜分其兄弟宗屬,徙於西境諸城,撫之以恩,檢之以法,中略. : 지금 호수가 10만이나, 도성에 몰려 좁을 지경이니, 장차 국가에 깊은 해가 될까 두렵다. 마땅히 그 형제종속들을 나누어, 서쪽 경계의 여러 성으로 옮겨, 은덕으로 안무(按撫)하고, 법으로 단속해야 한다. 중략(中略).》고 하였다.
➊ 모용황(慕容皝)은 북연(北燕)의 왕(王)이다. 이때 고구려(高句驪)·백제(百濟)·우문(宇文)선비(鮮卑)·선비(鮮卑)단부(段部)의 사람들이 모용황(慕容皝)의 침공(侵攻), 정벌(征伐)과정(過程)에서 포로(捕虜)가 되었거나 또는 노예(奴隷)등으로 잡혀서 도성(都城)으로 끌려오다보니 도성(都城)호수(戶數)가 10만이나 되어 도성(都城)이 좁을 지경이고,
➋ 이렇게 많은 백성(百姓)들이, 타의(他意)에 의해 끌려와 살고 있다 보니, 언제든지 반기(反旗)를 들고 일어날 수 있으므로, 이들을 가려서 서(西)쪽 변경의 성(城)등으로 보내야 한다는 이야기다.
고구려(高句驪) 또는 우문(宇文)선비(鮮卑) 또는 단부(段部)들은 북연(北燕)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보니, 모용황(慕容皝)의 1차 침공(侵攻)대상(對象)이 되었고, 역사서(歷史書)에서도 침공(侵攻)했다고 기록(記錄)되어있다.
➌ 그러나 역사통설(歷史通說)로 보면 : 백제(百濟)는 고구려(高句驪) 남(南)쪽 반도(半島) 서남(西南) 땅에 있었으므로, 북연(北燕)이 고구려(高句驪)를 격파(擊破)하고, 남진(南進)하여 백제(百濟)영토(領土)안으로 들어가서, 백제(百濟)군(軍)을 격파(擊破)했을 때만이 백성(百姓)들이나 병사(兵士)들을 포로(捕虜)로 데려갈 수가 있다. 그렇지 않은가!
북연(北燕)군대(軍隊)가 반도(半島) 남쪽의 백제(百濟)를 쳤다는 기록(記錄)은 없다. 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고구려(高句驪)가 북연(北燕)에게 망(亡)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➍ 그러나 역사서(歷史書) 원전(原典)에는 ‘백제(百濟)인들이 북연(北燕)의 도성(都城)에 끌려와 있다’ 고 하였으며, 또한 백제(百濟)가 부여(扶餘)를 침공(侵攻)하니, 부여(扶餘)는 견디지 못해 서(西)쪽의 연(燕)나라 쪽으로 이동(移動)했다고 하였다.
「반도(半島)백제(百濟)는 존재(存在)할 수 없다」는 뜻이다. 백제(百濟)가 무슨 날아다니는 조인(鳥人)들도 아니고 말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백제(百濟)는 고구려(高句驪)와 함께 요동지동(遼東之東) 천여(千餘)리에 있었다.〉는 것을 확인(確認)시켜주는 내용(內容)이며,
이에 따라「백제(百濟)의 요서경략(遼西經略)은, ‘실제(實際) 역사(歷史)’」란 것을 알게 해준다.
백제(百濟)의 요서(遼西) 경략(經略) : 역사통설(歷史通說)에서는, 대부분(大部分) 이를 인정(認定)하지 않는다.
※ 그러나 「인정(認定)한다 또는 안한다.」가 문제(問題)가 아니라, 여러 원전(原典)의 기록(記錄)이 잘못된 것이라는 논거(論據)와 해설(解說)이 먼저다.
◇「인정(認定)못한다」는 자(者)들은, 백제(百濟)를 반도(半島) 서남(西南) 땅에 묶어 놓았기 때문에, 요서(遼西)경략(經略)은, 불가능(不可能)한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처음부터 단추가 잘못 끼워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를 인지(認知)하지 못한다. 이게 문제(問題)인 거다. 아래 해동역사(海東繹史) 한 구절(句節)을 보자.
===================================================================================
○ 해동역사(海東繹史)는 조선인(朝鮮人)이 기록(記錄)한 역사서(歷史書)다. 이곳엔 우리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생소하게 느껴지는,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들을 고전(古典)에 의거(依據)하여 기록(記錄)해 놓고 있다. 우리 카페에 이미 게재(揭載)된 내용(內容)이다.
➊ 해동역사(海東繹史) 제18권/ 예지(禮志) 1 /조례(朝禮) :《국관(國官)은 한 달에 여섯 차례 조회(朝會)에 참석한다. 문반(文班)은 7백 10명, 무반(武班)은 5백 40명이며, 여섯 번 절하고, 춤을 춘 다음 물러가면, 임금이 몸을 구부려서 답례한다. 일을 여쭐 경우에는, 무릎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분부를 듣고는 다시 무릎걸음으로 물러 나오다가, 계단에 이르러서야 걸어 나온다. [이상 모두 계림유사(鷄林類事)] 》고 하였다.
➋ 해동역사(海東繹史) 본문(本文) : 《원(元) 대덕(大德) 4년(1300, 충렬왕26)에 정동행성(征東行省)이 아뢰기를, 「고려(高麗)국왕이 큰 모임을 열 때 왕(王)은 곡개(曲蓋)와 용병(龍屛)을 치고 경필(警蹕)을 하며, 여러 신하들은 무도(舞蹈)하면서 만세(萬歲) 부르기를 한, 결같이 중국(中國) 조정(朝廷)에서 하는 의식(儀式)과 같이 하니, 참람(僭濫)스러움이 아주 심합니다.」 하니, 조사(詔使)를 보내 바로잡았다. (원사元史)》고 하였다.
오늘날 대한민국(大韓民國)에서는 “사극(史劇)”이라는 역사물(歷史物)이 “T.V 방송국”에서 드라마로 아주 좋은 인기(人氣)몰이를 하고 있다. 그 이유(理由)야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나, 소위 접(接)해보지 못했던 과거(過去)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며, 특히 절대권력자(絶代權力者)가 가지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힘과, 그 힘에 대항(對抗)하는 자(者)들의 모습, 여인(女人)네들과 절대권력(絶代權力)과의 결탁(結託), 여인(女人)들의 질투(嫉妬), 시샘, 궁중(宮中)생활의 비화(秘話)등은, 말초신경(末梢神經)을 자극(刺戟)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간과(看過)하고 있는 것은, 대부분(大部分)의 역사(歷史)드라마가 「호기심(好奇心)의 인기(人氣)몰이로 전락(轉落)하고, 고전(古典)의 고증(考證) 불성실(不誠實)과 능력(能力)미비(未備), 식민사관(植民史觀)의 논리(論理)가 결합(結合)되어, 역사서(歷史書)의 진실(眞實)된 모습과는 전혀 판이(判異) 모습으로, 안방으로 전파(傳播)되고 있다.」는 사실(事實)이다.
➌ 위 해동역사(海東繹史) 본문(本文) ➊과 ➋를 보면 : 《한 달에 여섯 번 조회(朝會)를 하는데, 문반【文班 : 문반의 반열】이 710명이요, 무반【武班 : 무반의 반열】이 540명이면 1,250 명이 왕(王) 아래에 좌우(左右)로 나누어, 군주(君主)에게, 여섯 번 절하며, 일을 여쭐 경우에는, 무릎걸음으로 왕 앞으로 나아가고, 일을 마치면, 다시 무릎걸음으로 물러나오다가, 계단(階段)에 이르러야 서서 걸어 나온다.》고 하였다.
이런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면서 생각을 좀 해보자. 여지 것 들어 보지도, 본 적도 없는, 상상(想像)속의 그림과도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우린 그저 스스로 제후국(諸侯國)이라고 비하(卑下)하여, 천세(千歲), 천세(千歲)를 외쳤기 때문이다. 위 계림유사(鷄林類事)의 설명(說明)은, 우리를 무척 당혹(當惑)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1,250명의 신하(臣下)들이 도열(堵列)하고, 섬돌 위에 군왕(君王)이 자리 잡고 있는 궁내(宮內)를 생각해 보면, 그곳이 얼마나 넓었을까를 상상(想像)해보자. 이성계(李成桂)의 조선왕조(朝鮮王朝) 역시(亦是)도 이와 버금가는 영토(領土)를 가졌던 왕조(王朝)였다는 것에 비교(比較)해보면, 반도(半島) 한성부(漢城府)에 있는 궁궐(宮闕)은, 「소꿉장난하기에 안성맞춤」일 정도일 것이다.
➍ 고려(高麗)를 포함(包含)한 조선왕조(朝鮮王朝)는, 신하(臣下)들이 「임금 앞에서, 만세(萬歲), 만세(萬歲), 만만세(萬萬歲)를 외쳤다.」는 것은 「천자국 곧 황제국(皇帝國)임을 밝히는 것이다.」 제후(諸侯)들은 “천세(千歲)”라 하며, 그 신하(臣下)들은, “임금 앞에서 천세(千歲), 천세(千歲), 천천세(千千歲)”를 외칠 뿐이다. 제후(諸侯)는 “전하(殿下)”일 뿐이며, 그저 세자(世子)일 뿐이다.
어디 감히 “황제 폐하(陛下) 만만세(萬萬歲)”를 외칠 수 있으며, “태자(太子)마마”를 외칠 수 있었겠는가!
조선왕조(朝鮮王朝)의 군주(君主)는, 섬돌 위, 높은 곳에 앉아 있고, 계단(階段) 저 아래에 〈문신(文臣) 710인과 무신(武臣)540인 등 1,250인이 도열(堵列)서 있다가 군주(君主)가 도착(到着)하면, 만세(萬歲),만세(萬歲), 만만세(萬萬歲)를 외치고, 여섯 번이나 절을 한다.〉고 하였다. 상상(想像)을 해보자.
위에서 말하는 국관(國官)이란, 중앙(中央)조정(朝廷) 곧 당시 황성(皇城)에 근무하고 있는 고급(高級)관리(官吏)들을 말하는 것이며, 지방관리(地方官吏)는 제외(除外)되어 있을 것이다. ‘한 달에 여섯 번’이란 말은 지방관리(地方官吏)는 참석(參席)할 수 없으니 말이다.
또 하나 꼭 말하고 싶은 것은 : 우리가 교육현장(敎育現場)에서, 또는 드라마 영상(映像)속에서든, 「여섯 번이나 절하고, 무릎걸음으로 나아가고, 물러나는 장면을 본적이 있는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스스로 제후국(諸侯國)을 자처(自處)하고 있으니, 어디 감히 황제국(皇帝國)을 사칭(詐稱)할 수 있겠는가!
물론(勿論) 있다. 소위(所謂) 중국(中國)의 사극(史劇)영화(映畫) 또는 드라마에서 본 것이 전부(全部)다. 유일(唯一)한 것이다. 이게 팩트(fact)다. 「대륙(大陸)아이들이 조선왕조(朝鮮王朝)의 것들을 차용(借用)하여, 지들 것인 냥, 써먹고 있는 거다.」 우린 선인(先人)들이 남겨 놓은 밥상하나도 제대로 챙겨먹지 못하는 무지(無知)함속에 생각없이 돈(money)만을 쫓아 다람쥐 바퀴 돌리듯 살고 있는 것이다.
2017년 12월 02일 〈글쓴이 : 문무(文武)〉
|
첫댓글 더 많은 사료와 설명을 해 놓았는데, 1회 게재 용량 초과로 싹뚝해버렸습니다.
마저 설명치 못한 것은 다음 기회로 남겨 뒀습니다.
백제왕조에 대한 우리 사회의 천시는 더 이상 바라보기가 민망할 정돕니다.
아마도 사료부족으로 인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만, 가지고 있는 사료조차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식민사학의 반도백제에 이용당하는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여기저기 단편적으로 남아있는 백제 사료를 더 발굴해 보고자 합니다.
회원 여러분들의 관심과 성원에 감사드리며, 추운 날씨에 우리 카페 회원님들의 가정에 따스한 행목이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문무 선생님 안녕 하십니까 ?
끊임 없는 노고에 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도 반도의 한국 땅에서는, 어느 지역에서 조선왕조의 무슨 무슨 유물이 발견 되었다고 하면서 호들갑을 떨고 있습니다.
조선왕조가 반도 땅에 있었다는 것은, 역사서의 기록을 따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양이와 왜놈들의 거짓과 왜곡으로 얼룩진 사이비의 추악한 소설만도 못한 주장 일 뿐이며, 그러한 자들의 주구 노릇을 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역사서를 따르지 않고, 추정과 가설로 주장하는 것이 무슨 역사 이겠습니까 ?
어릴 때부터 밤새워 공부를 하고 자라서 성년이 되어, 역사서의 원전을 보니, 그동안 수 십년의 세월동안 학교서 배워왔던
역사라는 것들이, 새빨간 거짓의 역사교육 이었습니다.
이러한 것이 오늘날 한국의 학생들과, 한국의 국민들이 겪고 있는 역사 교육에 대한 현실 입니다. 이 보다 더 분노를 일으키게 하는 것은, 이 자들이 하는 짓은 전혀 일말의 반성과 부끄러움도 없이 조금도 주저 하지 않고, 날이 갈수록 이러한 역사의 교육에 자라나는 후세들까지 속이고 있는 것 입니다.
국민의 혈세와 학부모들의 피땀어린 돈으로 봉록을 받으면서, 이러한 짓들을 하는 것은, 고금을 상고해도 일찍이 없었던 망국적인 해괴한 일입니다.
역사라는 것은 거짓으로 가릴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성스러운 학문의 교단에서 이러한 짓을 자행하는 자들은, 선대와 선조들의 영령이 용서치 않을 것입니다.
요사이 신문에, 유사 역사학의 사이비 역사라는 말이 자주 오르 내리는데, 유사 역사학의 사이비 역사로, 선조를 능멸하고 모욕하며, 국가와 국민을 속이고, 후세들을 속이는 자들은, 지금까지 국가의 공교육을 맡아온 당사자 들입니다.
그러한 자들이 유사 역사학을 말하고 사이비의 역사를 말한다는 것은, 오늘날 한국의 역사 학계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찾는 사람들도 깊이 반성하고 돌아 볼 일들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역사의 허와 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헤메면서, 추정과 가설을 뒤섞고 있으니, 망국적인 식민의 주구들로부터, 유사 역사학이라느니, 사이비 역사라는 오명을 듣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
솔직하게 고백하는 심정에서 말을 한다면, 작금의 한국에서 우리 역사의 진실을 찾자는 사람들은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분들이 우리 역사에 대하여 게재하는 글들을 보면, 대다수의 주장들이, 역사서의 내용과 거리가 너무나 멀고, 역사를 다시 어지럽게 하고 있는 것을 수 없이 보게 됩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역사에 대한 현실을 바라보면, 식민잔재의 폐해는 이미 헤어나기 어려울 정도로 깊이 뿌리 내리고 있음을 탄식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선사를 해체하고 말살 시키려는 자들의 책략은 먹혀 들었고, 달성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입니다. 그 자들이 오늘날 한국의 역사를 바라보며, 조소하고 비웃으며 속으로 얼마나 기뻐 하겠습니까 ?
그러나 천하의 흥망성쇠와 천하 대도의 진리는, 이러한 사악하고 거짓된 천하의 악행들을, 그저 두고 보지 않는 것이, 수 천년의 고금을 이어온 역사의 진리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문무 선생님의 노고에 다시금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안녕하세요. "환국고려"님!
제법 겨울다운 날씨를 보이고 있습니다. 어렸을 적, 겨울나기를 회상해 보면, 어떻게 그토록 추운 날씨에 제대로 된 양말한 짝 없이, 고무신이나 짚세기를 신고 지냈을까? 지금이라면 어림없는 이야기겠죠.
<환국고려님>님 말씀대로 우리 사회는 이제 반도사관의 역사논리가 뿌리박혀 그 뿌리를 뽑아낼 수 없을 정도로 깊게, 단단하게 박혀있습니다.
이것들을 제거하려 한다면 명백한 유뮬유적과 함께 빼도 박도 못할 문헌적 고증까지를 제시해도 될까 말까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증명할 유물유적이나 문헌이 발견된다고 해도, 이러한 것들은 정치적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절망적입니다.
판단해 볼 때, 현재의 대륙를 지배하고 있는 자들의 상층부 인사들의 자기반성과 함께 양심선언이 있다면 물꼬를 뜨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봄니다만 이건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듭니다.
또 하나는 우리들의 힘이 뭉쳐 기존사학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역사개념을 도입, 진실의 조선사를 찾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에는 많은 난관이 있을 겁니다.
생각이외의 정치지도자가 나타난다면 또 모를까......!
여러가지로 희망적이지 못한 우울한 이야기들 뿐입니다만, 그렇다고 손 놓을 수 없는 일이죠. 재야의 연구자들마저 손 놓고 있다면 조선사는 영원히 땅속에 묻히고 말겁니다.
어떻게 하든 불소시개는 살려둬야 한다고 봅니다.
오늘의 현실을 보면서, <환국고려>님과 같은 분이 계시기에 조선사의 화롯불은 꺼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고 봅니다.
조그마한 것일 망정 희망을 갖고 끝까지 가보려 합니다.
누군가 또 뒤를 잇고, 또 뒤를 이어, 조선사의 진실을 찾아 나서지 않겠는가 하는 바램이죠.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또 여러 회원님들을 위해 좋은 내용의 글을 게재해 주시는 님께 함께 감사드립니다.
늘 건강하시길 빌며, 다음 글을 기대 해 봅니다.
굳이 한자와 역사서를 참고 안해도 한글을 이해하면 역사가 보이더군요.삼한의 역사도 세계언어의 뿌리라고 하는 산스크리트어(실담어)를 이해하면 중원대륙이 아닌 세계조선 이 보이더 군요.
가림토 문자를 보면 더욱 신뢰가 갑니다.
더불어 과학이 접목된 천문기록과 함께 세계언어를 연구하시는 분들의 글을 읽으면 한글 발음을 했던 위대한 선조님들의 세계분포도가 보이고요. 한민족과 한글 위대하고 존경 합니다.그래서 저는 희망이 있다고 봅니다.
또한 조작과 왜곡할때 등한시 했던 식물과 동물기록들이 현재의 객관적 증명과 사실관계에서 좋은 사료가 되고요.시대가 바뀌니 새로운 접근방법으로 인하여 그시대에 행했던 조작과 왜곡의 모순을 잡을수도 있겠다는 생각 입니다.
안녕하세요.
님께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우리 카페는 역사 기록과 함께 자연환경과 지형지리, 토산물, 특이지형등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문헌증 사료는 일차적으로 매우 중요한 자료이기 때문에 이것으로부터 얻은 정보는 이차적인 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습니다. 언어학적인 면으로도 그런 역사전개과정을 밝힐 수 있다면 그 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듭니다.
식민사학의 견고한 벽을 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는 많은 증거와 고증과 유물유적이 필요합니다.
조선사에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갖고 계신 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늘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