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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순면 [永順面, Yeongsun-myeon]
북쪽으로 산양면(山陽面), 동쪽으로 낙동강을 끼고 예천군, 서쪽 및 남쪽으로 영강(潁江)을 끼고
상주시와 접한다.
면역(面域)에는 소백산맥 남사면의 말단산지와 낙동강 연안의 평지가 뒤섞여 있다. 동쪽의 낙동
강 지류인 금천(錦川)과 서쪽의 영강이 남류하다가, 말응리(末應里)에서 합류하여 연안에 충적
평야를 형성한다. 연평균기온 12℃이나 내륙에 위치하여 한서의 차가 심하며 연평균 강수량은
약 1,100mm로 건조한 편이다. 본래 상주군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문경군에
이속되어 영순면이 되었다.
논농사 중심으로 주곡작물의 재배가 성하며, 금천·영강 및 낙동강 연안에서는 무·배추 등의 채소
경작이 이루어진다. 특산물로 사과(120ha)·수박(25ha)·오이(20ha)·양파(18ha)가 생산된다. 서
쪽에 인접한 중앙동(中央洞)을 통하여 국도와 철도로 각지에 연결되나 동부의 교통은 불편하다.
면사무소가 있는 의곡리(蟻谷里)는 중심취락으로 관공서와 상가가 밀집하여 교통이 편리하다.
문화재로는 홍귀달선생 신도비(洪貴達先生神道碑:경북유형문화재 122), 식산 이만부 전적(息山
李萬敷典籍:경북유형문화재 289), 유곡역 고문서(幽谷驛古文書:경북유형문화재 304), 백석정
(白石亭) 등이 있다. 백석정(白石亭) 있는 동네가 이장의 동네입니더. ㅎㅎㅎ
금림리 [錦林里, Geumrim-ri ]
낙동강 서쪽 연안의 평지지역이다. 자연마을로는 뒷못안, 미급, 버구리, 자그네, 정자동, 정자무
림, 탑골 등이 있다. 뒷못안은 큰 못이 있고 못 옆에 세 갈래 길이 나 있는 곳으로, 지나는 행인
이 쉬어 가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미급은 마을의 형태가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버구리는 마을 지형이 말죽통과 같이 생겼다 하여 버금치로 불려지다가
이것이 변음되어 버구리 또는 법동으로 명명되었다. 자그네는 장안사라는 절이 있었다 하여 마
을을 장안내라고 부르던 것이 변음되어 자그네라고 부르게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천마산 기슭
에 자리잡은 마을의 모습이 말안장과 흡사하다고 하여 자그네라고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정
자동은 옛날 이곳에 큰 정자가 있어 마을을 정자 혹은 정자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정자무
림은 사근과 금림을 구별하기 위하여 행정구역 변경 때 붙여진 이름이다. 탑골은 과거에 장안사
라는 사찰과 탑이 이 골짜기에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김용리 [金龍里, Gimyong-ri]
마을 서쪽으로 영강이 흐르며, 주위에 충적평야가 펼쳐져 있다. 자연마을로는 댓골, 새동네, 앳
가매 등이 있다. 댓골은 마을 개척 당시 뒷산에 대나무가 무성하였다 하여 죽곡 또는 죽동으로
불리어 오던 곳이다. 새동네는 본동에서 떨어져 나가 새로 동네가 생겼다 하여 새동네라 부르게
되었다. 앳가매는 옛날에 아이의 무덤이 많은 공동묘지였으므로 앳가매라 부르게 되었다.
달지리 [達池里, Dalji-ri]
마을 동쪽으로 낙동강이 흐르며 그 주위로 평야가 펼쳐져 있다. 자연마을로는 달늪, 삼인, 한밤
등이 있다. 달늪에는 산북 방면과 안동 방면에서 흘러내리는 강물이 만나서 넓다란 늪지대가 형
성되어 있는데, 달봉산 아래의 늪이라 하여 달늪이라는 지명이 붙여졌다고 한다. 삼인은 마을 뒷
산 숲속에 새들이 많이 모여 와서 잠잔다고 하여 새미라 호칭하던 곳이다. 그 후 선조 때 이곳의
강씨 3형제가 모두 과거에 합격하였는데 경상감사가 용궁현에 순시 차 들렀을 때 이 3형제가 배
알하였다. 이들이 새미에 사는 누구라고 하자, 감사가 어진 선비 셋이 난 곳이니 마을 이름을 삼
인이라고 하는 것이 어떠냐 해서 그 후로 새미는 삼인이라 불리게 되었다. 한밤은 마을 개척 당
시 주변에 밤나무가 많아 붙여진 지명이다.
말응리
말응리 의 유래 자료는 구하지 못하였으니 아시는 동민들께서 알아 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
1) 먼갓·원지(遠枝)·원호동(遠湖洞)
고려말 이곳에 원호지(遠湖枝)라는 못이 있어 원호라 부르게 되었다. 그 후 1450년경 좌참찬(左
參贊) 홍귀달(洪貴達)선생이 이곳에 정착하였다. 그는 먼 훗날까지 자손들이 번창하기를 바라는
뜻에서 마을 이름을 원지라 불렀다. 이는 오늘날 먼갓으로 불리고 있다.
2) 괴마골·괴동(槐洞)
당시 마을 주변에 괴목(槐木)이 울창하여 괴동이라 이름 지어진 것이 지금은 괴마골로 불리고 있
다.
3) 싱글·생걸·성계(聖溪)
옛날 마을 옆에 큰 절이 있었다. 이 절의 수도승이 매일 맑은 계곡에서 목욕하며 수도하였다 해
서 성계(聖溪)라 하던 것이 지금은 싱글 또는 생걸이라고 부르고 있다.
4) 솔안마·송내(松內)
먼 갓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주위에 소나무가 무성하여 솔안마, 송내라 하였다.
5) 말바윗골
모양이 말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말바윗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바위 아래로 영강이 흘러 깊은
소(沼)를 이루었는데 예로부터 낚시꾼의 낚시터로 명성이 있었다. 그러나 1970년 점촌과 대구를
잇는 354(점촌~풍양) 군도 확장공사 때 이 말바위를 없애 버리고 말았다.
사근리 [沙斤里, Sageun-ri]
낙동강 서쪽 연안의 평지지역이다. 자연마을로는 남산마, 무림, 방고개, 사근절, 새터, 서낭댕이,
엄촌, 재궁마, 진촌, 추촌 등이 있다. 남산마는 무림의 남쪽 산밑에 마을이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무림은 마을을 개척할 당시 주변이 무성한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방
고개는 아주 신씨 휘각이란 사람이 마을을 개척할 당시에 방을 붙였던 곳이라고 하여 방고개라
하였다는 설과 밤나무가 많았던 곳이라고 하여 밤고개라고 하였다는 설이 있다. 사근절은 마을
뒷산에 사근절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새터는 옛날에 이곳에 한 길이 생기고 난 뒤
이 길을 중심으로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샛터라 불려지고 있다. 서낭댕이는 옛날 성황당을
짓고 무림동민의 무사안녕을 기원하였던 곳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엄촌은 영월인 엄사현
이라는 사람이 정착하부터 부르게 된 이름이다. 재궁마는 개성 고씨 가문에서 재사를 두 동 건립
한 후 재사 관리인이 이곳에 거주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진촌은 추실이라는 사람이 추촌에 정
착한 이후 여양 진씨들이 들어와 거주하면서 부르게 된 이름이다. 추촌은 추실이라는 사람이 이
마을을 개척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오룡리 [Oryong-ri] 1
금천 서쪽에 위치한 평지이다. 자연마을로는 새마, 오룡골, 분통골 등이 있다. 새마는 새마을이
라고도 불리며, 영농능력이 있는 자에게 주택을 지어 주고 농토도 제공하여 이루어진 마을이라
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오룡골은 여덕윤이란 자가 용궁현 관내로 이거하였는데, 그의 아들 6
형제 가운데 5형제가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니 이를 다섯 마리의 용에 비유하여 부르게
된 지명이다. 분통골은 분토골이라고도 불린다. 마을 뒷산의 흙이 분 같이 하얗게 보여서 분토골
이라 하던 것이 분통골로 변음되었다.
오룡리 [Oryong-ri] 2
오룡골(五龍谷)은 면소재지에서 동쪽 4km 지점에 위치하며 오룡(五龍)의 유래는 중국 송(宋)
나 라에서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지낸 여선재(余善才)의 후손인 여현경(余玄景)이 고려국으로
귀화(歸化)하여 의춘군(宜春君)으로 봉작(封爵)되어 의춘(宜春, 宜寧)을 식읍(食邑)으로 하사
(下賜)받아 후손들이 의령(宜寧)으로 본관(本貫)을 쓰고 있다.
그 후 후손인 여덕윤(余德潤)이 조선 태종조(太宗朝 : 1400~1418)때 이곳으로 이주하였는데 그
의 아들 육형제(六兄弟)중 5형제가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모두 벼슬길에 올랐다고 하여
그 후 사람들이 용이 다섯마리 났다고 하여 오룡골(五龍谷)이라 하였다.
본래 용궁군(龍宮郡) 서면(西面)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분토리(粉土里)와 구
읍면(舊邑面) 무촌리(茂村里) 일부를 병합하여 오룡리라 하고 문경군 영순면에 편입되었다.
여씨(余氏) 일족이 떠난 다음 두번째로 입주(入住)한 것이 진주강씨(晋州姜氏)인 강자보(姜子
保)로 울진장씨(蔚珍張氏), 진주강씨(晋州姜氏), 남양홍씨(南陽洪氏) 등이 많이 살고 있다.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과 명산비결(名山秘訣)에 의하면 오룡(五龍)의 형세는 홍비좌사(鴻飛座
沙 : 기러기가 백사장에 날아 앉는다는 형으로 큰 인재가 많이 나서 높은 관직에 등용된다는 뜻)
설과 천마봉혈(天馬鳳穴 : 문장이 높고 고명한 영웅이 배출되어 훌륭한 사람들이 찾아든다는 뜻)
등 양설(兩說)이 있다.
임진왜란(任辰倭亂)때 원병으로 나온 중국의 이여송(李如松)이 우리나라의 명산(名山)이 많아
큰 인물이 많이 날 것을 두려워 하여 막하의 두사충(杜士忠) 장군을 시켜 전국의 명산(名山) 산
맥(山脈)을 제혈(除穴)한 곳이 많았다고 한다.
오룡의 형세(形勢)가 기러기형으로 사현산주봉(沙峴山主峯)에서 갈라진 낮은 산맥이 마을 중심
지 남쪽으로 뻗어 내려 장승산(將承山)을 오른쪽 날개로 비유 영동국교에서 새동네로 넘어가는
곳과 북동쪽으로 갈라져 왕태 공동묘지가 있는 산으로 이어지는 것을 왼쪽 날개로 비유하여 공
동묘지 못미쳐 낮은 곳 두곳을 제혈(除穴)하므로써 기러기의 양날개를 끊어 날지 못하게 하여 인
재 배출이 못되도록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왕태리(旺泰里)1
고려 공민왕(恭愍王)이 홍건적(紅巾賊)의 난(亂)때 묵어간 곳이라하여 왕태(王泰)라 하였으나
지명에 임금왕(王)자를 쓸 수 없다해서 지금의 왕태(旺泰)로 고쳤으며 이곳이 길가에 있는 마을
이라 하여 길가왕태 또는 중리(中里)라고도 부른다.
본래 용궁군 서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정자동(亭子洞) 일부를 병합하여 왕
태리라 하고 문경군 영순면에 편입됐다. 왕태 뒷산에 고려총(高麗塚)이라 부르는 무덤이 여러곳
있는데 일제때 도굴당한 듯한 흔적이 보이며 지금도 무덤 형태는 있으나 출토품은 없다.
원래 광주안씨(廣州安氏)들이 많이 살다가 타지로 떠나가고 500여년 전에 안성(安城)에서 이주
한 개성고씨(開城高氏) 일족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만수정(萬樹亭)이 있다.
왕태리(旺泰里 )2
1) 왕태(旺泰)·길가왕태·중리(中里)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 때 묵어간 곳이라 하여 왕태(王泰)라 하였다. 그러나 지명에는 임금
왕(王)자를 쓸 수 없다 하여 지금의 왕태(旺泰)로 고쳤다고 한다. 또한 이곳은 길가에 있는 마을
이라 하여 길가왕태 또는 중리(中里)라고도 부른다.
2) 보밑·저현(底峴)
이곳은 1450년경 고사원(高士原)이란 선비가 개척한 마을이다. 마을 뒤쪽에 큰 보(洑)가 있어
보 밑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보밑, 저현이라 불렀다고 한다.
3) 이산마·구음리(九音里)
옛날 고석(高錫)이라는 사람이 마을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밤마다 이상한 소리가 들려 이산마라 고 불렀다고 한다.
또는 이상한 소리가 아홉 번씩 들리어 구음리(九音里)라 하였다.
4) 병현동(並峴洞)
옛날 용궁 장날이면 장꾼들이 많이 다니는 두 길이 고개에서 모이므로 병현고개라 하였다고 한
다. 고개 아래 마을이라 병현동이라 불렀다고 한다.
◎ 율곡리(栗谷里)
조선 성종 때 홍귀달(洪貴達)선생이 낙향하여 이곳에서 학문을 즐기며 자연을 벗 삼았다고 한다.
밤나무가 많아 율곡이라 하였으며 지금은 율곡의 동의어인 밤실이라 부르고 있다.
1) 동무지·동산(東山)
동산 아래쪽에 위치한 마을이라 해서 동산(東山)마을이라 부르던 것이 변음이 되어 동무지라 부
른다.
2) 새갓(新枝)
고려 때 큰 홍수가 나서 주위 전체가 온통 물에 잠겨 나무들이 말라 죽었다.
그런데 유독 이곳에있는 나무들은 새 가지가 돋았다 해서 마을 이름을
새갓이라 부르게 되었다.
3) 응골·어헌골(漁軒谷)
옛날 이곳 마을 앞을 흐르는 영강(潁江)에 물이 많아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온 어부들이 이곳에
자리 잡고 살았다 하여 어헌곡이라 했다. 지금은 응골이라 부르고 있다.
4) 딩골·전촌(錢村)
옛날 전씨(錢氏)들이 모여 살던 곳이라 하여 전촌이라 부르던 것이 딩골로 변하였다. 지금은 전
씨는 한집도 없고 경주손씨(慶州孫氏), 월성이씨(月城李氏), 해주오씨(海州吳氏) 등이 살고 있
다.
5) 오랫골·애경당(愛敬堂)
이곳은 조선 성종 때 홍귀달(洪貴達)선생이 시묘 살이 하던 곳이다. 홍귀달 선생의 부모님 신위
를 모신 사당을 애경당(愛敬堂)이라 하여 마을 이름도 애경당이라 불렀다고 한다. 지금은 오랫골
로 부르고 있다.
6) 지장골(地藏谷)
고려 때 이곳에 절이 있었다. 이곳 절에는 지장보살이 있어 지장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현재 절
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의곡리 [蟻谷里, Uigok-ri]
마을 서쪽으로 영강이 흐르며, 주위에 충적평야가 펼쳐져 있다. 자연마을로는 감골, 갬실, 도연,
정골, 퇴안 등이 있다. 감골은 김해 김씨가 이곳에 처음 정착하였을 때 가가호호에 감나무를 심
었고 심지어 밭둑에도 감나무를 심었기 때문에 마을 이름을 감골이라고 하였다. 갬실은 남원 양
씨 양응해라는 사람이 이곳을 개척하여 정착하게 되었을 때 지형이 개미의 혈과 같이 생겼다고
하여 갬실이라 명명하게 되었다. 도연은 마을 앞에 큰 못이 있었는데 어느 해 큰 홍수가 나서 이
못이 매몰되어 없어지고 그 자리에 길이 만들어졌다고 하여 도연이라 부르게 되었다. 정골은 골
짜기가 너무 조용하고 정적만 울린다고 하여 정골이라 하였다. 퇴안은 비만 오면 마을 전체가 물
에 갇혔다가 비가 멈추면 물이 빠져나갔다 하여 물안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 후 안동 권씨 초은
권병 선생이 이곳에 이주하면서 다른 성씨와 대동단결하여 편안히 잘 살아보자는 뜻에서 마을
이름을 퇴안으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이목리 [梨木里, Imok-ri]
남쪽으로 낙동강이 흐르고 있으며, 강 주위로 평야가 있다. 자연마을로는 금성개, 꽃개, 백포 등
이 있다. 금성개는 금포라고도 불린다. 설월당 강주식 선생이 마을 앞 강변에 검은 바위가 보인
다 하여 이곳 지명을 금포라 이름 하였으나, 그 후 금성개라고도 불리게 되었다. 꽃개는 봄이면
진달래꽃이 만발하여 경관이 아름다웠던 곳이다. 그래서 이곳을 꽃이 만발한 갯벌, 즉 꽃개라 부
르게 되었다 한다. 백포는 강변에 커다란 흰 바위가 있어서 부르게 된 이름이다.
천마산 [天馬山]
높이 279m이다. 높이는 낮지만 문경시의 남쪽 끝에 솟아 정상에 서면 낙동강이 내려다보인다.
옛날에는 산기슭에 나루터가 있어 많은 배들이 드나들었다고 하며 그래서 지금도 이목 1리를 금
포, 이목 2리를 백포라고 부른다. 해장골에는 작은 암자인 해장사가 있다.
산행은 영순면 이목 1리인 금포마을 귀파재에서 시작한다. 이목 1리에서 귀파재까지는 40분 정
도 걸리며 귀파재에서 정상까지는 20분 정도 걸린다. 정상에는 산불감시초소가 있다. 하산은 금
밭골을 지나 귀파골에서 10분 정도 걸어 영순면 말응 2리로 내려가거나, 오룡리에서 이목리로
넘어가는 큰 고개로 내려갈 수 있고, 영순면 금림리로도 내려갈 수 있다
포내리 [浦內里, Ponae-ri]
자연마을로는 개안, 골마 등이 있다. 개안은 갠, 포내라고도 불린다. 임진왜란 발발 당시 청주 한
씨 일족이 마을을 개척하면서 갯벌 안쪽에 취락을 형성하였다 하여 개안(줄여서 갠)이라 부르게
된 곳이 현재의 포내 1리이며 갯벌 안 골짜기에 형성된 취락이 현재의 포내 2리이다. 골마는 골
짜기에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여 골마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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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지내지...? 한번 보고 싶구만... 건강하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