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라면 누구나 인생의 목표로 삼는 것이 권력, 명예, 미인이다. 이 중 한 가지만 가져도 성공했다는 얘기를 듣는데 앨런 그린스펀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Federal Reserve Bank) 의장은 세 가지 모두를 성취한 행복한 남자다.
내년 1월 31일 FRB 의장직에서 물러나는 그린스펀은 월스트리트와 워싱턴 정계에서 ‘경제 대통령’으로 불리며 대통령에 버금가는 권력을 누리고 있다. 그는 통화, 금리, 시장규율 등 미국 통화정책에 관한 전권을 행사할 수 있다. 그린스펀의 일거수일투족은 늘 세계경제에 화젯거리를 제공한다. 그의 말 한마디에 월스트리트는 물론 전 세계 주식시장이 요동을 친다. 이른바 ‘그린스펀 효과’다.
그린스펀은 1926년 유대인 주식중개인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엄한 가정 분위기 속에서 고독한 유년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다섯 살 때 아버지는 그를 증권사로 데려가 주식과 채권이 무엇인지, 중개인은 어떤 일을 하는지 자세하게 설명했다. 어린 그린스펀이 처음으로 금융의 중요성에 대해 알게 된 계기였다.
●그린스펀은 임기 4년의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을 다섯 번째 연임하면서 레이건, 클린턴, 부시 부자 등 총 4명의 대통령을 모셨다. |
열세 살 때 부모가 이혼을 하면서 어머니를 따라 뉴욕의 부자동네 워싱턴 하이츠로 이사한 그는 헨리 키신저와 함께 맨해튼의 명문으로 꼽히는 조지워싱턴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음악에도 뛰어난 자질을 보인 그린스펀은 재즈악단의 색소폰과 클라리넷 연주가로 활동했다.
그의 진로가 결정된 것은 뉴욕대에 입학해 경제학을 공부하면서부터였다. 대학 졸업 후 그는 미국 최고의 민간 경제 분석기관인 컨퍼런스 보드에 입사해 철강, 알루미늄 등 다양한 업종의 산업동향 분석 업무를 담당했다.
20대 말인 1954년, 타운젠드-그린스펀사(社)를 설립하여 금융 컨설팅을 했는데 이때부터 만나는 사람마다 그의 탁월한 경제지식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그린스펀의 여성 편력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그는 1952년 저명한 화가 조안 미첼과 결혼했지만 10개월 만에 파경을 맞았다. 그 후 첫 부인을 통해 알게 된 러시아 태생의 여성 소설가 아인 랜드와 사귀면서 뉴욕의 상류사회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1970년대에는 유명한 앵커우먼 바바라 월터스와 염문을 뿌렸지만 결혼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한때 미 연방수사국(FBI)이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그린스펀의 사생활과 심리상태를 걱정한 나머지 그의 여자 파트너들을 조사하여 물의를 빚은 적도 있었다.
고희를 갓 넘긴 1997년 그는 스물한 살 연하의 미인 앤드리아 미첼과 재혼했다. 앤드리아 미첼은 NBC방송의 유명한 외신 기자라 금융 권력과 언론의 결합이라며 화제가 되었다. 12년간의 열애 끝에 결혼한 두 사람은 지금까지 금슬 좋은 부부로 소문나 있다.
1968년 그는 닉슨 대통령 캠프의 경제참모로 발탁되면서 정치와 인연을 맺었고 1974년 포드 대통령은 그를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CEA) 위원장으로 임명했다. 그린스펀은 1987년 폴 볼커의 후임으로 FRB 의장에 취임했다. 그를 FRB 의장으로 추천한 사람은 제임스 베이커 당시 재무장관이었다.
반신욕이 정력의 비결
미첼은 TV 인터뷰에서 평상시 그린스펀을 “스위트 피”(달콤한 콩)라고 부른다고 고백했다. 그린스펀이 매일 아침 두 시간 동안 탕에서 반신욕(半身浴)을 하면서 자료를 검토한다고 귀띔하기도 했다. 그 뒤 월스트리트에서는 ‘그린스펀의 정력 비결’이라며 너도나도 반신욕을 하는 것이 한때 유행하기도 했다.
권력·명예와 미인을 거머쥔 그린스펀이지만 부(富)는 평범한 수준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는 공직자로 물의를 일으킬 가능성이 없으며 안전한 곳에만 투자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작년 공직자 재산신고 때 그린스펀의 총재산은 680만 달러로 밝혀졌다. 그의 한 해 수입은 18만 달러에 불과하다. 1억 4,000만 달러를 받아 물의를 일으킨 뉴욕증권거래소(NYSE) 이사장의 연봉과 비교할 때 턱없이 낮은 수준이다.
FRB 의장으로 재직 중 그는 뉴욕 증시의 주가가 대폭락한 ‘블랙 먼데이’(1987년), 러시아 경제가 무너진 ‘러시아 모라토리엄’(1998년), 9·11 테러(2001년) 등 숱한 위기를 겪었지만 모두 슬기롭게 해결했다. 1990년대 초에는 지속적인 생산성 향상으로 ‘고성장, 저물가, 저실업’의 경제가 가능할 것이라고 정확하게 예측하기도 했다.
그는 금리를 안정시켜 미국 경제가 장기간 인플레 없이 고성장을 하는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1994년 경기과열 때는 금리를 0.75% 전격 인상하는 등 선제공격으로 인플레를 잡았고, 물가안정에 대한 신뢰를 확고히 함으로써 기대심리를 낮추었다. 덕분에 2000년 말 실업률이 4% 미만이란 낮은 수준으로 유지될 수 있었다.
철저한 중립성으로 신뢰 높여
그러나 2000년 봄부터 시작된 인터넷 버블 붕괴와 주식시장 침체에는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비정상적으로 주식시장이 과열조짐을 보일 때 좀 더 일찍 금리인상을 했더라면 극심한 경기침체를 예방할 수 있었다는 주장이다. 그린스펀 자신도 인터넷 버블 붕괴의 조짐을 미리 찾아내고 대비하는 데 실패했다고 시인하고 있다.
그는 시장과 대화를 하면서 마술을 하듯 통화정책을 주도해 나갔다. 그가 향후 정책방향에 대해 설명할 때 자세히 들어 보면 확실하게 얘기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럴듯한데 잘 분석해 보면 알맹이가 하나도 없다. 정책 당국자들에게 시장을 끊임없이 주시하도록 만들면서 항상 빠져나갈 구멍을 만드는 것이다. 그린스펀은 1년에 두 번 의회에 출석해서 증언하는 것 외에는 세상 누가 불러도 나갈 필요가 없다.
그린스펀은 미국인들의 존경과 찬사를 한 몸에 받고 있다. 의회, 언론 등 미국 사회는 그린스펀을 깍듯이 예우한다. 때로는 타협과 설득으로, 때로는 굳은 신념으로 벼랑 끝에 몰린 미국 경제를 일으켜 세웠기 때문이다. 그는 4년 임기의 FRB 의장직을 1987년부터 무려 18년간 다섯 번째 연임했다. FRB 역사상 두 번째 장수 기록이다. 레이건, 클린턴, 부시 부자(父子) 등 그가 모신 대통령은 네 명이다. 공화당원인 그가 정권과 관계없이 장기 집권할 수 있었던 비결은 절제된 언어로 미국의 중앙은행이라 할 수 있는 FRB의 중립성을 지켜 왔기 때문이다.
그린스펀은 정권의 눈치를 보지 않고 독자적, 객관적인 입장에서 통화정책을 운영했다. 1992년 대선 직전에는 금리를 4.4%에서 3.0% 수준으로 낮춰 아버지 부시를 재선에서 떨어뜨렸다고 공화당 지지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자신을 재임명한 민주당 정부가 대선기간 중 금리를 인하해 경기를 더욱 활성화하자고 압력을 넣을 때도 주식시장이 ‘비이성적 과잉’의 과열 기미를 보인다며 오히려 금리를 인상했다. 집권당을 위해 억지로 경기를 부활시키거나 금융활성화 조치를 쓰지 않았기에 그의 자리가 더욱 돋보였다.
그린스펀은 2004년 6월 의장직에 재임명됐지만 내년 초 은퇴할 계획이다. 그의 후임으로는 벤 베르난케 경제자문위원장, 글렌 허바드 컬럼비아대 교수 등이 거론되고 있다. 내년 1월 31일 FRB 의장직을 그만두고 나서 그린스펀이 과연 월스트리트의 어느 투자은행에 취임할지 그의 행보가 벌써부터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