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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50년 지기 친구 부부와 함께 지리산 천왕봉에 오른 적이 있었다. 하루 종일 비가 내리는 악천후 속에서 강행한 산행은 고통스러웠지만 우리의 우정을 더욱 탄탄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날 이후 설악산에 한번 가자고 미지근한 약속을 했는데 실행을 못 하고 지내 왔다. 그런데 이번 설 연휴에 중청대피소 예약 현황을 조회해 봤더니 빈자리가 많아서 무작정 예약을 해버렸다. 그리고 우리 부부와 친구 부부는 모든 약속을 취소하고 산행에 초점을 맞췄다.
명절 끝의 고속도로는 매우 붐볐으며, 방송에서는 중부지방에 한파경보를 발령하고 있었다. 불안한 마음으로 전주를 출발한 우리는 서울에서 친구 부부를 만나 서울~춘천 고속도로를 달려 한계령에 다다랐다. 꽁꽁 얼어붙은 한계령휴게소와 매서운 바람 앞에 서니 온몸이 움츠러들었지만 장엄한 설악의 봉우리들을 바라보자 금방 가슴이 뜨거워졌다.
남설악탐방지원센터 앞에서 산행 채비를 하는데 직원이 지금 대청봉의 체감온도가 영하 40℃이며, 오늘 안면 동상에 걸린 사람이 있다며 주의를 환기시켰다. 등산로 들머리는 눈이 조금밖에 쌓이지 않아 아이젠을 신고 걷기에 매우 불편했으나 금방 푹신푹신한 눈길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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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살을 에는 듯한 거센 바람의 대청봉 정상석에 우리 부부가 나란히 섰다.
- 하늘을 올려다보았더니 한 점 흠 없는 푸른빛이 가슴속으로 와락 쏟아져 들어왔다. 청량하고 깨끗한 바람이 폐부 깊숙이 들어와 속세의 찌꺼기들을 밀어냈다. 아름다운 고요와 깨끗한 푸르름으로 가득 찬 우리들의 가슴은 이미 속세의 그것이 아니었다.
소나무 아래에서 호두곶감말이 간식을 먹는데 이름 모를 새 한 마리가 날아와서 손등 위에 앉았다. 핏줄이 훤히 보이는 발가락과 젖은 눈동자를 바라보니 도저히 우리만 먹을 수 없었다.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작은 새가 안쓰러워서 나뭇가지 위에 호두곶감말이를 올려놓았더니 호두만 쏙 빼서 달아났다. 혹독한 겨울산은 인간과 자연을 하나로 만드는 아름다운 장면을 그려내고 있었다.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눈은 많아지고 찬바람은 더욱 거세게 몰아쳤다. 게다가 친구의 호흡이 가빠지고 속도가 점점 느려져서 걸음을 멈추고 쉬는 시간이 많아졌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친구는 몇 번이나 산행을 포기하려 했다고 한다. ‘중청대피소 0.7km’라고 쓰인 마지막 이정표 부근은 완전한 설원이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눈밖에 보이지 않는 설원의 한가운데 서니 우리는 결코 자연과 동화될 수 없다는 생각에 고독감이 밀려왔다. 나무와 바위와 땅이 온통 하얀 백색공화국에서 유색옷을 입은 우리들은 이방인들이었다. 그러나 이방인들의 발걸음마저 너그럽게 받아주는 설악의 너른 가슴이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대청봉엔 사람의 그림자도 없었고 얼어붙은 표지석만 외롭게 서있었다. 힘들게 올라온 친구는 감격에 겨워 만세를 불렀다. 정상에서 인증샷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꺼냈더니 배터리가 얼어서 작동되지 않았다. 장갑을 벗은 손가락은 면도칼로 자르는 듯한 통증이 엄습해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영하 40℃의 살을 에는 듯한 추위임을 실감하며 서둘러 내려갔다.
대청봉 칼바람에 몸이 저절로 휩쓸려
중청대피소는 대청봉에 비하면 그야말로 지상낙원이었다. 잠자리를 준비하는 사람들과 저녁 식사를 마련하는 사람들로 제법 붐볐다. 먼저 온 일행들이 우릴 반겨 맞아주었고, 우리들은 금방 친구가 되었다. 친구의 부인이 마련해 온 돼지주물럭을 익혀서 양주를 한 잔씩 마시니 몸이 훈훈해졌다. 여기까지 기꺼이 동행해 준 아내들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예쁘고 사랑스럽다. 비좁은 침상에 누우니 잠이 오지 않았으나 9시에 소등을 하자마자 코고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침 날씨는 급변했다. 거센 눈보라가 몰아치고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대피소 직원들이 백담사 방향으로 하산하는 팀에게 봉정암에 머물고 있는 신도들과의 동행을 부탁했다. 우리는 원래 천불동계곡을 거쳐 설악동으로 하산할 계획이었는데 직원들이 위험하다며 극구 말렸다. 어쩔 수 없이 오색으로 하산하기로 하고 부라부랴 짐을 꾸려 대피소를 나섰다.
대청봉을 향해 가는데 바람이 어찌나 센지 몸이 저절로 휩쓸려 나갔다. 간밤에 눈이 많이 내려 길마저 없어져 버렸기 때문에 여간 힘들지 않았다. 대청봉에 올라 잠시 바람이 잠잠해진 틈을 타서 표지석을 배경으로 인증샷을 담았다. 조선 정조 때의 학자 성해응이 지은 <동국명산기>에 ‘대청봉은 우뚝 솟아 있는 것이 마치 큰 거인 같다’고 기록되어 있다. 오늘은 대청봉이 거인이 아니라 대청봉의 칼바람에 맞선 우리가 진정 거인이 된 기분이었다.
대청봉에서 오색으로 내려가는 길은 눈이 무릎까지 쌓여 있어서 몇 번이나 미끄러지고 뒹굴면서 나아갔다. 앞서 간 사람들도 없었기 때문에 내가 선두에서 러셀하며 하산을 이끌었다. 능선을 벗어나니 바람이 잦아들어서 안에 껴입었던 우모복을 벗었다. 우리는 눈썹이 하얗게 얼어붙은 서로의 모습을 보면서 웃었다. 컵라면과 소시지 안주로 마시는 스카치위스키 한 잔은 새로운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었다.
출발지인 남설악탐방지원센터에 도착해서 우리 스스로가 대견해 서로 껴안아 주었다. 혹독한 기후 조건을 극복하고 설악산의 정상을 밟았다는 자부심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오늘의 희열을 맛보기 위해서 지불한 우리의 고통은 분명 값어치가 있다는 사실을 가슴으로 느꼈다. 또한 겨울산에 오르기 위해서는 헛된 꿈과 자만심을 버리고 더욱 겸허해져야 한다는 가르침을 배운 산행이었다. 우리는 다시 속세로 돌아갈 것이지만 설악이 준 고통의 은총을 늘 가슴에 새기며 살아가리라. 그리고 50년 우정을 넘어 다음 50년의 아름다운 우정을 위해 더욱 사랑하고 아껴주리라.
첫댓글 겨울설악은 모험입니다.
어려운 역경속에서 확인한 우정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그나저나
당선턱은 언제나 쏘실런지... 기다려지네 ㅋ
설악산 대청봉 산행기 잘 읽었습니다.
정말 잘 쓰셨네요. 특히 인간과 자연을 하나로 만드는 새이야기,
백색공화국에 유색옷입은 이방인 표현이 좋았습니다.
오우~ 전 이제사 읽어 보았네요..
감동 .. 그 자체. 인간 승리.. 그 자체입니다..
월간 산을 구입하여 뒤적거리다가 표지를 보니 6월호 이군요..
게으름을 용서하세요.
감동적인 산행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