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사직 具思稷 [1549 ~ 미상]】'전라 좌수사(左右使)이순신(李舜臣) 휘하의 중위(中衛) 우장(右將)"
[1549년(명종 4)∼졸년미상.] 조선 중기 선조~광해군 때의 무신. 행직(行職)은 수원부사(水原府使)이다. 자(字)는 우경(虞卿)이다. 본관은 능성(綾城)이고, 거주지는 서울[京]이다. 아버지는 충의위(忠義衛) 구협(具浹)이고, 생부(生父)는 도총부 도사(都事)구택(具澤)이다.
1576년(선조 9) 식년(式年) 무과의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8세였다.[<무과방목>]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가리포 첨사(加里浦僉使)였던 구사직은 전라 좌수사(左右使)이순신(李舜臣) 휘하의 중위(中衛)의 우장(右將)으로서 왜적의 전함을 격파시키는 무공을 세웠다.
1594년(선조 27) 황해도 병사(兵使)가 되었으며, 1596년(선조 29) 원주목사(原州牧使)를 거쳐서, 1599년(선조 32) 충청도 병사(兵使)에 임명되었다.
1604년(선조 37) 훈련원 도정(都正)과 경기 수사(水使)를 거쳐서, 1606년(선조 39) 전라 병사(兵使)가 되었다.
1607년(선조 40) 구성부사(龜城府使)를 역임하였다.
1611년(광해군 3) 수원부사(水原府使)를 역임하였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무과방목(武科榜目)』
『난중잡록(亂中雜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태촌집(泰村集)』
<난중잡록> 제일권 임진상 편에 보면
"以泳湛爲先鋒。防踏龜船將申汝良爲斥候。順天府使權俊,加里浦僉使具思稷等爲中衛左右將。並李億祺軍船。發向露梁。與元均相會。先發至光洲之洋。則賊船五六艘。縱櫓退去。我軍追之。登陸而走。盡破其船。軍卒生氣。日暮回船。翌曉又向嶺海。至見乃梁。賊船蔽海而來。斥候將申汝良。已圍於賊。以扇麾軍。舜臣見海洋阻隘緩緩退却諸船。
어영담을 선봉으로, 방답귀선장(防踏龜船將) 신여량(申汝良)을 척후로, 순천 부사(順天府使) 권준(權俊)과 가리포 첨사(加里浦僉使) 구사직(具思稷) 등을 중위(中衛)의 좌ㆍ우장으로 하고는 이억기(李億祺)의 군함과 합세하여 노량으로 향발(向發)하여 원균과 만나기로 했다. 먼저 떠난 배가 광주(光州)의 바다에 이르자, 왜적의 배 5, 6척이 노를 바삐 저어 퇴각했다. 아군이 이들을 쫓아가자 그 배들에 탔던 왜적은 육지로 올라가서 달아났다. 아군이 그 배들을 다 부숴버리니 아군의 군졸들은 기운이 났다. 날이 저물어 배를 돌려왔다. 이튿날 새벽, 또 영남 바다로 향하여 견내량(見乃梁)에 도착하였는데, 적선들이 바다를 덮고 와서 척후장 신여량은 이미 왜적에게 포위되어 있으면서 부채를 흔들어 뒷 군사들에게 물러가라고 신호했다. 이순신은 바다가 좁은 것을 보고 느릿느릿 퇴각하여 여러 배들이 차례로 나왔다."
이라는 기록이 보입니다.
임진1592년 4월 29일에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시국의 급박함에 관하여 출전의 준비를 회의할 차로 부하 제장을 불러들여 좌수영 파리각璃閣에 모았으니 출석한 관하제장은 아래와 같았다.
좌수영 우후 이몽구李夢龜
순천부사 권준權俊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
가리포첨사 구사직具思稷
낙안군수 신호申浩
보성군수 김득광金得光
녹도만호 정운鄭運
흥양현감 배흥립裴興立
광양현감 어영담魚泳潭
사도첨사 김완金浣
발포만호 가장1) 영군관營軍官 나대용羅大用
여도권관 김인영金仁英
군관 급제2) 최대성崔大晟
군관 급제 배흥록裴興祿
군관 전 봉사 변존서卞存緖
군관 전 봉사 김효성金孝誠
군관 정로위3) 이언량李彦良
군관 별시위4) 송한련宋漢連
군관 전 만호 송희립宋希立
군관 전 선전관 정사준鄭思竣
포탄제성도감砲彈製成都監
군관 전 봉사 이설李渫
군관 정로위 이봉수李鳳壽
화약자성도감火藥煮成都監
군관 급제 태귀생太貴生
창검제조도감槍劍製造都監
군관 전 봉사 신여량申汝樑
이상 열석한 제장은 합 24인이었다. 수사 이순신이 정면에 좌정하고 관하 제장이 계급을 따라 좌우로 차례를 좇아 앉았다. 이 회의를 개최한 이유는 경상우수사 원균의 청병하는 관문이 온 까닭이었다. 이순신은 부산 동래가 다 함몰이 되었다는 경보를 들은 이래로 부하 제장을 좌수영으로 모아가지고 조정에서 출전하라는 명령이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
5월 4일 이른 새벽이 되어서 이순신이 수군함대를 통솔하고 출발하였다. 동쪽 하늘이 붉으려 할 때에 세 발의 대포 소리를 군호로 하여 대소 합 86척의 병선이 일제히 돛을 달고 뱃머리를 동으로 향하여 출발하니 기고가 당당하였다. 수로를 잘 알고 성실하고도 용감한 광양현감 어영담으로 지로선봉장指路先鋒將을 삼고, 중위장의 하나인 순천부사 권준은 감사 이광의 부름으로 전라감영에 가고 없기 때문에 방답첨사 이순신과 가리포첨사 구사직으로 중위장을 삼고, 낙안군수 신호와 보성군수 김득광으로 좌우부장을 삼고, 흥양현감 배흥립과 녹도만호 정운으로 전후부장을 삼고, 사도 첨사 김완으로 우척후장을 삼고, 여도 권관 김인영으로 좌척후장을 삼고, 군관 급제 최대성으로 한후장17)을 삼고, 군관 급제 배흥록으로 참퇴장18)을 삼고, 군관 이언량으로 돌격장을 삼고, 군관 신여량으로 귀선장을 삼고, 우후 이몽구는 본영을 지키게 하였다. 병선의 종별과 수효는 아래와 같다.
판옥대맹선 24척 승선 장졸 3130여명
협판중맹선 15척 승선 장졸 730여명
포작소맹선 46척 승선 장졸 1380여명
총계 85척 5400여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