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에 마음부수로써 기우는(名) 특징의 정신들을 식별하고는
변하는 특징의 파생 감성물질(色, 안이비설신)을 삼법인(무상, 苦, 무아)와 혐오스럼에 보고 해탈한답니다.
근래에 페북에 정신과 물질(名色)이라고 왜 간략히 명칭하는지를 궁금해 하시는 불자를 종종 보곤 한다. 그것은 사성제 즉, 12연기의 괴로움 (지집멸도)을 말로써만 공부하는 게 아니고
실제로 부처님 가르침(예류도, <금강경>에서 수다원과)을 들어가려는 불제자들로써의 반가운 궁금증을 듣는 것이다.
우리들 불자는 사선정(팔정도 正定)을 들어 익히 알지만 체험을 하지 않거나 노력도 않는다고 말들한다.
해서,
고요한 선정에서 무얼 보려고 하셨는지요? 라고 궁금증이 마음에 들어오면
사마타 삼매(사선정)을 경험한 불제자님을 가까이 두고 그들의 말과 글을 일상생활 행동으로 읽어 보라...
그들은 좌선이나 경행을 늘 하고 있고,
사선정 사마타를 토대로 정신과 물질을 분석 식별하는 '위빠사나 앎'이라는 최상의 지혜에 매진하고 있다.
니까야 경전 S12:65<도시경>과 S35:245<낑수까 나무비유경>경전을 읽어보라.
선정을 출정한 성스러운 분(성문4과)들이 정신과 물질을 삼법인(무상,苦,무아)과 혐오스럼움에 식별하고 있고,
구하기 쉬운 <대념처경>에서도 이 육신의 몸을 사대물질에 펼쳐놓고 식별한다. 즉, 궁극적 물질(깔라파)들이 무상하다고...
이 모두의 말들(최상의 지혜)은 선정이라는 토대위에서 경험할 수만 있다.
그래서 조사들이 정혜결사 지관쌍수라고 말들을 하신 것이다.
다시 한번 정신과 물질을 초기불교 경전을 통해서 살펴보자,
<도시경>에서는 사마타 (삼매)와 위빠사나 (삼법인)의 두 전령이 4대물질 광장 가운데에 있는 성주 識에게 최상의 지혜 집.사성제를 전하죠.
조금 전문적인 용어로 읽어보자.
'바왕가'이라는 심장 토대 위에서 산란하게 튀는 감성물질 눈-투명물질이 항상하지않고 변하므로 괴로움이고 무아이고, 따라서 가지고 있던 훈습된 識을 혐오한다. 눈에 관한 識을 버린다.
속히 형성速行하고 등록할때의 고착된 識이 그치므로
識이 그치는 조건으로 정신물질이 그치고 , 정신물질이 그치므로 육입이 그치고,... 늙음죽음이 그치고, 고통 절망 회한 등 괴로움 무더기의 일어남이 그친다.(멸성제)
다시한번 기본에 충실하자.
인식과정 오문 의문에서,
초선정 선지들(위딱까 위짜라 희열 행복 심일경)과 같은 인식 대상에 마음부수로써 기우는(名) 특징의 정신들을 식별하고는
변하는 특징의 파생 감성물질(色)을 무상.고.무아와 염오 등의 위빠사나 앎에 여리작의하라는 바를 정신과 물질(名色)에 알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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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물질을 일러 명색(名色)이라 한다. 어원에 충실하자
대림스님 역(2012), 맛지마 니까야 1, 초기불전연구원, p.289-323, “느낌, 인식, 의도, 감각접촉, 작의를 정신이라 하고, 4가지 근본물질과 그 근본물질에서 파생된 물질을 물질이라 한다. 이런 정신과 물질을 일러 명색(名色)이라 한다. 알음알이가 일어나기 때문에 명색이 일어난다.... 성스러운 팔정도가 명색의 그침에 인도하는 도 닦음이니,” (MN9 Sammādiṭṭhisutta)
...
정명스님(2023), 열반으로 가는 도 딖음 2, 푸른향기, p.192. ‘대상을 향해 기우는’ 특징의 정신들은 심장 토대를 의지하여 일어난 것이다. 심장토대의 의지처인 사대 근본물질과 근본물질을 의지한 나머지 파생된 물질들을 물질이라고 파악한다.
이 모든 것은 변하기 때문에 물질이라고 구분한다. 이렇게 기우는(nāmana) 특징을 가진 것은 정신이고 변하는(rūppana) 특징을 가진 것은 물질이라고 말하는데 간략하게 정신·물질(nāmarūpa, 名色)에 구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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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선정 사마타에서 비로소 감성물질(안.이.비.설.신)이 삼법인(무상.고.무아)의 대상이 되고
안<이비..신>식을 염오하는 등의 위빠사나 앎에서 12연기 집.멸성제를 조건성에 지혜하는 거죠.
최소한 초선정이상 삼매를 개발해야 예류도처럼 위빠사나 도의 답습을 가능하죠...
지금 한국의 어느 수행 처에서는 열심히 사마타에서 위빠사나 도를 닦고 있을 분들이 적잖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옛전의 부처님들이 팔정도의 옛길에서 옛 도시 사성제를 원만히 깨달은 바를 <도시경>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苦의 연기된 법에 대한 明(vijjā)이 생겨나는 장면은 다음과 같습니다.
“集이로다! 集(samudaya)이로다!
비구들이여, 내가 예전에 들어보지 못한 法에 관하여 眼이 생겨나고, 智가 생겨나고, 慧가 생겨나고, 明(vijjā)이 생겨나고, 光이 생겨났다.
滅이로다! 滅(nirodha)이로다!
비구들이여, 내가 예전에 들어보지 못한 法에 관하여 眼이 생겨나고, 智이 생겨나고, 慧가 생겨나고, 明(vijjā)이 생겨나고, 光이 생겨났다.
(Samudayo samudayo ti kho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m udapādi ñāṇam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Nirodho nirodhoti kho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m udapādi ñaṇam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SN. vol.2. p.104, 도시경] (☜아위자님 글중에서 인용)
선재선재선재,
사두사두사두
불법승에 귀의합니다. (/\)
첫댓글 윗글의 맥락을 백일법문의 중도설에 연관해서 한국불교학회50주년의 논문에서 (11월 동국대)발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