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렌뇨스님의 편지글(御文)』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믿음을 얻게 되는 경지를 경에서는 ‘곧 왕생을 얻어서 불퇴전으로’ 설하시며, 주석서에서는 ‘일념발기입정정지취(一念発起入正定之聚, 일념을 일으키면 곧 정정취에 들어간다)라고도 말한다. 이것이 곧 불내영의 이야기, 평생업성의 뜻이다.」
그리하여 성불사상과 근접해오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사람들은 일단 ‘저 땅에 왕생하는 것’과 ‘이땅에서 성불하는 것’은 말로는 구별하지만, 왕생도 성불도 불이에 들어간다는 뜻이다. 불이는 언어에 따른 구별을 허용하지 않는다. 왕생이 성불을 의미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 근접을 역설하는 데 정토종에서 진종으로의 추이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염불로써 성불하는 것이 곧 진종이다.”라 읊고 있다. 그렇더라도 그 성불은 사후에만 일어나는 일일까? 그런 것이 아니라, “번뇌를 끊지 않고 열반을 얻는다”라고도 말해지며, “생사가 곧 열반이다”라고도 말하고 있다. 어느 경우도 신란스님께서 사랑하셨던 말이다. 그렇기에 성불은 번뇌의 한가운데, 생사 그 자리에서 성취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번뇌즉보리를 설하는 성도문의 가르침과 매우 가까운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해후는 자력 수행으로 돌아왔기 때문이 아니라, 정토의 한 길에 철저했기 때문일 것이다. 왕생의 경지를 얻은 것과 깨달은 자 즉 부처님이 되는 것은 같은 의미이다. 여기에 아미타불의 정각과 중생의 왕생이 하나가 되는 이유이다. 성불과 왕생은 다른 것이 아니다. 왕생이 가능한 것은, 본래 인간에게 불성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명의 구름에 덮여있어 빛나지 못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불성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성도문은 수행을 설하고, 정토문은 칭명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 칭명이 불가사의한 작용을 해서 왕생을 확실히 약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평범하다고도 할 수 있고, 기이하다고도 할 수 있는 질문을 해야 하지 않을까. 왕생이라는 것이 도대체 누가, 또는 무엇이 왕생하는 것일까. 말할 것도 없이 사람이 왕생한다고 생각된다. 인간의 왕생, 그것도 특히 나의 왕생을 가리키는 것일 터이다. 이 예토를 떠나서 극락에 가는 것을 왕생한다고 말하는 것이지만, 가는 것은 사람이고 사람이 부처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답하더라도 누구도 의문을 품는 자는 없을 것이다.
호넨스님도 신란스님도 다 인간이 왕생하는 길을 설했던 것이다. 요컨대 인간이 부처가 되는 것이다. 이 때 ‘부처’는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신’과는 그 성질이 매우 다르다. 신이란 창조자로서의 신이고, 피조된 인간과는 어디까지나 다르다. 그런데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는 ‘깨달음을 얻은 인간’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것은 각자(覺者)이지 결코 신이 아니다. 그러므로 보살도 여래도 원래는 인간이다. 불교에서는 인간과 떨어져 있는 신이나 인간을 만든 신을 설하지 않는다. 인간이 태어난 것은 여러 가지의 연기(緣起)에 의한 것이지 어떤 한 조물주의 행위에 의한 것은 아니다.
앞에서도 서술했던 것처럼 아미타여래도 법장보살이 수행하여 각자가 된 모습인 것이다. 이것을 “정각을 취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보신불(報身佛)이라는 것은 수행의 과보로 얻은 몸이다. 그렇게 하여 그 과보를 중생에게 회향하는 것이 여래라는 의미이다. 아미타불은 신이 아니라 각자의 모습인 것이다.
이와 같이 생각해보면, 왕생도 성불도 인간이 각자가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식은 갖가지 착오를 범하기 쉽다. 인간이 왕생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인 채 그대로는 왕생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인 채 그대로는 여전히 망상 그대로일 것이고, 집착 그대로 일 것이다. 그러므로 집착이 있어도 그것에 사로잡히않을 때, 인간으로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에 속박되지 않을 때가 깨달음의 모습인 것이다. 그것은 생멸하는 가운데 있더라도 불생불멸에 들어간다는 의미이다. 인간의 차원 그대로는 왕생은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왕생은 불이에 들어가는 것이지, 대립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대립이지만 왕생은 불이인 것이다. 이때 불이는 대립의 반대말이 아니라, 모든 대립의 언어를 다 넘어선 것이 불이이다. 대립과 불이는 차원이 다른 말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경지가 왕생의 경지는 아니다. 인간이 자기의 차원을 넘어서 불이의 차원에 들어가는 것이 왕생이고 성불이다. 그것은 인간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해방하는 것이다. 대립이 불이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왕생한다기보다 대립을 초월하는 불이 자체의 왕생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왕생의 업으로 나무아미타불 여섯 글자의 칭명을 조사들은 권했다. 그러나 이 경우 ‘나무’라고 귀의하는 사람과 ‘아미타’라는 귀의의 대상인 부처를 둘로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언어로는 ‘나무’와 ‘아미타불’의 두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나무’가 곧 ‘아미타불’을 가리키는 것이다. 아니, ‘나무’와 ‘아마타불’의 두 가지가 ‘하나가 되어’(卽) 합쳐지는 것이 명호의 본 모습이다. ‘즉’이란 불이를 의미한다. 귀의하는 사람과 귀의 받는 부처가 불이가 되는 그 본모습에서 왕생이 드러나는(現成) 것이다. 왕생은 사람이 왕생하는 것이지만, 왕생은 사람과 부처가 둘이 아니게 될 때의 모습인 것이다. 명호의 의의는 사람과 부처의 차별을 없애는 데 있다. 왕생은 명호의 공덕인 것이다. ‘나무’와 ‘아미타불’이 하나가 될 때에 왕생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무아미타불’이 왕생의 주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람에게 왕생의 힘은 없다. 왕생은 ‘나무아미타불’에 있는 것이다. 사람 및 아미타가 함께 여섯 글자에 거두어질 때가 왕생이다. 잇펜스님은 편지에서, “염불왕생이란 염불이 곧 왕생이다. 나무란 귀의하는 주체의 마음이고, 아미타불이란 귀의 받는 대상의 행(行)이니, 마음과 행이 서로 상응하는 일념을 왕생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나무아미타불을 떠나서 왕생은 없고, 왕생이란 이 여섯 글자에 일치해 있기 때문에 여섯 글자 가운데는 사람과 미타가 둘이 아니게 된다. 있는 것은 ‘홀로 하나인 나무아미타불’뿐이다. 여섯 글자는 인간이 인간을 완전히 버린 바로 그 곳이다. 마찬가지로 아미타가 아미타를 내던지는 바로 그 자리인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인간도 아미타도 모두 명호에 견준다면 무용지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명호가 있기에 인간이며 아미타이다. 그러므로 명호에서 인간과 아미타는 둘이 아닌 경지에 들어가고, 둘이 아닌 경지에 不二에 들어가는 것이 왕생이다. 따라서 명호에 왕생이 있는 것이다. 잇펜스님은 『어록(語錄)』에서 말한다.
“명호가 바로 진실한 견불(見佛)이며, 진실한 삼매이다.”
“칭명 이외에 견불을 구하지 말라. 명호가 곧 진실한 견불이다.”
“원래부터 명호가 곧 왕생이다.”
“나무아미타불은 원래부터 왕생이며, 왕생이라 함은 무생(無生)이다.”
“명호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고, 명호 이외에 왕생이 없다. 일체 만법은 모두 명호 그 자체의 덕이니, 칭명하는 그 순간이 곧 왕생이다.”
잇펜스님은 「육자무생송(六字無生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섯 글자 가운데 본래 생사가 없고, 일성(一聲) 그 사이에 곧 무생을 증득한다.”
일성이란 한 번의 칭명이다. 무생이란 생사가 둘이 아님을 말한다. 칭명이란 자기를 버리는 것이다. 버리지 않는다면 명호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래서 스님은 “그 몸과 마음을 다 버렸을 때가 나무아미타불이다.”고 하였다. 우리들에게는 진실이 없다. “명호만이 진실”인 것이다. 그러므로 왕생은 명호에 있는 것이다.
사람의 왕생이라면 여전히 사람이 남을 것이다. 사람이 남아서는 생사를 벗어날 수 없다. 생사 없는 본래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왕생이다. “그래서 명호는 곧 마음의 본래모습이다”라고도 스님은 말씀하셨다. 명호로 돌아가는 것은 “생사 없는 본래모습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명호로 돌아가는 것 이외에는 나와 나의 본래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다”라고도 말씀하셨다.
해탈이란 새로운 별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본래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피안에 있는 정토는 차안에 있는 본래의 고향인 것이다. 무명으로 인하여 그곳을 떠났으므로 고향조차 피안으로 생각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그 고향이야말로 불생불멸의 세계이고, 생사 없는 정토인 것이다. 거기에 돌아가는 것을 왕생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범부에게 왕생을 확약한 것이 칭명이다. 여섯 글자에서 마음의 본래 모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왕생은 해탈이며 성불이다. 그것은 사람의 왕생이라기보다 사람 없는 왕생이다. 내가 없는 왕생이다. 사람이 사람을 넘어서는 때가 왕생이다. 사람인 채 그대로는 왕생이 불가능하다. 이미 왕생하고 나면 생사에 좌우되지 않는다. 생멸의 대립을 넘어서는 것이 왕생의 의미이다.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실로 생사의 꿈을 없애는 일은 다만 나무아미타불 뿐이로다.”
“오직 나무아미불만이 곧 생사를 떠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실로 나무아미타불에 생사의 해탈이 있는 것이다. 정토문의 모든 가르침이 여섯 글자에 집중되는 이유이다.
행주좌와에 잘 간직하는
나무아미타불의 명호는
다름 아닌 이 몸의 본존이리
--- 잇펜치신(一遍智眞
첫댓글 감사합니다.‥중국 정토종 초조 담란과.혜원 누구를 꼽나요.
스님, 잘 모르겠습니다. 중국 정토종에 여러 갈래가 있는 줄 들었습니다. 담란이라고 하면, 그 밑에 도작이고, 도작 밑에 선도이지요. 그 세분은 많이 말하는 것으로 압니다.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