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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26:1-32
▣ 아그립바 앞에 선 바울-사도행전 26장-
1. 바울의 개인적인 설명(26:1-23)
바울의 손은 묶여 있었으며(29절) 그가 손을 내어뻗은 그것 자체가 하나의 설교였다. 그리스도께 대한 그의 충성심으로 말미암아 묶인 위대한 사도인 바울이 여기 있는 것이다. 빌립보서 1장 13절에서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묶인바 된 것을 무거운 짐이라기보다는 축복이라고 했다.
바울이 왕에게 연설할 때의 정중한 예절에 대하여 유의하자. 비록 바울이 그 사람을 존경할 수는 없었다고 해도 그의 직책을 존중하였던 것이다(롬 13장 참조). 아그립바는 유대인 문제에 대해서는 “전문가“였으므로, 따라서 바울은 그가 공정하고 지적으로 들어줄 것임을 느꼈다. 다음의 핵심적인 몇 구절들에서 바울의 개인적인 변호의 내용을 요약할 수 있겠다.
나는 바리새인으로 살았다(4-11절)-바울의 초기 생애에 대한 부가적인 자료들을 위해서는 22장 3절 이하, 빌립보서 3장을 참조하자. 젊은 랍비로서 그는 대단히 유명하였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그의 생활을 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빌립보서 3장에서 바울은 이 모든 지위와 특권을, 그리스도를 알며 그를 위해 사는 것에 비교할 때, 배설물로 여긴다고 말했다.
6-8절에서는 부활의 문제를 다시 거론한다(23:6-10 참조). 하나님은 그 민족에게 왕국과 영광을 약속하셨는데, 사도행전 13장 27-37절에서 바울은 다윗과 맺어진 약속이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성취되었다고 설명하였다. 만일 이스라엘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더라면(행 1-7장), 그들은 왕국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가 죽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25:19).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이스라엘에게 소망을 주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바울은 계속해서 그가 박해자요 살인자로서 있던 시기를 설명하여 그의 회심의 날에 대한 것으로 이끌어간다.
나는 빛을 보았다(12-13절)-바울이 경험한 것 같은 깜짝 놀랄 류의 회심을 경험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살인 계획에 관계하고 있는 동안에 바울은 하늘에서 비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물론 그는 그 때까지 영적인 어두움 가운데 있었으나(고후 4:1-6),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 그에게 나타났던 것이다(딤전 1:12이하 참조).
나는 음성을 들었다(14-18절)-하나님의 말씀은 영혼에게 죄를 깨닫게하며 개심시킨다. 전 생애를 통하여 바울은 선지자의 음성을 들었으나, 그 날 그는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었다. 요한복음 5장 21-25절에 보면 영적 부활의 기적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바울은 단지 그리스도의 백성들만 박해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을 박해했던 것임에 주목하자. 주님의 몸의 지체들로서 신자들은 주님의 고난을 나누어 가지며, 그리스도는 그들의 짐을 지신다.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는데, 가시채란 농부들이 그들의 가축을 모는 데에 사용하는 막대기를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바울을 주인에게 순종하려 들지 않는 고집센 가축에 비교하신 것이다.
바울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어떠한 “막대기“를 사용하셨는가? 물론 스데반의 죽음도 그 하나였으며 바울은 그 일을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22:17-20). 그가 박해했던 성도들의 거룩한 행위가 바울의 마음에 감동을 주었을 것이며, 구약 성경도 그의 마음 가운데 새로운 확신을 주었을 것이 확실하다. 바울을 회개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들을 사용하셨으며, 이러한 방법은 오늘날 주님께서 죄인들에게 사용하시는 방법이기도 하다.
바울이 예수께 “주님“이라고 부르자 구주께서는 “예수“라는 “구원의 이름“을 그에게 밝히셨다(롬 10:9-10 참조). 그리스도께서 바울에게 부탁하신 임무를 주의깊게 읽자. 이방인에 대한 그의 특별한 사역을 눈여겨보며, 바울의 회심에 대하여 사도행전에 나타난 다른 기록들과 비교해 보라. 18절은 구원에 대한 아름다운 설명이다 !
나는 불순종하지 않았다(19-21절)-바울은 빛을 보았으며 그리스도를 향한 그의 마음을 열었다. 그리고는 즉각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하기 시작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인간의 노여움을 사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바울은 신실하였다.
나는 이 날까지 계속해 오고 있다(22-23절)-이 다섯 개 구절들은 바울의 생애를 분명하게 요약하고 있다. 또한 이것은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그를 섬길 것을 추구하는 그 누구나의 생애가 될 수 있다. 바울은 충성스럽게 계속 일했다. 마태복음 13장 18-23절에 나오는 얄팍하고 혼잡한 마음과 유사한 신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들은 잠깐 동안 계속 되다가 사라졌다. 그리스도께 충성된 것은 참된 구원의 증거이다. 22-23절은 바울의 간증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다. 그는 높고 낮은 사람들 앞에서 말씀에 기초하여 그리스도를 강조한다."
행 26:24-32
2. 바울의 열정적인 권고(26:24-32)
바울은 “이방인“이란 단어를 말하기에 이르렀는데, 베스도가 중단시켰다. 22장 21절에 기록된 바 성전에서 유대인들이 했던 것과 똑같았다. 베스도는 그의 마음에서 바울을 비난한 것이다. 여러 해 전에 그리스도의 친구들과 친척들이 그리스도께 했던 일과도 같은 상황이다(막 3:20-21/막 3:31-35).
베스도는 바울이 “미친 이유“가 그의 많은 학문 때문이라고 갖다 붙였는데, 이 말은 바울이 뛰어난 사람이며 위대한 학자였음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학문이 그의 말씀을 신용하지 않는 한 학문을 신용하지 않으신다.
사도는 아그립바에게 관심을 갖는 반면에 베스도를 무시하였다. 바울은 아그립바가 이 문제에 대한 전문가라는 점과 그가 구약 예언들을 읽고 믿는 사람이며, 또한 그리스도에 대한 사건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많은 빛을 받은 사람일수록 옳은 결정을 내리는 데 더욱 책임이 있다.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믿음을 가질 수도 있음에 유의하자.
아그립바는 선지자들을 믿었지만 이 믿음이 그를 구원하지는 못했다. 아그립바의 반응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그가 진실로 죄를 깨닫고 구원을 받을 경지에 이르렀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28절에 나오는 그의 말은 엄격하다.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가?“ 그가 죄를 깨우쳤다는 증거는 없으며, 여기서 “그리스도인“이란 단어는 경멸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말의 배후에는 “나와 같은 유대인을 미움받는 그리스도인으로 만들려면 시간이 더 걸릴 것이다 !“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말을 이어받아 29절에 나오는 열정적인 호소를 하며 왕실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것을 간청한다. 유감스럽게도 “거의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는 사람“과 “완전한 그리스도인“이라는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이 있다. 아그립바는 “거의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는“ 측의 사람으로서, 말씀을 이해하였고 진리를 들었으나, 그에 대한 어떤 것도 행하기를 거절하였다. 그의 지성은 가르침을 받았고 그의 정서는 감동을 받았으나, 그의 의지는 굴복되지 않았다.
이 말로 재판은 끝이 났다. 왕과 그의 일행은 베스도와 함께 그 방을 떠났으며 은밀한 모임을 열어 바울이 무죄라는 데에 전원 일치를 보았다. 32절에 나오는 아그립바의 말은 로마의 재판을 구한 바울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그는 로마로 가려는 바울의 마음의 부담감을 깨닫지 못하고 불신자의 눈으로 이 상황을 보고 있는 것이다 ! 이 일은 바울을 그곳으로 데려가시는 하나님의 방법인 것이다.▣ 실천적인 교훈
본 장에서는 흥미로운 몇 가지의 교훈들을 찾아볼 수 있다.
그리스도를 위해 언제나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주님을 우리의 마음에 주인으로 삼았으면 우리의 입술은 언제나 질문에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벧전 3:15-16). 이 두 구절을 주의깊게 읽고 바울이 어떻게 이 구절들을 성취하는지 보자.
“빛을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한다. 요한복음 5장 24절을 전도할 때에 암송하도록 하라.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설교란 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온 생애이다. 바울은 “자신을 설교“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자기의 구주이시며 생명의 주인되심을 전하였다(고후 4:5).
죄인들은 쉽게 설복되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베스도처럼 정서적인 큰감동을 받기도 하고, 다른 이들은 아그립바처럼 의심하고 비웃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말씀을 선포하는 데 충성을 다하자. 믿는 사람이 더러는 있는 것이다."
행 27:1-44
▣ 로마로 호송되는 바울-사도행전 27장-
바울의 항해와 배의 조난에 대한 기사를 읽을 때 지도를 참고할 것을 명심하자. 3년쯤 전에 기록된 고린도후서 11장 25절에는 바울이 세 번의 난파를 당했다는 언급이 있다. 그러므로 본 장에서 설명하는 파선은 네번째가 될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섬기며 복음을 잃어버린 자에게 전하기 위해서 기꺼이 위험도 무릅썼다. 우리도 그러한가?
1. 미항으로의 항해(27:1-8)
누가가 바울과 동행했으며(“우리“라는 부분에 유의하자), 아리스다고(19:29/20:4/몬 1:24/골 4:10 참조)도 일행이었다. 이런 사람들이 그의 곁에 있다는 것이 바울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었을까 ?
백부장 율리오는 바울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었는데, 그것은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기“ 때문이다(잠 16:7).
성경에 나오는 백부장은 대체로 친절하고 지성적인 사람으로 제시되어 있다. 율리오는 바울이 시돈에 있는 교회를 방문하도록 허락하였는데, 이 일은 그를 영적으로나 육신적으로 새롭게 하였다. 무라(Myra)성에서는 배를 바꾸어 탔다. 처음부터 이 항해는 용기가 나지 않는 것이었다. “바람이 역으로 불고 있었으므로“ 이들은 여러 날을 천천히 항해하였다. 배는 마침내 미항(Fair Havens)에 도착하였다."
행 27:9-14
2. 바울이 위험을 경고함(27:9-14)
이제는 10월이었으며, 9절에서의 “금식하는 절기“란 속죄일을 뜻한다. 가을이 지난 후 몇 개월 동안은 항해하기에 위험하였다. 그래서 로마로 계속 항해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하여 논의가 있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바울은 이번 항해에 재난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였으나 백부장은 듣지 않았다. 백부장이 이런 그릇된 결정을 한 데는 적어도 다음의 다섯 가지 요인이 있었다.
인내심이 없음-“시간을 많이 보내었다“(9절) 우리가 인내하지 못할 때는 일반적으로 돌진해 달리기 일쑤이며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한다. 우리는 앞으로 달리는 말이나, 뒤에 쳐지는 노새와 같아서는 안된다(시 32:9). 오직 목자를 따라가는 양과 같아야 한다.
숙련된 충고-그는 선장과 그 배의 소유주의 말을 들었으나 하나님의 사자의 말은 듣지 않았다. 백부장은 믿음이 있었으나 그릇된 사람들을 믿는 믿음이었다!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의 지혜보다 훨씬 위에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사람은 “전문가들“보다도 많이 아는 것이다(시 119:97-104).
불편함-“그 항구가 과동하기에 불편하므로“(12절). 백부장은 더 불편한 곳에서 석달을 보내야 할 것을 알지 못했다.
다수결의 원칙(12절)-그는 투표를 했으나, 바울은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다 ! 성경에서는 대체로 다수가 잘못된 경우이다. “모두들 그렇게 하는데 !“라는 말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핑계이다.
순조로운 여건-“남풍이 순하게 불매“(13절). 마치 바울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듯이 그들이 필요로 하는 바람이 불어 왔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어 오는 “큰 기회“를 삼가야 한다.
이상의 요인 각각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비록 환경이 우리가 잘못임을 증명할 때라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에 주의해야만 한다."
행 27:15-26
3. 폭풍(27:15-26)
상쾌한 남풍이 무서운 폭풍으로 변했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경우에는 반드시 그러하다. “유라굴로“는 반은 헬라어이고 반은 라틴어로서, “동풍과 북풍“을 뜻한다.
누가가 자주 사용하는 말인 “우리“가 이 일도 하고 저 일도 했다는 뜻은 선원들과 죄수들이 배를 구하기 위하여 바쁘게 노력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우선 언제나 뒤에 끌려 오는 작은 배를 끌어 올렸다(16절). 다음에는 줄로 선체를 붙들어 매었다(17절). 다음 동작은 돛의 일부를 내리고 배가 견디어 내도록가는 대로 쫓겨갔다(17하반절). 다음 날은 짐의 일부를 던져 버림으로 배를 가볍게 하였고(18절), 사흘째에는 배의 기구(헬라어로는 “가구“) 또는 용구까지 버렸다.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던 단 한 사람 때문에 일어났다 !
27절을 19절과 비교할 때에 20절의 “여러 날“은 11일간으로 계산된다. 아무런 빛도 소망도 없었다 ! 하나님도, 소망도 없이 불순종과 죄의 폭풍가운데빠져 있는 오늘날의 잃어버린 영혼들을 잘 나타내고 있다(시 107:23-31 참조). 그 때 바울이 일어나 이 재앙이 하나님의 경고를 듣지 않은 결과임을 상기시키며 지휘하였다. 바울은 책망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소망의 멧세지를 전했다!(23:11) 하나님은 그가 로마에서 사역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으며,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 삶의 폭풍 중에서도 우리에게 희망과 확신을 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다. 하나님은 또한 바울에게 말씀하시기를, 배는 어떤 섬에 난파하게 될 것이지만 모든 승객들과 선원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다."
행 27:27-44
4. 파선(27:27-44)
3일 후 한밤중에 바울의 말이 실현되었다. 선원들은 물결 소리를 듣고 육지가 가깝다는 것을 알았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여러 번 수심을 재어보고는 실제로 물이 얕아졌으며 육지에 가까와졌음을 알았다. 이제 이 배가 암초에 부딪쳐 모두 죽게 되는 것은 아닌가하는 새로운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안전대책으로서, 네 개의 닻을 끊어 바다에 던져 버렸다(40절). 선원들 중의 몇 명은 전에 끌어 올렸던 작은 배로(16절) 도망치려 하였으나, 바울이 이러한 음모를 간파하고 이들을 중지시켰다. 바울이 31절에서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고 말했는데, 그는 자신과 그의 두 친구만을 “우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두 주간 동안에 처음으로 날이 밝아오자 바울은 사람들에게 음식을 먹으라고 격려하였다. 폭풍의 영향과 계속 배를 보살펴야 할 필요성에 따라 배를 가볍게하느라고 음식이 부족하였으며, 그들의 신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금식하려는 욕망으로 인해, 승객들은 먹지 못하고 있었다. 부끄러움 없이 바울은 275명 앞에서(37절) 감사기도를 드리고 그 자신이 먹는 본을 보였다.
날이 밝자 섬의 절벽이 보였으며, 네 개의 닻을 끊어버리고는 돛을 달고 그 항구로 향하여 들어갔다. 배의 앞부분은 진흙 속에 빠져 움직일 수 없게 되었고 뒷부분은 파도에 깨어졌다. 사단이 다시금 발동하였으므로 군인들이 바울을 포함한 모든 승객을 죽이려 하였으나, 이번에는 백부장이 바울을 믿고 배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육지를 향해 가라고 말했다.
마지막 말은 22절과 34절에서 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진실성을 입증한다.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원을 얻으리라.“ 그 곳은 멜리데라는 섬이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 한 사람으로 인하여 275명을 살려 주셨다! 하나님의 성도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귀중한가! 하나님은 열 사람의 의인을 위하여 소돔과 고모라를 기꺼이 용서하려 하셨다. 그리고 롯과 그의 가족이 안전하게피하기까지는 진노를 내리지 않으셨다.
교회가 아직 세상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사악한 세계를 심판하기를 연기하고 계시다. 그러나 우리가 데려가게 될 때에 하나님의 심판이 떨어질 것이다. 사단은 바울이 로마에 가는 것을 막으려고 시도하였으나 하나님의 말씀이 우세하였다. “하나님의 선한 약속은 한 말씀도 실패하는 일이 없다.“"
행 28:1-31
▣ 로마에 도착한 바울-사도행전 28장-
사도행전은 우리를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이끌어 간다. 이 말은 교회의 전체 역사를 요약하는 것이기도 하다. 기독교 세계는 급진적으로 “로마로 되돌아 가고“ 있다. 예루살렘에서 처음 선포된 단순한 복음은 어느 날 이방인이 부가되어 로마에서 전파될 것이며 모든 세계가 무릎을 꿇게될 것이다!
1. 멜리데에서의 사역(28:1-10)
“토인“ 또는 야만인이란 로마인이나 헬라인이 아닌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3개월 동안(11절) 이들은 거기 머물렀으며, 원주민들은 이들을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해변에 닿았을 때 죄수들이 젖어서 얼마나 추웠을지 상상해보자. 비록 바울이 이제는 그 무리의 지도자요 구세주이지만 여전히 불을 지필 연료를 모으는 일을 돕고 있었다(10:34-35 참조). 뱀 곧 사단이 바울을 공격하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보호하셨다(막 16:18 참조). 원주민들의 반응은 루스드라 사람들의 반응과는 정반대되는 것이었다(14:11-19). 우리는 군중을 믿어서는 안된다!
그 성의 지도자는 보블리오였으며 바울과 그 일행이 사흘간 그와 함께 숙식하도록 해주었고, 바울은 그 사람의 아버지와 많은 원주민 병자들을 고쳐 주었다. 하나님은 바울이 이러한 기적들을 행하도록 허락하심으로써, 바울에게 조력하려는 일행이 3개월 후에 로마에 도착하게 될 때에는 확신을 가지도록 인도하시고 계셨다(10절).
기적과 신유의 은사가 사도행전 전체를 통하여 점차적으로 사라지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하나님은 바울이 에베소에서 특별한 기적을 행하게 하셔서 이방인들에게 전도하게 하셨고(행 19장), 이곳 멜리데에서는 병고치는 능력을 주셨다. 그런데 2년 후 바울이 로마에서 편지를 쓸 때 그는 에바브로디도가 아파서 거의 죽게 되었다고 하였다(빌 2:25-30). 또한 디모데후서 4장 20절에 보면 드로비모가 병들어 밀레도에 남았다고 말한다! 히브리서 2장 2-4절은 이러한 기적을 일으키는 은사는 교회에서 영속되는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행 28:11-16
2. 로마로의 여행(28:11-16)
일행은 11-1월, 석달 동안 멜리데에 머물러 있다가 그 항구에서 겨울을 보낸 곡식 수송선을 얻어서 로마로 향했다. “디오스구“(카스토르와 폴록스)는 항해의“수호신“이었으며 그들의 형상이 배에 조각되는 일이 많았다. 28장 13절에는 또 다른 “남풍“이 나오는데 27장 13절에서의 남풍과는 대단히 다르다! 보디올에서 바울은 일 주일 동안 성도들과 교제를 나누었는데 아마도 배가 사업상 지체되고 있었던 것 같다.
바울이 도착했다는 말이 로마에 전해지자(보디올은 로마의 으뜸가는 항구였다) 사람들은 그를 만나려고 계획을 세웠다. 바울이 보디올에서 일 주일 머물렀던 관계로 교회들 사이에 소식이 전해 질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그리스도인이 복음으로 말미암은 교제에 참여하며 어느 곳에 가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와 자매들“을 발견한다는 것은 참으로 축복된 일이다!
“압비오 저자“란 문자 그대로는 “압비오 시장“이며, 유명한 압비오 로(路)를 따라 로마에서 40마일 쯤 떨어져 있는 읍이었다. 여기서 바울은 일단의 신자 대표들과 만났으며, 10마일쯤 더 가서 삼관(Three tavems)에서 또다른 무리를 만났다. “tavem“이라는 라틴어는 오늘날 영어에서의 “tavem“과 같은 의미가 아니다. (로마어로는 일종의 「가게」이다). 약 3년 전에 바울이 편지를 보냈던 이 곳 신자들을 보자. 이 사도에게는 큰 용기가 솟아났다.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이 그렇게 여러 해 동안 갈망하던 도시에 도착한 것을 누가는 이처럼 간단히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는 도시의 아름다움에 대한 설명은 없다. 왜냐하면 바울은 관광객으로 여기 와 있는 것이 아니라 대사로 온 것이기 때문이다(롬 1:11-13 참조)."
행 28:17-22
3. 로마의 유대인들에게 소개됨(28:17-22)
다른 도시들에서처럼 바울은 자기 민족에게 먼저 시작하여 그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기를 원했다. 로마서 9장 1-2절과 10장 1절에서 자기 민족에 대한 그의 부담감이 어떠하였는지 보자. 바울은 그가 무죄하다는 말부터 시작하여 그들을 불러모은 진짜 이유를 말했다.
20절의 “이스라엘의 소망“이란 말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미한다(5:31/23:6/24:14-15/26:6-8/13:27-37 참조). 사실상,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가 그리스도이심을 입증하였으며 모든 이스라엘의 축복이 그에게 달려 있음을 보여 주었다. 그렇지만 바울은 이스라엘에게 왕국을 제시한 것이 아님을 눈여겨보자. 그보다는 하나님의 왕국을 전파하였으며, 이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뜻한다(31절).
로마의 유대 지도자들은 바울에게 불리한 어떤 고소 내용도 들은 일이 없었으나, 악영향을 주는 것으로 전해진 그리스도인이라는 “종파“에 대해서는 들은 일이 있었다. 사도행전에는 세 가지 종파가 나오는데, 사두개인(5:17)과 바리새인(15:5)과 그리스도인들(24:5/28:22)이다. 이들은 시간을 약속하여 바울과 만나 말씀을 상고하기로 약속하였다."
행 28:23-31
4.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절함(28:23-31)
바울은 감옥에 있지 않고 자신이 빌린 집에 있었다. 로마 군인들에게 쇠사슬로 묶여 있었으나 방문객을 맞을 자유는 있었다. 유대 지도자들이 도착하자 바울은 구약 성경을 사용하여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하였다(23절). 누가복음 24장 13-35절과 비교해 보면, 그리스도는 낙심한 두 사람의 마음을 열기 위해 모세와 선지자들을 사용하셨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반대로 나타났다. 엠마오 제자들은 그 말씀을 믿고 선교사들이 되었지만 로마의 유대인들은 대개 말씀을 거절하였으며 정죄를 받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라는 구절은(23절) 하나님의 계시의 빛에서 불신앙의 어두움으로(고후 4장) 가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설명하는 것 같다.
바울이 이들에게 왕국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자. 바울은 3년전에 로마서를 썼으며, 9-11장에서는 이스라엘이 제쳐진 것과 교회는 유대인들을 위한 하나님의 프로그램이 아님을 설명했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네번째로 이사야서 6장의 예언이 인용되었다. 700년전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말씀을 거절하고 주의 멧세지를 거부할 것이라고 이사야에게 말씀하셨었다.
마태복음 12장에서 그리스도께서 사단과 동맹을 맺고 있다는 고발을 당했을 때 주님은 친국의 비유를 말씀하시며 바로 이 예언을 인용하셨고(마 13:14-15), 이 땅에서의 사역을 끝맺을 때 쯤에 이 예언을 다시 적용하셨다(요 12:37-41). 바울은 로마서 11장 8절에서 이 예언을 인용했었고 이제 마지막으로 또 인용한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700년 동안이나 이 말씀을 해 오셨는데, 얼마나 위대한 인내인가!
28절은 바울이 처음으로 이방인에게 갔다는 뜻이 아니다. 이 말은 단지 로마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지금 기회가 주어졌는데 거절했으므로 이방인들에게로 방향을 돌릴 것이라는 뜻이다. 바울의 손은 그들의 피에 대하여 책임이 없다. 그는 구원받을 기회를 그들에게 주었었다. 이것은 본래부터 바울의 행동 양식이 되어 왔었다(행 13:44-49).
바울은 2년간 죄수로 있으면서 자유롭게 말씀을 전파하고 가르쳤다. 그가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쓴 것은 이 기간 동안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바울이 쇠사슬에 묶여 지하 감방에 있었던 것으로 상상하지만, 사실은 많은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로마에서의 그의 첫 수감 기간은 주후 61-63년이었으며, 그 후에 4, 5년간 자유롭게 석방되었었고, 이 기간에 디모데전서와 디도서를 썼다. 그는 아마도 이 기간에 빌립보, 골로새, 그리고 다른 아시아 교회들을 방문했을 것이며, 그가 바라던 서바나(스페인)여행을 했을 것이다(롬 15:24/롬 15:28).
68년에 다시 투옥되었을 때에는 그의 형편이 그렇게 좋지 못하였다. 이 기간에 기록된 디모데후서를 보면 그가 외로움과 괴로움을 참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킨 후에 주후 68년, 순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