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산에서 타오르는 의병의 불꽃
-임진왜란 기억-
경산시립박물관(관장 송정갑)은 오는 2025년 11월 15(토요일)부터 2026년 5월 10(일요일)일까지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는 거대한 전쟁(戰爭) 속에서도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분연(奮然)히 일어섰던 경산 지역 의병(義兵)들의 숭고한 우국충정(憂國衷情)과 희생정신(犧牲精神)을 기리고, 이의 발자취를 되새기기 위하여, 경산시립박물관 특별전시실에서 "경산에서 타오른 의병”이란 주제로 2025년 경산시립박물관 특별기획전을 마련하여 시민들에게 선보인다.
본 특별전은 2025. 11. 14.(금요일) 15:00시 경산시립박물관(경산시 박물관로 46) 로비에서 개막식을 가진 후 약 6개월여간에 걸쳐 전시된다.
이에 대하여 송정갑 관장은 이번 기획의 구상을 조선이 위태로웠던 그 시기에 경산의 선인들이 나라와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스스럼없이 일어나 의병(義兵)을 창의(倡義)하였던 용기와 헌신은 오늘의 우리가 지켜야 할 소중한 정신적 뿌리라고 강조하면서, 이를 통하여 우리 지역의 역사와 정신을 함께 기리고 그날의 아픈 기억을 함께 되새기는 선양(宣揚)과 추모(追慕)의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고 피력하였다.
경산에 현존하는 임란 창의 기록에는 1592년 임란 발발과 때를 같이하여 경산 지역 3개 현을 중심으로 각기 명망(名望) 높은 지역 선비들을 중심으로 스스로 임란 창의(倡義)를 결의하였고, 당시 여기에 스스로 참여한 지역 의병들만도 수천에 달하였다고 한다.
당시 경산 지역에 대표적인 의병장(義兵將)으로, 경산현(慶山縣)에 최응담, 박응성 의병장, 하양현(河陽縣)에 신해, 황경림 의병장, 자인현(慈仁縣, 당시 경주부에 속현)에 최문병 의병장이, 1592년 4월 17일 이후 스스로 창의(倡義)하여 지역 대장으로 추대되면서, 당시 경산 지역에는 최응담, 최문병, 신해, 황경림 등, 100여 명에 달하는 명망(名望) 높은 지방 선비들이 창의 인물로 거명되고 있다.
경산 지역 현존 기록 중, 최응담의 유허비문과 면와실기, 성재 선생실기, 죽은·죽포 선생실기 등에서 다음과 같은 경산 지역 의병들의 활동상을 기록을 통하여 엿볼 수 있다.
황경림 선생의 면와실기에는 “壬辰 四月 二十二日 會書堂以倡義事發文”이라는 서문을 시작으로 4월 16일 왜병이 대거 침입하여 부산포의 첨사 정발이 죽고, 17일 병사 이옥, 수사 박홍계가 기성을 둔거 하였고, 18일에는 동래부사 송상현이 유서로 그 부친이 “君臣義重父子 思輕遂不屈而 死其貞忠卓節有族以 檄文 千古是所謂世亂識貞臣者也”라는 통문을 보냄으로, 동월 27일 신녕(新寧)에 권응수(權應銖)가 의병을 일으켰고, 같은 날 경산현의 최응담(최대기로 각각 사용) 지역의 의병을 모아 봉기(蜂起)하였고, 적 30여급을 베고 말 10필을 노획하였다는 전과와 남천면 금곡에서도 적을 물리치고, 그들이 포획했던 물건들을 분배하였으며, 적 수백 명이 자인에 달려온 것을 쫓아 연화봉 아래에서 승전하였다 했다.
또한 신녕 지역에 권응수가 창의하여 군성을 크게 떨치매, 영천에서 정대임이, 하양에서 신해가, 의흥에서 홍천뢰가, 자인에 최문병이 각각 일어났으며, 당시 좌병사 박진은 적을 두려워하여 한발의 화살도 쏘지 못하고 있을 때, 이를 안 소론사 김성일이 박진 대신 권응수를 좌도 의병장으로 삼아 열읍이 그 지휘를 받도록 하고, 최대기는 신해와 그 휘하에 들어갔는데, 당시 와촌 지역에 집결한 군사가 무려 3,500여 명이나 되었다 한다.
이때 의병들은 3부로 나누어 신해, 최문병이 좌우홀(左右惚)이 되고, 정대임이 중홀, 홍천뢰가 전홀이 되었고, 권응수는 후독장, 군수 김윤국은 별영장, 정세아 등은 찬획종사로서 적의 화공임무를 맡았다.
최응담은 권응평, 홍천뢰와 함께 500의 군사를 거느리고 적 수 십급을 베어 적은 감히 나오지 못하고, 아군은 용전하여 성벽을 지키는 자를 베니 적은 북을 두들기고 소리를 지르며 성안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이로써 무수한 적들은 죽었으나, 최응담 경산대장의 얼굴에 3대의 화살을 맞는 부상을 입었다. 때마침 동남풍이 크게 불어 성안에 불을 지르자 적병은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모두 타서 죽었고 이 전투에서 아군은 최인제 등 17명이 전사하였다(최대기의 회당실기 중에서 채록).
이와 같은 시기에 경산의 진섭, 진엽, 남중옥이 고산 욱수에 박응성과 그의 제종 박응담, 압량 삼풍리의 승적과 합세하여 남천면 구일리 금성산성, 고산면 욱수 자산의 망월 산성에서 왜적과 대항했다.
하양현에서 황경림이 기장·울산·양산·경주·청도·밀양이 모두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고 먼저 가속을 청송 자하동(紫霞洞)으로 보내고, 표형(表兄, 외사촌형) 김거(金鐻)와 방어책을 논하기 위하여 현감을 만나 군병 소모문을 각 면으로 전달하도록 하고, 서당에 모여 창의격문을 발송한 후 모두 모여 서약하고 신해(申海)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유생 중 명망과 책략이 있는 자를 택하여 모병과 모속(募粟) 담당자로 임명하였다.
효양산 아래에서 병력을 모았으나, 하양현의 군사 수백 명은 이미 방어사군에 소속되어 남아 있는 자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각 가정의 노비와 유생 중 싸울 수 있는 자를 조사하였는데, 관군과 합해 보니 겨우 4백 정도였다. 부족한 무기는 담당관으로 하여금 기한을 정해 만들도록 하였고, 붉은 천을 찢어서 깃발을 만들고 그것에다 크게 ‘분충장의정용군(奮忠仗義精勇軍)’이라고 썼다. 무학산 가장 높은 곳에 척후병을 배치하고 꽹과리와 육성으로 원근에서 접근하는 적병을 통보하도록 했다.
왜군 백여 명이 와평(瓦平, 현재의 와촌 평야)으로 침입하여 인가를 약탈하매 병력을 이끌고 대적하여 영천과 경계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신해는 “우리 고을은 작은 읍이어서, 왜병이 반드시 침입하지 않을 것이다. 간간이 흩어져 약탈하는 왜군은 실로 걱정할 것이 못된다.”고 말하고, 전군을 통솔하여 신녕으로 가고자 황경림을 찾아와 함께 가기를 원했다. 이에 내가 “병가의 근심은 항시 적을 소홀히 생각하는데 있다. 만약 허점을 노려 외로운 성을 엿본다면 무엇으로 방어할 수 있겠는가? 군사를 나누어 각기 주둔하여 있으면서 그 변화를 엿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하였다. 이에 신해는 최대기와 정예병 2백을 선발하여 당일로 권응수군에 합류했다.
신해 의병장이 권응수군에 합류하자 제 유사가 황경림을 하양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그는 추가로 뽑은 의병이 70여 명에 불과하여, 경산과 자인으로 격문을 돌려 450여 명을 얻게 되어 비로소 군용을 떨치게 되었다. 왜군이 초례산중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사방으로 약탈을 함으로써 도로가 불통되었다. 이에 병력 100여 명을 산꼭대기로 보내 돌을 모으고 깃발을 세우고 큰 소리로 북을 울려 장차 엄습할 것처럼 하면서 해 지기를 기다려 불빛이 보이거든 하산하여 접전하도록 명령하였다. 정병 300명을 뽑아 산 밖 애로(隘路)지점에 매복하게 하고, 민가의 이엉·가벼운 돌·땔나무·인화물질을 가지고 몰래 사방에서 포진하게 하고, 돌격대 30명으로 샛길에서 동시에 불을 질러 왜군이 놀래 감히 산으로 오르지 못하도록 하였다. 왜군이 모두 산 밖 불이 없는 곳으로 나오자, 복병이 일시에 돌격하고, 정상에 매복한 의병 역시 북을 치고 내려오면서 양면공격을 하여 왜군을 격파했는데 이때 왜군의 목을 20여 급이나 베었다. 이때 최대기와 신해가 권응수 진영에 있으면서 왜군의 일대가 경산·하양 등지에 모여들어 약탈한다는 소식을 듣고 신녕으로부터 정병 2백 명을 이끌고 본진에 합세하자 병사들은 사기가 충천하여 필사의 각오로 왜군에 대항했다. 그로서 왜군 30여 명의 목을 베었다. 아군도 조총에 맞아 전사한 자가 12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남은 왜군이 멀리 달아나 하양현 일대가 편안하게 되었다. (황경림의 면와실기(勉窩實紀) 중에 채록)
자인현 올옥동에 최문병이 현내 선비 몇몇과 함께 의병 창의를 결심하자 이에 동조한 현민들이 그를 의병장으로 추대하여 천장산에 응거하였다가 군사를 매복시켜 적을 일거에 무찌르니 적은 감히 자인경계를 넘지 못하였고, 그 후에도 청도 의병장 박경전과 합세, 두곡에서 왜적 수백 명을 죽이고 청도 금천의 적을 막았다.
또 영천의병장 권응수와 합세, 군위, 하양 등지의 적을 격파하고, 좌장 정대임과 함께 적을 쳐서 10여 명의 목을 베었다. 이때 세운 공으로 감목관을 제수(除授)받고, 선조 32년(1599년)에는 가선대부 한성우윤으로 증직되었다.
경산 용성의 최팔원은 임진년에 동래부사 송상현의 격문을 받고, 일족 및 마을 장정을 모아 동래로 향하였다. 경남 언양지역에서 적을 만나 30여 명을 베고 그들의 말을 탈취했으며, 양산에서도 적을 무수히 베었다. 뒤에 동래성의 적과 싸워 적장 조박붕(鳥博鵬)을 베는 전과를 올렸으나, 중과부적으로 끝내 전사하고 말았다.
의병장 최준립 또한 증조부 최철견의 유훈에 분기하여 아화산성의 적을 기습하여 공을 세웠고, 그 공으로 병절교위 좌부장 훈련첨정에 올랐다가 정유재란 때 다시 의병을 모아 선전하여 포도대장에 제수 되었다. (내 고장 전통. 1985, 경산시, pp.42~69).
이와 같은 경산 지역의 임란 창의와 구국 의지, 그리고 의사들의 우국충정을 경산시립박물관의 특별전시실에서 당시의 문집과 실기, 유물 등을 통해 함께 소통하는 소중한 기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경산자치신문 문화부 국장 김종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