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5:13~26)
‘You, my brothers, were called to be free.
But do not use your freedom to indulge the sinful nature;
rather, serve one another in love.
The entire law is summed up in a single command: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If you keep on biting and devouring each other,
watch out or you will be destroyed by each other.
So I say, live by the Spirit,
and you will not gratify the desires of the sinful nature.
For the sinful nature desires what is contrary to the Spirit,
and the Spirit what is contrary to the sinful nature.
They are in conflict with each other,
so that you do not do what you want.’(13~17)
‘형제들아 너희는 ’자유‘를 소유한 존재이다. 그러나 그 자유로 죄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 사용해서는 안 된다.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는 데 사용해야 한다. 모든 율법은 한 가지 계명으로 가름 된다. “너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타자를 사랑하라.”는 것이다. 네가 만약 타자에게 해를 끼치고 짓누르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면 주의하라! 멈추지 않으면 너희 스스로 서로를 패망하게 할 것이다.
그래서 내가 호소한다. 성령을 쫓아 살아야 한다. 그리고 죄의 본성을 쫓아 욕망을 채우려 하지 말아라. 죄의 본성을 쫓는 욕망은 성령을 대적하는 일이다. 성령은 죄의 본성을 대적한다. 성령과 죄의 본성은 서로 상극이기 때문에 네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없게 한다.’ |
번역 되어 있는 것을 그대로 읽지 않고
내가 받은 은혜대로 번역을 해서 읽으면 은혜가 배가 되는 느낌이다.
(준수해야 하는 일정 궤도가 있다는 전제를 존중하기 위해
기존의 번역된 것과 원문을 존중하는 주의와 함께 한다면)
능동적인 것이 작용해서일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대단한 존재로 만드셨다.
그래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주시기꺄지 했다.
다만 죄의 본성이 우리 안에 침투한 이후로
그 자유가 죄악을 행하는 것으로 변질될 수 있게 되었다.
우리의 올바른 선택권 행사가 더욱 중요한 일이 되었다.
온존히 올바른 선택권을 행사할 능력이 없는 우리는
그 선택권을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도록 하는,
선택을 해야 한다.
어떻게 보면 매우 수동적인 선택권 행사로 볼 수도 있으나
관점에 따라, 가장 적극적인 선택권 행사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런 선택은
엄청난 사연과 굴곡을 내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극적이고, 진정성 있고,
많은 사연을 담은 혼신의, 영혼의 선택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랑, 그리고 욕망을 삶에서 투영하는 것에 대한
복잡한 이미지가 있어서 혼란스럽다.
100% 온전히 하나님의 사랑을 쫓는 이가 있을까?
사랑 90%, 욕망 10%
사랑 70%, 욕망 30%
사랑 50%, 욕망 50%,
사랑 30%, 욕망 70%,
사랑 10%, 욕망 90%....
각각 다른 양상의 인생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그래서 더욱 사랑이 필요한 것인가?
이런 다양한 양상의 인생을 수용할 수 있는 힘은
사랑밖에 없지 않은가?
온전함이 존재하기 힘드니
‘분투’의 삶이 필요한 것 아닌가?
매우 추상적이지만,
다양한 양상 중에도 분명하고 차별적인 어떤 요소가 있을 것 같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점수가 아니라
내가 몸을 틀고 눈으로 바라보는 그 방향이
하나님의 사랑인가?
아니면, 죄의 본성인가? 하는 것.
만약 내 몸의 방향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면
지금 점수가 형편없더라도
시간이 갈수록 옳은 선택이었음이 더욱 드러날 것이다.
나는?
나의 고민은 어떤 것인가?
하나님 안에 온전히 내 몸과 마음을 던지려는 진통인가?
아니면 알량하게 현실을 뜯어먹고 사는 삶이면서
지식은 있어서 거룩한 척 변명하는 삶인가?
기도할 일이다.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을 이루어야 하는데....
먼저 묵상 산책 등을 더해서 집중적으로
하나님의 음성 듣는 시간을 보장하는 게
딱 한발 실제적으로 행해야 하는 일인 것 같다.
<오늘의 명언>
진정한 사랑이란 예수님의 사랑이다. 즉 자기를 희생하고 헌신하는 사랑이다.
-존 맥아더-
“하나님, 감사합니다. 죄가 많습니다.
저를 용서하소서. 구제불능의 존재인데, 주님께서
포기하지 않으시고 이끌어 주시기를
염치 없이 구합니다. 염치를 구한다는 것이
오히려 교만한 일인 것 같습니다.
뭐, 대등한 존재에게 하는 말이지 않습니까?
주님, 마음의 공허함과 방황을 정리하고
온전하게 주님과 교제함으로
정리된 삶을 살게 해 주옵소서.
몸이 다시 안 좋은 소영이를 기억해 주시고
피곤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정환이가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도와주시는 하나님께서 정환이의 마음을 굳게
잡고 계심을 감사드립니다.
모쪼록 주님의 역사하심, 사랑을 우리가 그 일을 통해서
더욱 깨닫게 해 주옵소서.
윤준호 학생이 큰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치유의 역사를 허락하소서.
학생과 부모님을 위로하소서.
건강을 회복하고 다시 학교 생활과
장교 임관의 과정에 정상적으로 복귀할 힘을 주소서.
내일 다시 학교로 가서
1박 2일 동안 강의와 여러 가지 업무를 합니다.
일정과 안전, 안정과 평안을 지켜주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