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사진 편지 제 331 호 (06/5/16/화)
4. 조치원에서 공주시 갑사까지
5월 5일 금요일 흐림
우리가 이번에 오래 걸었는데도
발에 물집이 생기지 않고 부르트지도 않은 것은
비밀 병기 덕분입니다.
그 비밀병기는 바로 비누였습니다.
걷기 여행전에 여러분께서
발에 비누를 칠하고 양말에도 비누를 칠하라고
조언해주셨습니다.
저희는 준비단계에서 그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조언도 많아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놀랍게도 마찰이 원활했던지 발가락에
물집이 생기지 않아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오늘도 6시에 출발하려고
새벽 5시부터 일어나
두 발에 열심히 비누 칠을 하고 있는데
방안의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유 위준 박사 였습니다.
어제밤 전화로 오지말랬는데도
새벽에 우리 숙소로 찾아온 것입니다.
유 박사는 커다란 보따리를 들고 왔습니다.
오이.사과, 오렌지 한 봉지와
딸기와 참외 등 여러 과일을 골고루
잘 깎아서 프라스틱 통에 두 통,
그리고 매실즙에 꿀을 탄 것 두병이었습니다.
유박사 내외의 정성과 사랑이 가득 담긴
귀중한 선물이었습니다.
유박사 내외에게 미안하고 고마왔습니다.
우리는 염치없지만 유박사에게 또 한가지 부탁을 했습니다.
최소한의 옷과 소지품만 남기고 그동안 입었던
땀에 절은 빨래들과 여벌로 가져간 옷들을 모두
싸서 서울 우리집에 택배로 보내달라고 건네주었습니다.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 여행'의 저자인 김남희의
조언을 참고하여 우리는 배낭속에 최소한도의
물건만을 꾸려 왔지만 출발할 때는 별로 무게를
느낄수 없었던 배낭이, 오래 걷다보니 배낭의 무게가
점점 더 무겁게 느껴져 다리 아픈것보다도 오히려
어깨가 아파서 견딜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짐의 무게를 줄일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다가
고심끝에 해결책을 찾아낸 것입니다.
유박사에게 미안했지만 한뭉치의 짐을
덜어내니 배낭의 무게는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날아갈것 같다며 아내가 무척 좋아했습니다.
유 박사는 "마음같아서는 제 승용차로 공주까지
모셔다 드렸으면 좋겠는데 그럴 수도 없고...."
우리가 퍽 피곤하고 측은하게 보였던 것 같습니다.
고마운 유박사와 아쉬운 작별을 하고
우리는 6시 40분에 조치원을 출발했습니다.
오늘은 제 84회 어린이날이고
부처님 오신 음력 4월 초파일이기도 했습니다.
조치원 시내를 벗어나 공주로 가는 한적한 지방도로
들어서니 잘 닦여진 2차선 도로가
아침의 깨끗한 공기속에 시원하게 쭉 뻗어 있었습니다.
지방도를 조금 걸어가니 마침 이번 걷기여행에서
처음으로 경운기를 만났습니다.
하도 반가와서 손을 흔들며 경운기를 지나치려고 하니
잘 생긴 경운기 아저씨가
"이길로 가면 명산대천도 없는디 이렇게 일찍 어딜 가신데유?" 하고 물었습니다.
"우리는 서울에서 전주까지 걷기여행하는데
공주로 가고 있습니다."
"예! 서울에서 전주까지 걸어간다고유?
아이구 무슨일이래유. 조심해서 잘 가셔야 할 것이유.
공주는 이 길로 가는 것이 제일 낫기는 허지만유"
이 길은 차량통행이 아주 뜸하고 조용해서 진짜
시골 맛이 나는 아름다운 길이었습니다.
인도는 없었지만 차가 없으니 온 길이
바로 우리 길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중에서 가장 좋은 길을
4일째에 처음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제야 제대로 시골길을 걷는 맛이 났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걸어도 아침식사를 할 식당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유박사가 준 오이와 사과와 오렌지
그리고 누룽지 남은 것 조금으로 조반을 때우고
꿀물을 마셨습니다.
세상에 다 좋은 것은 없습니다.
한가지가 좋으면 한가지가 나쁜가봅니다.
능력은 있는데 인간성이 더럽거나
인간성은 좋은데 무능하거나 한 것처럼
차량 통행은 거의 없는데
밥 먹을 곳이 없었습니다.
산도 좋고 물도 좋으며
먹을 것도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느님은 무엇이든지 다 주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오이를 먹으며 공주 교대 교수와
학장님으로 오래 공주 생활을 하신
공주의 도사 박용진 회장님께 전화를 걸어
자문을 구했습니다.
" 회장님! 저희는 지금 공주로 가고 있는데요.
점심 때 쯤이면 도착할 것 같습니다.
어디서 점심 먹으면 좋은지 식당하나 추천해 주세요."
" 아! 그래요. 많이 가셨네,
공주에가면 '이학'이라는 따로 국밥집에 가서
점심을 드세요. "
" '이학'이 어디쯤있는데요?"
" 음... 유명하니까 공주가면 물어보세요
다 알아요. 너무 무리하지 말고 잘 다녀와요"
박용진 회장님은 우리가 서울을 출발 하기전 날
동아일보에 계시던 박주린 선배 내외분이
주최한 장행회에서 내외분을 같이 만나 뵈었고
헤어질때 잘 다녀오라면서 격려금까지 주시며
응원해주신 자상하고 고마우신 선배님이십니다.
과일은 먹었지만 밥을 안 먹었으니
아무래도 허기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참을 걸어 신대리 라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비닐하우스의 물결이 햇빛을 받아
아침 바다처럼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저 비닐하우스에는 무엇이 자라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걷고 있는데 비닐하우스 문이
열려 있는 곳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아내가 열린 문 틈으로 기웃거리며 "딸기다!" 하고
컬럼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 처럼 소리쳤습니다.
아내가 들어가 구경하자 마침 딸기를 따고 있던
젊은 아주머니가 아내를 반갑게 맞이하면서
뒤에 서있는 나에게 "사진도 찍고 딸기도 따서 드세요"
하고 인심좋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남의 딸기를 그냥 따먹을 순 없다고 생각했는지
아내는 2000원을 그 아주머니에게 내밀었습니다.
주인 아주머니는 프라스틱 상자에 수북하게
딸기를 담아 주었습니다.
아내는 서울에서 사면 5000원어치는 되겠다며
좋아하였습니다.
"씻지 않고 드셔도 괜찮어유. 그냥 드세유."
아침식사를 거른 우리는 걸어가면서
그 많은 딸기를 모두 먹어 치웠습니다.
그 싱싱한 딸기 맛과 아줌마의 따뜻한 인정은
언제까지 잊지못할 것입니다.
딸기를 먹으며 걸어가는 우리들의 등뒤로
"여름에 여길 또 지나가세유. 그때는 맛있는
복숭아 드릴께유"라는 아줌마의 말이 들려왔습니다.
길가에 대파 농사도 많이 보였습니다.
얼마를 걷자 큰 느티나무밑에 시원한 정자를 만났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땀을 식히며 지친 몸을 쉬었습니다.
버스 정류장은 앉을 의자가 있고 햇볕을 가려주니
소음과 먼지는 있었지만 걷기에 지친 우리들에게는
썩 괜찮은 휴식처였습니다.
시골 버스 정류장에는 하루 종일 버스 몇 편이 왕래할
뿐입니다. 자식들을 도회지로 다 내보내고 늙은 부모들만
시골에서 쓸쓸하게 살고 있는 듯 어디서나
젊은이들과 아이들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버스 정류장은 할머니들의 사랑방이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지친 다리를 쉬기위해 정류소 의자에 앉으니
할머니들은 심심하던차에 신기한 이방인을 반기며
금방 말을 걸어왔습니다.
" 어디를 가시유?
"공주까지 갑니다."
"공주가는 버스는 오후 두시니께 한참 기다려야 헐 것이유"
"저희는 걸어서 갈 것입니다."
"걸어서 간다고유? 걸어서는 못갈낀디....
몇살이나 되셨시유?
"예순 일곱살인데요."
"응, 한창 청년이구만... 하하하"
"자제들은 자주 옵니까?"
"일년에 두번 오지"
"저 고개만 넘으면 공주 땅이지유,
여기가 연기하고 공주하고 경계여.
공주버스는 저 고개 밑에서 돌아가고
연기버스는 여기서 돌아가는구만.
공주가 한 십리나 될랑가 모르겄네.
조심혀서 잘 가시유"
80세가 다 된 할머니들은 쓸쓸하고 심심해보였습니다.
할머니 말대로 고개를 넘었더니 연기군을 벗어나
공주 땅에 들어오긴 했지만 공주시내까지 십리라는
말은 말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저 모퉁이만 돌면 공주변두리 일것 같다고
다리 아프다는 아내에게 희망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러면 아내는 시골 사람들 한테 속고, 자기한테 또 속고
믿을 사람 하나도 없다고 불평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걸으면서 길을 물으면 대개의 현지 사람들은
정확히 몰라서 그런지, 우리에게 힘을 내게하려고 그런지
거의 실제 거리보다 가깝게 알려주어 가도 가도 나오지않아
오히려 힘이 빠지게 만들곤 했습니다.
오후 1시 40분경에 우리는 백제의 고도
공주 시내로 들어섰습니다.
시장기를 많이 느꼈습니다. 아무데서나 점심을 먹을까
했지만 박용진 회장님이 추천한 '이학'에서
먹어야겠다는 생각때문에 사람들을 붙들고
따로국밥집 '이학'을 물었습니다.
유명하다는 '이학'을 잘 아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계속 묻고 있는데 어떤 청년이 금강 강변에서
'이학'이란 집을 본것 같다면서
이길로 직선으로 곧장 가 보라고했습니다.
아내는 많이 지친것 같았습니다.
드디어 커다란 '이학' 간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역대 대통령들도 공주에 오면 이 집의
50년 전통 따로 국밥을 들었다는
내력이 입구에 붙어 있었습니다.
마침 어린이 날 이어서인지 자녀들과 같이
외식하고 있는 손님들로 꽉 차있었습니다.
우리는 석갈비 2인분과 따로 국밥,
맥주 한 병을 주문했습니다.
과연 소문대로 음식 맛이 좋았습니다.
석쇠에 구워서 내오는 갈비 맛도 아주 좋았습니다.
찬 맥주 한잔에 갈비 한점을 먹으며
이 식당을 소개해준 박 회장님을 생각했습니다.
'이학'은 바로 금강변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식사후에 금강 변으로 내려가 보았습니다.
우리는 한강에서부터 금강까지 걸어 온 것입니다.
한강 인도교처럼 금강 다리가 보였습니다.
교원대 정 재경 부장은 오늘은 욕심내지 말고
가급적 공주에서 숙박하는게 좋겠다고 충고했지만
우리는 이왕이면 부처님 오신날
갑사에서 쉬고 싶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갑사가 여기서 얼마나 되냐고 물었더니
"갑사요? 시내버스 타면 금방이지유. 바로 코 앞이지유"
지금 2시 반이니 저녁 식사때 까지는 갈 수 있겠지.
갈비와 점심을 잘 먹어서인지
아내도 다시 기운차게 잘 걸었습니다.
이 길도 공주시를 벗어나서 부터는
인도가 끊어지고 걷기에는 힘든 길이었습니다.
신국도 4차선과는 별도로 2차선 구도로가 있어
그곳을 택했습니다.
그런데 시내버스를 비롯해 많은 차들이 그길로 다녔습니다.
갑사에 거의 다와서 양쪽으로 가로수가 아름답고
오른쪽으로 금강물이 흐르는 길에 왔을 때 비로서 갑사로 가는 차들만 왕래 했기 때문에 한결 걷기가 나아졌습니다.
드디어 계룡산 갑사에 도착했습니다.
아름드리 고목들이 숲을 이루고 민박집들이
여기저기 눈에 띠기 시작했습니다.
갑사 앞의 숲이 멀리 보이는 지점에 도달했을 때
아내가 멈춰섰습니다.
저에게 손짓을 하며 조심조심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내는 나비도 우리처럼 지쳐서 지친 날개를 내리고
땅에 엎드려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 같다며
빨리 사진을 찍으라는 것입니다.
사진을 찍으며 '아스팔트위의 흑나비'라고 중얼거리자
아내는 '나비도 쉬어가는가 봐!'라고 했습니다.
오후 7시 반이 지나고 있었습니다.
코앞이라던 갑사를 5시간도 더 걸려서 찾아왔습니다.
아내는 기진 맥진했고 저도 왼쪽 다리가 많이 아팠습니다. 박 회장님이 갑사에 가거든 민박하는게 좋을 것이라고
알려주셨지만 우리는 민박보다는 여관을 택했습니다.
녹수장이란 여관이 좋아보여 들어가 보았더니
아무리 기다려도 주인이 나타나질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다시 나와서 그 아래 '황금산장'으로 갔습니다.
여기는 1박 40000원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묵은 여관중 가장 비싼 숙박료였습니다.
배낭을 방에 던져놓고 저녁식사를 하러 나갔습니다.
모든 식당의 간판에 TV 방송국 맛자랑에
나왔던 집이라고 씌여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야 장사가 잘 되는 모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수정식당'으로 들어갔습니다.
아주 넓은 식당이었고, 여주인이 관록이 있어보였습니다.
20년도 넘게 이 식당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 식당에는 시화가 많이 붙어 있었고
유명인사의 싸인판으로 온벽이 꽉 채워져 있었습니다.
이 식당에서 시화전도 열렸다는 잡지의 기사도
붙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주인의 남편이 바로 우리가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았던 녹수장을 관리하고, 자기는 식당을
운영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녹수장에 들어갔던 이야길 하니
여주인은 자기 남편이 여관을 비우고
샛길로 빠진것을 알아차리고 한숨을 쉬며
멋적은 표정을 지었습니다.
15000원짜리 수정 백반을 주문했더니
야채와 나물, 도토리묵, 청어구이까지
잘 차려 나왔습니다.
식사후에 다리가 아팠지만 갑사를 한번
둘러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래묵은 오리나무 고목길을 따라
갑사 경내로 올라가니 이 절의 주지스님을
비롯한 모든 스님과 신도 100여명이
연등을 들고 독경을 하면서 줄을지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웅전 앞마당에는 오색 연등이
여러개의 줄에 마당 가득 매달려 부처님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스님들과 신도들은 때마침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연등에 점화를하고 있는중 이었습니다.
신도들의 이름이 새겨진 각각의 연등에는
저마다의 소원을 비는 간절한 기원들이
점화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중에 높이 매달려 있는 연등안의
양초에 점화하는 일은 실제로 옆에서 지켜보니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습니다.
우리가 잠깐 지켜보는 사이에도 점화된 촛불이
옆으로 기울어지는 바람에 그만 누군가의 연등이
순식간에 화르르 타버리고 말았습니다.
카메라맨들이 부지런히 사진을
찍어대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초파일에 갑사에서 숙박하기로 한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좋아하면서
어서 사진을 찍으라고 재촉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저는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카메라를 방에 두고 왔기 때문입니다.
다시 여관으로 내려가서 카메라를 가져오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고 다리가 많이 아팠습니다.
아내가 나를 많이 핀잔하며 갑사의 연등행사를
놓친 것을 못내 아쉬워했습니다.
하도 무겁고 귀찮아서 카메라를 방에 두고 온 것이
저의 실수 였습니다. 무거우면 얼마나 무겁다고...
불교신도가 아닌 우리는 초파일에 처음으로 사찰에서
화려한 연등과 불교 의식을 보는 행운을 얻은 것을
기뻐하면서 여관으로 내려왔습니다.
황금산장 206호실에 돌아오니 TV에서는
내일 전국적으로 비가 내린다는 불길한
기상 예보를 전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제발 3일만 더 참아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함 수곤 드림
5월 16일부터 18일까지 강원도 강릉과 속초 지방으로 가까운 친구들과 여행을 떠나게 되어 부득이 한밤의 사진 편지를 또 당분간 휴간합니다. 또 19일부터 20일까지는 충남 도고 온천과 안면도에 갑니다. 그래서 대단히 죄송하지만 한밤의 사진 편지는 5월 22일부터나 다시 보내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널리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Will You Go'
WILL YOU GO
Oh, the summer time is come,
And the trees are sweetly
blooming,
And the wild mountain thume
grows around the blooming
heather.
Will you go, lassie, go?
And we`ll all go together
To pull wild mountain thyme
All around the blooming heather,
Will you go lassie, go?
I Will build my love a tower
By you clear and crystal fountain,
And on it I will pile
All the flowers of the mountain,
Will you go, lassie, go?
And we`ll all go together
To pull wild mountain thyme
All around the blooming heather,
Will you go lassie, go?
If my true love, she won`t have
me,
I will surely find another
To pull wild mountain thyme
All around the blooming heather.
Will you go lassie, go?
And we`ll all go together
To pull wild mountain thyme
All around the blooming heather,
Will you go lassie, go? <이 음악은 박 용진 회장님이 보내주신 것입니다.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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