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달력을 보니 아내의 생일이었습니다. 이 개명 천지에 아직도 음력으로 생일을 쇠는 아내, 지난 해에도 제대로 생일을 챙겨주지 못했었고, 사실 올해도 그렇긴 마찬가지였습니다. 몇 년 전까지는 아내의 생일을 거의 국경일 수준으로 지켜주곤 했는데, 이제 아이들의 생일이 더욱 커지고, 제 생일은 챙기는 것 자체가 귀찮거나 혹은 일상 안에서 그냥 넘어가는 걸 당연히 생각하곤 합니다만, 아이들에겐 그래도 엄마는 생일을 음력으로 쇤다는 것, 그리고 음력 날짜는 이러이러하게 찾아야 한다는 것 등을 가르쳐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내의 생일이니 그냥 넘어갈 수는 없겠지요.일 끝나고 허겁지겁 코스트코에 가서 장미를 사고, 고기를 샀습니다. 원래는 그냥 아내 몰래 이런 것 저런 것 준비해서 깜짝 쇼 해주는 걸 즐겼는데, 이젠 그게 안 되네요. 하하. 또 그런 걸 이젠 남사스럽게 생각하는 아내 때문에도, 미리 뭘 할지를 알려주는 것이 더 매끄럽습니다. 결혼생활 16년이 지나고 나니, 뭐 굳이 특별히 관행처럼 뭘 하고 할 필요가... 있죠. 그래도. 하하. ^^;
아내의 생일을 빙자하여 꽤 오랫동안 안했던 짓을 해 보고 싶었습니다. 대대적인 단백질의 보충? 뭐 그런 거. 아직은 불질하기 이른 서북미의 겨울, 뒷마당에서 불을 피우고, 숯불내공을 발산해 보았습니다. 초이스 등급의 뉴욕스테이크를 코스트코에서 파운드에 $6.99 라는 나쁘지 않은 가격에 구입했습니다. 아스파라거스가 나오지 않을 때여서 그냥 가든 샐러드를 대신 선택했고... 치즈케이크를 먹고 싶었는데, 아내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자기 일하는 곳에서 케이크를 줬으니 굳이 안 사도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얼마전에 샀던 토카이가 자기 목숨을 잃을 적당한 시간이 온 것입니다.
오랫만에 불판을 닦고, 고기에 소금과 후추만으로 간을 하고, 불이 완전히 마음에 들 정도로 자리를 잡을 때까지 천천히 양파와 버섯을 구웠습니다. 그리고 잡은 와인은 페데스탈 2004 멀로. 이 와인이 특별한 이유를 세 가지로 압축하자면, 일단 매우 뛰어난 '워싱턴주' 와인이라는 것, 둘째는 프랑스 보르도 뽀므롤 지역의 유명한 와인메이커 겸 컨설턴트인 미셸 롤랑이 직접 관여한 와인이란 것, 그리고 데이먼이 이사가기 전, 제게 어느날 김치 줬다고 선물로 준 와인이었다는 것입니다.
몇년 간 제 '간이 셀라'인 붙박이 옷장 속에 붙어 있었던 이 와인은 전혀 변할 일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강하고 무거운 와인으로 자기의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커피와도 같은 태닌의 톤, 그리고 당연한 것 같은 중량감. 이것이 과연 워싱턴주의 멀로인가 싶을 정도로 꽉 짜여진 바디...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조카들은 스테이크를 맛있게 먹고, 저는 스테이크보다도 이 와인 자체에 취해 있었습니다. 아, 워싱턴주에서도 이런 맛이 나올 수 있구나 싶은.
하긴, 아마 이 와인도 미셸 롤랑이 보여주는 그 트렌드대로 만들어졌을 겁니다. 포도의 단위경작면적당 수확량을 최대한으로 줄여 농축시켰을 것이고, 어렸을 때부터 무자비한 가지치기로 될성 부른 떡잎만을 골라내고, 오크통도 최대한 좋은 프렌치 오크를 사용해 16개월 정도는 묵혀 두었을 것이 틀림없을. 엘리트 와인인거죠. 그런데 그 맛이 과연 워싱턴주의 맛인가? 라고 질문을 해 보면, 조금은 아니다 싶은. 오히려 무거운 캘리포니아의 카버네와도 가까운 맛의 이 와인이 가진 미덕은... 역시 미셸 롤랑의 손길을 탔다는 건데, 글쎄요. 저는 조금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게 과연 이 지역을 제대로 표현한 것인가? 한마디로 떼르와가 그대로 잘 반영된 것인가?
어쩌면 그건 그 당시의 '트렌드'가 반영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른바 '플라잉 와인메이커'들이 있습니다.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세계 곳곳에서 자기 스타일의 와인을 만드는 사람들. 사실 미셸 롤랑은 그들 중에서 가장 최우수급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고, 원래 이 단어가 쓰이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 랑그독 - 루시용 지역에서 일하는 적지 않은 와인메이커들이 일거리가 상대적으로 없는 겨울에 '살아남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기후가 정반대인 남반구의 호주, 남아공, 칠레, 아르헨티나, 뉴질랜드 등으로 날아가 와인메이킹을 한 데서 비롯됐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와인이 만들어졌을 당시엔 세계엔 집값의 거품이 천천히 붕괴를 앞두고 가장 커다란 거품의 벨르 에포크를 구가하고 있을 시기였습니다. 그러니 미국의 깡촌 워싱턴주에서 미셸 롤랑 같은 거성을 불러다가 이정도의 빚잔치는 치뤄도 될 만한 때였겠지요.
솔직히 와인 맛은 참 좋았습니다. 그걸로 아무 생각 안하면 그만이었던 건데, 괜히 이게 '워싱턴 와인'이라는 선입감을 입혔던 것이 잘못은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화장빨 잔뜩 받은 농염한 요부 같은 와인은 캘리포니아에 어울리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전혀 떨쳐 버릴 수 없었던 것은 그만큼 오랫동안 워싱턴 와인을 마셔 온 탓이었나 싶기도 합니다. 흑설탕의 향이 감돌며 무거운 태닌이 나름 자기 바디감을 자랑하는 풀 바디의 멀로. 매우 두껍지는 않은 태닌이 카버네는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해 주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칫하면 시라와 오해할 수 있는 무거움. 그리고 산도가 감돌고 나서 오래오래 머무는 피니시. 이건 워싱턴 와인의 진화라고 할까요.
어쨌든 아내의 생일을 빙자한 스테이크 파티는 아내의 직장에서 줬다는 케이크에 토카이를 맞추는 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산도와 당도의 극강의 밸런스. 역시 토카이 아스주의 꿀보다 더 달콤한 맛은 파티를 정리해주는 것은 물론 입맛까지도 싹 정리해 주는 듯 합니다. 아내는 고맙다고 말한 후 먼저 떨어져 버렸습니다. 아내가 토카이를 매우 조금 남긴 잔에 모르고 그냥 물을 따라 마셨는데, 물이 아직도 달콤합니다. 대단합니다. 하하. 그러나 아내의 생일이라는 핑계로 잡았던 한 워싱턴 와인이 제게 준 여운은 꽤 오래 갈 것 같았습니다.
아내는 다행히 아직까지는 꽃만 받아도 저렇게 기뻐하는군요. 물론 꽃 대신에 다른(?) 선물도 했습니다. 여기까지만.
시애틀에서...
|
출처: Seattle Story 원문보기 글쓴이: 권종상
첫댓글 이번엔 준 국경일 수준으로 마나님 생신을 축하해드렸군요.
딸기와 키위는 오바마 형님이 보내주신 건지???
가족 모두 행복한 하루였겠어요. ^^
네... 간신히 시간맞춰서... 하하.
초이스 등급이란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이번 구정에 한국의 미국수입고기 매장중 어떤 곳에서는
위의 페데스탈 Box(12병)로 받을 수 있을지요 받게된다면, 비용은 얼마나 들까요
1kg에 15,000원을 받네요. ^^*
권님
미국에서는 쇠고기의 등급을 매길 때 제일 좋은 프라임(마블링이 잘 된 고급 스테이크 하우스들은 이 등급의 쇠고기를 씁니다), 그 다음이 초이스 등급입니다. 보통 한인타운 갈비집 등에서 이 고기를 쓴다는 광고를 많이 하죠. 코스트코에서 제일 많이 팔리는 등급이기도 합니다. 그 아래 등급은 셀렉트, 그리고 그 아래는 스탠다드. 이런 식으로 나뉩니다. 스탠다드보다도 떨어지는 건 맥도널드 햄버거 집 같은 곳에서 쓰는 고기들이고... 페데스탈은 한병에 60불 가량에 세금 하면 70달러 잡고, 여기에 곱하기 열둘 하면 대략 850달러, 여기에다가 운송비 하면... 모르겠습니다. 한국돈으로 150만원 정도? 하지만 이 와인이
구하기 쉬운 게 아니라서. 한정판이라고도 할 수 있구요, 매년 그냥 이 안에서 소비가 됩니다. 생산량이 그다지 많지가 않아서 생기는 현상입니다. 더 자세한 건, 인터넷으로 wine.com 이란 곳에서 pedestal merlot 로 검색해보시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150...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해야하네요., 암튼 친절한 설명에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