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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골의사에 삶의 묻어나는 감동글
저는 우여곡절 끝에 의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잊을 수 없는 한 환자가 있죠.
40대 초반의 여자였는데 위암이었죠.
하지만 이게 전이가 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어요.
CT가 그때만 해도 3cm 단위로 잘라져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암이 작으면 잘 보이지 않죠. 일단 보고를 드려야 했죠.
아침에 주임과장에게 이런 환자가 있었고 전이가 확인이 안됩니다
하고 보고를 드렸더니 배를 먼저 열어보고 전이가 되어있으면 닫고,
안 되어 있으면 수술을 하라고 하더군요.
근데 환자 보호자에게 동의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이런걸 환자에게 이야기 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가족과 보호자를 이야기해봤더니 남편은 죽었고,
시댁식구들은 연락이 끊어졌대요.
그래서 아이들에게 이야기할 수 없어 본인에게 직접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하시는 말씀이 ‘고등학교 아들과 중학교 딸이 하나 있는데
내가 죽으면 아이들이 어떡합니까.
할 수 있는 일은 뭐든지 해야 합니다’ 하더라고요.
그래서 수술 날짜를 잡았죠.
헌데 배를 열고 보니까 저희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가슴부터 배까지 서리가 내린 것처럼 하얗게 되어있더군요.
작은 암세포로 전체가 퍼져있었어요. 너무 심각했던 거죠.
바로 닫고 수술실을 나왔습니다. 그런 경우 대개는 급속도로 나빠집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하고 다시 환자에게 가려고 하는데
저는 그 장면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창 밖으로는 눈발이 날리고 있었고 가습기에서 희뿌옇게 수증기가 나왔고
침대 옆에서 아이 둘이서 검정색 교복을 입고선 엄마 손 하나를
둘이서 잡고 서 있더군요.
처연하고도 아름다운 느낌 뭐 그런 거 있지 않습니까.
눈이 마주치자 환자가 저를 보시더니 고개를 끄덕끄덕해요.
환자는 알고 있었던 거죠.
수술을 했더라면 중환자실에 있었을 텐데 일반 병실이니까
암이 전이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거죠.
하지만 옆에는 지금 애들이 있으니까
지금은 얘기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던 것 같아요.
아니나 다를까 수술 후 급속도로 나빠져서
퇴원도 못하고 바로 돌아가셨죠.
사망을 앞두고 며칠 동안은 아이들이
학교를 안가고 병원을 왔는데 항상 그 자세였어요.
손을 잡고 아이와 함께 셋이서 서서 있었죠.
우리 외과 의사들은 보통 회진을 하면
아침 식사를 몰래 숨어서 하고 그랬거든요.
아침 먹었으면 아주 선배들에게 혼났어요.
신참 의사를 3신이라고 하거든요.
잠자는 덴 잠신, 먹는 데는 걸신, 일 못하는 데는 병신.
어쨌든 하는 것도 없다고 먹는 거 보이면 혼나고 그랬어요.
그래서 회진 돌고는 수업 들어가기 전에 컵라면 먹고 그랬죠.
그때 외과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인 모습이었죠.
그랬던 우리들 중 하나가 돌아가면서 그 병실에서
아이들을 데려와서 같이 라면을 먹고는 했었어요.
하지만 이건 사실 특별한 선의는 아니었어요.
특별한 선의였다면 제 시간에 제 돈으로
아이들에게 맛있는걸 사주었겠죠.
하지만 제약회사에서 가져온 라면을,
인턴이 만들어 놓은 라면을 같이 먹었었죠.
후륵 후르륵 먹으면서 아이들한테 이런 저런
대화를 했었을 거 아닙니까.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해요.
‘아이들에게 대학 2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나도 힘들었다’ 뭐 이런 얘기를 했었나 봅니다.
뭐 그런 거 있잖아요. ‘했었나 봅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건
제가 사실 기억을 못하고 있었던 것을
다른 사람에 의해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얘긴 잠시 후에 들려드릴게요.
결국 아이들의 엄마인 환자는 거의 임종이 다가왔습니다.
이때 의사가 할 일은 사망 실시간이 임박하면 사망확인하고
시간 기록하고 진단서 쓰는 게 다입니다.
간호사한테 정말로 연락이 왔어요.
돌아가시는걸 지켜보면서 저와 간호사는 서 있었죠.
두 세 차례 사인곡선을 그리다가 뚜뚜.. 하면서 심전도가 멈췄는데
아이들은 또 예의 그 모습으로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있었죠.
이후의 상황은 대충 머리 속에 그려지지 않습니까.
아이들은 울부짖고, 간호사들이 떼어내고,
영안실에서 와서 엘리베이터를 통해 지하로 데려가고..
저는 속으로 ‘이걸 어떻게 보지?’ 하고 있는데
아이들이 울지 않고 가만히 있어요.
그래서 아이들이 아직 모르나 보다. 그래서 한 잠시 일분 기다렸어요.
그러다 아이의 어깨를 눌렀더니 엄마 손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요.
봤더니 눈물이 줄줄 흐르는데 옷의 절반이 눈물로 젖어 있더라고요.
돌아가신 것을 아는 거였더라고요.
저는 순간적으로 움찔했습니다.
그리고 서 있는데 그제서야 엄마에게 다가서서
왼팔로 목을 잡고 오른팔로 어깨를 안아요.
그리고는 엄마 귀에 대고 뭐라고 말했냐면..
‘엄마 사랑해요.. !’ 하고 얘기하더라고요.
저는 지금까지 수 많은 죽음을 목격했지만,
떠나는 사람에게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
그 '사랑해요..'
라는 말 안에는 떠나는 엄마에 대한 송별사 일수도 있고
위로일 수도 있고, 남겨진 자의 각오일 수도 있죠.
저는 많은 죽음을 목격했습니다.
어떨 때는 제가 맡았던 환자가 하루에 5명이 돌아가신 적이 있었어요.
인간이 마지막 떠나는 순간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직위? 돈? 그가 누구든, 그가 무엇을 하는 사람이든,
그가 무엇을 가진 사람이든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손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마지막에 하는 단어가 바로 ‘손’이라는 겁니다.
자신의 옆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진짜 내 마지막 순간에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서 손을 잡아주는 것이죠. 하지만 실제로 어떻습니까.
내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이 내일이 될지,
다음 주가 될지, 10년 후가 될지 모르지만 반드시 올 것이 언제 올지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때로는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스스럼없이
상처 입히고, 더러는 외면하잖아요. 정말 무섭지 않습니까?
가장 위로 받을 수 있고 마지막에 위로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군가를 생각해보면 집에 있는 가족과 아이들이죠.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것보다도 금배지고,
좀 더 필요한 건 공천이고, 그보다 지금 빨리 필요한 것은 돈다발입니다.
어쨌든 이후 저는 안동 신세계 병원에서 의사 생활을 계속 했지요.
근데 십여 년이 지나서..
간호사가 하루는 신부님이 오셨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피 흘리는 신부님이 오셨나 보구나 했습니다.
제가 안동에서는 항문외과의로는 아주 유명해서 사실
경상도 지역 전체에서 거의 손꼽을 정도거든요.
신부님들이 보통 손님으로 위장해서 치료받으러 오시는데
그런 분이신가 하고문을 열고 나가니
손님의 얼굴에 아우라가 스쳐 지나갔습니다.
사람의 얼굴의 빛깔과 때깔은 다르잖아요?
때깔은 돼지처럼 먹고, 색조 화장품을 바르면 좋아 집니다.
하지만 빛깔은 습관, 태도, 사고, 삶의 방식들이 지금까지
내 얼굴에 반영되어 반죽으로 나온 겁니다.
그 사람의 아우라는 사실상 그 사람에게 나쁜 습관, 나쁜 태도,
나쁜 성향이 거의 없었다는 얘깁니다.
놀라서 제가 ‘누구십니까’ 했더니 대뜸 ‘저를 모르십니까’ 하더라고요.
그래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때 그 고등학생이 저랍니다’
하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가 혹시나 잘못한 게 있나 뜨끔 하더라고요. (웃음)
이래저래 이야기를 나눠보았더니
여동생은 교대를 가서 선생님이 되었다고
하더라고요.두 누이가 곱게 잘 자랐죠.
그러면서 신부님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선생님은 기억 못하시겠지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입장에서는 가혹하고 힘들겠지만 엄마 입장에서 생각하면
남겨진 아이들이 혹시나 잘못되면 어떡할까 하고
그런 생각으로 세상을 살아가라..’
저는 제가 그렇게 멋있는 말을 했는지도 몰랐어요.
그 말씀이 두 오누이가 살아가는데 버팀목이 된 가장 중요한
말이 되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 말을 듣는 순간 뒤통수에 벼락이 떨어진 느낌이었어요.
제가 멋있는 말을 했구나 하는 게 아니에요.
저는 무심코 한 말이었는데, 무심코 했던 작은 선의가
두 남매의 인생을 바꿨다는 생각을 했더니,
반대로 누군가를 절벽에서 밀었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우리는 각자 서로에게 일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 우리는 그 영향력의 크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직급은 위로만 올라가야 하고, 내가 많은 사람을 휘두를 수 있어야 하고,
그 힘은 점점 더 세져야 하죠.
하지만 영향력의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영향력은 반드시 선한 것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무심코 한 여배우의 기사를 보고, 무심코 그 기사에 댓글을 달았는데,
하필 그 여배우가 그 댓글을 볼 수 있잖아요.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렇게 보편적인 악의는 누군가를 절
벽으로 밀어낼 수가 있다는 겁니다.
영향력의 크기가 중요한 게 아니라 선한 것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제가 오늘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겁니다.
고객을 기쁘게 해야 하는 것이죠.
하지만 고객으로 하여금 진정성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웃음이
진심으로 자유에서 나와야 하고, 진실로 기뻐서 나와야 하고,
선한 영향력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에 두근거리십니까?
집에 놓고 온 아이의 얼굴을 생각하면 두근 두근하고
사랑하는 와이프, 남편의 이름만 불러도 가슴이 설레십니까?
이러한 모든 것은 내가 주인이 되는 삶에서만 나올 수 있습니다.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기쁨을 삶 속에서
계속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긴 시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출처;닥터, 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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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역경을 헤쳐온 위대한 여인...
- 앨리슨 래퍼 -
앨리슨 래퍼(Alison Lapper)는 1965년영국에서 팔다리가
기형인 질병(선천성 희귀 염색체 이상)을 안고 태어나, 생후
6주만에 친부모에게 버려져 보호시설에서 성장했다.
22세 때 결혼생활을 시작했으나,
남편의 폭력으로 9개월 만에 파경을 맞았다.
그러나 그녀는 장애와 고난을 극복하고 어릴 때부터 관심이
있었던 미술을 뒤늦게 시작해 해덜리 예술종합학교와 브라이튼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였고, 1994년에 First Class Honours
(최고우등학위)로 졸업하며 예술가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입과 발로 그림을 그리는 구족화가이자 사진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녀는
"팔이 없이 태어났다는 이유로 나를 기형이라고 여기는 사회
속에서 육체적 정상성과 미의 개념에 물음을 던진다" 라고 말하며,
자신의 신체적 결함을 작품에 적극적으로 담아내 장애인에 대한
편견에 도전해왔다
아들을 출산한 후에는 임신한 여성의 몸과 모성애를 주제로 작품을
펼쳐왔으며, 이 같은 작품 활동은 장애인과 여성들에게 희망을 준
공로로 인정돼, 독일에서 열린 '위민스 월드 어워즈
(Women's World Awards)'에서 '세계 여성성취상'을 수여했다...
비너스“팔 없어도 당당해요”
SBS TV 8뉴스가 ‘살아있는 비너스’라 불리는 구족화가
앨리슨 래퍼(40)의 출산장면을 방송해 눈길을 끌었다.
"완벽한 엄마가 되고 싶고, 혼자 다 해내고 싶지만
아직도 많은 도움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곤 해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999년 미혼모로 아이를
낳은 앨리슨 래퍼의 아들은 비장애아동으로 태어나
건강히 자라고 있다.
아이를 위해 해주고 싶은 것이 많았던 그녀는
입과 발 밖에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느꼈지만 삶을 비관하진 않았다.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는 전혀 창피하지 않아요.
그래서 나 자신을 꾸밀 필요도 없다고 생각 합니다"
앨리슨 래퍼의 용기와 뜨거운 모성애가 깊은 감동을
전해줬다.
1965년 짧은 다리와 양팔이 없는 해표지증(Phocomelia)을
안고 태어나 생후 6주 만에 버려진 뒤 보호시설에서 성장하면서
부터 겪었던 파란만장한 삶의 이야기 <앨리슨 래퍼 이야기>
(황금나침반. 2006)도 출간됐다.
17세 때 미술공부를 시작해 1994년 학사학위를 딴 앨리슨 래퍼는
22세에 결혼했으나 남편의 폭력과 학대에 시달리다 2년 만에 이혼했다.
암울한 유년기와 불운한 결혼생활을 겪었지만 불굴의 의지로 일어서
세계적인 구족화가가 된 그녀는 지난해 세계여성 성취상을 수상하고
대영제국 국민훈장까지 받았다.
책은 당당한 도전으로 삶에 맞서 온 앨리슨 래퍼의 용기 있는 삶을
고스란히 녹여냈다.
앨리슨 래퍼는 임신 9개월째인 지난해 가을 영국 현대미술가
마크 퀸에 의해 `임신한 앨리스 래퍼` 라는 5m짜리 조각 작품이
트래펄가 광장에 전시 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앨리슨 래퍼 방한 기록사진들 (2006.4.24)
앨리슨 래퍼(左)가 아들 패리스와 함께 24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게 우리 엄마 자서전이에요!"
꿈이 카메라맨? 앨리슨 래퍼의 귀여운 아들 패리스
"나는 강한 사람이다"
앨리슨 래퍼의 아들은 '취재진을 취재중'
앨리슨 래퍼의 건강한 장난꾸러기 아들 패리스
선물할 자신의 사진작품과 함께 한 앨리스 래퍼
자신의 사진작품 선물하는 앨리슨 래퍼
화사하게 차리고 나타난 '살아있는 비너스' 앨리슨 래퍼
'살아있는 밀로의 비너스' 앨리슨 래퍼 모자
패리스에 뽀뽀하는 앨리슨 래퍼
환한 표정으로 기자회견하는 앨리슨 래퍼
"나도 작가가 되고파"
"엄마 물 마셔"
손학규 경기지사에게 선물하는 앨리슨 래퍼
앨리슨 래퍼 에버랜드 방문
앨리슨 래퍼 에버랜드 방문
26일 경기도 고양시 홀트일산복지타운을 방문한 앨리슨 래퍼가
직업재활관 도예실에서 입에 붓을 물고 도자기에 그림을 그려넣
고 있다./우영식/지방/-지방기사 참조- 2006.4.26 (고양=연합뉴스)
자신의 작품을 보고 있는 앨리슨 래퍼
한국 구족화가 만난 앨리슨 래퍼
아들 한복 선물 받은 앨리슨 래퍼
'앨리슨 래퍼는
팔과 다리가 없는 장애인으로 태어났다.
"괴물' 이라 불리었던 그녀는
생후 6주만에 어머니에게서 버림받고
장애인 보호시설에서 자라면서
줄곧 세상의 편견과 배척을 이겨내야 했다.
그후 미술을 하고 싶다는 일념으로 브라이튼
미술대학을 졸업했고, 2000년 주위의 우려와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들 패리스를 건강하게
출산하여 구족화가. 사진작가. 여성, 엄마로서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녀는 말한다.
"장애인이지만 정신마저 불구일 수는 없었다.
나는 모든 것을 견디고 웃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항상 그래 왔다."
-『앨리슨 래퍼 이야기』책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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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인이 우리를 울린다.
한 여인이 우리 가슴에 희망을 듬뿍 심어준다.
살아 있음에 감사를...
한 여인이 진정한 삶의 의미를 일깨워 주면서
감동으로 닥아온다.
한 여인이 이렇게 위대하고 아름다울 수 있을까...
열린 입을 다물지 못한다.
우리나라 식으로 표현하면
'민들레 같은 여인' '질경이 같은 여인' 이다.
척박한 사토(沙土)에서 오아시스를 가꾸는 여인.
짓이겨 밟힐수록 향기를 뿜어 자신을 승화시키는 여인.
엄마 앨리슨 래퍼와 아들 팰리스.
그림같고 조각상같고 하늘나라에서 내려온 천사같다.
만약...
아들 패리스가 없었다면 앨리슨 래퍼의 현실을 어떻할까.
그녀의 성품과 근성으로 볼 때 역경을 극복한 감동과 희망의
여인은 틀림없을 것이나 엄마의 강인함. 모성애. 원숙한 여인은
분명 아니었으리라.
엄마의 부족한 부분을 보상하듯
아들 팰리스는 너무나 잘 생겼다.
함께 있는 모자의 모습이 그림이고 환상이다.
아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바라보는 앨리슨 래퍼에게는
패리스가 또한 꿈이요 가장 큰 희망이 왜 아니랴.
어느 책의 대목이 떠 오른다.
"神은 감내할 만큼의 고통을 준다."
"큰 고통을 주는 것은 크게 쓰이기 위해서다."
말이야 쉽고, 누구나 '그럴 것이야' 라고 고개를
끄덕이겠지만 당사자의 삶은 어떻했을까.
神만이 걸을 수 있는 길을....
의연하 살아 온 여인..
지구촌의 빛이고 희망이기에
난 그녀에게 기립 박수를 보낸다!!.
첫댓글 선한 영향력을 전달할 수 있도록 습관화하는 일은
우선 상대방의 장점을 볼 수있도록
상대방의 장점과 선행을 긍정적으로 표현하는 일이 아닐가요?
어머님의 영혼과 그 사랑이, 두남매를 신부님 이라는 성직자와 선생님 이라는 교직자를 탄생 시킨
참 감명스런 이야기 였습니다. 좋은글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