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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산하 사형제도폐지소위원회는 2011년 사순시기를 맞아 사형제도 폐지를 위한 영상물과 강론자료를 제작, 지난 7일 전국 교구와 1,600여 개 성당에 배포했다.
영상물은 웹하드(www.webhard.co.kr)에 ID: cbckmedia / PW: cbckmedia로 로그인 해 내리기전용-사폐동영상 폴더에 가면 내려받을 수 있다.
다음은 강론 자료 전문이다.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사순시기 강론 자료
‘죽음의 문화’를 ‘생명의 문화’로
1995년에 개봉된 미국 영화 <데드맨 워킹>이라는 영화를 보신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주인공인 헬렌 프리진 수녀님이 한 사형수의 편지를 받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데이트 중이던 연인을 강간하고 살해한 그 사형수는, 주범은 변호사를 써서 사형을 면했지만 자신은 돈이 없어 변호사를 쓰지 못해 사형선고를 받았다며 도와달라고 합니다.
헬렌 수녀님은 그의 범죄가 너무나 잔혹하고 반성도 하지 않는데다가, 비열하고 거친 언행을 일삼는 그를 보며 심하게 갈등합니다. 그러나 수녀님은 그가 사형만은 면하게 하려고 많은 노력을 합니다. 하지만 결국 사형이 확정되고, 사형수의 간곡한 부탁으로 사형집행일까지 남은 6일 동안 그의 영적 인도자가 되어 줍니다.
이 영화를 보신 분들은 사형수가, 사람들이 유리창을 통해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주사약을 맞고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장면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법의 이름으로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사형제도의 잔혹함을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게 해 준 영화입니다.
헬렌 프리진 수녀님은 이 일이 있은 후, 사형제도 폐지 운동과 살인 피해자 가족 지원에 적극 나섰고, 지금은 세계적인 사형폐지 운동가가 되었습니다. 매년 ‘희망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사형수의 가족들과 살인 피해자 가족들이 함께 떠나는 ‘화해와 용서의 여행’을 주관하고 있고, 지난 2005년과 2007년, 두 차례에 걸쳐 한국을 방문하여 많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여러분은 스물한 명이나 되는 고귀한 생명을 앗아간 희대의 연쇄살인마 유영철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유영철은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꼭 기억해야 하는 분이 계십니다. 유영철에게 어머니와 부인, 3대독자인 아들까지 3명의 가족을 하루아침에 잃은, 지금 전에 보신 영상에 나왔던 고정원 루치아노 형제님이십니다.
이 사건의 재판이 시작되었을 때, 고정원 형제님은 대법원에 유영철이 사형만은 면하게 해 달라는 탄원서를 제출하였습니다. 비록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지만, 그를 사형시킨다고 가족이 살아 돌아 올 수도 없고, 마음이 편해지는 것도 아니며, 어떠한 이유나 방법으로도 사람의 생명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어머니와 아내, 아들을 죽인 살인범의 생명도 소중하다고 탄원한 고정원 형제님의 결심 뒤에는 한국의 헬렌 프리진 수녀라고 불리는 조성애 요한마르코 수녀님이 계셨습니다. 역시 영상에 나오시는 조성애 수녀님은, 소설가 공지영씨가 쓴 소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 나오는 모니카 수녀님의 실제 모델이십니다. 고정원 형제님은 조성애 수녀님을 만나 위로받으며 예수님을 만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바로 법원에 탄원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고 합니다.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은, 이처럼 고정원 형제님의 엄청난 슬픔과 분노마저 용서와 화해로 변화시킨 것입니다.
영상에서 보신 것처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처음 사형이 집행된 1949년부터 마지막 사형집행이 있었던 1997년까지 50년 동안 총 920명이 사형 집행되었습니다. 이 숫자는 한국전쟁 중에 발생한 군사법원의 사형자 수는 빠진 것이라고 하니 실제 숫자는 이보다 훨씬 더 많겠지요.
그런데 이 920명 중 국가보안법, 반공법, 긴급조치 등의 죄명으로 사형이 집행된 수가 254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사형의 30%에 가까운 숫자가 소위 말하는 정치범들이었다는 것인데, 이는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이들 중 상당수가 수 십년이 지난 후에는 재심에 의해 무죄가 선고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권력자들이 자신의 정권을 비판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을 억울하게 고문하고 사건을 조작하여 사형시켰던 것입니다. 일일이 다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인혁당재건위 사건으로 세상을 떠난 8명의 사형수들과 독립운동가 조봉암 선생님을 생각하면, 사형제도가 얼마나 억울하고 참혹한 제도인가를 단적으로 보게 됩니다.
지난해 10월, 국회에서는 매우 의미 있는 일이 있었습니다. 6개 정당의 대표적인 의원들이 여야를 넘어, 한마음으로 18대 국회에서 사형을 폐지하자는 선언문을 발표한 것입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추기경님을 위시하여 주교단 전체와 사제, 수도자, 신자 10만 명이 서명한 사형폐지 입법청원서를 두 차례나 국회에 제출한 바 있습니다.
U.N.은 이미 오래 전에 전 세계 모든 국가의 사형폐지를 목표로 천명하였고, 현재 전 세계 130여 개의 국가가 사형을 제도적으로 폐지하였거나 10년 이상 집행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지난 1997년 이후 13년 간 사형이 집행되지 않아 사실상 사형 중단국으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2010년 2월 25일, 헌법재판소의 합헌 결정(헌법재판관 5대 4)으로 사형제도는 여전히 법적으로 존치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61명의 사형수가 있습니다.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범죄를 저지른 개인에게만 그 모든 책임을 돌려야 할까요?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사랑의 결핍, 온갖 차별과 비리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생길 만큼 세상의 법과 제도가 평등하지만은 않다면, 범죄의 원인과 결과를 우리가 함께 고심하고 책임을 나눠 져야 하지 않을까요? 이 기회에 사형제도만이 최선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사형제도는 국가가 법의 이름을 빌려 행하는 또 다른 살인이라는 것을 함께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어떤 분들은 사형제도가 폐지되면 강력범죄가 더 많아질 것을 우려합니다. 그러나 사형제도와 범죄 억제력은 서로 큰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미국에서 사형이 가장 많이 집행되는 주는 텍사스주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지난 30년간 미국 내에서 강력범죄가 가장 많이 발생했다는 것은 매우 역설적인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이 점은 유엔을 비롯하여 권위 있는 연구기관들에 의해 여러 차례 연구되어 왔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범죄를 막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 삶 곳곳에 스며든 ‘죽음과 폭력의 문화’를 ‘생명과 인권의 문화’로 바꾸어 가는 것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 생명은 언제나 최우선으로 존중받고 보호 받아야 하며, 그것은 국가제도와 우리가 함께 만들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존엄성과 그에 대한 존중은, 예수님께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하신 말씀을 실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느님의 조건 없는 사랑으로 창조된 모든 생명을, 내가 먼저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 결과는 결국 ‘나’의 생명도 그렇게 존중받고 사랑받는 것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점점 더 크게 자라나, 앞서 말씀드린 고정원 루치아노 형제님처럼 슬픔과 분노를 용서와 화해로 변화시키고, 우리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죽음의 문화’를 ‘생명의 문화’로 변화시켜 갈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사형제도가 완전히 폐지되고, 생명 존중의 문화가 가득 넘쳐나 이 세상에 평화를 꽃 피워갈 수 있도록 다함께 기도하고 실천해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