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본 이후에 닥쳐올 정신적 붕괴에 대해서 허접작가 본인은 전혀 책임지지 않습니다.
참으로 엄한 내용전개를 보이고 있으니 청렴결백하고 건전한 정신구조를 가지신 대부분의 창세기전 팬 여러분들은 이대로 목록키를 누르시던지 딴 게시판을 누르시던지 마음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이 만큼 경고를 드렸는 데도 무시하고 읽으신 후의 정신붕괴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습니다.
......항의멜 날아오면 씹을 겁니다. (-.-)
<아마도 언젠가는.....>
죽어가는 태양의 마지막 비명처럼, 새빨갛게 얼룩진 하늘을 보며 나의
주인은 나지막히 속삭였다.
그 매끈하고 새하얀 존재감과 어울리지 않는 거친 불모의 땅에 두 발
을 딛고, 그린 듯이 아름다운 선을 가진 두 손으로 모래를 움켜쥐고,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눈물을 떨구며, 조용히 속삭였다.
"....돌아왔어요....."
그렇게.... 도저히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을 만큼 안타깝고...
"이제야.... 이제야 왔어요. 오라버니....."
그리운 목소리로.....
"....살라딘....."
.
.
.
.
내 이름은 벨제부르. 암흑신 수장 혼돈의 데이모스조차 간과할 수 없는
힘과 권능의 소유자, 음모의 베라모드의 유일무이한 피조물.
저 오만방자한 주신들을 멸절시킬 데블족의 왕이자 그리마의 황제로
태어난 최강의 마족.
"........성공작이로군."
내가 눈을 떠... 나의 사지와, 나의 자아를 인식하기도 전...
내게 들렸던 것은...
"과연.... 하지만 이 녀석이 앙그라마이뉴가 필요로 하는 영자량을 감당
할 수 있을 지는 미지수야."
"애시당초 기대하지도 않았어."
차분하게 가라앉은.... 아름다우나 싸늘하게 굳어버린 목소리...
"뭐? 그럼 대체....!"
"유감이지만 내 실력으로는 부족해. 아마.... 데이모스라 해도 마찬가지
일테지."
".....굳이 생명공학쪽으로 손대기 싫어하는 자네가 웬일인가 했더니... 그
럼 왜 만든건가?"
"........."
"베라모드!"
그것이... 내 머리속에 각인된 첫번째 이름....
음모의 베라모드.
태어날때부터 마족최강이라 일컬어졌던 나조차도 그의 앞에 가면 제대
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극지의 눈보라라면 저 싸늘한 눈길에 비할 수 있을까?
".....그럭저럭 괜찮군."
"이봐.... 겨우 한다는 말이 그건가? 이제 이 녀석을 상대할 수 있는 것
은 주신들 중 최강의 전투력을 자랑한다는 샤크바리정도일세."
"일개 주신의 힘도 능가하지 못한다면 애써 만들 필요도 없었지."
"....쯧쯧, 조금쯤은 칭찬해줘도 좋으련만... 냉랭한 사람같으니..."
"쓸데없는 일에 감정소모하고 싶지 않아. 데리고 나가주겠나?"
"베라모드! 자네, 애 앞에서...!"
"귀먹지 않았으니 자꾸 소리치지 말게, 유스타시아."
언제나... 그랬다.
그의 입에서는 정교하게 세운 어떤 일에 대한 계획이나, 나의 전투력
평가에 대한 지극히 냉혹한 감상외에는 어떠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저 싸늘함은 가히 주신 디에네의 냉혹함과 맞먹는 것으로 두 사람이
같은 장소에 있게 된다면 빙룡 자비에르가 저절로 소환될 거라는 시덥
잖은 농담이 유행할 정도였다.
"......요즘 들어 점점 전투가 치열해지는 것 같습니다."
"아아, 또 뭔가 윗분들 기분이 아닌가보지. 프라이오스랑 데이모스는 알
아주는 앙숙이거든."
파멸의 유스타시아, 내 창조주가 등한시했던 나의 전투기술과 지적능력
을 보살펴주었던 분. 그리마로 인해 변형된 험악하고 살벌한 외모에 비
해 무척이나 상냥한 사람이었다. 아마도 그래서일까, 암흑군 내의 그에
대한 신망은 매우 두터웠다.
암흑신의 일원인 그보다.... 나를 더 어려워할 정도로....
"하지만 설마 전면전까지 가지는 않을 거다. 뭐니뭐니해도 동료들이니
까."
".....예?"
"어린애는 몰라도 돼."
그리고는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주었다.
.......아직도 그때의 내 기분을 이해할 수 없다...
아마....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 기묘한 아픔을...
허나, 유스타시아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어떻게 된 건가!"
그때의 기억은.... 그저 하늘이 너무나 붉었다는 것뿐...
그리고 언제나 눈처럼 하얗던 내 창조주의 머리카락이.... 사무치는 핏
빛이었다는 것뿐..
썩은 냄새를 풍기는 열풍이... 그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다혈질이나 침착함을 잃는 법이 없던 유스타시아의 음성에는 당혹감과
분노가 가득했다.
"언젠가는 이렇게 될거라고 예상하고 있지 않았나? 저 자존심 덩어리인
늙은이들이 서로 물고 뜯을 거라는 걸."
"하지만! 프라이오스는 몰라도 데이모스님은...!"
".......그렇게 생각하나?"
다리가 후들거렸다. 숨이 막힌다.
처음으로 본 내 창조주의 미소는.....
"설마.... 설마... 자네가....!?"
"내 이름이 괜히 음모의 베라모드인게 아니네..."
그 붉은 하늘아래... 너무도 아름답고....
너무도.... 차갑게....
"자.... 그럼 이제 데이모스를 설득하러 갈 차례인가?"
잔혹하게....
"준비하거라. 벨제부르."
회색의 눈동자가 나를 꿰뚫는다.
무기질의 냉소가 나를 비웃는다...
"신부를 맞이하러 가야지."
.
.
.
.
거대하고 장엄한 신전이 그 위용을 반쯤 어둠에 숨긴 채 우리를 맞이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보았다.
혼돈의 데이모스. 암흑신의 수장을...
과연 암흑신의 수장이란 빈 말이 아니었다.
베라모드의 눈빛이 극지의 냉기로 상대를 베고 찢어놓는다면, 데이모스
의 눈빛은 육중한 바위처럼 사람을 짓눌러왔다.
허나....
늙을리가 없는 신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외모에는 세월의 흔적이 너무
도 짙게 남아있었다. 깊이 패인 주름살, 느리고 무게있는 움직임....
태산의 숨소리처럼 낮고 고요하게 울리는 목소리...
"......오랜만이군. 베라모드."
"그렇군요. 데이모스님."
"자네가 먼저 날 찾아오다니.... 라그나로크를 일으킨 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게 있던가?"
"무슨 그런 말씀을.... 이 전쟁은 전 암흑신들의 의지에 따라 결정된 사
안입니다. 수장이신 분의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군요."
"............이것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이 땅에서 사라져갈지 자네는 상
상도 안가나!"
갑자기 터져나오는 노성에도 베라모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습니다. 인간들의 문명이 더욱 번영하기 전에
치루어야 할 성인식같은 거죠."
"쉽게도 말하는 군! 어서 용건이나 말하고 사라지게!"
노골적으로 몸을 돌려버리는 데이모스의 야멸찬 태도도 베라모드의 입
가에 띈 희미한 조소를 지울 수는 없었다.
"리리스가 완성되었다고 들었습니다."
"..........!!!"
"이것저것 둘러댈 것 없겠지요. 사돈 맺지 않으시겠습니까?"
"........뭐?"
"이미 그 눈으로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주신들의 걸작, 최강의 천사, 13
날개의 루시퍼를...."
"..........."
"아마도 벨제부르에 대한 대응으로 만들어낸 것 같습니다. 훗, 재미있는
일이지요. 정작 이 아이의 쓰임새는 따로 있는 데..."
그는 가볍게 내 어깨를 잡아 데이모스의 앞으로 내밀었다.
"이 아이의 힘으로도 궁극의 마신을 제어하는 것을 불가능합니다. 아마
당신이라 해도 그 마신을 제어할 수 있는 피조물을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능할 겁니다. 허나!"
그의 목소리에..... 얼어붙은 광기가 스며들었다.
"당신의 리리스와 나의 벨제부르가 결합한다면?"
침묵이... 그 공간을 잠식해들어갔다.
그때 내가 조금만 평상심을 유지하고 있었더라도 그의 말이 무슨 뜻인
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나는 암흑신들 중 가장 확고한 입지를 다지고 있는 두 사
람 사이에 끼인 꼴이 되어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마도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그야말로 최강의 마신, 온 마족들
이 바래마지 않는....."
"...........됐네. 자네 머리속에 뭐가 있는 지 알만 하군."
대뜸 베라모드의 말을 잘라버린 데이모스는 지긋이 나를 바라보았다.
비록 전장에 나가 무수한 주신군들을 살육한 나지만, 그때의 내 외모는
기껏해야 15살난 인간의 사내아이.
그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차마 그와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발끝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위로 부터 내려꽂히는 시선에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쯤....
툭-
커다란 손이 내 머리를 짚었다.
"아직 어리구나....."
언젠가 유스타시아가 내 머리를 건드렸을 때처럼 내 안의 무언가가 세
게 찔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힘껏 얻어맞은 것같은 이 아픔은..... 대체 뭘까....
"아뇨. 지금이라도 아이를 생산하는 데는 문제가 없습니다. 단지, 당신
의 리리스가 성장이 느린 것 뿐이죠."
"............"
"확답을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데이모스?"
두근...두근...
머리 위로 느껴지는 무게감을 느끼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귀를 기울
이고 있었다.
빙글빙글 돌던 머리속은 어느새 가라앉아 나는 지금 내 처지가 어떤
것인지 깨달았다.
.......보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다.
아이를 낳기 위해 결합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나는 알고 있었다.
나의 아내가 될 여자... 그 누구보다도 많은 생명을 창조했다는 데이모
스가 가장 공들여만든 피조물... 호기심이 일지 않는다면 살아있는 자가
아닐 것이다.
아니, 아니다. 단지.... 나는....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나의 창조주에게서....
이 싸늘한 존재감으로 부터, 언제든지 쓰고 버릴 수 있는 물건으로밖에
나를 보지 않는 무감정한 눈으로 부터....
내버려두었으면.... 쓰다듬어주지도, 안아주지도 않을 거라면 차라리 그
냥 내버려둬주기를 바랬다....
어차피 당신에게 내가 아무래도 상관없는 존재라면.......
정말로..... 궁극의 마신을 제어하기 위한, 최강의 마신을 얻어내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면....
그냥.... 내버려둬주기를.....
"........정말......많이... 변했군. 자네...."
"....새삼스러운 말씀이시군요."
".............좋네."
"타당한 선택이십니다."
나는 어쩐지... 데이모스가 뭔가를 내켜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내 창조주의 오만한 태도때문인가...
아니면......
"그럼 저희는 이만."
정말로 자기할말만 늘어놓고 가버리는 베라모드의 등 뒤로 데이모스의
탄식과도 같은 혼잣말이 들려왔다.
"......요즘따라 그립군..... 엠블라...."
"...........!"
그건 마치 데이모스가 이 순간만을 위해 갈고 닦은 회심의 일격같았다.
베라모드는... 한참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자네가 있었다면.... 프라이오스도 나도.... 이 지경까지 오진 않았을
텐데...."
"그만!!!"
....나는 그대로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
베라모드의 얼굴은.... 그야말로 악귀라는 말이 절로 떠오를 정도로 일
그러져있었다. 그 냉정하고 단아하던 얼굴 어디에서 저런 표정이 나올
수 있는 걸까...
"그녀를 그곳에 버리고 온 건 당신이야!"
"..............."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고 내게 실행키를 누르게 한 데미안이나! 이 모
든 걸 계획한 당신이나! 이젠 꼴도 보기 싫어!"
"..............."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뻔뻔스러운 얼굴로 번듯하게 수장자리나 꿰차서
앉아있으면 단 줄 아나! 그렇게도 내가 미쳐가는 꼴이 보고 싶던가!"
"..............."
그는.... 데이모스는.... 그저 베라모드를 바라볼 뿐이었다.
움푹하게 들어간, 빛바랜 눈동자에서 측은함을 읽는 것은... 나의 착각
일 뿐인가....
숨을 몰아쉴 정도로 폭언을 퍼부어대던 베라모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마지막으로 싸늘하게 일침을 놓았다.
"쓸데없는 푸념이나 늘어놓을 시간에 내 며느리나 잘 간수하시지요. 데
이모스! 어차피 이건 당신이 선택한 겁니다!
그것이... 내가 처음으로 목격한 그의 분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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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어째 표정이 좋질 않구나. 벨제부르."
".......죄송합니다."
창백한 얼굴, 무엇을 바라보는 지 알 수 없는 남빛 눈동자..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육체를 타고난 마족의 여왕이다."
그는 마치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내 귓가에 속삭였다.
".....네 여자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좀 더 다정한 눈으로 봐주지 않겠느냐?"
알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내게 할 말이 아니다."
알고 있으니까.... 제발.....
"둘 다 첫인상이 별로로군요."
달의 디아블로. 파멸의 유스타시아와 더불어, 아무렇지도 않게 베라모
드와 마주 앉을 수 있는 사람.
칠흑같은 어둠을 두르고 나타나는 환영의 공포. 그 어둠 속에 떠오르는
달처럼 선명한 아름다움. 두 얼굴의 여신.
섬세한 선을 가진 아름다운 오른쪽 얼굴에 비해, 그리마의 변형현상으
로 인해 왼쪽 얼굴은 흉칙한 백골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길고 화려한 손톱장식을 한 손을 뻗어 리리스의 얼굴을 들어올
렸다.
그저 흉칙한 것이 아닌, 최고의 아름다움과 결합된 흉칙함.
디아블로의 소름끼치는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도 리리스의 얼굴
에는 어떠한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하지만 나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요. 이 아가씨...."
"그대가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지. 디아블로."
"딴엔 그렇지만."
살며시 리리스의 턱을 놓아주고 뒤로 물러서던 디아블로는 문득 생각
났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어째서 였을까? 아무리 암흑신의 후임으로 모든 마족들의 경외의
대상이 되는 나라지만 엄연히 그들의 반열보다는 밑이다.
무슨 생각으로.... 내가 그녀의 눈빛을 맞받아쳤을 까...
"데이모스는?"
"밖에 계십니다."
"잠시, 이 쑥맥들을 부탁하겠네."
드물게도 쿡쿡거리며 웃는 베라모드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굴욕감에 사로잡혔다.
왜지?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처음부터... 태어났을 때부터.... 계속되는 이 알 수 없는 아픔... 통증...
어차피 이렇게 되도록 정해진 것이다.
리리스를 만나, 그녀에게 내 아이를 낳게 하기 위해 나는 태어난 것이
다. 만들어진 것이다.
원래부터 이렇게 정해졌있었다.
뭘 더 어떻게 하란 말인가!
왜 아픈가! 왜 비참한가!
왜 굴욕적인가! 왜 싫은가!
왜.....슬픈가......?
".....닮았군."
지독한 상념의 도가니속에서 나를 끄집어내준 건, 뜻밖에도 디아블로의
목소리였다.
"착각인지도 모르겠지만."
"......누굴...말씀하시는 건지.....?"
"그냥 혼잣말이야."
그녀는 더없이 아름다운 얼굴과 더없이 공포스러운 얼굴로 웃어보이고
는 내게서 그 끈질긴 시선을 돌렸다.
텅빈 공백의 시간....
더이상 바라볼 것이 없어진 내 시선은...자연히 리리스에게로 돌아갔다.
'닮았군.'
디아블로의 목소리가 머리속에서 맴돈다....
그것은 분명 나를 가리킨 말이었다. 그러나 지금 내 안에서는...
그 울림이 내가 아닌 리리스를 가리키고 있었다.
뭘까.... 이 느낌이....
이 창백함, 금방이라도 허공으로 사라져버릴 듯한 공허한 기운...
깎아만든 듯한 섬세한 얼굴선과, 말을 할 줄 모르는 듯 다문 입술과,
투명하게.... 빛나는... 속을 알 수 없는 눈동자....
나는... 나도 모르게 천천히 그녀에게 걸어가고 있었다.
"크흠...."
디아블로의 헛기침소리가 나를 현실로 불러왔지만 그녀에게서 시선을
뗄 수는 없었다. 분명... 그녀는 닮았다. 대체 누구를?
조금만.... 조금만 더..... 곧 생각날 듯도 한데.....
"......늦는군."
흘려 듣기에도 어색한 말을 중얼거리며 디아블로가 홀을 나가버리자...
결국.....이 공간에는 그녀와 나만이 남게 되었다.
"...리리스...."
조용히... 그녀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움찔, 그녀의 공허한 눈에 초점이 잡히며 그 시선이 나를 향한다.
마치 지금에서야 나를 처음보는 것같은 시선...
이상하다.... 어째서 이렇게 불안한 걸까...
나는... 그녀를 사랑하지도 않는 데.... 그녀가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금방이라도 사라져버릴 것 같은, 희미한 그림자같은 존재감에...
내 마음이 왜 이렇게 불안한 걸까....
사라져.... 버릴 것만 같다....
지금이라도....
지금이라도....
잡지 않는다면....!
"...........!!"
내가... 내 정신이 들었을 땐, 어느새 그녀에게 입을 맞추고 있었다.
사라져버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두 팔을 움켜쥐고서.....
그 뒤 얼마 후, 나는 정식으로 모든 암흑신과 마족들의 축복을 받으며,
환호하는 군중들 앞에서 나의 신부에게 맹약의 키스를 했다.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지 않는 텅빈 눈동자를 애써 외면하며....
"뭐?"
"새로운 대륙이 발견되었어. 이거.... 새로 하나 이름을 지어야 겠는 걸."
"....그게.... 그게 무슨 말이지?"
베라모드, 그가 그렇게 동요하는 모습이라니... 놀라웠다. 그것은 유스타
시아나 디아블로들도 마찬가지였는 지, 놀라다 못해 당혹해하는 눈이었
다.
"새로운 대륙이라니!"
"아, 그, 그게 그러니까.... 안타리아 대륙 바로 옆에 있는 불모의 땅일
세. 맞붙어있는 두개의 대륙인데.... 그나마 크기가 작은 쪽은 좀 나은데
... 나머지는 대륙의 반이 거친 사막이야. 아마 주신쪽에서도 별 관심
이..."
"잠시 다녀오겠네."
"잠깐만요! 아직 정확한 탐사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나중에
우리와 함께 가는 게....."
"됐어. 그냥 가보려는 것 뿐이야."
"이, 이봐! 아무튼 제멋대로로군! 벨제부르! 따라가거라!"
"예?"
"어서!"
"아, 예...."
나답지 않게 허둥대며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유스타시아의 쓰디쓴 목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저것만은... 변하지 않은 건가...."
"둘의 유일한 공통점인 것 같군요."
"제멋대로라는 거 말이지?"
"예."
........둘?
하나는 베라모드.... 또 하나는....
누구지?
내가 따라오는 것을 아는 지 모르는 지 베라모드는 한번도 내게 눈길
을 주지 않았다.
그는 꼭 누가 쫓아오는 것처럼... 아니, 누군가가 끌어당기는 것처럼 서
두르고 있었다.
너무나 필사적으로.... 아니, 이런 표현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언제나 그를 둘러싸고 있던 싸늘한 안개가 걷혀버린 듯 했다.
꼭... 인간처럼, 그는 숨을 몰아쉬고, 안타까운 눈을 하고, 손을 어디에다
둘 지 모르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그대로 사라져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같은 공간, 같은 시간대에 존재
한다는 것이 어색하리만치 희미하던 모습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여기에 있다.
여기 내 옆에 있다.
내가 아닌 다른 것을 바라보고 있지만....
그는 존재한다.
지금 여기에, 이곳에.... 존재한다.
......우웅...
거대한 비공정이 낮게 울며 처음 보는 대륙 위를 가로질렀다.
밑으로 보이는 대지는... 유스타시아의 말대로 그야말로 불모의 땅이었
다. 끝도 한도 없이 펼쳐지는 모래의 땅.
......여기서 생명체가 적응할 수 있을 까....
"........맙소사...."
귀를 의심했다.
"....신이시여....."
과연.... 이게 그의 목소리가 맞는 건가...?
.
.
.
.
이미 출발자체가 늦은 시각이었다.
그와 내가 비공정에서 내려, 그 삭막한 대지에 발을 딛였을 때는 이미
서쪽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전란의 불꽃으로 인한 핏빛과는 또다른 붉음...
생사가 오가는 유혈의 장이 아닌, 태양의 진혼을 위한 장엄한 연주.
나는 잠시... 감상에 빠져 줄곧 내 창조주에게 향해있던 시선을 잠시 돌
렸다.
장관이다.
사막인 만큼 지평선은 끝도 없이 펼쳐져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드넓은 대지는... 하늘 위에 가득한 황혼의 빛깔로 시뻘
겋게 물들어있었다.
문득, 잊고 있던 그가 생각났다. 그는 대체 무엇을 보려고 이 낯선 땅
으로 온 걸까?
나의 시선을 의식하지도 못한 채...
베라모드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비공정의 그늘 아래 숨어있던 그의 몸이 앞으로 나가면서, 그 새하얀
얼굴과,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몽땅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
순간적으로 나는 그의 옷자락을 움켜잡을 뻔했다.
언제나 차갑고 하얀 안개에 싸여있던 그는....
그렇게.... 그대로 붉게 물들어... 그 척박한 대지에 동화된 듯 서있었다.
음모의 베라모드....
싸늘하고 교활하고 무자비한 암흑신...
그런 그가.... 이제 겨우 발견된 이 불모의 땅에 뿌리라도 박을 듯이 움
직이지 않았다.
나의 창조주....
리리스와는 달리... 나는 단 한번도 그를 '아버지'라 부른 적이 없다.
그렇게 여긴 적도 없다.
아니... 내가 먼저 그를 부른 적조차 없다....
뭐라고.... 뭐라고 그를 불러야 할텐데....
저대로... 저대로 이 붉은 사막속에 사라지게 내버려둬선 안되는 데...
방금전까지만 해도... 당신은 내 곁에 분명히 존재했는 데....!
".....돌아....이제야 돌아왔어요....."
제발... 안돼....
"이제야..... 이제야 왔어요.... 오라버니...."
사라지지 말아주십시오....
"......살라딘....."
언제나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던 건...
언제나 나를 아프게 만들었던 건...
"베라모드님!"
.........나를 창조해놓고도.... 나를 허용하지 않는 당신....
그의 고개가 천천히 돌려지며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 그만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단신으로 수백의 주신군을 상대하면서도.... 나는 그렇게 떨어본 적이
없었다. 정말로... 내 일생동안 가장 용기있는 일을 한게 뭐였냐고 누군
가가 묻는다면 그때 그 순간.... 그의 이름을 부른 것이라고 대답할 정
도로...
그때의 나는 필사적이었다.
"이제.... 해가 집니다....."
꿀꺽...
힘겹게 침을 삼키며, 나는 나에게로 다가오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가 나를 창조하고서 얼마나 세월이 흐른걸까.
언제나 나를 내려다보던 그는 어느새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한번도... 한번도 그와 이렇게 가까이 마주한 적이 없었기에....
이미 그렇게도 두렵던 그보다 훨씬 커버린 나를 알지 못했다.
바로 내 코앞까지 그가 다가왔다.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귓전을 점령한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이때까지 내가 본 그 어떤 여인보다도 아름다운 그는....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이렇게 곧게.... 그의 눈을 직시한 적이 없다....
언제나... 내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단 한번도.... 그의 눈에 담아지는 내 모습을 바라본 적이 없다.
그의 눈이 나를 비춘다.
그 회색눈동자 안의 나는.... 생전 처음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가.... 이런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나?
이렇게나 한심한 표정으로? 이렇게나 절실하게.... 매달리는 얼굴로?
".......!!"
그 회색 눈동자 안의 내 모습이 부풀어 올랐다.
내 뺨 위에 얹어지는 하얀 손의 감촉....
그리고....
입술 위에 느껴지는.... 벼락과도 같은 전율...
말 그대로.... 머리가 정지해버렸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항상 전투를 대기하던, 한손을 검자루위에 얹은 그 자세 그대로.... 나는
완전히 얼어붙었다.
......그는 한번도 나를 만진 적이 없다.
그저 나와 부딪혔을 뿐... 단 한번도....나를 만진 적이 없다.
그에게.... 나는 물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이제와서.....!?
입술의 감촉이 멀어지고, 그의 눈동자가 멀어지고.... 그의 눈안의 내가
멀어진다.
그가 멀어진다.
".....돌아가자."
다시 한번 그때가 돌아온다면 나는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입을 맞춘 대상은..... 내가 아니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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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발견된 대륙에는 '투르'와 '한'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베라모드, 나의 창조주가 주장한 것으로, 어차피 이름하나 붙이는 데
별 감흥이 없었던 신들은 기꺼이 찬성했다.
어째서 음모의 베라모드가 이런 시시한 일에 저토록 열을 올리는 가에
는 다들 의아해했지만...
사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의 창조주는 절대로 필요없는 일에 신경쓸 사람이 아니었다.
앞만 바라본다는 것과는 다르다. 모든 것을 보고 있지만, 모든 방향을
주시하지만... 그 중 필요가 없는 것은 과감하게 잘라낸다.
하지만....
그때 그 황혼녘의 사막.....
그 곳에서 붉게 물들던 그의 모습은....
분명 그때부터였다.
냉혹하리만치 이성적인 그가 잘라내지 못하는 것 중에....
내가... 포함된 것은....
"......전쟁이 오래가는 구나."
"예. 아마도 둘 중 하나가 심각한 타격을 입기 전까지는 계속...."
"그렇겠지..."
.....대화의 상황이 완전히 달라져버렸다.
이제 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본다. 그의 눈과 마주치기 위해 끊임없이
그의 눈길을 따라간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들지 않는다.
어린 시절, 뭐가 뭔지 모른 채 머뭇거리는 나를 내몰던 차갑고 싸늘한
눈빛을 이제는 볼 수가 없다.
그 회색눈동자 안의 내 모습도 볼 수가 없다.
그는... 아예 나를 바라보지 않는다.
"그래, 요즘 리리스는 어떠냐?"
".....여전합니다."
거짓말이다.
그녀는 변했다.
"그래? 하긴.... 어차피 그 아이는 일종의 상징에 불과하니, 별 일이 있
을리 없지."
살짝... 아주 살짝... 언제나 그를 바라보고 있는 내가 아니면 눈치챌 수
없는 경미한 아픔이,
그를 할퀴고 지나갔다.
"그러는 너는 어떠냐?"
드디어... 그가 날 바라보았다.
비록 금새 다시 시선을 돌려버렸지만...
"변방쪽에서는 그 루시퍼란 녀석이 마족들을 싹쓸이하고 있다던데... 그
와 마주친 적이 있느냐?"
".......아직 없습니다."
아쉽게도....
"다행이구나. 그렇다면 당분간은 자중하거라."
........무슨....?
"......하오나...."
"난 널 전장에서 썩히려고 만든 게 아니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그를 알고 있다.
얼음조각을 내뱉는 듯이 단호하게 끊는 말투를 쓸 때의 그를 알고 있
다.
그것은 그 어떤 반론도, 이론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경고인 동시에 선언
이다.
".....제가 그보다 약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애초부터 살육병기로 만들어진 녀석과 일부러 붙을 건 없다는 뜻이
다."
"......이길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나에게서 어긋나던 그의 눈빛 속에 확연한 불쾌감이 엿보였
다. 마침내, 그 냉혹한 회색의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쓸데없는 고집! 네 녀석이 이기든 지든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와 네가 붙으면 누가 최후의 승리자가 되든, 둘 다 막대한 타격을 입
을 것이고, 설혹 잘못해서 어느 한쪽이 죽기라도 한다면 전쟁은 일방적
으로 끝이 난다. 그걸 막으려는 것이야. 어디서 어리석은 호승심으로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게냐."
어차피.... 저 차디찬 말들 속에서 뭔가를 기대하는 건 오래전에 포기했
다. 단지 내가 바라는 건.........
태어나서 처음.... 그때부터.... 지금까지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건....
"성체가 된지 오래인 주제에 어리광부리지 마라. 그렇게 피가 보고 싶
다면 적의 주력이 오지 않는 변방으로나 나가보든지."
어린 시절... 내가 당신을 똑바로 바라볼 수나 있었습니까....
".......나가봐라."
내가.... 내가 당신의 옷자락 하나라도 붙들 수 있는 존재였습니까...
"예."
이렇게 돌아서는 것 밖에.... 언제나 이렇게 고개 숙이고 뒷걸음치는 것
외에 당신이 내게 허락한 게 뭐가 있습니까!
뚜벅뚜벅뚜벅...
지나치게 힘이 들어간 발걸음소리가 회랑 안에서 메아리친다.
어쩔 수 없이 감정이 격해졌다는 걸.... 깨닫고 만다.
아픈 기억이....
유스타시아와, 데이모스의 손길을 느꼈을 때 이 가슴이 느꼈던 아픔
이...
이번에는 머리속을 헤집고 다닌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본 적이 있다....
13날개의 루시퍼...
아직 어렸던 내가... 아직 어렸던 그를 본 적이 있다.
라그나로크의 피바람이 몰아치기 훨씬 전, 대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중
립지대에 모든 신이 모였을 때, 내 창조주를 따라 그곳에 갔던 나는,
곳곳에 보이는 날개달린 자들을 동경의 눈으로 바라보았었다.
한없이 솟아오를 수 있을 것만 같던 강하고 하얀 날개...
비록 그때의 나는.... 그 날개를 잡아뜯는 것이 내 손이 되리라는 것을
알지 못했지만...
그 날개의 하얀 광택을, 그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보고 있는
것은 내가 처음으로 자각한 즐거움이었다.
그리고 또한 보았다.
푸른 빛이 도는 단정한 검은 머리, 언제나 미소를 잃지 않는 입매의 준
수한 청년과 함께 있던... 하얀 소년을...
무엇이 두려웠던 걸까... 나는 그 광경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도 몸을
숨길 수 밖에 없었다.
그 단아한 청년이 주신의 일원이라는 것은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주신들 특유의 청백 오오라... 암흑신들의 그리마만큼은 아니지만 그 미
미한 기운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소년은...
눈을 의심했다. 그는 나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날개를 가
지고 있었다. 햇살이 흩뿌려지며, 날개의 백색이 뿌옇게 빛났다. 순간
후광으로 착각할 만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소년의 얼굴은 모르는 사람이라 해도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무표정했지만 그를 바라보는 청년신의 눈길은 너무나도 부드럽고... 상
냥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것을 보는 눈빛이 어떤 것인지... 나는 거기
서 깨닫고 말았다.
아팠다... 그때도 이렇게 아팠다.
무엇이 그리 아팠을 까...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도저히 깨달을 수 없
다... 나는 뭘 그렇게 아파한 걸까....
.
.
.
.
.
"벨제부르?"
아름다운 남빛 눈이 당혹감과 놀라움을 동시에 띄고 나를 쳐다보았다.
"어, 어쩐 일로?"
"그냥...."
그녀의 하얀 얼굴위로 수만가지 표정이 스쳤다가 사라진다.
"요즘 들어 자주 오네요..."
"갈데가 없는 가보지."
당황해서 손님대접을 할 엄두도 못내고 있는 그녀를 가볍게 무시하며
나는 아무렇게나 자리를 잡고 앉았다.
허둥대며 다과를 준비하는 그녀를 보며 나는 또 한번 확신했다.
그녀는 변했다.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만든 걸까?
세상 만사에 무관심하던, 그러면서도 눈앞에서 죽어가는 생명을 모른척
하지 못하는 바보같은 그녀를... 저 창백하고 무표정한 공주님을...
어떻게 저런 보통 여자애로 만들어버린 걸까...
미묘한 표정의 변화가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눈 속을 파고든다.
어설프게 미소짓고, 일부러 화제를 돌리고, 내 시선을 피하고...
다양하기 짝이 없는 표정을 보면서 나는 묘한 즐거움을 느꼈다.
"재미있어...."
"예?"
작은 새처럼 화들짝 놀라는 그녀를 보며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예애....."
"혹시 말이야...."
그리고 그런 그녀를 보며 나 역시 쓸데없는 말이 많아진다.
"누군가를.... 닮았다는 말 들어본 적 없어?"
어?
갑자기 그녀의 창백한 두 볼에 옅은 홍조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리고 입가에 떠오르는 미미한 웃음...
비록 한낮의 안개처럼 금새 사라졌지만... 나는 무척이나 놀랐다.
.......낯설다.
"......날 닮은 사람이 있어요?"
"아니... 본 건 아니지만.... 그냥 당신을 보면 언제나 낯이 익다는 생각
이 들곤했는 데...."
이상하다... 언제나 그녀를 보면 그런 느낌이 들었는 데...
갑자기 이 순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슨 착각을 이렇게 오랫동안 한거지?
처음 그녀를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정말 긴 착각이었군.
......그녀는... 그냥 그녀일 뿐이야.
하지만.... 지금의 그녀도 마음에 든다.
저렇게 많은 표정을 가진.... 그저 평범한 인간들과 다를 게 없는 얼굴
을 한 그녀도.....
아주...... 마음에 든다.
나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든다.
무엇이 그녀를 바꾸어놨는 지 알 수는 없지만....
내가... 지켜줬으면...한다...
저 표정을...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정식으로 결정될 거야."
"....응? 뭐가요?"
딴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가... 나는 약간 짜증을 내며 말했다.
"우리 둘 말이다."
"............"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그녀 자신도 감출 수 없었던 화사함을
덮어버린 것은...
두려움이었다.
공포였다.
.........나에 대한, 혹은 나와의 결합에 대한.
"....그만 가보겠어."
"아, 예....."
이곳에 왔을 때처럼, 나를 위해 일어서는 것도 잊어버린 그녀는...
순식간에 시체처럼 질려버린 얼굴로, 계속해서 한가지만을 생각하며...
보이지 않는 것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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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만년설을 뚫고 올라오는 마그마같은 모습이다. 그는 두 눈 가득 격정을
담고 자신의 힘을 조심성없게 휘둘렀다.
퍽! 퍼벅!
쨍그랑!
쿵.....!
......요란한 타악합주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그의 분노를 기다렸다.
"망할 주신놈들! ......이런 식으로 뒷통수를 치다니!!"
마족의 살육자, 최초로 세라프의 칭호를 받은 13날개의 루시퍼.
그가 리리스를 납치했다.
내 창조주는 무시무시한 분노를 발산하며,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달
아오른 머리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진실을 알 것 같았다.
....그 녀석이었어?
그랬구나. 리리스...
그가... 너를 바꿨던 거구나....
처음부터.... 내가 지켜줄 수 있는 게 아니었구나.
"......이제와서.... 이제와서..... 이런 식으로 방해를 받다니!"
언제나 흐릿하던 네 존재를....
항상 둘러쳐져있던 투명한 장벽을....
나는 어쩌지 못했던 그것들을...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뚫고 들어와 너를 만졌던 거구나...
"베라모드. 진정하게. 흥분해서 될 일이 아니야.......그나저나 주신들의
움직임도 심상치않네."
".......뭐?"
"아무래도 바람난 자식은 우리쪽에만 있는 게 아닌 모양이야."
"......무슨 소리인가 그게....?"
"루시퍼의 행동이.... 주신들의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니란 뜻이네."
".....그럼 그 애송이가 공명심에 미쳐 제멋대로 저지른 일이란 말인가?"
"..........."
유스타시아는... 한참동안 망설이는 듯 했다.
베라모드의 소리없는 재촉을 받으며 그는 딱 한마디를 내뱉었다.
"....사랑이야."
대체 언제, 어디서 만났던 걸까...
아니, 그런 건 이제와서 중요한 게 아니지.
"................."
뜻밖이었던 것은 내 창조주의 반응이었다.
코웃음이라도 치며 비웃을 줄 알았던 그는...
마치 어딘가가 고장난 인형처럼 터덜터덜 걸어가, 자신의 몸을 내던지
듯 의자에 걸터앉았다.
"......대체 언제....?"
"그건... 아무도 모르지..."
떨리는 손으로 이마를 짚고서, 한참을... 정말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몸 속 깊은 곳에서 끌어올리는 듯한, 절망과 회한이 되섞인 목소리로...
내게.... 명령했다.
"벨제부르.... 쫓아가라."
......어차피 이런 결과가 오리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지만.
"가서..... 리리스를 데려오거라."
역시.... 싫어지는 것을 어쩔 수 없다.
그의 명령이 의미하는 것은.....
그를, 그녀의 그를.... 죽여야 한다는 것....
".....네 것을 되찾아라..."
내 것?
그따위 건.... 처음부터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맨 몸뚱이로 이 세상에 던져졌다.
아무것도 주어져있지 않았고, 아무것도 받을 수 없었다.
허울좋은 칭호들만 잔뜩 받아든 채... 무엇을 해야 하는 지도 알지 못한
채...
그저 벗어나기만을 바라면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아픔에 시달려가며...
계속해서 흰 날개를 피로 더렵혀가며...
계속해서.... 당신을 바라만 보며.....
"......알겠습니다."
"자, 잠깐만! 기다리게! 나도 같이 가겠어!"
"......암흑신의 중요일원이 자네가 직접 나서서야 체면이 서질 않아. 일
만 크게 만들 뿐이네. 주신쪽도 군사들만 보내 추격할 뿐, 직접 나서지
는 않고 있질 않나?"
"하지만! 이 녀석 혼자서는 벅차네! 이 녀석과 루시퍼놈의 힘에 비하면
미미하기 짝이 없긴 하지만 리리스는 엄연한 데이모스의 딸이야! 그녀
가 루시퍼를 돕기라도 하면...."
"괜찮습니다. 유스타시아님."
............어리석다. 나는.....
"그녀는 절 공격하지 못할 겁니다. 기껏해야 루시퍼의 뒤에 숨어있는
것이 다겠죠."
".......그래도...."
"자네가 나서봐야 일만 크게 만들거라니까."
.....결국 생각해낸 거라고는 이게 다다...
이것뿐이다....
내가 생각해도... 참으로 치졸하고... 유치하기 짝이 없다.
부정할 생각은 없다. 이제 내 한계인가 보지....
"다녀오겠습니다......베라모드님."
최대한 자연스럽게....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불러본다.
".....가 봐라."
마지막으로 그가.... 나를 돌아봐주었으면 하는 소망은...
눈치채지 못하게 그의 옆얼굴을 응시하는 것으로 접어두었다.
뒤돌아서려는 순간,
"벨제부르."
......헛된 희망이.... 다시금 불쑥 고개를 쳐든다.
".....할 수 있다면..... 고통없이 보내주거라."
........!!!
"여의치않다면 하는 수 없지만..... 반드시 숨통만은 끊어놔야 한다."
아프군.....
그것도 굉장히 기분 나쁘게 아프다.....
"...알겠습니다."
.
.
.
.
.
.
그동안 멀리까지도 갔군.
첩첩이 겹쳐진 산봉우리, 군대의 행진을 막는 깊고 푸른 강물에.....
통행이 금지된 소환수들의 영역까지...
험한 지형만 골라다녔군.
......정말 도망갈 수 있을 거라 믿는 건가?
"거기까지다. 루시퍼...."
그의 눈동자가 나를 돌아다본다.
세라프의 위풍당당한 모습은 간곳이 없다.
분명 눈이 부실 정도로 새하얬을 13장의 날개는 더럽혀지고 피에 젖은
채 축 늘어져있었다. 비단 날개뿐만이 아니다. 전체적으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허나 그를 더럽히고 있는 저 피의 주인은 분명 그가 아
닌 그의 앞을 가로막던 마족들의 것이겠지. 그는 숨을 몰아쉬며 검을
들어올렸다.
".....벨제부르...."
꽉 다문 잇새에서 새어나오는 내 이름... 마치 나를 갈아죽일 듯한 증오
와 원망을 들으며 나는 정말 어이없게도 웃음이 나왔다.
이봐, 이봐.... 나에게 그래봤자 별 소용없어.
.......그런데.... 갑자기 뭐지?
내 마음 어딘가에서... 나도 모르고 있던 내가 고개를 들어 미소를 짓는
다.
한번쯤은..... 어떨까?
그래, 뭐, 상관없잖아? 마지막이야. 마지막으로 한번만....
그러고보니 내 성격도 참 유별나군.
나는 애써 담담하게, 저도 모르게 떠오르는 미소를 지우며, 최대한 여
상스럽게 물었다.
"내 신부는 괜찮은가?"
그의 눈에서 불꽃이 튄다.
.....그래, 너도 변했구나. 티 한점 없이 밝고 새하얀 날개의... 아름답지만
무표정한 소년은 없구나...
이미..... 창백하고 무표정한 내 공주님이 없듯이....
"벨제부르!"
이때까지 루시퍼의 날개뒤에 숨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던 그녀가 앞
으로 나섰다.
"리리스!"
"벨제부르! 제발 부탁이에요! 우릴 이대로 보내줘요!"
.....갑자기 저 자식이 마음에 들기 시작한다.
내 '전' 약혼녀는.... 정말 더러워진 구석하나 없이...
방금 데이모스의 신전에서 나온 것처럼 깨끗하고, 아름다웠다.
.......그가 보호한 것이다.
마족 수백명을 혼자서 상대하면서도 숨하나 흐트러지지 않는다는 세라
프가, 저토록 지치고 더러워지면서도... 그녀하나만은 온전하게....
확실히 생각보다 괜찮은 놈이다.
"이상한 말을 하는 군. 리리스. 당신은 그저 이 싸움이 끝날때까지 조용
히 숨어있으면 돼. 힘겨운 인질생활은 이제 곧 끝날 거야."
".....예?"
"무지막지한 납치범에게 끌려다닌다고 얼굴이 말이 아니군. 곧 당신의
'아버지'께 돌려보내줄께."
"베, 벨제부르...!!"
"베라모드님이 정말 화나셨다구. 당신의 며느리가 무례한 주신군의 애
송이에게 끌려다닌다고 생각하시니 혈압이 오르는 모양이야."
"어째서! 그게 아니란 걸 당신도 알잖아요! 루시퍼와 난....!"
"거기까지야, 리리스. 이 더이상 말하면.... 되돌릴 수 없어."
루시퍼 녀석의 안색이 변한다.
"당신은 절대 처벌받지 않을 거야. 당신에 대한 데이모스님의 애정은
둘째치고, 내 창조주는 포기할 줄 모르는 사람이거든."
약올리는 건 이쯤 하면 됐겠지?
"자신의 손주를."
전혀 뜻밖인 내 반응에 그녀가 당황하자, 루시퍼는 다시금 그녀를 자신
의 뒤로 보냈다.
".......역겨운 놈."
"뭐라고 말해도 좋아. 네 놈은 지쳤고, 나는 이것이 첫번째 전투다."
"............"
"그러고보니 자네와 난 그동안 한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지. 마족내의
자자한 자네의 악명이, 과연 진짜인지 확인해볼까?"
나는 내 창조주에게서 배운 냉혹한 조소를 띄우며 나의 검을 뽑아들었
다. 수만의 천사가 이 칼 아래 찢겨져 나갔다. 수억의 생명이 사그라들
었다.
내가 걸어온 길은 언제나 핏속에 잠겨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거부한다.
"오너라. 세라프. 나, 마족의 왕 벨제부르가 오늘 여기서 네 놈의 숨통
을 끊어주겠다."
창!
허억... 허억...
하.... 하악....
지금 들리는 것이.... 나의 숨소리인가..
찡--- 그그그그극---
내 검이 이렇게 둔탁하고 거친 소리를 낸 적도 있던가..
크극! 파바바바바밧!
무엇때문인가..
이 의미없는 싸움을 3일밤낮으로 계속 끌고 있는 이유가.....
아직도 흐트러짐 하나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저 강한 눈때문인가.
아니면....
차자장! 파카카카아아아!!
- 고통없이 보내줘라.
나도 모를 또 하나의 나 때문인가...
"...강하군."
"쿨럭.......동감이다."
그는 이미 내게 4장의 날개를 빼앗겼다.
더이상 고귀한 세라프의 상징이 아니라, 피에 젖은 더러운 깃털의 집합
체에 불과한 그것들은 쓰레기처럼 더러운 땅 위를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에 비해 내가 입은 타격은...
약간의 피로, 호흡의 불안정, 그리고....
계속되는 아픔...
"과연... 멀쩡한 상태에서 맞붙었다면 장담못하겠군. 허나!"
".............."
"지금의 너는 내 상대가 아니다."
- 어리석은 호승심으로.....
- ......나가봐라.
"이것으로.... 결정이 날 것이다."
곧게 찔러들어가는 암흑의 검과 마지막 일격을 준비하는 루시퍼의 검
은 눈동자, 그의 눈에 비친 검은 나, 나의 눈의 비친 창백한 그녀, 그녀
로 인해 떠올리는....
또 하나의 백색...
"루시퍼!!!"
그녀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들린다.
그리고,
정확하게
- 언제나 하얗게
그의 검이
- 조용하게
나의 복부를 뚫고
- 먼 곳을 바라보며
등으로 빠져나온다.
- 닿을 수 없는 것을 꿈꾸며
차갑게.... 나의 피를 식히며...
- 나를 바라봐주지 않는....
다시 빠져나가는 하얀 검광...
- 내가.....
"........벨제.....부르...."
- 언제나 바래마지 않았던....
천천히 몸이 기울며 쓰러져간다.
분명 땅위로 내동댕이쳐졌을 텐데... 아무런 아픔이 없다.
한번도 놓은 적 없는 나의 검이... 내 손안에서 빠져나간다.
귀가 울린다.
하늘과 땅이 뒤집힌다.
이런.... 느낌이었나.
나의 육체는 일말의 반항조차 없이 나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다.
손가락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피는...
내가 죽인 그 수많은 천사들과, 인간들과...
아무것도 다르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최후의 끝, 끝의 끝, 황혼의 마지막까지...
- 결코 놓을 수 없었던 것...
나도 모를 내가 끝내 포기하지 못했던 것...
언제나 아팠던 이유...
내가 아무리 강해져도, 아무리 오래 살아도 알 수 없을...
꾸준하게... 단 한번도 그 리듬을 바꿔본 적 없는...
나의 심장의 아픔...
- 눈물 흘리는 태양과...
머리 속이 비워져간다.
- 그 눈물에 물들어가는 하얀 옷자락...
고통은 어느 순간부터 사라지고,
둔중한 감각이 온 몸을 지배한다.
그 과정을 하나하나 밟아가며...
내가 죽인 자들이 밟았을 그 과정을 되짚으며...
그렇게...
나도....
죽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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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 크리스탈 신전.
냉기가 지배하는 차가운 얼음의 신전.
수만년에 걸친 음모의 둥지.
대리석 기둥처럼 반듯하고 정교하게 깎인 얼음의 기둥.
그들의 '마스터'를 기다리기 위해 준비된,
아주 오래된 무대.
이제서야 막을 내릴 때가 된...
아주 오랜 기다림.
퍼벙---!!
바지직, 바지직...
저 멀리서, 메아리의 여운처럼 폭발음이 들려온다.
남자는 한번 고개를 들었다.
커다란 헬멧에 가려져 얼굴의 윗부분이 보이지 않아, 그의 눈이 어떤
감정을 담고 있는 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잉-
괜시리 다시 한번 광선검을 꺼내 가볍게 휘둘러본다.
이제 곧...
이제 곧...
그가 온다.
음모... 수만년의 음모에 휘말려, 자신의 운명에 휘말려, 모든 것을 잃은
한 청년이 이리로 올 것이다.
한번도 마주하지 못한, 이제야 겨우 만나볼...
'마스터'
흥분하는 것인가?
남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광선검을 집어넣었다.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기다리기만 하면....
그 오랜 세월을 기다려왔는 데...
단 몇분의 시간을 참지 못할리 없다.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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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기억은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을 데리려왔다.
시즈.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 자신을, 태고적부터 정해진 운명의 고리를 순환
시키기 위한 프로젝트의 실행자로 선택한 자는 바로 그 음모의 베라모
드였다.
머뭇거리는 듯 떠오르는 단편적 기억속의 그를 되새기며,
그 하얀 옷자락과 머리카락과 선이 고운 옆얼굴의 아름다움만을 기억
해버리고 만 소년은 대뜸 이 차가운 신전에 머물기를 결심했다.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자신의 부하이자 충실한 프로젝트 진행자
인 시즈들에 의한 것이라는 걸 알만한 나이가 됐을 때는...
그의 차가운 얼굴과,
절대로 내밀어지지 않았던 하얀 손과,
한번도 자신을 쳐다본 적 없는 회색눈동자를 기억해냈다.
그리고.... 그는 떠나지 못하게 됐다.
기억이 떠오르면 떠오를 수록, 그의 육체가 강해지고,
인간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못할 강함이 그의 손에 주어질 수록 그때의
아픔도 되살아났다.
그래서, 마스터의 고향이라는 팬드래건에 가끔 들리며,
그의 모든 것을 파멸시킬 어리석은 동생의 제단에 올라갈 희생양을 만
나고 돌아오며...
전 세계 각지에 퍼져있는 시즈들의 보고를 받으며,
여전히 하얗고 아름다운, 그러나 너무도 다른
그의 창조주를 훔쳐보며...
그는 문득 생각에 빠지곤 했다.
......이 아픔을......
떨쳐낼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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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풍당당한 흰색의 거체, 육중한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무리
없는 움직임.
팬드래건 왕가의 상징. 백색의 아론다이트.
아니, 이제는 암흑에 물든 검은 아론다이트(아론다이트 슈발츠)
'.......히든카드는 마지막에 쓰시겠다? 여유만만한 모습이군.'
그리고.....
아직 각성하지 못한 또 하나의 동료.
'..................'
마지막으로.....
'....마스터....'
얼음이 내뿜는 미약한 빛 하나에도 아름다운 물결을 만들어내는 찬연
한 금발... 주신들의 피를 이은 정통 에스프리 혈통의 상징.
유난히 수척해진 수려한 얼굴, 습관적으로 적의 급소를 꿰뚫는 두 자루
의 검.
아이러니하다.
암흑신 베라모드의 창조자. 그의 모든 음모의 정점.
뫼비우스의 우주를 이어갈, 가장 크고 중요한 고리.
파괴신 앙그라마이뉴의 실질적 창조자인 그가...
하필이면 정통 에스프리 왕가의 왕자라니...
"수십번의 환생을 거쳐.... 이제야 만나는군."
얼어붙은 허공을 가로지르는 청명한 음성...
아론다이트의 해치가 열리며 '그'의 상반신이 눈에 들어왔다.
루시퍼.
....취미도 희한하군. 아론다이트를 자유자재로 조종한다면 이제 볼 장
다 본 거지. 굳이 계속 가면을 쓰고 있을 건 뭔가?
여전히..... 그의 눈빛은 곧다.
사랑받고 사랑한 자의 눈.
영겁의 환생을 거치면서도.... 그 삭아 없어져버릴 기억에 눌리지 않은...
강하고 당당한 눈이다.
이제.... 이 길고 질긴 인연의 끈을 매듭지을 때가 왔다.
어차피....
그때의 아픔도... 그때의 실망도... 그때의 절망도...
언젠가는 다시 되풀이 되겠지만...
숙명의 라이벌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이 유치하기 짝이 없는 이름
으로 불리는 우리 둘의 관계는....
항상 이곳에서 매듭지어질 수 밖에 없다.
그의 죽음, 그리고 나의 죽음의 바로 앞에서....
"너희들은 인간의 힘을 너무 얕보았다."
나지막히... 울려퍼진다.
의기양양 외치는 것도 아니고, 미약한 불안이 섞인 것도 아닌, 그저 담
담히 사실을 말하는 것 같은 그의 음성을 들었다.
그 텅빈 눈동자와...
조각같은 무표정함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끼며...
나는 검을 든다.
그러나 채 그 익숙함의 근원을 알기도 전에...
나는 다시금 죽음을 맞이한다.
언젠가 나는 다시 이 순간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최대한...
진화의 운명이 허락하는 한 오차율을 줄이며,
계속되는 아픔을 끌어안으며,
인간으로서의 나를 지우며,
내 공주님을 차지한 그의 손에 죽어갈 것이다.
이 우주를 진화시키기 위해...
언젠가 빈정대며 말했듯이 모두가 꿈꾸는, 정말 언젠가는 다가오리라
꿈꾸는 장미빛 미래를 위해...
언젠가... 이 아픔이 사라질 날을 위해,
이해할 수 없는 통증에 고뇌할 나를 잊기 위해..
나는 영원에 가까운 세월동안,
계속 아파하고,
계속 죽어갈 것이다.
그리고...... 뫼비우스의 고리가..... 끊어질 그날까지...
나의..... 마지막에는....
언제나....
황......혼의 핏.....빛...
그....... 처절........한 아름..........다움에 물......든...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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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9차 아수라 프로젝트 완료. 오차율 5.98%......
루스 더 벨제부르.
.................................아버지.....
닐리리~ 이게 나 뭐하는 짓일까나...
드디어 내가 게시판의 분위기를 흐리다못해 구정물로 만들려고 작정을 했구나~~~~~` --;;(맛이 갔네, 맛이 갔어.)
........원래 이거 말고 참~ 정신건강유지에 좋은 스트레스해소용 글을 쓰고 있었는 데, 어느날 갑자기 떠오르는 허접 아이디어.
...결국 일주일만에 완성했군요.
이따위 걸 가지고 일주일을 끌다니 난 제 정신이 아니당.
로날드님! 올렸어요!
그러니까 보지 마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