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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나라는 타자☆]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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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타자]
이태관 시집 / 현대시세계시인선 064 / bookin(2015.03.15) / 값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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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타자
이태관
나는 고뇌하는 수도승
바람 많은 언덕에 탑을 세우고
세상이 들려주는 이야기 듣기 위해
문패는 하늘에 걸어두었지
온 몸이 십자가인 가지 위
나뭇잎 등잔 하나 매달고
또로록 개암나무 열매 굴리면 하루가 가지
바다를 향한 파란 신호등 너머
장례식장의 불빛은 밝기도 하지
썰물 때에 맞춰
하루 두 번
집을 지어야 하는 무명의 생도 있지
옛집은 아득히 멀고
그곳엔
미처 도시로 떠나지 못한 등 굽은
소나무 하나
주문처럼 서 있지
바람은 불어왔다 가지
나는 수도승
숭숭 구멍 뚫린 생도
한여름엔 시원키도 하지
젖은 옷가지 널어 말리는
줄탁의 시간
부리 하나로 하늘에 칼금을 긋는
구름 목탁
이태관
목탁구름이 몰려왔다
낡은 장삼을 걸친 산들이
묵언黙言에 들었다
하늘 쪽으로 재 몸을 끌어올린 나목들이
바람 죽비를 맞고 있었다
불에 들러도 사리를 수습치 말라는
부러진 가지의 유언을
새들이 받아 적고 있었다
밤새 목탁 구름이
처마의 창문을 두드렸다
깨달음이라는 건
먼지 더께로 내려앉은 마음의 문짝 하나
떼어버리는 것인가
아침 창을 여니
가지마다 출렁이는 얼음 염주
부음을 접한 새들이 먼 하늘로 치솟고 있다
천불천탑
- 거미
이태관
그의 하루는 침묵으로 시작된다
노을을 짜깁기해
사람의 마을과 숲을 가로지르는
덫 하나를 완성하는 생존의 방식
이슬 맺히는 자리는
욕망의 흔적이다
눈물은
상처의 중심에서 자라난다
쌓아놓은 사다리의 수가
천 개,
떨어진 죽음은 오늘로 구백구십구
마지막 기단을 새우고 탑돌이를 할 것이다
숲을 살찌우는,
동그랗게 말린 죽음들
상수리 둥치에 새살이 돋는다
천년송
이태관
아홉 겹 금줄 두른
와운리 마을 수호신은
천년송이다
나무는 온 몸 가득
푸른 먹물을 쟁여놓은
한 자루의 붓
그 붓으로 일필휘지
자식들의 소원을 하늘로 써 올린다
면벽 끝에서야 눈 떠지는 인간의 견성은
천 개의 둥근 나이테 속에서
얼마나 무의미한가
천 년 동안 허공에
푸른 방점을 찍고 있는
나도 전동타자기를 가져본 적이 있다
이태관
얼굴 한 번 내 비친 적 없던 큰 아빠가
토끼 인형을 선물했다
중학생이 된 아이는 지금도
그 인형을 안고 잔다
애플을 지나 삼성
휴렛팩커드를 두드리다가
내게도 전동타자기가 있었다는 생각
누르면 딩딩딩
열차 소리를 내던
열두 시 이십 분 대전발 부산행 완행열차는
가락국수처럼 구부러진 길을
숨 가쁘게 달렸다
밤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때의 속도는 수정이 가능했지
너와의 사랑도
손가락의 속도로 흘렀다
어디로 갔나 세월의 얼룩 속에서
순간이 되어버린 기억들
재생이 아득한
손가락만이 기억하고 있는 것들
내게도 전동 타자기가 있었다
지금은 사라진,
추억만 남은
월식
이태관
낯선 구름이 흘러갔다
달의 얼굴이 가려졌다 바람이
불어왔는지
어둠이 가셨다
잠들지 못한 새인 양
달의 몸속으로
헬리콥터가 지나갔다
달이 심하게 요동을 쳤던가
잠 깬 오동나무가 제 몸을
눈물처럼 떨궜다
잠들지 목한 새의 울음소리가
달의 몸을 쥐어뜯고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이태관
목욕을 하고 거실에 나서면
그녀가 말했다
― 난 다 봤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내가 말했다
― 한 번 더 그러면 머리털을 잘라버릴 거야
결국, 그녀는 머리털을 잘렸다
며칠이 지난 루, 스님이 탁발을 오셨다
쌀을 가지러 부엌으로 들어서는 순간,
그녀가 스님에게 말했다
― 너도 보았니?
앵무새처럼 말해야 할 때가 있다
다 들켜버린 알몸으로
서 있어야 할 때가 있다
살아서 말할 수 없는 비밀들로
세상은 앵무새의 몸짓을 닮아간다
나무의 디비식
이태관
물소리 와글와글 끓어오르는 밤이었다
비는 내리고, 어디선가
배고픈 고양이 울음소리도 들려왔을 것이다
어느 생도 시간의 매를 감내할 수없는 것인지
재개발을 위해 옛 마을이 허물어져 가는 밤
가로등도 떠날 이들의 마음을 아는지 잠들지 못하고
끝내, 그 밤을 견디기 어려웠던지 건넛말 달수네
한밤에 떠나나 보다
마을을 휘돌아 나가는 차의 불빛이 당산나무를 감싸 돌며
바람벽에 제 유언 하나 새겨 놓는다
미처 수습치 못한 말들이 사라진다
길 잃은 고양이 울음소리도 들려왔을 것이다
심열을 앓듯 선잠에서 깨어난 아침,
마을 앞 당산나무가 제일 먼저 몸을 허물었다
잘렸던 시야가 텅 비었다
공空을 이룬 하늘, 눈에 시리다
상사화
이태관
구름이 손가락이 한 켠을 가리켰다
활짝 핀 여섯 손가락들이
바람을 돌리고 있었다
꽃 진 자린 몇 날이 흘러도 끝내
이파리 솟지 않았다
진종일 창밖만 바라보던 사내
두 눈이
텅 비었다
풍장
이태관
민달팽이 오채부지로
화장실 바닥에 제 몸을 널어 말리고 있다
한나절 사이의 일이었다
아침에 일별하고 낮 사이 안녕
화장실은 그에게 얼마나 넓은 사막이었나
낙타는 죽으면 모래바람이 몸을 덮어준다는데
아마존의 후니우 부족은
시신을 나무 위에 걸어 풍장 시킨 뒤
그 뼈를 갈아 지인들과 나눠 먹는다는데
볕 잘 드는 마당 한 모퉁이에
달팽이를 풍장했다
그날 밤, 꿈결처럼
세상의 포근한 공허 속으로
민달팽이가 기어가는 것을 보았다
길을 나서다
이태관
습관이란 그런 것이네 밤마다
술 취한 몸을 집으로 이끄는 힘으로
아침이면 집 앞 거미줄은
머리 위에 펼쳐져 있지
자물쇠가 보이지 않아
거리를 헤매었네
자물쇠 없으니
열쇠가 무슨 소용이람
얼마를 떠돌아야
현관은 늘 잠겨 있지 않다는 사실을
나는 깨닫게 될까
습관이란 그런 것이네
걷어내도 허공에 집을 짓는 거미,
벙그는 꽃잎위의 나비
110번 버스는 터미널을 향하네
투덕이는 버스에 몸을 싣고
한 번도
제 손으로 자물쇠 열어보지 못한 사내
길을 나서네
해는 서산을 향하고
시간은 일곱 시를 지나고 있네
김장
이태관
가을이 깊어지면
햇발 담던 빈 항아리
땅으로 갈 채비를 하지
살얼음 낀 땅 속으로 하루의 노동이 깃들고
어둠, 그 깊은 울림 속으로
한해의 삶들이 몸을 누이지
가끔은 햇살이 들여다보겠지
집나간 자식처럼 바람도 깃들 거야
온 몸으로 기지개 펴며
하얗게 삭아가는
고향은 그렇게
땅의 온기 속에서 익어가지
흙으로 가는 길은 이렇게
조금씩 제 몸을 내어주는 일
새콤하게 때로는
곰삭게
겨울비
이태관
그 밤은 발이 시렸어요
꼭 다문 사각의 창문 틈 사이로
붙박인 별들이 보였지요
손끝에서 피어난 담배연기가 구름을 만들고
천천히 그것은 별을 향해
흘러갔지요
시간이 지나간 발자국마다
피어나던 꽃
아버지, 어디서 그리 드셨어요
흰 빨래는 마르지 않았는데
어둠이 먼저 밀려와요
누군가의 발자국이 한 생을 지워버려요
불 꺼진 네모난 입들이 밤새
추위에 떨던 날
기어이 비는 내리고
사각의 기억 속 아버지,
흙 속에 갇히셨네요
앞산이 허리를 비워 물안개를 피워 올리는 사이
나무는 제 몸을 소리통으로 만들어버렸어요
진종일 바다는
속살을 보여주지 않았어요
산책
이태관
고대의 비밀을 찾아 나서는 길이다
신들만이 알고 있다는 지혜
나무의 기도와
바람의 노래
돌에 새겨진 묘비명
나무 위 다람쥐들로
숲은 넓어져 가고
올해도 자식들이 내려오지 않는
잡초 무성한 무덤이 둘
물푸레 나뭇가지에 싹이 올랐군
햇살이 느슨해지자 매미의 울음이 달아오른다
살며시 내미는 아내의 손을 잡고
비밀의 암호를 찾아나선 길
푸른 하늘 아래 드넓게 펼쳐지는
상형문자들
어제처럼 오늘도
좀처럼 해독되지 않는
산의 책
할미꽃
이태관
바닥만 바라보며 상아야 하는
생이 있다
인사를 하렴 저렇게
먼저 고개 숙이시잖니
바다가 비좁은 새우는 한 생을
허리 굽히고 살지
아이야,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 고갯길을
유모차 밀고 가는
사연을 아니?
무릎이 꺾였다면
다섯 목숨은 하늘만 바라봤겠지
밤술이라도 넘겼다는 건 허리가 굽었기 때문
오일장 돌듯 온 몸으로 바퀴를 굴리는
구부러진 생
하늘이 높아진다는 건
바닥이 가까워졌다는 것
비 내리면
그 비를
흰 등뼈 우산이 받치고 간다
오남매 기른 젖가슴 사이로 빗물이 샌다
쫄래쫄래
유모차가
그 뒤를 따르고 있다
연緣
이태관
발자국을 보았어요
삼억 년 전에 새겨졌다는 흙의 비문이
빗속에 떨고 있었죠
푸른 이끼는 어디서 왔나요
잇몸이 들뜬 어머닌 병원을 찾지 않으셨구요
아버진 이 빗속에 어디를 가셨나요
어릴 적 외할아버지의 흰 고무신이
떠올랐어요
발가락들이 헤엄치며 놀았죠
자맥질하다 보면 숨이 막혀오던 그 깊이,
어머니의 가지런한 치아 사이로
푸른 햇살이 튕겨 올랐지요
산에는 산짐승의 길이 있구요
하구언엔 철새가 오지 않아요
어디로 가셨을까요 아버진
발길이 숲을 향하고 있나요
현관을 뒹구는 신발들 사이로
낡아 뒤축이 굽어진 에나멜 구두
불끈, 아이들이 자라나요
희미해 가는 내 발자국 위로
고운 분홍치마 갈아입으신 어머니
창밖을 서성이고 계셨어요
대추나무 성자
이태관
하루하루를 몸에 새기는 나무가 있다
경전을 몸에 두르고
더 이상 두꺼워질 수 없는 안경을 걸치고
삶을 필사하는 노인
축복은 관솔불로 빛나지
종으로 흔들리던 개암나무 열매가
크리스마스 캐럴처럼 떨어져 내리고
울려 퍼지던 노랫소리 마침내 침묵할 때,
단 한 번의 눈길에 싹을 틔우는
나무 성자
모든 나무의 잎들이 태어날 때까지
단 하나의 잎도 내지 않겠다는
비장한 서원을 세운
하루하루 사람을 닮아가는 나무가 있다
주름 속에선 구름이 피어오르고
행간엔 안개가 넘실거린다
세월 속으로 침잠하여
온몸이 경전이 되어버린
달빛 청소부
이태관
두려워요
나비가 날아오르지 못하는 곳
다시 내려가야만 하는
우물의 바닥엔 무엇이 있나요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생겼죠
폭풍우에도 꺼지지 않는 거대한 입술에선
‘가난을 비관한 일가족 자살’이라는
신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무심한 바람이 지나고
그들의 머리 위에 있다는 것은 착각에 지나지 않죠
이 수직도 알고 보면 평평한 수평
결국엔 바닥에 닿아야 하죠
두려워요 평등이라는 말
줄을 타고 올라도 달에 다다를 순 없죠
거할 곳 없이
허공에 희망이라는 집 한 채 올려놓고
별의 하얀 이가 푸르게 빛나도록 창을 닦는 슬픈
달빛 청소부
나무 물고기 1
이태관
나무는 제 몸을 비워 슬며시
어항 하나를 들여놓았다
비좁긴 해도 아늑하잖아
다섯 마리 물고기가 사는 방
바람과 구름 닮은 물고기들이 어느덧
가슴에 옹이를 자라는 사이
막내 물고기가 말했다
― 엄니! 큰물에서 놀고 싶다니까요
침묵이 필요할 때란 더 이상
그들의 그늘이 되어주지 못한다는 것
바다로 떠나간 물고기들
앓던 이가 빠지면
입 속에서 바람의 길이 들어선다
나이테를 새긴다는 건
맵찬 바람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는 일
석정리 오씨 할머니 불에 들던 날
석정石井 떠나 바다에 든 물고기
지류를 더듬어 오르지 않았다
차일 걷힌 하늘 위로 햇빛 솟았다
담벼락엔 크레용으로 그려진 물고기 떼
햇살이 짤랑이자
천고를 울리듯
목어가 홀로 울었다
골목길
이태관
길을 걸었어요
누군가 자꾸만 부르는 소리 들리는데
비석치기 못치기 오징어놀이 하던 그 길을
달빛만 가만히 따라오고 있었어요
뜨거웠던 몸들이 어깨 기대어 선 돌담
좁았던 그 길이 순식간에 넓어졌어요
어머닌 옛 시절 그대로시구요
돼지감자꽃 환히 피어 있었어요
돼지는 꿀꿀, 소는 음매에
모두가 함께 하는 세상
벌초가 끝난 마을은
바리캉에 잘려나간 머리칼처럼
햇살에 환히 빛나고 있었지요
길을 걸었어요 대숲에 바람이 일자
술래가 사라졌어요
어머닌 아버지 따라 산에 가시구요
구름에 가려진 마을은 잿빛으로 변했어요
길은 좁아지구요
내 머리 위로도 흰 구름이 흘렀어요
길을 잃었어요
춘삼이, 경서, 관빈이
옛 친구는 오간 데 없고
해바라기는 이빨 앙다물고
세월을 견디고 있었어요
천천히 발걸음
길어지고 있었어요
생강나무
이태관
아기고양이가 겨울을
건너고 있다
허공에 피어나는 노란 리본들
봄이 몇 스푼 섞여 있는 빗물을
어린 혀들이 핥고 있다
생각해 보면 할머닌
생강나무 기름으로 쪽을 지셨다
산에 드시던 날에도
나를 잊지 말아라
노랗게 물든 생강나무 잎들로
손 흔드셨지
겨우내 빈 집을 지키던 작은 애벌레들의 꼬물거림
숲에 깃들던 새들의 날갯짓에 그만
터져버린 웃음이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겨 마을을 향한다
빈 논 가득
물이 차오르는
봄날
주꾸미
이태관
어머닌 말씀하셨죠
― 가진 건 몸뚱이뿐이니 부지런히 배워야 한다
지구의 가장 낮은 곳인 바다
모래와 뻘 속에 온 몸을 묻고
사주경계를 실시합니다
치설로 갑각류에 구멍을 내는 일도
물고기를 따돌리는 일도 모두
바다가 가르쳐준 것
바다는
살아있는 교과서
조금씩 머리에 먹물이 듭니다
달빛을 등대삼은 이력으로
화려한 불빛에 끌려요
외로움의 골방인 빈 패각을 찾는 일도
모조일지라도 보석으로 탐하는 마음도 어쩔 수 없네요
그런 거네요 태생이 그러하다네요
한 생의 끝맺음이 졸업이라면
재 몸 위에도 흰 밀가루 가득 뿌려 주세요
바득바득 씻어내게요
끓는 물에 드는 순간, 피어나는
꽃 한 송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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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自序
가장 어두운 때는
자신이 눈과 귀를 막았을 때다
당신을 향해
나의 모든 것을 열어놓는다
2016년 3월
이태관
.♣.
=============== == = == ===============
이태관 詩集 [※나라는 타자※]
[ 해설 ] -
바람의 기억, 시간의 빈집
오홍진 / 문학평론가
1. 바람
이태관의 시는 바람의 이미지와 긴밀하게 이어져 있다. 그의 시에서 바람은 생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매운 바람”(「바람 발전소」)을 불러내는 생명의 숨결이기도 하다. 죽음과 생의 경계에서 펼쳐지는 바람의 상상력은 다양한 사물의 이미지와 어울려 이태관 시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하는 바탕으로 작용한다. 이를테면「구름목탁」에서 시인은 “바람 죽비”를 맞고 있는 겨울나무들에 주목하고 있다. ‘구름목탁’이라는 시의 제목이 암시하는 대로, 시인은 사물의 세계 전체가 존재의 깨달음에 관여하는 어떤 상황을 시의 언어로 표현한다. 구름목탁이 있고 바람 죽비가 있으니 낡은 장삼을 걸친 산들은 묵언黙言수행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이런 묵언의 세계에서 시인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밤새 목탁 구름이 처마의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시인은 잠을 이루지 못한다. 바람 죽비나 나뭇가지를 내리치는 소리를 들으며 시인 또한 묵언에 빠진 세계에 묵묵히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 아침이 되었다. 밤새 나뭇가지를 내리치고 처마의 창문을 두드리던 바람 죽비의 소리는 잦아졌지만, 시인의 마음은 여전히 그 소리들의 여운에 잠겨 있다. “누가 떠났는가/깨달음에 드셨나”라는 마음을 간직한 채 “아침 창을 여니/가지마다 출렁이는 얼음 염주”가 선뜻 시인의 눈을 파고든다. 하늘에서는 구름목탁과 바람 죽비의 소리가 울리고, 땅에서는 햇볕을 받은 얼음 염주가 부러진 가지 위에서 반짝인다. 한겨울에 펼쳐지는 자연 속 이미지의 향연은 “부음을 접한 새들이 먼 하늘로 치솟고 있”는 장면으로 완결된다. 새들은 “불에 들어도 사리를 수습치 말라는/부러진 가지의 유언”을 안고 먼 하늘로 솟구친다. 바람 죽비를 맞고 부러진 가지의 삶과 죽음이 묵언 수행의 길을 걷는 존재의 삶과 자연스레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나는 고뇌하는 수도승
바람 많은 언덕에 탑을 세우고
세상이 들려주는 이야기 듣기 위해
문패는 하늘에 걸어두었지
온 몸이 십자가인 가지 위
나뭇잎 등잔 하나 매달고
또로록 개암나무 열매 굴리면 하루가 가지
바다를 향한 파란 신호등 너머
장례식장의 불빛은 밝기도 하지
썰물 때에 맞춰
하루 두 번
집을 지어야 하는 무명의 생도 있지
옛집은 아득히 멀고
그곳엔
미처 도시로 떠나지 못한 등 굽은
소나무 하나
주문처럼 서 있지
바람은 불어왔다 가지
나는 수도승
숭숭 구멍 뚫린 생도
한여름엔 시원키도 하지
젖은 옷가지 널어 말리는
줄탁의 시간
부리 하나로 하늘에 칼금을 긋는
-「나라는 타자」전문
위 시에서 시인은 “바람 죽비”의 이미지를 “줄탁의 시간”으로 다시금 풀어내고 있다. “나는 고뇌하는 수도승”이라는 말이 오롯이 부각되는 이 시에서 시인은 “바람 많은 언덕에 탑을 세우고” 세상의 이야기를 듣는 존재를 시의 세계로 불러낸다. 왜 하필 바람 많은 언덕에 시인은 탑을 세운 것일까? 그래야 세상의 이야기, 시인의 표현대로라면 “나라는 타자”가 풀어내는 세상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나라는 타자가 풀어내는 세상의 이야기를 들으려면 시인 또한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상황에 이르러야 한다는 점에 있다. 줄탁의 시간은 무엇보다 나라는 타자의 이야기를 들으려는 “고뇌하는 수도승”의 마음가짐을 표현하고 있는 바, 바람 많은 언덕에 시인이 탑을 세운 이유는 이로써 설명될 수 있다고 하겠다.
‘줄탁줄啐啄’은 ‘줄탁동시啐啄同時’에서 나온 말이다. 알 속의 병아리가 바깥으로 나오기 위해 알 벽을 쪼는 일을 ‘줄’이라고 한다면, 어미 닭이 바깥에서 알의 표면을 쪼는 것을 ‘탁’이라고 한다. 요컨대 ‘줄’의 과정이 없으면 ‘탁’의 과정은 없다고 봐야 한다. 위 시의 2연에서 시인은 “썰물 때에 맞춰/하루 두 번/집을 지어야 하는 무명의 생”을 이야기 한다. “등 굽은 소나무 하나”에 초점이 맞추어진 무명의 시적 맥락은 바로 그 ‘무명’이라는 특성으로 하여 무명의 생을 넘어서는 또 다른 차원의 생으로 확장된다. 돌려 말하면 바람 많은 언덕에 서 있는 등 굽은 소나무는 “숭숭 구멍 뚫린 생”이라는 조건 때문에 한 여름의 시원함을 경험하는 역설적 진실에 직면한다. 어디 이뿐이겠는가. 바람 많은 언덕에 탑을 세웠기 때문에 시인은 도리어 젖은 옷가지를 널어 말리는 상황과 마주한다.
안에 있는 ‘나’가 변하지 않으면, 바깥에 있는 ‘나라는 타자’ 또한 변하지 않는다. 숭숭 구멍 뚫린 생으로 몰려오는 바람의 상상력은 이런 점에서 “나는 고뇌하는 수도승”이라는 시인의 선언과 뗄 수 없는 관계를 형성한다. “부리 하나로 하늘에 칼금을 긋는” 존재의 이미지는 세상의 타자들이 내보내는 이야기를 들으며 끊임없이 고뇌하는 수도승의 형상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 요컨대 바람 많은 언덕에 서 있는 “등 굽은 소나무 하나”가 줄탁의 시간을 견딜 수 있는 힘은, 바람이 들려주는 타자들의 이야기를 듣는 공감의 마음으로부터 뻗어 나온다. 불어오는 바람이 있고, 바람의 이야기를 듣는 존재가 있다. 부리 하나로 칼금을 긋는 획기적인 생의 미학은 바람이라는 타자가 만들어내는 상상(이야기라고 해도 좋다)의 힘을 통해 이태관 시의 중심에 들어서고 있는 셈이다.
이태관은「노을」이란 시에서 “길을 잃고/바람을 따라 끝없이 떠돌고 싶었던 건/낯선 곳에서도 말없이/나를 받아주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고백한다. 타자를 향한 애틋한 열망이 끝없이 떠도는 바람의 상상력을 낳는다. 정확히 말하면, 시인에게 바람을 따른다는 건, 타자로 뻗어 있는 길을 걷는 일과 다르지 않다. 땅을 떠난 슬픔에 겨워 “천둥 울음을 만들어” 내는 저 매미가 다시 “홀로/흙으로 떨어져 내리”(「노을」)는 까닭은 매미에게는 땅이 곧 “나라는 타자”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바람을 따라 걷는 자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욕망을 등에 지고 그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다. 타자의 공간으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자기가 세운 세계를 뿌리부터 뒤흔드는 힘겨운 과정을 반드시 경유해야 한다. 그리하여 타자의 세계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세계를 세우려는 욕망이 한편에 있다면, 자기의 세계로부터 다시 타자의 세계로 회귀하려는 욕망이 또 다른 한편에 존재한다. 스스로 뚫고 나온 알의 세계로 회귀하려는 존재의 이런 욕망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 것일까?
바람에게도 생이 있고, 바람에게도 길이 있다. 바람을 따라 끝없이 떠도는 자는 두 개의 욕망 사이에서 길을 잃었지만, 바람 자체는 정작 제 길을 올곧게 가고 있을 뿐이다. 「고산 간다」를 창조한다면, “시간은 바람으로 쌓”인다. 바람이 흐른다는 건 시간이 흐른다는 것이다. 그 시간은 어디로 흐르는 것일까? 고산에서 시인은 “허물어진 부족의 유물에 쌓인/고요의 시간을 핥고 있”는 아기고양이 한 마리를 발견한다. 야생이 사라진 고양이는 사람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무심한 두 눈”으로 고양이는 사람의 시선과 마주한다. 소리가 사라진 세계라고 표현하면 어떨까? “텅 빈 유적”이라는 게 원래 그런 것 아닌가. 시간의 빛을 간직한 사물들이라고 말해도 상관없겠다. 그리하여 시월의 고산에서는 바람이 발톱을 세우고 거세게 몰아치지만, 그것이 바람의 길을 따르는 존재를 할퀴는 경우는 없다. 문제는 그 바람이 불러일으키는 시간이다. 바람을 따르는 존재는 시간 앞에서는 한없이 무력한 존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시간은 지나간 모든 것들을 “텅 빈 유적”으로 만들어버리는 허무의 사도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바람의 존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와 같은 존재로 돌변한다. 바람은, 시인의 말대로라면 “시간의 허기에 할”퀸 바람은 시간을 거슬러 원래의 공간으로 회귀하는 모험을 감행하는 것이다. 7일 동안의 “천둥 울음”을 끝내고 땅으로 회귀하는 매미처럼, 바람은 껍질로 남은 시간의 흔적들을 하나하나 현실로 불러내기 시작한다. 시간에 저항하는 유일한 방법은 시간밖에는 없다. 바람이 풀어내는 시간의 흔적들을 되새기며 시인은 “기억의 껍질”(「구름밥」) 하나하나를 시의 세계로 불러낸다. 시간 앞에서 역류하는 바람의 이미지는 따라서 이러한 기억의 껍질을 빌려 하나의 형상으로 표현된다. 바람의 길은 기억의 길이 되어버리고, 바람을 따르던 존재는 이제 기억의 길을 따르는 존재가 된다. 시간이 한 장 한 장 쌓아올린 바람의 집에서 시간의 흔적들이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그것은 ‘나’의 기억으로만 한정할 필요는 없다. 나의 기억은 타자의 기억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질주하는 시간은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이 타자의 기억을 불러내고 ‘나라는 타자’로 가는 바람의 길을 불러낸다. 우리는 시인이 내보이는 바람의 길을 따라 그 기억의 집 속으로 들어가면 되는 것이다.
2. 기억
시인의 기억은 우선 “세월의 얼룩 속에서/홀씨 하나로 사라진 것들”을 향해 있다.「나도 전동타자기를 가져본 적이 있다」에 구현되는 사라진 것들의 미학은 시간의 저편으로 사라진 사물을 지금 이곳으로 불러낸다는 점에서 정확히 “바람의 길”을 따르고 있다. 바람의 길에 펼쳐진 세월의 얼룩들을 거슬러 올라가며 시인은 시간의 바깥에 존재하는 사물들을 계속해서 시의 세계로 불러낸다. 그것은 큰 아빠가 선물한 토끼 인형을 중학생이 되어서도 안고 자는 아이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토끼 인형이라고 해서 시간의 침해를 받지 않은 것은 아니다. 도대체 시간의 폭력을 벗어날 수 있는 사물들이 있기나 한 것인가. 그럼에도 중학생이 된 아니는 여전히 토끼 인형을 안고 잔다. 토끼 인형에 대한 아이의 마음(감각이라고 표현해도 좋다)은 시간을 거슬러 지속된다고나 할까. 세월의 얼룩으로 남은 시간의 흔적들을 이렇게 그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이의 마음에 아름드리 새겨진다. 시인의 말마따나 전동타자기는 “지금은 사라진/추억만 남은” 사물이 되었지만, “누르면 딩딩딩/열차소리를 내던” 전동타자기의 감각은 지금도 시인의 뇌리에 강렬하게 남아 있다. 시간은 시인의 마음에 새겨져 있던 이러한 감각을 결코 지우지 못한다. 시간의 바깥에 사물에 대한 감각이 존재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솔잎 긁는 틈틈이 싸리나무를 잘랐지 싸리는 한 데 묶여 싸리비가 되고 하나는 쉬 부러지지만 뭉치면 부러지지 않는다는 아비의 훈계도 되어 간혹, 종아리 위에 내천 자를 그리기도 했지
술추렴이 벌어지는 앞슬막에선 투전판이 벌어지기도 했지 그런 날이면 어디선가 밤 늦도록 부부싸움이 일었고, 그 와중에 모진 놈은 흑싸리에 맞아 거리에 나앉기도 했지
도시라는 터널을 지나 도착한 고향은
싸리눈 맞으며 대문 나서던 그날처럼
마당은 곱게 쓸려 있었지
바람이 맵차게 온 몸을 후려치는
섣달그믐
- 「싸리비」전문
“종아리 위에 내 천자를 그리기도 했”던 그 감각으로 하여 시인은 여전히 싸리비를 기억 속에서 떠올리고 있다. 전동타자기나 싸리비에 담긴 감각의 흔적들은 이렇듯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힘이 사물의 감각에 내재되어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무언가를 기억한다는 건 그러므로 무언가의 감각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몸에 새겨져 있지 않은 기억, 다시 말해 감각이 배제된 기억이 어떻게 기억의 주체를 사로잡을 수 있겠는가. 사라져가는 사물들의 감각을 기억함으로써 시인은 시간의 폭력과 맞설 수 있는 힘을 얻는다. 물론 이러한 감각의 힘을, 시간의 흐름을 뒤집는 근본적인 힘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단언하건대, 시간의 흐름을 뒤집을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시간을 뒤집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몸-마음에 새겨진 감각으로 하여 거스를 수 있는 대상일 뿐이다. 그 감각이 기억을 낳고, 그 기억으로 하여 우리는 사라져가는 것들과 일시나마 시간의 바깥에서 조우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시인이 이토록 기억에 집착하는 까닭을 물어야 한다.「골목길」을 따른다면, 그것은 “해바라기 이빨 앙다물고 세월을/견디고 있”는 상황과 다를바 없다. “춘삼이, 경서, 관빈이/옛 친구는 오간 데 없”는 바로 그곳에서 해바라기는 이빨을 앙다물고 세월을 견디고 있다. 옛 친구들과 “비석치기 못치기 오징어놀이 하던 그 길”은 아직도 남아 있지만, 그 길에서 같이 놀던 친구들은 사라지고 없다. 그들과 놀던 길을 걷다 보면 “누군가 자꾸만 부르는 소리 들”리는데, 뒤돌아보면 “달빛만 가만히 따라오고 있”다. 서글프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 길은 남아 있는데 그 길에서 놀던 친구들은 사라졌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을 이보다 안타깝게 표현할 수 있을까. 기억은 시간의 단편일 뿐이다. 기억하는 자의 안타까움은 무엇보다 기억이 시간의 바깥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한계인식에서 뻗어 나온다. 그런데도 시인은 기억에 집착한다. 그 기억속에서 시인은 그 시절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을 불러내고(「緣」), 불덩어리 간직한 얼굴로 돌아다니던 방수쟁이 김 씨를 불러낸다. 생강나무 기름으로 쪽을 지시던 할머니가 “나를 잊지 말아라”라는 말을 남기고 산에 드시던 그날(「생강나무」)을 시인은 또한 기억 속에서 떠올리기도 한다. 기억이 아니면 그는 이제 흐르는 세월을 견딜 수 없는 상황에 빠져버린 것일까?
툇마루의 시계는 멎어 있었다
가족의 시간을 둥글게 말아 올리던 그 허기가
허물어진 마루 아래 기대어 있었다
마당을 가르는 뱀
세 시 오십 분을 향한다
두 갈래 혀가 서로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
언제였을까 노인의 온기를 나누던 저 의자
실바람에도 한 발을 절룩인다
낙엽에 쌓여 천천히 늙어가고 있다
공을 차는 순간처럼
한 발에 힘을 더해야 할 때가 있다
집도 그러한가
한 쪽 기둥의 힘이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
-「옛집」전문
여기, 세월의 흐름을 견디지 못하고 “한쪽 기둥의 힘이 조금씩 풀리고 있”는 옛집이 있다. 툇마루의 시계는 예전에 멎어 버렸으니, 옛집은 시간 밖에서 시간의 흐름을 감수해야 하는 운명에 처해 있다. 이 집에서 흐르던 “가족의 시간”은 당연히 허기에 지쳐 앙상한 뼈만 드러내고 있다. 옛집만 허기에 지친 것은 아니다. 노인의 온기를 나누던 저 의자 또한 실바람에도 한 발을 절룩이는 불구상태로 옛집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옛집에 남아 있는 모든 것이 가을날의 낙엽처럼 천천히 늙어가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시간을 거스를 힘이 옛집에는 없다. 시간은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이기 때문이다. 늙어가는 옛집은 옛 친구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골목길만큼이나 서글픈 대상이다. 시간이 지나간 자리마다 사라진 사물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시인은 시간이 남긴 이 흔적들을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끊임없디 시의 언어로 치장한다. 그것이 마치 자신에게 주어진 생을 견디게 만드는 운명의 형식인 것이다.
「상사화」를 참조한다면, 시인의 이러한 생의 방식은 텅 빈 두 눈으로 진종일 창밖만 바라보는 사내의 모습과 상당히 닮아 있다. ‘상사화’는 잎과 꽃이 만날 수 없는 꽃이라고 한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꽃말을 지니고 있는 상사화의 모습을 연상한다면, 상사화에서 두 눈이 텅 빈 사내의 애절한 모습을 발견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만은 않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는 것만큼 애달픈 일이 있을까?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을 시간의 흔적=기억으로나마 넘어서려고 하는 마음을 시인은 상사화의 상황에 비유한다. 두 눈이 텅 비었으니 흘러가는 시간이 보일 리가 없다. 텅 빈 두 눈에는 오직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대상만이 흔적처럼 남아 있다. “평행을 달리는 앞 레일을 따라가지 못하면 탈선”(「사랑」)이 되어버리는 이 절대적인 사랑의 미학은 시간 앞에서 “마침내 평안할 때까지”(「사랑」)지속된다. 시간 앞에서 평안해진다는 것은 무엇인가?「사랑」이라는 시에 언급된 대로, 그것은 “백골이 될 때까지 진토가 될 때까지”는 도달할 수 없는 생의 종착역이라고 말할 수 있다. 죽어야만 끝나는 사랑의 형식을 시인은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끝없이 되새기고 있는 셈이다.
사라져가는 것들을 향한 눈 먼 사랑의 형식은 어찌 보면, 시간의 폭력과 맞서야 하는 존재라면 피할 수 없는 생의 형식인지도 모르겠다.「나무 물고기1」에서 시인은 “나이테를 새긴다는 건/맵찬 바람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라고 표현한다. 저마다의 존재들에게는 저마다의 나이테가 있다. 맵찬 바람을 받으며 온 몸으로 우는 나무 물고기의 형상이 암시하는 바 그대로, 저마다의 생명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의 형식을 온 몸으로 표현하며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 바람이 불어오면 나무 물고기는 온 몸으로 울어야 한다. 그것이 나무 물고기의 ‘자연’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산에도 바람이 흐르는 길이 있듯/생도 걸어야 할 길이 있다”(「나무 물고기3」). 나무 물고기는 자기 몸에 펼쳐진 바람의 길에 순응함으로써 자신이 걸어가야 할 운명의 길과 대면한다.
사랑에 목숨을 건 시인의 마음에도 여전히 바람이 불고 있다. 바람은 시간 앞에서 머뭇거리는 시인에게 나무 물고기가 걸어간 운명의 길을 제시한다. 바람이 불면 나무 물고기는 온 몸으로 운다고 했다. 나무 물고기에게는 그렇게 우는 것이 “바람을 세우는 일”(「나무 물고기3」)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말마따나 저 바람은 “기어이/다시 또 떠날 것이다”(「나무 물고기3」). 기어이 다시 또 떠나는 게 바람의 운명이라면, 이태관이 선택한 시작詩作의 길 또한 바람이 내보이는 운명의 형식과 무관할 수 없다. 바람은 사물=기억에 집착하지 않는다. 기어이 다시 또 떠나려는 존재에게 기억은 스쳐 지나가는 시간의 흔적으로 인식될 뿐이다. 그 흔적으로 하여 바람의 존재는 세월을 견디는 힘을 얻었지만, 그 흔적으로 하여 바람의 존재는 세월을 견디는 힘을 얻었지만, 그 흔적으로 하여 바람의 존재는 세월을 견디는 힘을 얻었지만, 그 흔적으로 하여 바람의 존재는 시간과 맞서는 힘을 망각할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를 기억함으로써 시간을 견디려는 이태관의 시작詩作은 이 지점에서 다시 시간의 흐름 속으로 밀려들어간다. 사라져가는 것들을 향한 기억을 뒤로 한 채 그는 또 어떤 시간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는 것일까?
3. 시간
바람과 더불어 이태관의 시는 다시 시간의 길로 들어선다. 기억의 이미지에 갇혀 있던 시간이 자유를 얻는 순간, 기억은 바람처럼 흩어져 시간의 물결 속으로 합류한다. 시간의 흔적이 더 이상 시간에 대항하는 사물로 작용할 수 없다면, 바람의 길을 따르는 시(인)가 가야할 곳은 과연 어디일까? 우선「고래를 찾아서」에서 그 질문에 대답하는 단서를 찾아보도록 하자. 시인은 이 시에서 “이제, 하산할 시간”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옛적엔 심해였던 산허리에는 바람의 뼈가 가득하다. 바다가 산으로 변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시인은 옛적에는 심해였다는 산허리에서 “어깨마다 넘실대는 푸른 고래 떼"를 발견한다. 시간의 흐름이 멈춰버림 것일까? 그럴 리는 없다. 산허리에 바람의 뼈가 가득하다는 것을 시인은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산허리의 푸른 고래 떼는 이 바람의 뼈로 만들어졌고, 햇빛에 다가서기 위해 몸을 비트는 저 고등어나 멸치 떼도 이 바람의 뼈로 만들어졌다. ”기이한 꽃들은 색색의 산호“로 역시 바람의 뼈=시간이 아니면 만들어질 수 없는 사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인이 지금 보고 있는 산허리의 푸른 고래 떼가 “고래를 찾아 떠난 스무 살”의 눈에 비친 것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겠다. “고래를 찾아 떠난 스무 살”은 그렇다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해풍과 파도와 항해였던 내 청춘은/돌아올 줄 모르고/뱃머리를 붙잡고 에돌다 산허리에서 만난/저 푸른 고래 떼”라고 시인은 적고 있다. 스무 살의 이상=고래가 사라진 자리에 산허리의 푸른 고래 떼가 들어섰다. 시간의 흐름을 따라 이루어진 스무 살의 여행길에서 시인은 돌아오지 않는 청춘의 시간만을 발견한다. 시간이란 원래 그런 것 아닌가. 미래를 위해 현재를 저당 잡히고, 현재를 위해 다시 과거-기억을 이끌어 들이는 시간의 비극을 그 누가 피할 수 있을까. 스무 살의 청춘이 찾아 나선 고래는 이러한 시간의 범주 속에 철저히 묻혀 있다. 스무 살의 고래 자체가 이미 시간의 바깥을 상정하고 있지 않은가. 이제 고래는 바다가 아니라 산허리에 살고 있다. 그리하여 스무 살의 청춘에서 놓여난 존재는 산허리를 애돌다 “저 푸른 고래 떼”의 이미지와 순간적으로 조우한다. “환상통처럼 출렁이는 수평선”을 가로지르는 저 푸른 고래 떼를 보며 시인은 “이제, 하산할 시간”이 다가왔음을 직감한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일까? 하산을 하면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일까? 아니, 시간의 바깥으로 하산하는 일이 과연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물소리 와글와글 끓어오르는 밤이었다
비는 내리고, 어디선가
배고픈 고양이 울음소리도 들려왔을 것이다
어느 생도 시간의 매를 감내할 수 없는 것인지
재개발을 위해 옛 마을이 허물어져 가는 밤
가로등도 떠날 이들의 마음을 아는지 잠들지 못하고
끝내, 그 밤을 견디기 어려웠는지 건넛말 달수네
한밤에 떠나나 보다
마을을 휘돌아 나가는 차의 불빛이 당산나무를 감싸 돌며
바람벽에 제 유언 하나 새겨놓는다
미처 수습치 못한 말들이 사라진다
길 잃은 고양이 울음소리도 들려왔을 것이다
신열을 앓듯 선잠에서 깨어난 아침
마을 앞 당산나무가 제일 먼저 몸을 허물었다
잘렸던 시야가 텅 비었다
공空을 이룬 하늘, 눈에 시리다
-「나무의 다비식」전문
“어느 생도 시간의 매를 감내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인상적인 시구가 오롯이 부각되는 위 시에서 시인은 스스로 제 몸을 허물어 시간의 흐름과 마주하는 “마을 앞 당산나무”의 당찬 삶에 시안詩眼을 집중하고 있다. 살아 있는 생명으로 태어났으니 당산나무가 시간의 매를 견딜 수 없는 건 당연하다. 주목해야 할 것은 어찌 보면 섬뜩한(생이 곧 죽음이라는 사실!) 생의 진실과 마주하는 당산나무의 태도에 있다. ‘나무의 다비식’이라는 제목이 암시하거니와, 시인은 시간을 대하는 당산나무의 모습으로부터 산에서 내려온 자가 걸어가야 할 길을 이끌어낸다. 재계발이 예정된 옛 마을에 마지막 밤-시간이 찾아온다. 떠날 이들의 마음을 아는지 가로등도 잠들지 못하는 이 밤에 건넛말 달수네가 그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길을 떠난다. 어차피 떠나야 하는 길이다. 시간은 떠나는 걸 애달파하는 생명들을 위로하지 않는다. 시간은 흐르는 게 자연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떠날 자는 떠나야 한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사물들이 시간의 질주에 가담하는 것은 아니다. 고래를 찾아 떠나는 스무 살의 청춘이 있다면, 산허리의 푸른 고래 떼를 발견하고 하산을 결심하는 또 다른 나이의 청춘도 있게 마련이다. 물소리가 와글와글 끓어오르는 밤, 비가 내리고 어디선가 배고픈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바로 그 밤에 마을 앞 당산나무는 제 몸을 스스로 허문다. 시간의 너머에 죽음이 있다는, 평범한(?) 진실을 말하고 싶지는 않다. 죽음이란 생명을 가진 존재의 종착지일 뿐, 그것 자체로 특별한 현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산나무가 몸을 허문 그 자리에 들어선 “공空을 이룬 하늘”의 이미지는 우리가 쉽게 거부하지 못할 시적 의미를 내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당산나무가 채웠던 공간은 이제 “텅 비었다”. 시간의 매를 감당하지 못한 존재가 피워낸 공空의 꽃은 ‘텅 빈’그 상태로 시간의 질주에 저항한다. 텅 빈 것은 시간을 감내할 이유가 없다. 그 자체가 시간이기 때문이다. 시간의 바깥에 또 다른 시간이 있다는 역설적 진실을 시인은 당산나무의 형상을 통해 분명히 보여준다. 그리고 그 역설적 진실은 시간의 폭력에 저항하는 상상의 힘으로 이태관 시에서 새롭게 펼쳐진다.
하루하루를 몸에 새기는 나무가 있다
경전을 몸에 두르고
더 이상 두꺼워질 수 없는 안경을 걸치고
삶을 필사하는 노인
축복은 관솔불로 빛나지
종으로 흔들리던 개암나무 열매가
크리스머스 캐럴처럼 떨어져 내리고
울려 퍼지던 노랫소리 마침내 침묵할 때
단 한 번의 눈길에 싹을 틔우는
나무 성자
모든 나무의 잎들이 태어날 때까지
단 하나의 잎도 내지 않겠다는
비장한 서원을 세운
하루하루 사람을 닮아가는 나무가 있다
주름 속에선 구름이 피어오르고
행간엔 안개가 넘실거린다
세월 속으로 침잠하여
온 몸이 경전이 되어버린
-「대추나무 성자」전문
대추나무는 하루하루의 시간을 몸에 새긴다. 시간의 경전을 몸에 두르고 “삶을 필사하는” 대추나무의 모습은 “세월 속으로 침잠하여/온 몸이 경전이 되어버린”존재의 삶을 에둘러 드러낸다. 그런데 왜 하필 대추나무일까? “모든 나무의 잎들이 태어날 때까지/단 하나의 잎도 내지 않겠다는/비장한 서원을 세운” 존재가 대추나무라는 점을 시인은 무엇보다 강조하고 있다. 모든 나무의 잎들이 태어나는 시간의 너머에서 대추나무는 비장한 서원을 세운다. 시간 안에 있되, 시간의 바깥을 끊임없이 지향하는 대추나무의 이미지는 온 몸이 시간이 되어버린 당산나무의 형상을 그대로 빼어 닮았다. 당산나무가 스스로 몸을 허물어 공空의 세계를 이루었다면, 대추나무는 제 몸을 시간의 경계 속으로 내던짐으로써 공의 꽃을 피운다. 대추나무에게 하루하루의 시간이 곧 경전인 까닭은 여기에 있다. 대추나무의 하루는 곧 영원의 시간과 맞닿아 있고, 그런 점에서 그것은 모든 나무의 잎들이 태어나는 원초적 시간과 다르지 않다. 대추나무의 하루하루가 모여 모든 나무의 잎들이 태어나는 수많은 시간으로 화한다. “등 굽은 소나무”가 견뎌내는 “줄탁의 시간”(「나라는 타자」)을 대추나무는 하루하루의 시간 속에서 반복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셈이다.
‘나라는 타자’를 찾아 끊임없이 “고뇌하는 수도승”은 이렇게 대추나무 성자가 하루하루의 시간 속에서 피워내는 공空의 세계와 힘겹게 조우한다. 하루하루를 몸에 새김으로써 스스로 시간의 경전이 되어버린 대추나무처럼 이 고뇌하는 수도승 또한 스스로 시간이 되는 험난한 시의 길에 들어서려고 한다. 스스로 시간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김장」이라는 시를 참조한다면, 시인이 걸어가려 하는 그 길은 “조금씩 제 몸을 내어주는” 성자=보살의 길과 다르지 않다. “조금씩 제 몸을 내어주는 일”을 말하는 건 쉽다. 입만 움직이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추나무 성자가 실천하는 하루하루의 자비-행은 시간의 매를 온 몸으로 감내하는 존재가 아니라면 이룰 수 없는 꿈과 같은 것이다. 대추나무는 온 몸으로 하루하루의 시간을 산다. 땅의 온기 속에서 익어가는 김장 배추 또한 “조금씩 제 몸을 내어주는 일”을 묵묵히 실천함으로써 “온 몸으로 기지개 켜며/하얗게 삭아”간다.
이태관은 무엇보다 이러한 존재들의 삶에서 그가 지향하는 시작詩作의 계기를 끌어내고 있다. 이를테면, “끓는 물에 드는 순간, 피어나는/꽃 한 송이”(「쭈꾸미」)를 시인은 시라는 언어와 집으로부터 이끌어내려고 한다. 물론 그것은 조금씩 몸에 바람이 스미기 시작하는 것으로 비유되는 시간의 매를 견딜 때만 가능한 일이다. 시간의 끓는 물에 스스로 뛰어들 용기를 이 고뇌하는 수도승은 과연 실천하게 될까? 그리하여 하루하루의 시간을 몸에 새기며 시간의 바깥을 바라보는 대추나무 성자의 삶에 그는 과연 도달할 수 있을까? 질문에 대한 대답은 미래에 남겨두고, 지금은 이 말만 하기로 하자. “은사시 나무에 봄이 내렸다/겨우내 잠들어 있던 창을 여니, 후드득/떨어져 내리는 것들/살아 있다/틈새로 스미는 온기와 서로의 체온으로/이 엄동을 견딘 것이다”(「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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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4의 글 ◆
세상에서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쓴 여유롭고 편안한 시
시인이 쓴 시를 두고, 더군다나 그 시인이 친구라면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친구 시인이 쓴 시를 읽는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까. 감상을 얘기하자면 긍정성 쪽으로 방향을 틀어야겠고, 포장을 해야 한다면 그럴 듯한 요설의 무늬들을 새겨 넣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시인 이태관의 시들은 그럴 필요가 없다. 그의 시는 곧 이태관 그 자신이다. 그의 시를 읽으면 친구인 그의 인간과 그의 마음을 떠올리게 된다. 그가 시의 행간에다 꼼꼼히 새겨 넣은 사유는 꼿꼿하고 웅숭 깊고 너그러우며 정갈하다. 그를 아는 이들은 다 안다. 세상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그는 늘 웃고 있다. 삶의 현실로부터 한 발 비껴난 여유로움으로 늘 편안하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도피자는 아니다. 세속살이의 방편이랄 수도 있는 과장이나 감춤이 없을 뿐이다. 한때는 으쓱거리기도 했을지 모르나 힘 뺀 어깨에서 태어난 그의 시들은 하나같이 어찌 그를 쏙 빼닮았는지, 고개 끄덕일 수밖에 없고 미소 지을 수밖에 없다. ― 최준 / 시인
‘나라는 타자’를 찾아 끊임없이 고뇌하는 수도승의 시들
이태관 시인은 ‘나라는 타자’를 찾아 끊임없이 “고뇌하는 수도승”은 이렇게 대추나무 성자가 하루하루의 시간 속에서 피워내는 공空의 세계와 힘겹게 조우한다. 시인은 무엇보다 이러한 존재들의 삶에서 그가 지향하는 시작詩作의 계기를 끌어내고 있다. 이를테면, “끓는 물에 드는 순간, 피어나는/꽃 한 송이”(「쭈꾸미」)를 시인은 시라는 언어와 집으로부터 이끌어내려고 한다. 물론 그것은 조금씩 몸에 바람이 스미기 시작하는 것으로 비유되는 시간의 매를 견딜 때만 가능한 일이다. 시간의 끓는 물에 스스로 뛰어들 용기를 이 고뇌하는 수도승은 과연 실천하게 될까? 그리하여 하루하루의 시간을 몸에 새기며 시간의 바깥을 바라보는 대추나무 성자의 삶에 그는 과연 도달할 수 있을까? 질문에 대한 대답은 미래에 남겨두고, 지금은 이 말만 하기로 하자. “은사시 나무에 봄이 내렸다/겨우내 잠들어 있던 창을 여니, 후드득/떨어져 내리는 것들/살아 있다/틈새로 스미는 온기와 서로의 체온으로/이 엄동을 견딘 것이다”(「삶」) ― 오홍진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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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관 시인∥
∙ 1990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 1994년『문학사상』으로 등단했다
∙ 시집『저라도 붉은 기억』『사이에서 서성이다』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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