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朴炯尙 辯護士의 所論
1) 問題提起의 背景
이순신 장군은 정유년 8월 19일경에 장흥 회진 회령포에서 수군통제사 취임식을 갖고서 조선수군을 재건했다. 그 한 달 전에 원균의 칠천량 패전이 있었고, 그 한 달 후에는 충무공의 명량대첩이 있었다.
이 글은 위와 같은 사정에 착안하여 ‘이충무공과 전라도 장흥지방의 관계’를 살펴봄에 그 1차적 의도를 두고 있다. 장흥지방에 관련하여 다음 몇 가지 사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난중일기 8월 19일자 사건으로 등장하는 ‘회령포 만호 민정붕과 피난인 위덕의 간에 일어난 사건’에 대해 재검토한다.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임진.정유 양난 당시의 군량 조달문제’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필자 박형상)
2) 避亂人 魏德毅(1540~1613)
기존 설중에는 ‘회령포 만호 민정붕’과 ‘피란인 위덕의’간에 8월 19일에 일어난 일을 두고 사적 상거래로 추측하는 일부 견해가 있다. 장흥 관산 당동출신으로 의주 행재소까지 삼천리를 걸어 찾아가 선조를 모셨다는 청계 위덕의에 관련하여 난중일기에는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8월 19일경 일기내용을 놓고서 노승석은 “회령포 만호 민정붕이 그 전선에서 받은 물건을 사사로이 피난인 위덕의 들에게 준 죄로 곤장 20대를 쳤다”라고 번역한다. 이에 대해 박혜일은 “회령포 만호 민정붕이 물건을 받고 전선을 사사로이 피란인 위덕의 등에게 (빌려)준 죄로 곤장 20대를 쳤다”고 번역해야 옳다고 주장한다.
박혜일 교수는 자신의 번역에 의지하여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피란인 위덕의는 이순신보다 3년 앞선 1573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임진년에는 의주로 가서 피란 중이던 선조에게서 주부에 제수되고, 영남 운향관이 되어 임지에서 군량운반을 감독하다 형조좌랑으로 승진하였다. 이후의 난중행적은 불분명하나, 정유일기의 같은 날짜기록(정유 8월 19일)을 보면, 벼슬이 있는 자이되 이순신에 의하여 ‘피란인’으로 불리고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그런데 이 날짜의 기사를 보면, 회령포 만호 민정붕은 위덕의의 술과 음식 등에 매수되어 전선을 사적용도로 이용하도록 내주었다가 때마침 당도한 통제사 이순신에게 발각되어 곤장 20대의 처벌을 받고 있다. 여기서 ‘위덕의의 사적용도’란 전선을 이용할 정도로 규모 있는 전란 중의 상거래임을 의미할 것이며, 그의 솜씨 있는 장사수완은 명나라 장수 여응종의 찬사와도 무관치 않은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라고 추론하고 있다. 배상렬은 한걸음 더 나아가 “원균과 위덕의의 상거래가 존재했다고 확신한다.”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는 다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조정은 ‘명나라 군대의 식량을 조달하는 문제’로 크나큰 어려움을 당하였다. 2만 명 명군의 식량을 대느라고 나라의 재정은 바닥나고 백성들의 등골이 빠질 지경이었다. 한가로이 놀면서 군량만 축내고 있는 명군들의 모습에 이순신 장군은 심히 개탄하면서 ‘더 이상 군량을 공급할 길이 없다. 원통하고 분하다’는 장계를 올린 바도 있다.
이런 배경과 더불어 ‘명나라 장군이 위덕의를 두고 유성룡.이덕형과 동격으로 칭송을 아끼지 않고 있는 점’과 ‘위덕의가 의주에 있는 선조를 위한 군량조달을 실제로 담당했던 점’을 합쳐 미루어보면, 의주 행재소에서 내려온 위덕의의 모량(募糧)활동은 이순신장군 휘하의 현지 수군의 군량조달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므로 전라도지역에서 군량을 빼내어 의주로 가져가는 조정 관리나 이른바 ‘근왕의병’을 보고서 이순신장군이 곱게 생각하였을 리 만무하다. 그래서 의주 쪽 사람들을 ‘피난인’이라고 냉소적으로 지칭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위덕의의 사적용도’라거나 ‘전란 중 사적인 상거래를 했다’는 식으로 단정적으로 비약하여 매도하는 것은 너무 지나치다 아니할 수 없다.
만약 그렇게까지 크게 비난받을 만한, 즉 ‘물건과 전선 빼돌리기 식의 사적 상거래’에 틀림없다면 이순신 장군이 겨우 ‘곤장 20대’의 형벌을 내렸을 리 없다. ‘청계 위덕의 선생’ 은 장흥지역에서는 ‘고향의 인물’로 칭송되고 있으며 장흥 위씨 문중의 대표적 인물이다. 영정 때의 실학자인 존재 위백규(1727~1798)선생의 선조로서, ‘장흥 관산 죽천사’에 주벽으로 모셔져 있다. (노승석의 난중일기 완역본․2005)
가끔 뵙던 박형상 변호사님께서 역사에 깊은 식견과 예리한 판단럭을 지니셨군요.
碧泉 위윤기 님
이번 종보에 박형상 변호사가 장흥위문 관련해, '취수헌공에 대하여'를 기고 해주기로 했습니다.
야운 위이환 님
너무나 고마운 일입니다.
의미있고 기치있는 내용이리라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재치아우가 반길 일이기도 합니다.
박형상 변호사님 취수헌공에 대한 기고가 기대 됩니다.고맙네요.
위문중 조상님의 옛발자취와 역사공부를 하고 갑니다.
위의 글은 청계공 명예훼손사건 전말의 시작단계이지만 끝까지 보고나면 박형상 변호사님이 우리 문중을 위해 얼마나 큰 도움을 주셨고 또 얼마나 큰 역할을 해 주셨는지 알게 될 것이고, 우리는 항상 박변호사님의 고마움을 잊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종보에까지 기고해 주신다니 더욱 감사할 따름입니다.
碧泉 위윤기 선암 위옥량 湖山 위신복
네네. 이미 박 변호사의 초고본은 받았습니다만, 종보에 특별기고를 하겠다고 하자 더 보완해서 보내겠다며 날짜까지 확인했습니다.
저도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