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다. -
☆ 2014년 가해 5월14일 (홍) 수요일 성 마티아 사도 축일
[청주] 모두 다 주어라.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 사도 1, 15 - 17. 20 - 26
† 복음 : 요한 15, 9 - 17
마티아 사도는 열두 사도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배신자 유다의 자리를
메우려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에 사도로 뽑힌 인물이다(사도 1,21-26 참조).
그는 예수님의 공생활 초기부터 다른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가르침을 받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까지 목격한 이로
예수님의 일흔두 제자(루카 10,1-2 참조) 가운데 하나로 보고 있다. 마티아
사도의 활동과 죽음에 관해서 확실하게 알려진 것은 없으나, 예루살렘에서
선교 활동을 펼친 데 이어 이방인 지역 특히 에티오피아에서 선교하였다고
전해진다.
★ 베드로가 신자들에게 배신자 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뽑자고 말하고 두
사람의 후보를 세운다. 그들을 앞에 두고 함께 기도한 뒤 제비를 뽑게 하니,
마티아가 새로운 사도로 뽑힌다(제1독서).
★ 주님의 계명을 지키면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게 된다. 예수님의 계명은
그분께서 그러하셨듯이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이 사랑을 실천하면 예수님의 친구가
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어거스트 투랙이라는 경영인은 17년 동안 미국의 한 트라피스트 수도원을
자주 방문하여 그곳에서 생활하고 일하는 남다른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는
수도원의 생활 방식과 인생에 대한 관점을 점차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
능률과 영리, 양적 측정과 인물 본위 등 현대 경영에서 당연시되는 기본
전제들이 얼마나 위험하며 많은 중요한 가치를 희생시키는지를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이 수도원에서 얻은 귀한 경험을 나누고, 수도원 생활의
중심 가치가 세상 사람들이 직업 세계의 삶을 행복하고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데에도 매우 의미 있다는 점을 보여 주고자 책을 냈습니다. 『수도원에 간
CEO』입니다.
이 책에서 매우 인상적인 부분은 '삶의 변화'라는 과제에 대한 성찰입니다.
그는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고 탈바꿈시키려는 열망이 있었으나, 수사들의
삶에서 체득한 사실은 그 변화의 갈망이 존재 깊은 곳과 닿아 있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는 수사들이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서원의 과정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죽는' 수준의 존재의 탈바꿈을 지향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반면 많은 사람은 다른 차원의 변화가 이러한 존재의
변화를 대신할 수 있다며 착각한다고 지적합니다.
"모든 인간의 동기는 탈바꿈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되지만, 탈바꿈에는 세
가지 다른 유형이 있다. 목마른 사람이 물을 마실 때, 그는 자신의 '상태'를
탈바꿈시킨다. 가난한 사람이 복권에 당첨되면, 그는 자신의 환경을
탈바꿈시킨다. 그리고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에 나오는) 스크루지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크리스마스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날 때, 그는 존재의
탈바꿈을 경험한 것이다. 이 세 가지 유형의 탈바꿈이 모두 필요하다. 문제는
우리가 한 유형의 탈바꿈을 다른 유형의 탈바꿈으로 대체하려고 할 때 비로소
생긴다."
- 매일 미사 -
◈ [청주] 모두를 다 주어라. |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5월14일 성 마티아 사도 축일 (요한15,9-17)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 요한 15,9-17
모두를 다 주어라.
오늘 기억하는 마티아 사도는 열두 사도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배신자 유다의
빈자리를 채우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가 선택될 때 사도들은 요셉과 마티아
두 사람을 앞에 세우고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 이 둘 가운데에서
주님께서 뽑으신 한 사람을 가리키시어, 유다가 제 갈 곳으로 가려고 내버린
이 직무, 곧 사도직의 자리를 넘겨받게 해 주십시오”(사도123-25).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사도들은 ‘주님께서 뽑으신 사람’을 알려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15,16).
는 주님의 말씀을 알아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뽑은 사람을 인정해 달라고
하지 않고 오히려 당신이 뽑으신 사람을 알려달라고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구애 없이 주님께서 선택하셔서 쓰신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더욱 더 겸손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대로 우리를 벗으로 삼으시고 친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 놓으셨습니다. 목숨을 바친다는 말은 그 전에 이미 바칠 수 있는
것을 모두 바쳤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자기를
하느님께 모두 내어 바치는 행위입니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모두를 다 주고도 아직도 부족하다고 여깁니다.
무슨 일을 하든 억지로 마지못해 의무감으로 하면 기쁨을 갖지 못합니다.
그러나 똑 같은 일을 하면서도 자발적으로 하면 보람과 기쁨이 큽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명령이나 의무에 의해 한다면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 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기쁨이 없습니다. 그러나
계명을 내리는 분의 뜻을 알기 위해 또 그분과 하나가 되기 위해 지킨다면 그
의미가 풍요로워집니다. 사실 진정한 사랑을 한다는 것은 그만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자기를 먼저 생각하는
부족한 사랑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받은 하느님의 사랑을
생각해야 하고 이웃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야 하며 또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 ‘사랑 안에 머물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무조건 ‘머물러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그들을 위한
당신의 사랑이 선행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신 것과 같은 사랑으로 제자들을 사랑하였습니다. 아버지께 받은
사랑은 제자들을 위한 사랑의 기초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아들 예수님께서
받으셨고 예수님의 사랑을 제자들이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제자들 서로 간에 사랑을
하는 것에 머물지 말고 이웃 사람에게로 사랑의 손길을 펴야 합니다. 그리하면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요한13,35).
혹 계명을 억지로 지키는 사람은 헛고생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계명을 지키십시오. “마음 속 깊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께서도
그를 아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채비가 갖추어져 있는 만큼 그는
하느님을 사랑합니다”(디아도쿠스주교). 그리고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더 사랑 받는 존재가 됩니다”(작은 거인들에서). 망설이지 말고
사랑을 위한 사랑을 함으로써 주님의 계명을 지키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지금의 자리가 천국임을
2014년 가해 5월14일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 요한 15,9-17
제가 신학생 때, 어떠한 행동 하나로 인해 신부가 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금지하는 행동을 친구들과 몰래 했다가
들통이 났거든요. 교수 신부님께서는 불같이 화를 내셨고, 우수선한 학교
분위기 때문에 혹시라도 퇴학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갖게 되었지요.
교수 신부님의 처사만을 기다리면서 정말로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습니다.
그리고 왜 그러한 행동을 했을까 라는 후회와 함께 동시에 그런 행동을 한 제
자신이 너무나도 부끄러웠습니다.
문득 창세기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뒤에
부끄러워서 숨지요. 알몸임을 깨닫고 부끄러웠다고 생각되었지만, 사실은
하느님의 명령을 배반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꼈던 것이 아닐까 싶더군요.
제가 그랬으니까요. 아무튼 그 당시 며칠을 두려움과 부끄러움으로
고생하면서 다음의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정말로 신부가 되고 싶어 하는구나’, ‘결혼해서 사는 길이 아닌 사제로 평생
살고 싶어 하는구나’, ‘지금의 자리가 바로 천국이었구나.’
물론 교수 신부님의 넓은 마음으로 그냥 넘어가서 지금 이렇게 사제로 잘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때의 생각을 하면, 허투루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지요. 특히 주님과 함께 살려면 주님의 눈높이에 맞춰야
하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거룩하게 살아야 할 것은 물론이고 내 자신을
지금의 나보다 더 나은 모습으로 성장시켜야 합니다. 이를 위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은 당연하겠지요?
그리스도 안에 머물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 역시
바뀌어야 합니다. 그냥 주님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시겠지 하면서 대충대충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눈높이에 맞추어 나갈 때, 하느님의
영광을 이 세상에 드러낼 수 있습니다. 또한 주님께 대한 사랑은 이런 삶을
살고자 하는 열의를 불러일으키며, 이 사랑 안에 머무를 때 우리는 그분처럼
되어 그 분 안에서 참 평화를 누릴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분명히 말씀하시지요.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문다는 것은 단순히 “주님! 당신을 믿습니다.”라고 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사랑의 눈높이에 철저히 내가 맞추어 나간다는
것이지요. 주님처럼 거룩해져야 하고, 주님처럼 사랑을 철저히 실천하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사람은 지금의 자리가 천국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지 못하는 사람은 두려움과
부끄러움으로 지금의 자리가 지옥이라고 한탄만 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의 내
자리를 천국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도 더욱 더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인생은 짧고 되돌릴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삶의 순간순간마다 존재의
경이로움에 놀라며 삶의 의미를 맛볼 수 있다. 이 얼마나 알알이 소중한
시간들인가?(헨리 데이비드 소로)
한 발씩 떼는 마음
언젠가 부산 갈맷길을 걷다가 길을 잘못 들어서 엄청나게 고생했던 적이
있습니다. 분명히 그 동네에 사시는 분에게 여쭙고 간 길이었지만,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길처럼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바위를 타고 올라가야 했고 어느
순간 발을 디딜 곳이 없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지요. 도저히 앞으로는 더 이상 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없이
되돌아 내려가려고 했지만, 바위를 타고 내려온다는 것 역시 쉽지 않더군요.
아주 조심해서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한 발짝 떼고는 그
다음 발 디딜 곳을 생각하고, 또 한 발을 떼고는 그 다음 발 디딜 곳을
생각하면서……. 시간은 오래 걸렸지만, 결국 그 힘든 바위를 아무런 사고
없이 내려올 수가 있었지요.
이때 깨달은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한 발씩 떼면서 조심히 내려올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한 발씩 순간에 최선을 다한다면 풀지 못할 문제는
없다는 것이지요. 만약 바위 위에 그냥 주저앉아 버렸다면 그 위에서 내려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발을 떼는 그 용기를 통해서 최악의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요.
주님을 따른다는 것, 참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따름 역시 한 발씩 떼는
마음으로 해 보면 어떨까요? 언젠가는 주님을 잘 따르면서, 그 안에서 평화를
누리는 나를 발견할 것입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사랑의 완성은 ''벗''이 되는 것
2014년 가해 5월14일 부활 제4주간 수요일
<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
복음 : 요한 15,9-17
< 사랑의 완성은 '벗'이 되는 것 >
기원전 4세기경, 그리스의 피시아스라는 젊은이가 교수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왕에게 교수형 당하기 전에 부모님께 마지막 인사를 하고
오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왕은 그
청을 거절하였습니다. 그 때 다몬이란 친구가 나서서 “제가 그 대신 감옥에
있겠습니다. 그가 오지 않는다면 제 목숨을 거두셔도 좋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왕은 비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사형수다. 돌아오면 죽는다는 것을 뻔히 아는데 돌아올 것 같은가? 그가
오겠다고 해도 부모가 보내주지 않을 것이네. 자넨 만용을 부리고 있는 거네.”
그래도 청을 계속하자 왕은 피시아스를 보내주었습니다. 그러나 교수형을
집행하는 날이 되어도 피시아스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어리석게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은 다몬을 보며 혀를 찼습니다. 다몬의 친척들이
울며불며 피시아스를 저주했지만, 다몬은 목에 줄을 건 채 친척들을 꾸짖으며
자신의 친구를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결국 왕의 엄지손가락이 밑을 향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멀리서부터
고함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제가 돌아왔습니다. 이제 다몬을 풀어주십시오. 사형수는 접니다.”
두 친구는 눈물로 서로 포옹을 하며 다음 세상에서도 친구로 지내자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이것을 지켜보던 왕은 벌떡 일어나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피시아스의 죄를 사면해 주노라!”
그리고 나직이 혼잣말로 이렇게 탄식했다고 합니다.
“내 모든 것을 다 주더라도 이런 친구를 한번 사귀어보고 싶구나.”
그렇습니다. 어쩌면 좋은 아내를 얻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좋은 친구를
얻는 것일 것입니다. 결혼하여 20년 이상 사신 어떤 형제님이 자매님과의
관계를 설명해 주시는데, 지금은 ‘친구’처럼 지낸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사제가 된 저의 결혼에 대한 환상을 깨 주실려고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는 사랑이 식어서 그렇게 친구처럼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부부가 서로 목숨을 바쳐 줄 수 있는
친구처럼 된다면 그것이 신혼 때보다 더 완성된 사랑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신혼 때는 사랑의 감정이 타오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이 있을 때 상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아마도 그리 어렵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감정은 몇 년 살며 사라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런 감정이 사랑이라 느꼈던
사람은 그 짜릿한 감정이 사라지기 시작하면 사랑도 함께 사라졌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때가 신혼 때보다 더 사랑이 성숙해 졌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사람으로 함께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해 온 그 사람,
비록 지금은 예전처럼 짜릿한 감정을 느낄 수는 없을지라도, 그 사람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다면 사랑은 이제 감정을 넘어서 믿음과 의지로 더
완전해 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누구든 당신의 계명을 실천하면 당신의 ‘친구’가
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큰 사랑은 없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벗으로 생각하고 목숨을 바쳐 주신 것입니다.
벗은 육체적인 감정에 끌려 만나는 이성관계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순전히
우정으로 맺어져 남녀 간의 관계보다는 그 끈끈함이 약해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 뜻을 따르는 이들을 당신 ‘친구’라 불러주신 것입니다.
당신이 남녀관계가 주는 감정적으로 얻는 즐거움이 없더라도,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쳐 주실 수 있는 가장 완전한 사랑을 지니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위의 이야기에서 왕은 왕비도 있고 후궁도 있고 신하들과 친구들도
많지만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쳐 줄 친구는 갖지 못했습니다. 결국 벗을 위해
목숨을 바쳐 줄 수 있는 친구를 얻기가 얼마나 힘든 줄 말해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친구가 있고 의리를 외치기도 합니다. 그런 관계들이 하느님
안에서 ‘벗’의 관계로 승화하여 그 친구들을 위해 목숨을 바쳐 줄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우리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가장 완전한 사랑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친구가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해 주기를 기대하지 말고, 먼저
내가 누군가를 친구로 여기고 그 친구를 위해 내 생명을 바칠 수 있는
사람인지 생각해보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결국 예수님처럼 모든 이를
벗으로 여길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산 성당 홈페이지: http://cafe.daum.net/ca-osan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담당 전삼용 요셉신부 -
◈ [기타] 서로 사랑하여라.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2014년 5월14일 성 마티아 사도 축일 수요일 복음묵상
'당신의 사랑이 아름다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십시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15,12)
---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 역시 너무도 잘 아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쉽고 간단한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이들이 얼마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 말씀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던 것처럼’이라는
부분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이해한대로 움직이게 되어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먼저 이해해야만, 그분의
뜻대로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 없이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인간이라고 하지만 사랑의 의미조차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삶을 다하는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역사를 뒤돌아보아도,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보더라도, 우리의 사랑은 참으로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라는 생각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도 예외는 아닌 듯 합니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생각했고 믿어왔던 것과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주셨던 사랑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떠오르는 대로 적어보렵니다.
1.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은 상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사랑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다정다감하거나 살가운 표현을 쓰시는
분은 아니셨습니다. 오히려 사랑의 내용에 열정을 쏟으신 분이셨습니다.
비록 상대에게 오해나 미움을 받더라도 진정 상대를 위하는 길을 선택하려
하셨습니다.
2.
예수님의 사랑은 영원한 세상을 지향하는 사랑이었습니다.
무엇이 상대를 영원히 살리는 길인지, 무엇이 상대를 영원히 죽이는 것인지를
알고 하시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눈앞에 펼쳐진 상황이나, 상대의 요구에
연연하기보다는 그 상대를 지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항상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3.
책임지는 사랑이었습니다.
상대의 그 어떤 반응에도 한결같이 당신의 사랑에 책임을 지셨습니다.
배신과 적대감이 당신을 힘들게 하셨어도 그분께서는 결국 등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4.
옳음, 즉 정의를 생각하는 사랑이었습니다.
사랑과 정의는 서로 다른 성질의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 없는 정의, 정의 없는 사랑은 모두 거짓이라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어쩌면 그분의 사랑은 정의와 일치된 사랑이었고, 그분의 정의는
사랑과 일치된 정의였습니다.
5.
이러한 사랑은 결국 그분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몰아갔습니다.
그분의 죽음은 그분의 사랑과 함께 예견된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늘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사랑이 진정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지
말입니다. 가장 하느님의 사랑과 닮은 사랑이 어머니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 사랑 역시 얼마나 이기적일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기적이라는 말은 진정 자식을 사랑하는 방법을 모른다는 뜻입니다.
가장 뜨겁고 역동적인 사랑은 남녀간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 사랑 역시 얼마나 본능적일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본능적이라는 말은 집착과 소유를 사랑으로 착각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루카11,11-12) 하지만 우리는
뱀을 주면서 생선을, 전갈을 주면서 달걀을 주고 있다고 착각하며, 사랑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흔히 조건 없는 사랑을 아름답다 합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이 아름답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하지만 착각해서는 안 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어떤 사랑이던 상대를 진정으로
위하는 길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조건이 채워지지 않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당신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 하십니다.
하지만 당신처럼 우리는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의 대부분의 사랑은 수없이 한계를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청해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당신을 닮은 사랑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서울] 오늘도 사랑노래 부릅니다.
2014년 가해 5월14일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 요한 15,9-17
오늘도 사랑노래 부릅니다.
종의 신분으로부터 해방, 속국상태에서 해방, 해방은 기쁜 일입니다.
힘이나 돈 때문에 굽실거리며 비굴하게 하수인처럼 군다면 슬픈 일입니다.
세상의 일 잘되게, 자식들 남보다 잘 살게 해달라고 비는 게 참 신앙 같나요?
하느님 앞에서 얼굴을 들고 어깨를 펴면서 유쾌한 마음으로 웃으십시오.
반가운 고향 어릴 적 친구를 만나듯 하늘을 그리 대하며 반기십시오.
신앙인은 바로 이러한 태도로 깃들기를 노력하며 오늘도 사랑노래 부릅니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ㄷ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요한 15,15)"
- 서울 대 교구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서울] 부활 제4주간 수요일
2014년 가해 5월14일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 요한 15,9-17
‘단골손님’이란 말이 있습니다. 단골손님은 자주 이용하는 손님이고, 주인은
단골손님에게 특별히 잘 해주기 마련입니다. 맛있는 음식이 오면 전화를
하기도 하고, 좋은 자리를 마련해 주기도 하고, 새로운 물건이 오면 연락을
하기도 합니다. 교우들이 하는 가게들을 방문할 때가 있습니다. ‘안경점, 약국,
치과, 식당, 미장원, 문구점’ 등을 가면 저는 단골손님 이상의 대우를 받습니다.
아마도 제가 혼자 살아서인가 봅니다.
고백소에도 단골신자가 계십니다. 마치 고백소가 ‘사랑방’같은 분들이
계십니다. 대게는 연세가 많으신 분들이십니다. 특별히 죄를 고백하시는 것도
아니시고, 즐거웠던 일, 속상하였던 일, 아들 자랑, 손자 자랑과 같은 이야기를
하십니다. 때로는 고백소의 작은 틈 사이로 사탕도 주시고, 용돈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저도 그런 분들은 단골신자기이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들어드립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곳에 자주 가는 단골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자주하는 단골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의 마음만 보시고, 우리의 생각만 보시고, 우리의 삶만 보시고
우리를 충분히 사랑하시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은
이제 하느님 나라의 단골신자가 되었습니다. 매일 기도하였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었고,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 이상 더 하느님 마음에 드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박해를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주님 때문에
멸시를 받는 것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라는 말씀이 큰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하느님을 증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기다려 주시며,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느님께로 갈 수 있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해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고 지키면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행동으로 하느님을 증거하셨습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헐벗은
사람들과 늘 함께 하셨습니다. 병자들을 치유시켜 주셨고, 죄를 지은 사람들은
용서해 주셨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용기와
힘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로 하느님을 증거하셨습니다. 늘 따로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를 하셨습니다. 마지막 때에 이르러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제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들은 예수님의 말씀, 행동, 기도를 자신들의 삶으로 증거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였고, 기도했으며, 서로 격려하였고,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런
사도들의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들 또한 기도의 단골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봉사의 단골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나눔의 단골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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