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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8월 24일 온고을교회 주일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 발꿈치 신학 heel theology 》
시 41:1~13
〈 환자에게 해 주는 첫 마디 〉
“검사 결과가 아쉽게 나왔어요! 수술 시기를 놓쳤습니다!”
“이런 경우 호르몬요법 치료 방법이 있으니 곧장 시작을 하지요!”
5년 전 제가 전립선암 진단을 받았을 때, 담당 의사가 저에게 한 말입니다.
병이 들어 병원에 가면 의사들은 대략 위와 같이 환자에게 말해 줍니다.
그런데 고대시대, 의사도 병원도 없을 때, 병자는 제사장을 찾아갔습니다.
그때는 제사장이 의사 역할도 했는데, 환자가 찾아가면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시 41:1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
이 말의 뜻이 참 깊습니다.
이웃집 쌀독에 쌀이 떨어졌습니다. 온 식구가 손가락만 빨아야 합니다.
이때 아무도 몰래, 그 집 쌀독에 쌀 한 말 부어놓고 옵니다.
온 식구가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 보살핌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당신이 그때, 그렇게 가난한 자를 살린 것처럼, 하나님이 당신을 건져주실 겁니다.”
제사장이 환자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은 고대 이스라엘의 관행이었습니다.
의미심장하지요?
딱, 굶어 죽게 되었을 때, 누가 쌀독에 쌀을 채워줘서 살아난 것처럼 병을 이기고 일어난다!
하나님은 병자를 이렇게 고쳐주실 거라고, 제사장이 희망의 심지에 불을 붙입니다.
중병으로 겨우 찾아갔는데, 제사장이 이렇게 말합니다. 어떻습니까? 양심이 찔립니까?
시인이 기어드는 소리로 대답합니다.
시 41:4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나를 고치소서”
내가 가난한 자를 도우며 살지는 못했지만, 하나님 나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5년 전, 저도 그때 똑같은 심정이었습니다. ‘하나님 내가 착한 놈은 아니지만서도…’
〈 몸 아플 때 가장 서글픈 것 〉
옛날이나 지금이나 병든자는 희망의 끈을 붙들고 치료를 받습니다.
치료를 받아오는 동안 참 기가 막히고 서럽기가 한량이 없습니다.
건강할 때처럼 활동할 수 없는 것도 서럽지만, 그보다 더 서글픈 것이 있어요!
그것이 뭐냐? 오늘 시편 41장에서 아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 글씨, 아무개가 그 병에 걸렸다네? 그 친구 이제 다 끝났고만!”
“그 나이에 암에 걸렸으니, 오늘 죽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지 뭐~”
병문안 왔을 때는 “나을 거예요! 너무 걱정 마세요!” 이러고는 딴소리합니다.
그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귓전에 들리는 것 같습니다. 세상 참 냉혹합니다.
☻ 지금 저의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 41장에 나오는 얘기를 하는 중입니다. 헐~
그런데 치명적으로 울화가 치미는 것이 있습니다.
건강했을 때, 형제보다 더 가깝게, 네꺼 내꺼 없이 지냈는데, 그 사람이 뒷담화를 합니다.
시 41:9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오늘 설교 제목에 들어가 있는 “발꿈치”가 나왔습니다.
“발꿈치를 들었다”는 표현이 나왔는데, 이 말은 우리식으로 하면, “배신했다”는 뜻입니다.
시편 41장을 쓴 시인 다윗이 병석에 누웠더니, 평소 신뢰하던 절친이 배신했습니다.
세상이 다 변해도 그 친구만은 의리를 지킬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닙니다.
세상이 이렇게 냉혹합니다.
병든 자의 아픔은 ‘건강을 잃었다’는 그것만이 아닙니다. 여기에 또 하나가 있어요!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꽤 심각한 병에 걸려 본 경험이 있다면 누구나 공감할 겁니다.
병든 것도 서러운데, 친구마저 배신합니다.
유대인의 표현은 “발꿈치를 들었다”이지, “발가락을 들었다”가 아닙니다.
발가락을 드는 것은 정면에서 하는 발길질입니다.
발꿈치를 드는 것은 뒤돌아서 차는 것입니다. 등을 보이고 발길질했으니 ‘배신’입니다.
시인 다윗, 병든 것도 서러운데, 설상가상으로 배신의 아픔이 따라왔습니다.
☞ 비단 시인 다윗만이 겪는 서러움이 아닙니다. 병들면 누구나 겪는 고통입니다.
〈 온전한 구원을 위하여 〉
오늘 설교제목을 제가 《 발꿈치 신학 theology 》이라고 거창하게 정했습니다.
이 ‘발꿈치’에 무슨 신학(神學)이 있을까? 궁금하실 겁니다.
잘 들으시고 함께 은혜누리기를 기도합니다.
다윗의 시편 41장 9절의 하소연을 기억해 주신 분이 계십니다. ~ 누굴까요?
그렇습니다. 다윗보다 1천 년 후에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알아주십니다.
발꿈치를 들어올린 친구의 배신으로 고통 당한 시인 다윗을, 예수님이 기억하셨습니다.
☞ 예수님은 왜 “발꿈치를 들었나이다”(시편 41:9)를 기억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이 땅에 구원자로 오셨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이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구원은 궁극적으로 죄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세상에서 죄 안 짓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대로 두면 모두가 지옥갑니다.
하나님은 죄인구원을 위하여 성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주인으로 영접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 믿고 받게 되는 구원은 단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 뿐이 아닙니다.
이 땅에 살면서도 구원받은 자답게, 천국시민답게 살아가는 것이 구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병들어 당하는 고통에서도 “구원받으라!” 하시는 분입니다.
병들어 배신당하는 아픔까지도 예수님은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아픔까지도 내가 구원한다”라고 선포합니다.
요 13:18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다윗이 병들었을 때, 베프, 절친이 배신을 했습니다. 뒷통수를 쳤습니다.
다윗은 병들어 아픈 것보다 더 아프다고 시로 읊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아픔에서도 구원받으라!” 하십니다.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그로 인해 가슴이 찢어지는 다윗의 그 고통이 “나에게 응하게 하려는 것”이라 하십니다.
그 아픔이 나에게 응하여 내가 대신 짊어질 터이니, 너희는 아프지 마라!
“너희는 이 아픔에서도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것이 《 발꿈치 신학 》입니다.
〈 발꿈치 신학 〉
시편 41장을 인용한 요한복음 13장은 그 유명한 “세족식 장면”입니다.
유월절 앞 두고,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십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발꿈치에 묻은 오물까지 정성껏 씻어주십니다.
발꿈치는 우리가 걸음을 걸을 때 가장 먼저 땅에 닿습니다.
땅을 딛고 힘차게 일어서기 알맞게 발꿈치는 설계되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발에서 가장 큰 힘을 지탱하기 알맞게 되어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면서, 지난 3년 동고동락했던 자 중 한 사람!
누구지요? 가룟 사람 “유다” 그 자가 “발꿈치를 들 것이다”
예수님을 배신하는데, 그 배신은 1천 년 전 다윗의 고통, 그 고통이 나에게 응한 것이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들, 예수 믿고 구원받는 자들!
그들도 늙고 병이 듭니다. 병이 들면 다윗이 겪었던 그 고통을 겪습니다.
그 고통까지도 나에게 “응한다” 그러니 너희는 “아파하지 말라!” 이 뜻입니다.
어떠세요? 《 발꿈치 신학 》 이해가 조금 되십니까?
☞ 저도 전립선암에 걸리고 벼라별 소리를 다 들었습니다.
다윗이 당한 고통에는 못미치겠지만, 누구나 병들면 그렇게 되나봅니다.
“황의찬이가 ‘아담은 빅뱅을 알고 있었다’를 썼기 때문에 암에 걸렸다.”
직접은 아니지만, 한 다리 건너서 전해 들었습니다.
그 친구는 ‘아담 빅뱅’을 읽어보지도 않고, 제가 빅뱅 신봉자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세상 참 냉혹합니다.
그 말을 한 친구, 정말이지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입니다.
생각 같아서는 열일 제쳐두고 쫓아가고 싶었습니다. 한바탕 한풀이를 하고싶었습니다.
그러나 참았습니다. 제가 어떻게 참아냈을까요?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고통을 예수님이 대신 감당하셨다!” 할렐루야~
그 고통이 예수님에게 ‘응’했습니다. 예수님에게 응답이 되었다는 말씀이지요!
저의 사례를 들어서 죄송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렇게 냉정합니다. 차갑습니다. 내 고통 나눠가지지 않습니다.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
☞ 주님만이 저의 고통을 가져가십니다. 할렐루야~
〈 세족식을 하시면서 〉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요 13:18)
예수님이 이 말씀을 언제 하셨다고요? ~ 세족식을 하시면서, 여기서부터 의미심장합니다.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그리고 18절에서 이 말씀을 하신 다음, 21절에서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십니다.
그리고 한 상에 둘러앉아 제자들과 함께 떡을 떼십니다. 최후의 만찬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 한 사람이 나에게 “발꿈치를 들 것이다!”
제자들이 “그 자가 누구입니까?” 득달같이 묻습니다.
요 13:2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유다는 주님이 주시는 그 떡을 받아 먹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서둘러 떠납니다.
왜 떠나요? “발꿈치를 들기 위하여~” “배신하기 위하여~” “스승을 팔아먹기 위하여~”
가룟 유다가 “발굼치를 들었습니다.” 그 밤에 예수님은 잡히십니다.
완벽한 “발꿈치 들기”입니다.
그 밤에 잡혀서 온갖 수난을 다 겪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결국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둡니다.
다윗은 시편 41장을 쓰고 한참을 더 살았습니다.
시편 41장 이후로도 다윗은 시편 수십 편을 더 남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발꿈치”를 들자마자 즉시 체포당합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둡니다.
“발꿈치 들기”가 성공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세상이 어찌 됩니까?
“발꿈치를 드는 자들의 세상” “배신자가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세상”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사흘만에 무덤을 깨끗이 비우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이 세상은 ‘개판 오분전’이 되었을 겁니다.
누구나 배신하고 이득을 취하는 자가 장땡인 세상이 되었을 겁니다.
그러면 누가 신의를 지키면서 삽니까? 누가 신뢰를 바탕으로 거래하겠습니까?
당장 눈앞에 보이는 더러운 이익을 위하여 신뢰를 헌신짝 버리듯 할 겁니다.
예수님이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 이렇게 말씀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 발꿈치 드는 자의 고통 〉
수많은 설교 제목 중에서 《 발꿈치 신학 》 이런 제목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 오시기 1천 년 전, 다윗이 병들었을 때 “발꿈치 드는 자”의 고통을 시로 읊었습니다.
예수님인 그 고통까지도 구원의 범주에 넣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도 그 고통에서 해방을 맛봅니다.
병들어 몸져 누운것도 서러운데, 돌아서서 배신하는 자들로 인한 고통, 견딜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입니다. 한량없는 은혜입니다. 여러분도 이 은혜를 꼭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뭐, 그렇다고 억지로 병에 걸릴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친구가 나를 대적하여 발꿈치를 들었습니다.
그 배신자, 응당 벌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의 말로를 잘 알고 있습니다.
발꿈치를 든 자가 응당 받아야 할 징벌입니다.
《 발꿈치 신학 》은 이것으로 마무리 되지 않습니다.
발꿈치를 휘두르다가 낭패를 당한 어떤 사람의 이야기가 성경에 있습니다.
행 26:14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사울이 주님의 제자들을 색출하러 가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납니다.
엎드러진 사울에게 주님 말씀합니다.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가시채는 수레를 끄는 말이 뒷발질할 때 딱 거기를 차도록 달아놓은 가시묶음입니다.
수레를 끌기 싫다고 뒷발질 했다가는 그 가시에 찔려 죽는것보다 더 아픕니다.
수레를 끄는 말이나 당나귀, 한 번 차고, 두 번 차고 하면서 길들여집니다.
사울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색출하겠다고 길길이 날뛰었습니다.
뒷발질을 한 것입니다. “발꿈치를 들었다” 이 말입니다.
그러다가 가시채에 찔리는 고통에 멈추고, 주님의 제자가 되어 신약성경 13권을 씁니다.
《 발꿈치 신학 》의 신묘막측함인 줄 믿습니다.
우리도 걸핏하면 발꿈치를 들어올리는 못된 사람이었습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그러다가 사울처럼 가시채를 걷어 차, 거꾸러진 일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렇게 길들여져 우리도 다윗처럼 발꿈치를 드는 자로 인해 고통을 경험합니다.
그 고통이 예수 그리스도! 주님에게 응했습니다. 주님이 감당하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가 다윗이 되고, 바울이 되었습니다. 《 발꿈치 신학 》의 미학이며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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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24일 주일 설교문이 완성되었기에 미리 올립니다. 함께 은혜 나누기를 기도합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