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연재
불교와 상담 : 반 조
글 손강숙
(중앙승가대학교 교수 / nie1206@hanmail.net)
한강 작가가 스웨덴에서 202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서 뿌듯함, 자랑스러움이 밀려왔다. 한강의 작품 중 단편소설 작별이라는 작품을 읽었을 때를 기억한다. 겨울날 벤치에서 잠시 졸다가 눈사람으로 변한 엄마가 아들과 작별하는 장면이다. 손이 닿으면 손가락이 녹고 얼굴이 닿으면 뺨이 녹고 두 팔을 벌려 안으면 가슴이 녹아버려 어찌할 도리가 없는 상실의 고통을 온몸으로 느끼게 했다. 엄마는 남극이나 북극으로 가면 된다고 아들을 안심시키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눈사람이 된 엄마가 녹지 않을 수 있는 곳은 이 지구촌 어디에도 없다. 엄마는 그동안 살아왔던 18평 아파트와 작별하고 이어서 아들과 끝말잇기 놀이를 하면서 작별한다. 아들은 엄마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작가가 작품에서 신의 사랑이 있다면 모성애가 아니라 그것은 바로 아기가 엄마를 보고 미소 짓는 사랑일지 모른다고 말한 것처럼 아이들은 종종 엄마에게 그들의 감정을 이야기함으로써 스스로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연습을 한다.
딸 ‘엄마, 오빠가 나 때렸어’(울면서 달려온다)
엄마 ‘아이고, 우리 딸, 오빠가 때렸어? 어디 어디, 엄마가 호오 해줄게, 엄마가 오빠 많이많이 혼내줄게’(딸의 속상한 감정을 반영한다)
억울하고 분하고 화난 감정을 엄마에게 표현하고 나면 아이들은 울음을 뚝 그치고 금방 얼굴이 밝아져 다시 놀이를 시작한다. 아이들이 엄마에게 자신의 감정을 나누는 것은 안도감을 경험하게 한다. 또한 엄마의 반응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용기를 가지고 감정과 마주했다는 자부심을 느낀다.
마치 엄마의 아이에 대한 반응처럼 상담에서도 감정의 반영(reflection)이 중요하다. 내담자의 기쁨, 슬픔, 화남, 걱정스러움과 같은 감정을 상담자가 반영하는 것은 내담자로 하여금 감정을 표현하도록 고무시키는 이상적인 개입이다. 상담자가 내담자의 느낌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를 명확히 말하는 것은 상담자가 내담자에 대한 이해를 전달하므로 상담관계를 형성하는 데에도 도움을 준다. 상담에서 감정의 반영을 강조한 상담자 중 한 명이 인간중심상담의 창시자인 칼 로저스(Carl Rogers, 1902-1987)이다. 로저스는 감정은 우리 경험의 주요한 일부분이라고 말하면서 감정을 충분히 경험하는 과정은 곧 자신을 찾아가는 변화의 과정과 같다고 했다.
1964년 중년의 글로리아는 이혼 이후 아이와의 문제를 상담하기 위해 로저스를 찾아간다.
로저스는 글로리아의 감정을 반영함으로써 자신을 더 깊이 있게 탐색하게 하고 “좋은 엄마”에 대한 자신의 기준을 인식하도록 돕는다.
글로리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최근에 이혼을 했어요. 아이와 뭐든 털어놓고 지내요. 한번은 우리 아이가 아빠와 헤어지고 나서 남자와 사랑한 적이 있는지를 물었어요. 저는 아이에게 거짓말을 했어요. 거짓말한 것이 죄책감이 느껴져요.
로저스 지금까지 아이와 솔직한 대화를 나누어왔는데 관계에 손상을 입힌 것 같아서 걱정이 되시나보군요.
글로리아 저는 좋은 엄마이고 싶어요. 제가 원하는 일을 하는 것과 좋은 엄마가 되는 것 둘 다를 원해요. 아이에게 잘해주지 못하고 충분한 시간을 못 보내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어요.
로저스 당신은 좋은 엄마가 되는 일이 아주 중요한 일이군요. 훌륭한 엄마가 되기를 원하는데 당신의 실제 감정은 그것과 조금 다르게 느껴지는군요.
감정의 반영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수용하는 과정은 스스로 자신의 욕구와 소망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또한 그러한 발견은 변화를 가능하게 만든다.
로저스는 상담을 통해 내담자가 참 자기를 확인하고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상담자 자신도 자신을 보는 노력을 충분히 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로저스는 상담에 앞서 스스로에게 ‘이 관계에서 나는 진실한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은 로저스가 글로리아와의 관계에서 아무 것도 숨기기 않은 채로 다가가고 글로리아가 상담자를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한다. 진실함(Genuiness)은 관계에서 가장 중요하다. 로저스가 진실해진다면 로저스의 감정이 의식 위로 떠오르게 되고 표현된다. 로저스가 내면에서 경험하는 것은 로저스의 의식을 통해 나타나게 되고 그것이 관계를 통해 외부로 드러나게 된다. 마치 아이가 엄마의 눈을 쳐다보고 엄마가 아이를 보는 것과 같다. 다시, 로저스는 자신에게 ‘나의 눈이 아니라 내담자의 눈을 통해 내담자의 세상을 보는가?’ 라고 묻는다. 이 질문은 글로리아의 내면의 감정에 더 민감할 수 있는가? 글로리아가 무엇을 느끼는지를 알수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로저스는 글로리아의 눈을 통해 글로리아의 세상을 보고 그녀의 표면적인 감정뿐만 아니라 그 표면 아래에 있는 감정을 느낀다. 로저스는 민감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글로리아의 경험의 세계 안으로 들어간다. 상담자가 이러한 자질을 갖게 될 때 내담자와 진정한 교감이 이루어지고 치유적 관계가 형성된다.
상담자가 내담자의 눈으로 내담자의 경험의 세계를 보는 것과 달리 수행자는 지혜의 눈으로 자신의 본래의 성품을 본다. 회광반조(廻光返照)하는 것이다. 회광반조는 지혜의 빛으로 자기를 비추어보는 일이다. 어디에도 머무름없이 지금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알아차리는 것이다. 내담자가 상담자의 도움을 받아 인생을 새롭게 살아가게 되는 것과 달리 수행자는 반조의 노력을 통해 매순간 혼자 앞으로 나아가고 나아가고 또 나아간다.
포천 보문사에 계시는 비구니 스님이 그런 분이다. 스님은 절에 오는 신도들의 고통을 해결해주기 위해 상담을 전공하고 불교와 상담을 융합하여 꾸준히 신도들의 고통을 달래주고 있다. 그 절에는 강아지가 한 마리 살고 있다. 어떤 신도가 멧돼지들이 못 내려오도록 데려다 놓은 강아지인데 그 강아지 이름이 ‘반조’다. 반조는 작별이라는 작품에 나온 하얀 눈처럼 겉도 속도 하얗다. 겨울 보문사에 눈이 오면 절은 하얀 도화지가 된다. 하얀 도화지에는 어떤 그림이든 가능하다. 눈이 오면 반조는 하얀 눈밭을 이리저리 뛰어다니지만 흔적이 남지 않는다. 눈인지 강아지인지 분별이 어렵다. 여름 보문사는 흐르는 계곡물이 압권이다. 아침마다 반조는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가재들과 놀다가 수행하는 스님 옆에 함께 앉아 정진한다. 왜 스님은 강아지의 이름을 반조라고 했을까? 아마도 매일 회광반조(廻光返照)를 실천하는 삶을 살려고 다짐하는 것은 아닐까.
가끔 등산객들이 우연히 지나가다 보문사에 들른다. 스님은 누구든 절에 오면 직접 따서 말린 꽃차를 한잔 내주고 그 인연이 고마워 그냥 보내지 않는다. 10분 명상이라는 뜻밖의 선물을 내놓는다. ‘숨을 들이쉬고 숨을 내쉬고 또 숨을 들이쉬고 숨을 내쉬기’를 반복하는 동안 등산객들은 자신도 모르게 반조한다. 반조는 등산객들이 자신의 삶을 비추게 만든다. 이 짧은 인연으로 등산객들은 일상에서도 반조를 실천할 수 있다. 반조는 등산객들이 삶의 괴로움을 바로 볼 수 있게 하고 지혜가 증장되게 할 것이다. 누구나 괴롭지만 아무나 상담실 문을 두드리는 것이 아닌 것처럼, 누구나 산을 오를 수는 있지만 아무나 산문을 들어서지는 않는다. 자신이 선택한 인연의 길인 것이다. 이런 것이 부처님의 가피다.
일상생활을 하면서 반조는 쉽지 않다. 몸이 아플 때,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부모님과의 관계가 틀어졌을 때, 다른 친구들은 잘 지내는 것 같은데 나만 외로운 섬처럼 느껴질 때, 직장에서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우리는 대부분 나를 비춰보기보다 그저 습관대로 상대방을 먼저 비난하게 된다.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냐고 화를 벌컥 낸다. 내 말을 귀담아 들어주고 나를 어루만져주는 엄마도, 나의 분노와 슬픔을 반영해주는 상담자도 지금 내 옆에 없다.
통도사 화엄산림 28일차 오후법문에서 법사스님은 우리들에게 ‘모든 중생이 본래 부처님이다. 본래 부처였던 그 마음에 홀연히 미혹한 한 생각이 일어난다. 낮에는 해를 보면 누구나 동서남북 방향을 짐작할 수 있지만 캄캄한 어둠 속에서는 사방이 다 어두우니까 방향을 짐작할 수 없다. 그와 같은 상태가 홀연히 미혹해진 것이다. 동쪽을 북쪽이라고 하고 서쪽을 남쪽이라고 하게 된다. 착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본래는 다 부처였다‘라고 말씀하신다. 그 말씀은 울림이 되어 슬픈 혹은 화난 우리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반조하게 만든다. 우리 모두 본래 부처로 돌아간다면 부모님을, 연인을, 친구를, 그리고 직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내가 만든 나의 틀로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나도 그들도 모두 본래 부처니까.
한 선지식이 써주신 입춘 부적을 올린다. 부적을 얻으러 간 날 새벽에도 흰 눈이 왔다. 독자님들 모두 지혜의 빛으로 자기를 ‘비추어 봄’의 시간을 통해 2025년 한해 자신이 세운 서원을 두루 성취하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