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결심/김경미
라일락이나 은행나무보다 높은 곳에 살지지 않겠다
초저녁 별빛보다 많은 등을 켜지 않겠다
여행용 트렁크는 나의 서재
지구 끝까지 들고 가겠다
썩은 치아 같은 실망
오후에는 꼭 치과엘 가겠다
밤하늘에 노랗게 불 켜진 보름달을
신호등으로 알고 급히 횡단보도를 건넜으되
다치지 않았다
생각하면 티끌 같은 월요일에
생각하수록 티끌 같은 금요일까지
창틀 먼지에 다치거나
내 어금니에 혀 물린 날 더 많았으되
함부로 상처받지 않겠다
목차들 재미없어도
크게 서운해하지 않겠다
너무 재미있어도 고단하다
잦은 서운함도 고단하다
한계를 알지만
제 발목보다 가는 담벼락 위를 걷는
갈색의 고양이처럼
비관 없는 애정의 습관도 길러보겠다
<시 읽기> 오늘의 결심/김경미
어디선 많이 본 듯한 표정을 하고 노인네들 몇이 전동차에 앉아 있다. 하품을 하거나 중요한 것 같지도 않은 얘기를 열심히 핸드폰에다 쏟아붓거나 볼 것도 없는 신문을 뒤적거리거나 벽에 붙어 있는 광고판을 정성껏 쳐다보며 앉아 있다. 바퀴 달린 큰 가방에 올드팝 시디를 싣고 들온 중년 남자 하나가 <체인징 파트너>를 크게 틀어놓고 무어라고 떠들지만 대꾸도 없고 반응도 없다. 시각 장애인이 동전이 든 플라스틱 바구니를 들고 찬송가를 부르며 지나가도, 가끔 누군가가 동전을 넣어도, 멍하니 쳐다보기만 한다.
그 노인들은 다 제 몸 안에 소설책 여러 권은 채울 만한 이야기들을 갖고 있으니라, 소설보다 더 기가 막힌다는 이야기가 저 평범해 보이는 삶에도 지나갔으리라, 몸과 마음으로 겪어내기 힘든, 죽어도 여러 번은 죽었어야 할 심각한 위기와 고통도 지나갔으리라. 살아보려고 악쓰고 비명 지르고 주먹과 악다구니로 대들어보고 며칠 동안 잠도 못 자고 끙끙 앓고 이러저리 잔머리 굴리며 해쳐나갈 길을 생각해보기도 했으리라.
날뛰는 야성과 억누를 수 없는 본능과 술 한 말을 먹어야 겨우 자빠질 성깔과 광기와 배 째라와 오기와 물불 안 가리는 발정을 박살 내며 삶의 폭력이 한바탕 휘젓고 지나갔으리라, 마음으로 여러 번 죽어보고 망치로 뒤통수를 맞는 듯한 충격이 온몸을 몇 번 울리고 지나간 후에, 울음과 한숨과 분노와 절망과 체념이 지나간 후에, 날뛰던 힘들은 비로소 저렇게 고분고분해졌으리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삶의 행패와 안하무인과 변덕과 불행 앞에서 살인이 벌어져도 모른 척하거나 검든 희든 그저 예, 예, 하거나 구렁이 담 넘어가듯 뭉그적거리는 지혜를 다 터득한 듯, 이제는 모두 도사 같은 얼굴들을 하고 있다. 저 불랑배 같은 삶한테 함부로 덤비면 너희들도 다 요 모양 요 꼴이 되느니라 하고 알려주는 것 같다. 그 엄청난 이야기들이 아무 일 없이 그럭저럭 살아온 듯한 얼굴을 하고 변변치 않은 옷을 입고 전동차 의자에 앉아 흔들거리고 있는 것이다.
삶은 우리에게 이렇게 얘기하는 것 같다. 열정을 다해 열심히 일할수록 손해만 볼 거야. 진정으로 내가 가진 것을 다 주는 절절한 사랑을 할수록 이용과 배신만 당하고 실패할걸. 제 의지와 힘만 믿고 열심히 앞으로 나아가다가는 남한테는 물론 자신한테도 다쳐. 배짱과 오기는 더 튼 폭력만을 불러 치명상을 줄 거다. 결코 그렇지 않다고? 그것은 나약한 실패자의 변명일 뿐이라고? 그럼 어디 해봐. 제대로 한번 당해봐.
「오늘의 결심」이 시인도 한때는 은행나무보다 높은 곳을 향하고 별빛보다 많은 등을 켰었다. 그러다 삶에게 사랑에게 자신에게 배반당하고 좌절을 겪으면서 순수하고 진정한 욕망의 부질없음을 깨닫게 되었나보다. 그래서 시인은 선언한다. 이제 더 이상 높은 이상을 품거나 야심적으로 미래를 설계하거나 나 자신을 믿고 앞으로만 나아가다가 실패하고 상처받는 어설픈 짓은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삶을 붙들고 아등바등 헛심을 쓰지 않겠다고. 언제든지 짐 싸놓고 미련 없이 떠날 준비를 하겠다고. 이제는 계산적으로 눈치 보고 처세하면서 삶이 주는 상처를 영리하게 피하겠다고. 사랑하더라도 고양이처럼 “비관 없는 애정의 습관”을 닮아보겠다고. 쓸데없이 마음만 아프게 하는 순진한 열정은 버리겠다고.
그러나 반어적인 말투도 잘 살펴야 한다. 정말 시인은 정직하고 순수하고 긍정적이고 지혜로운 삶의 태도를 버리겠다는 것일까? 겉으로는 웃으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하고 있지만 안으로는 삶에 대한 분노와 오기의 칼이 느껴진다. 그래서 이런 말이 들리는 것 같다. 삶과 사랑과 자신에게 배신당할 준비가 필요하다고. 상처 받고 포기할 수 있는 큰마음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삶의 횡포에 굴복하여 고분고분해지는 꼴을 들키지 않으려면 실패와 좌절과 상처를 가지고 노는 여유와 웃음과 지혜가 필요하다고. 나약한 개인이 심술궂고 힘센 삶에 정면 대결해서 이길 수는 없지만 한바탕 웃음거리로 만들어 마음껏 비아냥거리고 조롱할 수는 있다고.
―김기택, 『다시, 시로 숨 쉬고 싶은 그대에게』, 다산북스,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