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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 그리스도교 / 이슬람교 = 세계 3대 종교
그중 하나로서 전아시아인들의 정신적·사상적·문화적·사회적 삶에 크나큰 영향을 끼쳐왔다. 19세기 후반부터는 서양세계에도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불교는 고타마 싯다르타(Gautama Siddhartha)라는 한 역사적 인물에 의해 창시되었다. 그는 수행을 통해 '부처'(Buddha 佛陀), 즉 '깨달음을 얻은 자'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불교는 기본적으로 부처의 가르침을 전하고 실천하는 종교이다.
불교: 해인사의 장경판고에 보관되어 있는 대장경판, 국보 제32호,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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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불교의 기원과 역사불교 출현의 역사적 배경
불교가 출현한 때인 BC 6세기경에는 당시 인도의 기성종교였던 브라만교에 커다란 변화가 일고 있었다. BC 1500년경부터 인도 서북부를 침공하여 원주민을 지배하며 아리아인들은 4성 계급(varṇa) 제도를 중심으로 한 사회질서를 구축했다. 브라만교는 4계급 가운데서 가장 신성한 사제계급인 브라만(Brāhmaṇa)들에 의해 형성된 종교·윤리·문화 전통으로서, 베다라는 성전에 근거한 다신(多神) 신앙을 지닌 종교였다.
여기서는 신과 조상들에게 드리는 제사의례를 중요시했으며 4계급이 각각 지켜야 할 의무를 강조했다. 브라만교는 주로 인도 서북부에 자리잡고 있었으나 BC 6~7세기에는 갠지스 강의 중류와 하류를 따라 인구이동이 생기면서 북인도의 중부와 동부로 퍼져가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지역에는 풍부한 농업생산을 기반으로 하여 도시가 생겨나고 상공업이 발달했으며, 종래의 부족국가 대신 코살라와 마가다 같은 강력한 군주국가들이 출현하였다.
이에 따라 브라만들의 종교적 권위와 사회적 지도력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으며 도시의 세속적 분위기는 보다 합리적인 형태의 새로운 종교를 요구하게 되었다. 종래의 번잡한 제사의례에 대한 비판과 아울러 제사행위의 대가로서 사후에 천상에서 영원한 복락을 누린다는 관념에도 회의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상적 변화는 베다의 마지막 부분인 〈우파니샤드 Upanishad〉 사상에도 이미 나타났다.
인간은 '유한한 행위'(業 karma)로서는 도저히 영원한 세계를 얻을 수 없고 끊임없이 윤회(saṃsāra)의 세계에서 생과 사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는 자각과 더불어 인간의 참자아와 우주의 궁극적 실재를 아는 신비적 지식(jñāna)을 통한 해탈이 강조되었다. 그런가 하면 브라만교의 울타리를 벗어나서 베다나 브라만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제사행위와 내세를 거부하는 자유사상과 새로운 종교운동들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은 사문(沙門 śramaṇa)이라 불렸는데 그들은 출가자(出家者)들로서 걸식생활을 하면서 숲속에서 고행과 명상을 통해 인생문제에 대하여 다양한 해결방식을 제시했다. 주위에는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추종자들이 모여들어 그로써 하나의 출가 공동체(saṃgha)가 형성되기도 했다. 그들 가운데는 철저한 유물론자·숙명론자·도덕부정론자들도 있었으며 자이나교의 창시자인 니간타 나타푸타와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도 그들과 같은 사문으로서 인생고의 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해탈의 길을 제시했던 것이다.
석가모니 생애
석가모니의 본래 이름은 싯다르타(達多 Siddhārtha)로서 고타마는 그의 성씨였다. 석가(釋迦 Śākya)족 출신의 성자라 하여 석가모니(釋迦牟尼 Śākyamuni) 혹은 간단히 석존(釋尊)이라 부르기도 한다. 석가족은 지금의 네팔과 인도 국경 부근에 있었던 하나의 조그마한 왕국이었으며 수도는 카필라바스투였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BC 560년경(460년경으로 보는 설도 있음)에 이 왕국의 정반왕(淨飯王 Śuddhodana)과 마야 부인(摩耶夫人 Mahāmāyā)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왕궁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했으며, 야소다라와 결혼하여 아들 라훌라까지 두었으나 인생고의 문제를 깊이 자각한 후 29세의 나이에 왕궁을 떠나 출가 수행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는 유행사문(遊行沙門)으로서 마가다 국에 가서 여러 출가 사문들을 만나 각종 명상법을 배우고 깊은 선정(禪定 dhyāna)에 드는 체험을 했으나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독자적인 수행의 길을 걸으면서 극심한 고행을 통해 해탈을 얻으려는 노력도 해보았지만 몸만 극도로 쇠약해지고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깨닫고는 고행을 포기했다.
수자타라는 처녀가 공양하는 우유죽을 먹고 몸을 회복한 후 나이란자나 강에서 목욕을 하고 그 물을 마셨다고 한다. 그와 함께 고행을 하던 수행자들은 그가 고행을 포기했다고 비난하면서 그에게서 떠났고, 그는 홀로 숲으로 가서 이른바 보리수(菩提樹:나중에 붙인 이름으로 aśvattha라는 무화과 나무의 일종) 밑에서 깊은 선정에 드는 체험을 하는 중에 깨달음(菩提 bodhi)을 얻어 부처, 즉 각자가 되었다. 진리의 깨달음으로 인해 그의 마음은 모든 번뇌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해탈을 얻은 것이다. 이것이 석존의 성불체험이었고 불교가 시작되는 결정적 사건이었다.
깨달음을 얻은 석존은 오랫동안 마음의 평안과 기쁨을 맛보면서 지냈으며 자신이 깨달은 진리(法 dharma)가 너무나 심오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설법을 주저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마음을 돌이켜 교화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석존은 제일 먼저 바라나시의 녹야원(鹿野苑)으로 가서 자기와 함께 고행을 하던 걸식승 다섯 비구를 찾아 그들에게 고행이나 쾌락주의의 양 극단을 피해 중도를 따라 수행할 것을 말하고 '4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諦)와 '8가지 바른 길'(八正道)에 대한 설법을 하여 그들을 제자로 얻었다고 한다.
이것이 불교의 수도 공동체인 승가(僧伽)의 시작이었다. 석존은 마가다 국에서 교화활동을 하면서 사리불(舍利佛 Śāriputra)·목건련(目犍連 Maudgalyāyana)·가섭 등 많은 제자들을 얻게 되었다. 그 가운데는 수달다(須達多 Sudatta)와 같은 부유한 상인들도 있었고, 마가다의 왕 빔비사라(Bimbisāra)도 있었는데, 빔비사라는 석존이 머물 수 있도록 죽원(竹園)을 보시(布施)하기도 했다.
한편 석존은 고향인 카필라바스투를 방문하여 부모와 재회하고 아들 라훌라를 출가시켰으며, 그의 종형제 데바닷타(提婆達多 Devadatta)와 아난다(阿難陀 Ānanda)도 그의 출가 제자로 받아들였다. 또한 석가모니의 이모인 마하프라자파티 고타미(Mahāprājāpātῑ Gautamῑ)도 수차례의 간청 끝에 출가의 허락을 받아 첫 비구니(比丘尼)가 되었다. 그후 많은 여자들이 출가하여 비구니 승가를 형성하게 되었다. 석존은 35세 때 성도(成道)한 후 입적하기까지 45년 동안 주로 마가다 국과 코살라 국을 중심으로 중인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포교활동을 했다.
80세에 쿠시나가라로 가는 길에 병을 얻어 반열반(般涅槃), 즉 육신을 떠난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 죽음을 앞두고 석존은 승가의 앞날을 염려하여 많은 유언을 남겼다. 석존은 자신이 죽은 뒤 사람들에게 그들 스스로와 법(dharma)을 의지하여 수행할 것을 가르쳤으며 자신이 남긴 법과 계율을 스승으로 삼아 수행할 것을 권했다. 〈대반열반경 大般涅槃經 Mahā- parinibbāna-sutta〉에 의하면 석존의 사후 그의 유해는 화장되었고 유골(遺骨 śarῑra)은 중인도의 8부족들에 의해 분배되어 각기 사리탑이 세워졌다고 한다. 이것은 현대의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어느 정도 사실로 입증되고 있다.
석가모니 교설
석존의 교설은 그의 가르침을 모아놓은 경장(經藏)과 율장(律藏)에 여러 가지로 전해지고 있으나 무엇보다도 그가 성도 후 다섯 비구들을 찾아가서 행했다고 전해지는 그의 첫 설법 내용인 사성제와 팔정도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이것을 기본으로 하여 석존의 교설과 사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첫번째 거룩한 진리로서 인생의 고에 관한 고성제(苦聖諦)를 설했다고 한다. 사랑하는 자와 이별하는 괴로움, 미워하는 자와 만나는 괴로움,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괴로움, 그리고 색(色 rūpa)·수(受 vedanā)·상(想 saṁjñā)·행(行 saṃskāra)·식(識 vijñāna)의 5가지 요소들의 복합체인 인간존재 그 자체가 괴로움임을 설했다.
여기서 인간존재 그 자체가 괴로움이라 함은 인간존재를 구성하는 신체적 요소(色), 느낌(受), 생각(想), 의지(行), 인식(識) 등의 물질적·정신적 요소들이 모두 항시 변하는 무상(無常 anitya)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 어느 것도 항구적인 만족을 줄 수 없는 괴로운 것들이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라고 석존은 말한다. 뿐만 아니라 위에 언급한 5가지 묶음(五蘊)들 가운데 어느 것도 나의 불변하는 자아로 취할 것이 못 된다고 한다(→ 색인:아트만). 석존에 의하면 인간이란 다만 수시로 변하는 요소들이 화합하여 하나의 임시적인 존재를 산출하고 있을 뿐 인간에게는 항구불변의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無我 anātman)고 한다. 고·무상·무아는 그가 본 인간존재의 참된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괴로운 것을 즐거운 것으로, 무상한 것을 항구적인 것으로, 영원불변의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데도 존재하는 것으로 전도된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2번째 진리는 고집성제(苦集聖諦)
고가 발생하는 원인을 밝히는 진리이다. 인간 존재와 그 삶이 고인 것은 우리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욕구하는 갈애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갈애가 계속되는 한 인간은 집착(取)을 일으켜 행위(業)를 하여 그 결과(業報)로써 사후에 또다른 고통의 존재로 태어나 같은 과정을 또다시 반복하게 된다.
그런가 하면 갈애 또한 원인을 갖고 있다. 갈애는 인간의 실상을 모르는 무지(無明)와 이 무지를 조건으로 하여 생긴 전생에 있어서 누적된 업력(行)에 의해 생기는 것이다. 석존은 이와 같이 고를 일으키는 '복합적 조건'(集起)들을 분석적으로 설했으며 이같은 고의 조건적 발생을 연기(緣起)라 불렀다. 무지와 갈애로 인해 인간은 과거·현재·미래 세를 통해 끊임없는 생사(生死)의 악순환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3번째 진리로서 석존은 이러한 고가 멸한 상태, 즉 무지와 갈애가 멸한 상태에 관한 진리인 고멸성제(苦滅聖諦)를 설했다. 이는 고가 멸한 상태(nirodha)가 있다는 진리이며 이러한 상태를 열반(涅槃)이라 부른다. 열반은 탐욕(貪)·성냄(瞋)·무지(痴 moha)의 3독(三毒)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로서 생사의 세계를 초월한 경지를 뜻한다.
열반은 과거세에 지은 업의 소산인 현재의 몸을 지닌 채로도 실현 가능하고(석존이 성도했을 때처럼) 사후에 신체를 떠나 실현되기도 한다. 후자를 반열반(般涅槃 parinirvāṇa)이라고 부른다. 석존의 입적시에 실현된 경지이다. 이런 사후의 열반에 대하여 석존 당시부터 제기되었던 문제는 인간에게는 영원불멸의 자아가 없는데 누가 열반을 체험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따라서 현세에서 열반을 실현한 여래(如來 Tathāgata)가 사후에 존재하는가 안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으며 석존은 이에 대하여 가부를 논하지 않았다. 이 문제는 그가 대답을 거부한(無記) 것으로 전해지는 14가지 사변적 문제 가운데 하나였다. 석존은 열반이라는 초월적 실재의 신비를 그대로 남겨두었으며 우리의 일상적 개념으로 규정하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4번째 진리로서 석존은 고멸도성제(苦滅道聖諦), 또는 줄여서 도제(道諦)를 설했다.
즉 고의 종식인 열반으로 가는 길, 팔정도에 관한 설법이다. 팔정도는 정견(正見)·정사(正思)·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정정(正定)을 실천하는 것으로서 이 8가지 수행을 셋으로 크게 묶으면 계(戒)·정(定)·혜(慧)의 삼학(三學)이 된다. 도덕적 행위와 삶(戒), 흩어진 마음의 통일과 정화(定), 사물에 대한 올바른 통찰(慧)을 닦음으로써 열반을 실현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석존은 팔정도를 설함과 아울러 쾌락을 탐하는 삶과 육체를 괴롭히는 고행주의의 양극을 피해 중도의 길을 따를 것을 가르쳤다. 중도는 8가지 수행을 올바로 할 수 있도록 하는 기본태도인 것이다. 석존은 이같은 고락의 중도 외에 단상(斷常)의 중도, 혹은 유무(有無)의 중도도 가르쳤다. 즉 영원한 자아가 존재한다는 상주론(常住論)도 석존은 거부했고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죽으면 아무 것도 남지 않으며 업보도 내세도 없다는 단멸론(斷滅論)도 거부했다. 그러나 존재의 조건이 계속되는 한 인간은 조건적 존재로서 존속한다.
열반이란 이렇게 조건적으로 존재하는 무상하고 괴로운 인간존재 자체가 완전히 극복된 무조건적인 세계이며, 팔정도는 무지와 탐욕 같은 인생의 조건들을 극복하여 열반을 실현하는 길인 것이다.
초기 수도공동체
석존의 가르침을 듣고 따르는 출가 사문들은 승가라는 수도공동체를 형성했다. 승가는 석가모니 부처와 그가 설한 법과 더불어 이른바 불교의 3보(三寶)를 이룬다. 석존을 따르는 출가 사문들은 석자(釋子), 즉 정신적인 의미에서 석존의 아들들이라 불렸으며 그의 가르침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들이라 하여 성문(聲聞)이라고도 불렸다. 그는 사회적 신분이나 계급, 남녀노소의 구별 없이 누구나 원하면 출가해서 그의 제자가 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에 승가는 기본적으로 보편적이고 개방된 사회였다.
다만 승가의 일원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부모의 허락을 받아야 했으며 신체적 결함을 지닌 자나 범법자들은 승가에 들어올 수 없었다. 석존은 출가 수행자들의 자기완성과 공동생활을 위해 그들이 지켜야 할 계율을 제정해 주었다. 계(戒)란 도덕적 규범들로서 수행의 기초가 되는 것이며, 율(律)은 출가 수행자들이 공동체 생활에서 지켜야 할 규범들을 말한다.
가장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건 5계로 살생·도둑질·거짓말·간음·음주를 금하는 것이며, 이 5계는 출가승들은 물론이요 일반 재가신도들에게도 해당되는 도덕적 규범이다. 출가승들이 지켜야 하는 계는 이보다 훨씬 더 많아서 남자 출가승으로서 수계식을 거친 비구승인 경우 구족계(具足戒)라고 불리는 227계(또는 250계)를 지켜야 하며, 비구니의 경우는 311계, 그리고 20세 이하의 출가 사문인 사미(沙彌)와 사미니(沙彌尼)의 경우에는 10계가 있었다.
비구·비구니·사미·사미니는 승가를 구성하는 4부류의 출가자들이었으며, 사미니의 경우는 18세가 되면 정학녀(正學女)가 되어 2년 동안 더 수행한 후 비구니가 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정학녀를 별도의 그룹으로 보면 승가는 5중(五衆)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석존은 계율들을 일시에 체계적으로 설한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수행에 도움이 되도록 제정해주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규정 늘고 공동체 생활 자체가 제도화됨에 따라 계율도 체계화된 것이다. 본래 석존과 그의 제자들은 일정한 주처 없이 유행하면서 걸식을 하고 야숙을 하거나 나무 밑에서 잠을 자는 등 비교적 극기적인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러나 부유한 재가신자들이 주처를 제공함에 따라 점차로 정착된 공동체 생활을 하게 되었다.
특히 인도의 계절상 여름의 장마철이 오면 유행이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본의아니게 생명체들을 해칠 우려도 있기 때문에 우기 동안은 수행자들이 한 곳에 모여 우안거(雨安居 varṣa)를 보내야만 했으며 이것이 관습화되기 시작하면서 점차로 유행을 포기하고 비하라(vihāra 精舍)에 거주하면서 수행하는 정주공동체가 출현하게 된 것.
정주승가는 일정한 지역적 경계(sῑmā)를 지니고 있었으며 한 경계 내에 있는 수도승들은 공동체의 회의나 행사에 반드시 참여하도록 되어 있었다. 한 정주 승가를 구성하는 최소 인원은 4명이었으며 구족계를 주고 비구가 되게 하는 수계식(授戒式)을 행하기 위해서는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최소한 10명의 비구가 필요했다.
승가의 생활은 금욕적인 삶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좌선을 하며 식사는 1일 1식으로 오후식은 금지되었다. 수도승들은 재가자들이 기부한 승가의 물건을 공동으로 사용했으며, 사유물로서는 3종의 가사의, 1개의 밥그릇(食鉢)과 좌구(坐具) 등 6물(六物)뿐이었다. 원시 승가가 행하는 의식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포살(布薩)이라는 의례로서 한 경계 내에 있는 수도승들이 1개월에 2회씩 모여 구족계를 어기지 않고 지켰는지를 점검하면서 자신들의 생활을 성찰해 보는 의식이었다.
수도승들은 한 곳에 모여 구족계를 설한 계경(戒經 Prātimokṣa-sūtra)을 공동으로 암송하면서 계를 범했는지의 여부를 조목조목 점검하고 범한 경우에는 고백을 해야 했으며, 죄의 경중에 따라 벌이나 제재를 받게 했다. 그 가운데 가장 무거운 죄는 바라이(波羅夷) 죄로서 살인(斷人命)·도둑질(盜)·성행위(淫)·거짓으로 수행의 완성을 주장하는 죄(大妄言)를 범하면 승가로부터 영구히 추방당했다(→ 색인:금욕주의). 우안거가 끝날 때는 참여했던 모든 수행자들이 모여 자자(自恣)라는 안거 해산의식을 가지며 재가자들이 지어주는 새 옷 3벌 받는 의식도 행해졌다.
정주승가는 마을로부터 그리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수도승들이 걸식을 하러 가기에 불편이 없었으며 재가신도들도 수시로 방문해 승려들의 설법을 들을 수 있었다. 승가의 목적은 세속과의 단절이라기보다는 어디까지나 수행을 돕기 위한 환경을 제공하는 데 있었다. 출가승들은 자유로이 환속할 수 있었으며 승가 내에는 엄격한 위계질서가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수행 경력이 많은 비구의 지도를 따라 수도생활을 영위했으며 모든 중요한 일들은 민주적 절차에 따라 대중들의 합의에 의해 결정되었다. 이상과 같은 승가의 전통은 수천 년 간 이어져와서 오늘날도 스리랑카·미얀마·타이 등 상좌부불교(上座部佛敎)가 지배하는 곳에서는 큰 변화 없이 그대로 지속되고 있다.
재가불교
석존의 가르침은 주로 출가 수행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재가신자들을 도외시한 것은 아니다. 석존은 45년간의 긴 교화활동을 통해 수많은 재가신자들의 귀의를 받았으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들에게 적합한 형태의 설법을 베풀어주었다. 출가자들에게 베푼 설법이 사성제나 팔정도와 같이 주로 열반을 실현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라면 재가신자들을 위한 설법은 대체로 도덕적 삶을 통해 내세에 좋은 과보를 얻도록 하는 것을 주로 하고 있다.
재가신자들이 지켜야 할 계로서 석존은 5계를 가르쳤으며 주술이나 점복 등을 금하고, 동물의 희생을 수반하는 제사를 금했으며, 베다 성전의 권위나 혈통에 의한 브라만 계급의 우월성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재가신자들에게 증오는 또 하나의 증오를 일으키며 증오와 원한은 결코 또다른 증오와 원한에 의해 해결될 수 없음을 가르쳤다.
세상에서 아무리 귀하게 여기는 것들이라 할지라도 모두 무상하고 덧없는 것이기에 집착해선 안 된다는 것 가르치는가 하면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스승과 제자, 고용주와 고용인, 출가자와 재가신자 간에 지켜야 할 의무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가르침을 베풀었다. 상업에 종사하는 재가신자를 위해 석존은 상행위에 있어 지켜야 할 신용과 근면성을 강조했으며 재산증식 자체를 금기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정당한 부의 축적은 오히려 권장했다.
재가신자들은 석존 당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불(佛)·법(法)·승(僧) 3보에 귀의함으로써 자신들의 신앙을 표시했다. 재가신자들은 석존의 사후에 탑(塔 stūpa)에 안치된 그의 유골 숭배를 통해 석존에 대한 신앙을 표시하는가 하면, 승가가 필요로 하는 물질적 수요를 충족시켜줌으로써 승가에 대한 귀의를 표시했다. 석존 당시부터 부유한 장자들은 금전·토지·건물·숲·동산 등을 승가에 기증했으며, 이같은 행위를 통하여 그들은 동시에 자신들의 내세를 위해 선근(善根)을 심고 공덕(功德 puṇya)을 쌓는다고 믿었다. 한편 출가승들은 재가신도들의 재시(財施)에 대하여 설법을 통한 법시(法施)를 베풀어주었다.
부파불교의 기원과 역사결집(結集)과 근본분열
석존의 생존시에 승가 내에 교리나 수행상의 문제가 발생한다 하더라도 언제나 그의 권위 있는 가르침에 의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승가의 화합은 심각한 도전을 받지 않았다. 석존은 그의 높은 인격과 카리스마로 인해 승가의 절대적 귀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스스로를 교단의 우두머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누구도 그러한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석존은 그의 종형제였던 데바닷타가 자신을 교단의 우두머리로 세워달라는 요청을 거부했다. 그러나 석존은 사후 승가의 화합문제가 발생할 수 있음을 예견했던 것 같다.
석존의 마지막 날들의 행적에 대하여 상세히 전하고 있는 〈대반열반경〉에 의하면 석존은 사후 자신이 가르쳐준 법과 율을 스승으로 삼을 것을 부촉했다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석존의 입적 후 그의 교설에 관한 상이한 이해와 전승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승가는 곧 석존의 교설내용을 확정지을 필요를 느꼈으며, 이를 위해 승가의 대표자들이 모여 이른바 결집회의를 개최하게 된 것이다. 결집이란 석존의 가르침을 모인 사람들이 합송(合誦 saṁgῑtῑ)하여 확인하는 행위로서 제1차 결집은 500명의 아라한(阿羅漢:수행을 완성한 자)들이 모여 가섭의 주재로 열렸다고 한다.
이때 석존의 교법은 그를 항시 가까이 모시고 있던 아난다에 의해 암송되었으며 율은 계율에 정통한 우파리에 의해 송출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들에 의해 송출된 법과 율이 지금의 팔리어 장경이나 한역 대장경에 들어 있는 형태의 경과 율의 내용을 완전히 갖춘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다만 그 근본적인 사상만이 간단한 단문이나 게송(偈頌) 형태로 읊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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