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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July 16th Saturday : Sketch Day at the Sundam Vally , Chulwon with Saturday Painter Association Members
0915분 출발 거리.95km 1시간 40분 소요예상
목적지 철원에 순담계곡! 경치 좋은 곳 갑니다.
그래서 풍경좋은것 그리려고 15호 판넬 준비!
오늘 토요화가회 참석이 43명정도...
10시55분 ( 11시) 도착 예정이다.
1시간 정도 비몽사몽 하면서 왔는데....
( 꿈이 아닌 듯도 하고 꿈인 듯도 하다는 뜻으로 몽롱하게 분간이 잘 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非 : 아닐 비/夢 : 꿈 몽/似 : 같을 사/ 夢 : 꿈 몽
잠에서 덜 깨어 아직 꿈을 꾸고 있는 듯한 모습, 또는 아직 잠에 취해 있는 상태를 이른다. 주로 멍하니 흐릿하여 넋이 나간 상태, 똑바로 판단을 할 수 없는 정신이 모호한 지경에 부지불식간에 어떤 일을 겪었을 때 ‘비몽사몽간에’라고 표현한다.)
10:40분 38선 휴계소 정차하여 시야 터진 경치사진
한장 찍고... 잔여 거리 20km 25분 거리!
오늘 날씨는 흐린날씨에 최고 28도, 비올 확률 90% 라고 합니다!!
11:06 am 차창에 비가 맺친다...오랜만에 우중 스케치 할 모양이다. 11시 10분 목적지 도착!!
이곳 순담식당 전망 좋은 자리가 있었다..평일날 와서 경치보고 식사하면 딱 좋게 보인다. 사진 찍으로 구태어 돌아다닐 필요가 없어서 모두 한곳에서 순담계곡 , 잔도 시작 방향으로 멋진 계곡 사진들을 찍는다.. 오늘 품평회때 보니 모두 비슷한 구도가 특별히 많았다!!
오늘이 초복! ...점심은 육계장과 곰탕중 선택, 나는 오늘 곰탕으로 했다!
식사후 한 2시반까지 그럭저럭 그렸는데..구도는 좋은데.. 좀 뻔한 그림 예상이 되어서 신이 나지 않았다. 판넬에 붙힌 종이도 비가 오니까 우그러 졌다.
정지하고 한동안 화가들 사진 찍어드리면서 놀았다 , 그중 한장 이곳에 소개 합니당~ ㅎ
오늘 그리기 신나지 않어서.. 아주 새롭게 다른것 그릴까 하다가....이따가 그림 일기 쓸때 내 작품 없이 쓰면 뭔가 허전하고 재미가 없어서.. ㅎㅎ 다시 정붙히고 4시10분까지 80%정도까지는 그렸다!
4시반에 작품 품평회하고 4시50분 버스 출발
. 지금시간 17:10 , 잔여 거리 76km 1시간 26분 걸려서 예상 도착 18시 30분 !
비가와서 날은 덥지않았습니다...몇달절 주상절리 걸었던 곳을 바라 보면서 자연과 한판 잘놀은 하루 사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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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내용 인터넷 서핑 자료 임의로 편집한 것임.
삼복 ; 오늘 7월16일이 초복임 ㅁ⁸
초복은 하지로부터 세 번째 경일(庚日),
중복은 네 번째 경일,
말복은 입추로부터 첫 번째 경일이다.
복날은 열흘 간격으로 초복에서 말복까지 20일이 걸리지만, 해에 따라서 중복과 말복 사이가 20일이 되기도 하며 이는 월복(越伏)이라고 한다. (하지가 경일이면 그 날을 첫 번째 경일로 셈한다.)
삼복 기간은 여름철 중에서도 가장 더운 때이기도 하다. 초복은 대략 7월 11일부터 19일 사이로, 소서와 대서 중간이며 본격적으로 더위가 시작되는 시기이다.
중국의 <사기(史記)>를 보면 진의 덕공(德公) 2년에 비로소 삼복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진·한나라 이후 삼복을 숭상하여 한때 조정에서 신하들에게 고기를 나누어 주었으며, 민간에서도 더운 여름에 식욕이 떨어지는 것을 보충하기 위하여 육류나 영양가 높은 음식을 먹었다.
복(伏)은 원래 중국의 속절로 진(秦)·한(漢)에서 그 유래를 찾는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의 기록에 의하면 “『사기(史記)』에 이르기를 진덕공(秦德公) 2년에 처음으로 삼복 제사를 지냈는데, 4대문 안에서는 개를 잡아 충재(蟲災)를 방지하였다.”는 내용이 전한다. 이로 보아 삼복은 중국에서 유래된 속절로 추측된다.
복날 개를 잡는 것은 매우 오래된 풍속이며,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복날 영양식으로 개고기를 먹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에도 “황구(黃狗)의 고기가 사람을 보한다.”라는 구절이 있다. 우리 민족이 개장국을 건강식으로 널리 즐겼음은 분명하나 지방에 따라서는 개고기를 먹으면 재수가 없다고 하여 금하기도 하였다.
또 특정 종교의 세계관에 의해 개고기를 식용으로 하는 것을 금기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개장국을 대신하여 삼계탕을 즐기기도 한다. 이외에도 팥죽을 쑤어 먹으면 더위를 타지 않고 질병에도 걸리지 않는다고 하여 초복에서 말복까지 먹는 풍속이 있다. 팥죽은 벽사의 효험을 가진다는 믿음이 있는데, 이는 무더운 복 중에 악귀를 쫓고 무병하려는 데에서 나온 풍습이다.
절차:
복날은 주로 개를 잡아 몸을 보신한다.
그러나 개고기가 아니더라도 삼계탕이나 수박 등을 먹음으로써 복달임을 하기도 한다. 즉 복날 사람들과 어울려 영양식을 먹음으로써 건강을 챙기고 친목도 도모한다. 특히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 도진리에서는 각 문중마다 재실에 마을 어르신들을 모셔 놓고 삼계탕을 끓여 수박과 함께 대접한다.
고령 지역에서는 삼복에는 개를 잡아 보신탕을 끓여 먹는다. 개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들은 대신 닭을 잡아 보신하거나 수박을 사다가 복달임을 하기도 한다. 복달임은 땀을 많이 흘려 탈진하고 기가 허해 지기 쉬운 여름을 이겨 내기 위한 선인들의 지혜가 엿보이는 풍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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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담계곡 蓴潭溪谷
( 순채 순, 못 담, 시내 계, 골 곡)
순채(蓴菜:
수련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 수초)
강원 철원군 갈말읍 군탄리(軍炭里)에 있는 계곡.
신철원에서 북서쪽으로 5 km 떨어진 곳.
한탄강이 크게 굽이지면서 협곡을 이루는 곳으로, 상류에 있는 고석정(孤石亭)까지의 1.5 km가 한탄강에서 가장 경치가 아름답다.
계곡 이름은 조선시대 정조 때 김관주(金觀柱)가 이곳에 연못을 파고 순약초(蓴藥草)를 재배하여 복용한 데서 유래한다. 주변에는 직탕폭포·삼부연폭포 ·산정호수 등이 있다
한탄강 중류에 있다. 조선 시대 지리지와 고지도에는 순담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순담은 조선 순조 때 우의정을 역임했던 김관주가 이곳에 연못을 파서 순채(蓴菜)를 심고 복용하며 요양을 하였는데, 그 연못의 이름에서 유래하여 불리는 지명이라 전해진다.
고석정과 인접해 있는 아름다운 계곡으로 기묘한 바위와 절벽 · 연못 등이 많으며, 하얀 모래 밭이 천연적으로 형성되어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는 명소이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때에 항일독립투사들의 은거지였다고 하며, 유재헌 목사가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수도원인 기독교대한수도원이 인근에 위치하고 있다. 또 물길이 넓고 빠르며 깎아지른 듯한 협곡이 많아 래프팅 장소로 유명하여 동호인들이 즐겨찾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고석정 :
고석정(孤石亭)은 철원팔경 중 하나이며 철원 제일의 명승지로 꼽힌다. 한탄강 한폭판에 치솟은 10여m 높이의 거대한 기암이 천연덕스럽게 우뚝 솟아 있고, 그 양쪽 허벅지쯤으론 옥같이 맑은 물이 휘돌아 흐른다. 여기에 신라 진평왕 때 축조된 정자와 고석바위 주변의 계곡을 통틀어 고석정이라 한다. 기암이 외따로 강심에 잠겨 있는 탓이었을까. 아무리 보아도 장엄할지언정 외롭지는 않아뵈는데 절벽바위 이름을 외로울 ‘고’자 고석(孤石)이라 했으니 선인들의 자연을 보는 눈썰미가 매섭다.
위 직탕폭포에서 승일교를 거쳐오는 고석정의 한탄강은 강폭은 넓지 않으나 이 지점에 와서 특히 강물이 깊고 푸르며 굴곡이 심한 천연의 곡선을 이뤄 아름답다. 강폭 양쪽 주변으론 깎아지른 절벽이 산수화처럼 아름답게 서 있고, 옛 정자는 사라졌으나 원래의 자리에 근래 세운 정자가 있다.
지방기념물 제8호로 지정된 고석정은 신라 때 진평왕이, 고려 때는 충숙왕이 찾아와 노닐던 곳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유명해진 까닭은 조선시대 의적으로 불린 임꺽정(林巨正, ?~1562)의 활동·은거지로 알려지면서이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은 벽초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에는 고석정에 관한 언급이 한마디도 없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이 고장 사람들은 고석정을 꺽정바위로 부르며 고석정의 형상이 마치 임꺽정이 신고 다니던 장군화를 닮았다고 믿고 있어 흥미롭다.
양주(楊州)의 백정 출신 임꺽정은 의기가 있고 뜻이 굳어 일찍이 국정(國政)에 맘을 두었으나 신분이 천민이어서 뜻을 펼 수 없었다. 울분을 삭이지 못하던 임꺽정은 당쟁으로 조정이 어지럽고 사회기강이 혼란스럽던 1559년(명종 14)부터 대적당(大賊黨)을 만들어 동지들을 규합하고 두목이 된다.
그로부터 3년 동안, 1562년까지가 임꺽정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이다. 황해도 구월산과 서흥·신계를 중심으로 이 지역의 관청이나 토호·양반집을 습격하여 재물을 빼앗았다. 함경도와 황해도 방면의 곡물이 조정으로 운반되는 길목에 성을 쌓고 진상품을 약탈, 서민들에게 나눠주었으며, 약탈한 물건을 서울이나 개성 등 다른 지역으로 가지고 가 팔기도 했다.
임꺽정은 관군의 토벌에 거세게 저항하면서 적어도 3년 이상을 버텨낸 놀라운 인물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활동영역은 강원도와 개성, 경기도 등지로 확대되었으며, 변장술·사칭술도 뛰어나 관청에 들어가 수령대접을 받은 적도 있다. 임꺽정 일당은 어디서든 모이면 도적이 되고, 흩어지면 민이 되어 관군의 눈을 피해 교묘히 빠져나갔다. 그러니 토벌에 지친 순경사(巡警使)는 1561년 정월 꺽정의 형 가도치(加都致)를 잡아 꺽정이라 허위 보고하는 사건도 생겼으며, 꺽정을 사칭하는 가짜 임꺽정도 종종 등장하곤 했다.
임꺽정은 점점 나라의 기강을 흔들 만큼 위협적인 인물이 되어갔고, 조정에서는 갖가지 포상을 내걸며 그의 체포를 독려했다. 임꺽정은 1562년 1월 황해도 서흥에서 부상을 입고 토포사(討捕使) 남치근(南致勤)에게 체포되어 한 많은 생을 마감한다.
역사는 보는 입장에 따라 임꺽정을 정반대로 평가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연려실기술』 등에서는 임꺽정을 포악한 도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반면, 뒷날 민중들 사이에는 의협심 많고 정의로운 전설적인 인물로 전해오는 것이다.
임꺽정이 도적으로 활약하게 된 배경은 조선사회의 경제적인 모순에 있었다. 황무지를 개간하면 지배층이 날름 소유해버리고 민중들은 모두 소작인으로 전락했다. 그렇다고 농사가 잘되는 것도 아니었고 세금이 적은 것도 아니었다. 굶주린 민초들은 하나 둘 먹고 살 길을 찾아 제 땅을 버리고 떠나갔다. 그렇게 유랑하다가 도적이 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임꺽정은 그런 모순된 사회에서 분출해 나온 민초들의 대변자였고, 그들에게 대리만족을 주면서 불쌍한 백성들을 위로하던 의적이었던 것이다.
고석정 중간쯤엔 임꺽정이 몸을 숨기기 위해 드나들었다는 뻥 뚫린 구멍이 있어 사실감을 더해준다. 겉으로 보기엔 한 사람이 겨우 들고 날 수 있는 공간인데, 바위 속으로 들어가면 대여섯 사람은 너끈히 앉을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 관군에게 쫓기던 임꺽정은 피할 재간이 없게 되면 변화무쌍한 재주를 부려 꺽지라는 물고기로 변신, 강물 속으로 몸을 숨기곤 했다고 한다. 임꺽정의 재주가 비범했음을 전해주는 대목인데, 이 고장 철원사람들은 아직도 임꺽정은 관군에 잡혀 죽은 게 아니라 물고기 꺽지로 변해 깊은 강물로 들어가 영원히 몸을 숨겨버렸다고 믿는다. 사실 여부를 떠나 이 고장 사람들의 꺽정에 대한 신뢰와 전설을 곧이곧대로 믿을 줄 아는 마음이 푸근하기만 하다.
고석정 주변 용암평원에는 고석성(孤石城)터가 있는데 임꺽정이 관군에 대항하기 위해 쌓았던 성터라고 전해진다.
꺽지;
꺽지는 하천의 상류 1�·2급수인 맑은 물에서만 사는 물고기다. 몸 크기는 24∼27㎝ 정도. 구한 말의 선비 서유구는 1820년 무렵에 펴낸 『난호어목지』에서 꺽지의 생김새가 나무껍질과 비슷한 물고기라며 ‘근과목피어’(斤過木皮魚)라 적고 있다. 쉴 때는 얌전하고 조용하지만 성질이 매우 까다롭고 사나우며 공격적이다. 낮에는 쉬고 밤에 활동하며, 몸색깔을 자유자재로 바꾸는 둔갑의 명수다. 꺽지의 이름만도 고장마다 달라 200여 개. 꺽기·�꺽다구�·꺽저우 등 숱하다. 꺽지는 매운탕으로 먹는다.
첫댓글 Excellent!!
역사 한자락 오늘도 배웁니다. 정성에 감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