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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 아는 만큼 보인다] 218. 여덟째 계명 ② (「가톨릭교회 교리서」 2471~2513항)
진리든 거짓이든, 누구나 자신이 증언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가 그린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이란 유명한 그림이 있습니다. 이 그림은 그의 일생일대의 회개를 상징합니다. 그는 천재적 재능으로 많은 교회의 성화들을 그렸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생활을 하여 결국 살인까지 저지르게 되었고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탈옥에 성공하여 몰타섬으로 도주하여 거기서 숨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공포가 하도 커서 칼을 차고 신발을 신고 잠을 잘 정도였다고 합니다.
공포 속에서 사는 것이 너무나 지긋지긋한 나머지 그는 유일한 사면권을 가진 교황을 설득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어린 다윗이 골리앗의 칼을 들고 잘린 골리앗의 머리를 들어 올리는 그림을 완성해냅니다. 그림 속의 다윗은 어렸을 때의 순수했던 자기 모습이고 목이 잘린 흉측한 골리앗의 머리는 지금까지 거짓으로 살았던 자신을 상징했습니다. 사실 그의 진심을 담아 그린 그림은 이 그림이 처음일 수 있습니다. 이 그림에 진정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또 교회와 하느님이 누구인지에 대한 진리가 들어있습니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은 자신의 예술 작품들의 아름다움을 통해서 그가 창조자 하느님과 맺고 있는 관계의 진실을 표현합니다.”(2501) 내가 거짓을 말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그린 성화를 보더라도 그 속에서 진실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모두 거짓이든, 진실이든 자신의 존재에 따라 무언가를 표현하며 그것 속에서 그것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빌라도 앞에서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2471) 그러니 그리스도의 삶은 곧 아버지를 보여주시는 삶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에페 4,24)”이며 “거짓을 벗어버린(에페 4,25)”(2475) 인간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거짓이 있을 수 없기에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삶 안에서 자신이 증거한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진리를 증언함은 거짓의 소멸을 의미합니다. 빛과 어둠은 공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순교는 신앙의 진리에 대한 최상의 증거입니다.”(2473) 예수님은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용기를 내야 합니다. “나를 짐승들의 먹이가 되게 놔두십시오. 나는 짐승들을 통해서 하느님께 이르게 될 것입니다”(2473)라고 말한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의 용기를 본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반면 거짓을 말하는 자는 자신이 드러내는 악마를 봅니다. 주님께서는 “너희는 너희 아비인 악마에게서 났다”라고 하시며 거짓말 안에 악마가 활동하고 있음을 폭로하셨습니다.(2482 참조) 거짓말하는 자 안에 있는 악마는 “거짓말쟁이이며 거짓의 아비”(요한 8,44)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아버지를 긍정하고 증언하고 계시합니다. 누구나 진리의 아버지이든, 거짓의 아비이든 그를 증언하고 그를 보며 삽니다. 거짓을 증언하는 사람은 거짓의 아버지를 보며 장차 자신이 가게 될 어둠의 세계에 대한 공포에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진리를 증언하는 이는 죽음 앞에서도 장차 만나게 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을 기대하며 기쁠 수 있습니다. 진정 이 세상에서부터 진리의 왕국의 향기를 맡으며 살려면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서 언제나 거리낌 없는 양심을 간직하려고 애를 써야”(사도 24,16)합니다.
[매주 읽는 단편 교리] 주님 승천 대축일
주님 승천 대축일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가심을 기념하는 대축일입니다. 주님 부활 대축일로부터 여섯 번째 목요일 곧 부활 후 40일째 지내는데, 이날이 공휴일이 아닌 데서는 그다음 주일 곧 부활 제7주일에 지냅니다. 우리나라가 그렇습니다.
오늘 대축일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심으로써 구원 사업을 완성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강생하면서 취하신 인성(人性)을 온전히 지니신 채 하늘로 오르심으로써 우리 인간도 하느님께 오를 수 있는 천상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대사제로서 당신 자신을 바치신 희생 제사가 지상의 영역을 넘어 우주적이고 천상적 차원의 것이었음을 드러내셨습니다(히브 9,23-25 참조). 그리고 승천하신 후에는 그전에 사도들에게 약속하셨던 성령을 보내주심으로써 이제 교회를 통한 구원사업을 이어가실 것입니다.
오늘 미사 전례는 ‘주님 승천’의 의미를 깊고 풍부하게 전해줍니다.
먼저, 입당송은 사도 1장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주님의 승천과 재림을 노래합니다. 본기도는 주님의 승천으로 인간의 품위가 높아졌으니 천상의 것을 추구하라는 내용입니다. 제1독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여러 차례 사도들에게 나타나신 후, 그들 앞에서 하늘로 오르신 장면을 전해줍니다. 화답송은 하느님께서 하늘에 올라 거룩한 어좌에 앉으신다는 시편 47장을 노래합니다. 제2독서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키시고 하늘에 올리시어 당신 오른쪽에 앉히셨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복음은 전례주기(가해)에 따라 마태오 복음이 봉독 되는데, 사도들이 예수님에게서 복음 선포의 사명을 받는 마지막 장면입니다. 예물기도는 우리도 성자와 함께 하늘로 오르게 해달라는 청원이며, 영성체 후 기도는 성체를 통해 이곳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 같이 언젠가는 하느님 곁에 올라 그분을 만나게 해달라는 청원입니다. 끝으로, 승천의 신비를 정확하게 알려주는 오늘의 감사송을 읽으며 다시 한번 마음에 새겨보면 좋겠습니다.
“영광의 임금이신 주 예수님께서는 죄와 죽음을 이기신 승리자로서, 오늘 천사들이 우러러보는 가운데, 하늘 높은 곳으로 올라가셨으며,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개자, 세상의 심판자, 하늘과 땅의 주님이 되셨나이다. 저희 머리요 으뜸으로 앞서가심은, 비천한 인간의 신분을 떠나시려 함이 아니라, 당신 지체인 저희도 희망을 안고 뒤따르게 하심이옵니다.”
[가톨릭 신학14]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신” 1 : 예수님의 생각은?
“우리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1코린 15,3-5) 신앙고백의 핵심인 이 케리그마는, 코린토 1서가 쓰여진 54-55년경 훨씬 이전부터 이미 교회 안에서 사용되던 고백이라고 봅니다.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다는 고백은 성경 곳곳에 나타납니다.(로마 5,8; 갈라 3,13; 에페 5,2; 1요한 3,16) 그리고 갈라티아서에는 이보다 더 강한 “나를 위하여”(2,20)라는 표현도 보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는 사건에 직접적으로 개입되지 않은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걸까요?
우선은 정말 예수님이 돌아가시는 것이 ‘우리를 위한’ 것이었는지 예수님 자신에게 여쭤봐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너무 따지는 것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만약 예수님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신 적이 없다면, 서간문에 나오는 제자들의 고백은 그 신빙성이 좀 떨어질 수도 있을 테니까요.
다행히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당신 죽음을 미리 아셨고 그 의미에 관한 설명도 하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직접적으로는 세 번의 수난 예고(마르 8,31-33; 9,31; 10,33-34), 그리고 간접적으로는 살해된 목자와 흩어진 양떼 비유(마태 26,31), 당신이 마실 잔과 받을 세례(마태 10,38) 등등에서 당신이 폭력적 죽음을 당하게 될 것임을 암시하셨습니다. 당신 죽음을 미리 아셨다면, 그런 죽음의 의미도 생각하셨겠지요? 성경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생각을 몇 군데서 볼 수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최후의 만찬입니다.(마태 26,26-29; 마르 14,22-25; 루카22,15-20; 1코린 11,23-25) 약간의 표현상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예수님께서 당신 죽음을 ‘많은 사람을 위한’, ‘너희를 위한’ 죽음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공통적입니다.
이것은 특히 마르 10,45에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여기에서 “몸값”은 희랍어로는 ‘뤼트론(λυτρον)’인데, 이는 노예 해방을 위한 몸값, 사형수의 목숨값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예수님 자신이 당신의 죽음을 ‘많은 이들을 위한, 많은 이들의 구원을 위한 속죄’로 이해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대속’이라고 표현합니다.
한편 핀트가 약간 벗어나긴 하지만, 마르 10,45의 말씀의 맥락은 이 말씀의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이 영광 받으실 때 각기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당신이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는지 물으시고, 그들이 그렇다고 하자, 왼편이든 오른편이든 그 자리에 앉는 일은 당신이 허락할 일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이 이 두 사도를 매우 불쾌하게 여깁니다. 한 마디로 제자들은 권력을 누가 더 가질 것인지에 관심이 있지요. 속전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제자들을 향한 답입니다.
[교회 안 상징 읽기] 가상칠언에 대한 또 하나의 풀이
복음서에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숨을 거두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 일곱 마디가 기록되어 있다. 이 일곱 마디의 말씀, 곧 가상칠언(架上七言)은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하고도 좋은 소재가 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이들이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를 주제로 묵상해 왔다.
그 많은 이들 중에 아그레다의 마리아(Mary of Agreda, 1602-1665)가 있다. 17세기 스페인의 수도자이자 신비가였던 마리아는 성모 마리아의 생애에 대하여 일련의 환시들을 체험했고, 그렇게 체험한 환시 내용을 글로 써서 ‘신비로운 하느님의 도성(The Mystical City of God)’이란 책을 만들었다. 그 시절은 성모 마리아가 그리스도와 공동 구속자로 인식되던 때였고, 그러했기에 이 책에는 책 제목만으로는 선뜻 알아차릴 수 없지만, 다분히 그리스도의 구원 활동에 깊숙이 관여되어 있는 성모 마리아의 면모들이 나온다. 그리스도의 가상칠언과 관련해서도 그러하다. 그 내용을 한번 살펴보고자 한다.아그레다의 마리아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시던 동안, 으뜸 악마인 루치페르와 그의 졸개 악마들은 그분이 참으로 하느님이시고, 이 세상을 구원하실 분이신지를 확실하게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루치페르는 복음을 선포하시는 그리스도를 수행하던 베드로 사도가 그분의 신원에 대해 고백했을 때도, 그분께서 죽은 라자로를 되살리신 다음에도 여전히 그분의 신원에 대해 크게 의심했다고 한다. 그분이 예사롭지 않으신 분이라는 것은 진즉 알았지만 참 하느님이시리라고는 확신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루치페르는 교만했기에 천사도 아닌 인간이 세상의 창조주이신 하느님과 위격적으로 하나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러했기에 루치페르와 그의 졸개들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거룩하신 어깨에 십자가를 짊어지고 죽음을 향해 가시는 장면을 보는 순간 도망쳐서 차라리 지옥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 싶은 압도적인 충동을 느꼈다. 그들은 그분이 참으로 예사 사람이 아니며 더욱이 끝내는 자기들을 궤멸시키실 분이라는 위기감마저 느꼈다. 그렇지만 그들이 그 파멸에서 벗어날 길은 없었다. 성모 마리아의 명에 의해서 그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과 파멸의 장소인 골고타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십자가 위에서 남기신 일곱 말씀은 악마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나?
그리스도께서 남기신 마지막 말씀들은 천사들과 악마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성모 마리아는 당신 아드님의 권능으로써 악마들을 굴복시키셨다. “그분은 악마들에게 골고타로 가서 십자가 주위에 서 있으라고, 그곳에서 꼼짝 말고 인간은 구원되고 그들은 멸망하는 위대한 신비의 결말을 지켜보라고 명하셨다.”라고 아그레다의 마리아는 말한다. ‘사람의 아들’에게 저 옛날의 용이 굴복하도록 하늘이 정한 순간이 마침내 다가왔으니, 악마들이 자기들의 패배와 멸망을 지켜보며 극도의 혼란과 놀라움을 맛보도록 성모 마리아께서 명하신 것이다.
아그레다의 마리아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한마디 한마디 말씀하실 때마다 그 말씀 하나하나에 담긴 악마들의 파멸과 관련된 신비들이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선포되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남기신 마지막 일곱 마디 말씀이 어둠의 세력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첫째 말씀: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이 말씀으로 마침내 악마들은 영원하신 하느님 아버지께 청원하시는 분이 그리스도라는 점을 확실하게 그러나 고통스럽게 깨닫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확인과 더불어 혼란에 빠진 악마들은 다시금 온 힘을 다해 지옥 깊은 곳으로 몸을 던졌고, 다시금 자기들이 결국에는 실패했음을 깨달았다.
둘째 말씀: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43)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회개한 죄수에게 하신 것이다. 이 말씀으로써 악마들은 거룩한 신성과 결합된 가장 거룩하고 완전한 인성을 지니신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겪으심으로써 얻어내신 공로를 통해 인간이 죄를 용서받게 되리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또한 이제부터는 그분의 죽으심에 힘입어 인간이 구원될 수 있으리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제 원죄로 말미암아 닫혔던 낙원의 문이 다시 인간에게 열리게 된 것이다. 루치페르는 이로 말미암아 고통스러운 나머지 성모 마리아께 자기가 다시 지옥으로 돌아가도록, 주님의 수난 현장에서 벗어나도록 허락해 주시기를 애걸했다.
셋째 말씀: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요한 19,26)
악마들은 성모 마리아가 하늘에서 장차 자기들의 머리를 짓밟을 여인으로 선포되신, 참으로 하느님의 어머니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로써 악마들은 스스로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성 요한 사도에게 사제의 직능이 부여되었다는 사실을 알고서 그들의 분노는 더욱 커졌다. 그제야 악마들은 최후의 만찬 때 사도들에게 십자가의 희생 제사를 재현할 직능을 맡기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이해했다. 그러니까 악마들은 그제야 성 요한 사도가 복음사가로서의 직능뿐만 아니라 구세주 그리스도의 품위와 직분에 참여함으로써 받는 사제로서의 직능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을 본 것이다.
넷째 말씀: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마태 27,46; 마르 15,34)
이 말씀은 악마들에게 인간에 향한 하느님의 무한하시고 영원하신 사랑을 드러내 보였다. 이를테면 성부 하느님께서는 헤아릴 수조차 없도록 크신 당신의 사랑을 완전하게 펼쳐 보이시기 위해 성자 하느님의 신성을 그분의 가장 거룩하신 인성에 신비로운 방식으로 결합하셨고, 그런 다음에는 극도의 고통을 당하시게 하심으로써 가장 풍성한 결실을 내실 수 있도록 섭리하셨음을 보여 주셨다. 인간이 그토록 하느님께 사랑받는 복된 존재라는 점은 루치페르와 그의 졸개들의 시기심을 더욱 키웠다.
다섯째 말씀: “목마르다.”(요한 19,28)
이 말씀은 악마들에게 자기들이 철저히 실패했음을 알게 해주었다. 악마들은 이 말씀으로 사실상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을 위한 당신의 사랑을 아무리 베풀어도 흡족해하지 않으시리라는 점과 인간의 영원한 구원을 위해서라면 더 많은 고통도 마다하지 않으시리라는 점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이해했다.
여섯째 말씀: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
이 말씀을 들은 루치페르와 그의 졸개들은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 곧 그분의 강생과 구속의 신비가 성취된 것으로 이해했다.
일곱째 말씀: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
이 마지막 말씀과 더불어 악마들을 단죄하고 영원한 심연으로 되돌려보낸 주님의 위대한 선고가 내려졌다. 그런 다음 루치페르와 모든 악마가 지옥의 가장 깊은 곳으로 던져졌다.
그리고 아그레다의 마리아는 이렇게 말했다. “루치페르와 그의 졸개들이 인간을 유혹하는 힘은 미약해졌다. 인간이 다시는 죄악과 자유 의지로써 악마들을 풀어주지 않고 그들에게 다시 이 세상을 파괴하러 돌아올 빌미를 주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것이다.”
[더 쉬운 사회교리 해설 - 세상의 빛] 217. 복음과 사회교리(「간추린 사회교리」 16항)
기술발전 이면에 따라오는 어두운 현실 성찰해야
“반죽을 묻힌 닭고기를 로봇이 기름 솥으로 옮깁니다. 그리고 튀김 바구니를 흔들어 줍니다. 이런 식으로 튀김솥 6개를 돌려서 한 시간에 치킨 50마리까지 튀겨 냅니다. 로봇 임대료는 월 110만 원, 적잖은 돈이지만 인건비도 많이 오르고 사람들이 뜨거운 기름 앞에 서 있는 걸 꺼리는 분위기라서 로봇을 대안으로 택했다고 합니다.”(2023년 2월 26일 SBS 뉴스)
실수는 적고 속도는 빨라
요즘 식당에 가면 이제 키오스크(무인주문결제 기계)는 기본이고 자율주행 서빙로봇도 많이 상용화됐습니다. 게다가 음식 조리도 로봇에게 맡기는 분위기입니다. 3.3㎡ 넓이의 주방에서 로봇 4대가 4종류의 메뉴를 1시간 동안 310인분이나 만들어 냅니다. 사람의 손이 전혀 필요 없는 건 아니지만 몇 사람이 해야 할 일을 로봇은 오차 없이 해냅니다. 로봇은 사업자에겐 높은 인건비에 대한 부담을 줄여 주고 그래서 고물가 시대에 불가피한 흐름이라고 합니다.
수많은 수하물을 취급하는 물류센터도 로봇이 100% 작업을 수행합니다. 덕분에 무겁고 힘든 물건을 사람이 직접 나르지 않아도 되는 데다 안전사고도 없고, 소비자 입장에서 배송도 훨씬 빨라졌습니다. 큰 공장의 생산직부터 동네의 무인 편의점까지 인공지능은 산업 모든 분야에 신속히 보급되고 있습니다.
로봇을 맞이할 준비가 됐는지
이런 현상은 문명의 혜택을 누린다는 장점도 분명 있을 것이나 반대로 많은 일자리들이 사라질 것이고 일자리 감소는 구매력 감소로 이어져 빈익빈부익부 현상이 심화될 것이란 우려가 단점 중 하나입니다. 더욱이 제조업과 대면 서비스 종사자가 많은 한국에서 국내 취업자의 43%가 로봇으로 대체될 것이란 예측도 있습니다.(2018년, LG 경제연구원) 이는 결국 구매력 저하로 인해 상품을 만들어도 팔 수 없는 이른바 시장의 붕괴 상황을 초래할 거라고 경고합니다.
그래서 한국보다 기술력이 우수한 외국도 인공지능 로봇 도입 속도를 일부러 제한하면서 기존의 고용을 보존하고 미래를 준비할 시간을 마련하고 있습니다.(2016년 인구 1만 명당 로봇 수, 한국 531, 일본 305, 독일 301, 대만 190, 미국 176) 그런데 한국은 그 속도가 너무 빠르다고 합니다.
유토피아인가 디스토피아인가
예로부터 기술발전은 인류에게 빛과 어둠을 동시에 가져다주었습니다. 윤택한 문명과 삶의 풍요로움이라는 빛의 이면에는 나를 포함한 어느 누군가가 희생될 수 있다는 어두운 현실이 늘 따라다녔습니다. 그래서 공정의 실천이 중요하고 가톨릭교회는 공정을 위한 실천이 하느님의 뜻임을 강조해 왔습니다.(이사 56,1) 아마도 인공지능 로봇의 확산과 자동화는 향후 가속화될 겁니다. 그리고 장단점도 점차 드러날 겁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스스로가 하느님 말씀과 이웃을 어떻게 대하느냐입니다. 사람이 만든 문명에만 몰두해서 살지, 아니면 하느님께서 초대하시는 복음적 삶을 선택해서 마음 뜨거운 사랑의 삶을 살지, 신앙인인 우리의 성찰이 중요합니다.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커다란 문제 가운데 첫 번째는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진리와 관련된 것이다. 자연과 기술과 도덕 사이의 경계와 관계는, 인간은 무엇이며 인간은 무엇을 성취할 수 있고 인간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와 같은 문제들에 어떠한 태도를 취할지에 대하여 개인적, 집단적인 책임을 요구한다.”(「간추린 사회교리」 16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