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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출 19: 7-25
요즘 저희 집은 여러 아이들이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한 명이 있을 때는 잘 모르겠는데 몇 명이 있다가 보니 나름대로 규칙과 질서가 필요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해라하고 말을 하면 다 자기 나름대로 이유들을 대면서 반항을 합니다. "왜 이모부는 자기 마음대로 하느냐?"는 것입니다. 제가 자기들에게 제시하는 것은 다 자기들을 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반항을 하고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제 나름대로 규칙을 정하고 나면 그것을 자기들과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자기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일단은 약속을 하고 그 다음부터 그 일을 시작을 합니다.
아이들이 비록 작지만 로봇이나 죽은 무생물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이기 때문에 자기 생각이 있고, 그것에 동의를 구하여야하고 아이들의 의견을 들어주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나 삶의 원리들은, 율법은 우리를 위하여 좋은,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동의를 구하십니다. 우리에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그냥 하도록 하면 될 것인데 왜 내가 잘못된 길을 가는 것을 아시면 서도 그냥 놓아두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억지로 끌려가면서 사는 것은 우리에게 행복하지 않기에 하나님은 우리가 그것을 깨닫고 무엇이 옳은지를 바르게 알고 말씀대로 살기를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은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주시면서 이렇게 살면 너희가 나의 특별한 소유가 되며,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에게 엄청난 축복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해라하고 말씀하시면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이제 가서 백성들의 동의를 구하라고 말씀합니다.
자신이 선택하여 살게될 때에,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옳구나 하는 것을 깨닫고 살게 될 때에 참 기쁨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억지로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늘 문제를 삼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이냐 나의 자유의지이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하여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왠지 모르지만 먼저 선택하셨습니다.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6절을 통하여,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타락한 우리의 내성은 하나님을 알만한 것들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 분이 먼저 손을 내미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를 선택하시고 우리를 그의 백성으로 삼아 주셨는지는 알수 없습니다. 그냥 신비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나와 같은 죄인을, 거짓과 잘못된 습관으로 무엇하나 잘난 것이 없는 나를 하나님이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그냥 감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손을 잡아야 합니다.
그냥 그분은 우리를 그냥 끌고 가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억지로 끌고 가시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응답을 기다리십니다.
베드로를 부를 때도 그랬습니다. "나를 따라 오라" 그러니 베드로는 그냥 따라왔습니다. 모든 것을 다 버려두고 . .
그러나 한 젊은이에게도 동일한 부름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젊은이는 제물이 많은 고로 근심하며 그냥 돌아갔습니다. 그 부르심을 거부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에게 응답하고 손을 내밀었다고 하여서 우리가 무엇을 하였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내가 너를 구해줄게!" 하고 손을 내밂은 그 손을 잡았다고 하여서 내가 살아남은 것은 내 힘으로 하였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방법입니다.
구원도 우리의 삶의 인도하심도 그냥 억지로 그냥 끌고 가지 않습니다. 우리의 응답을 그 분은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8절,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이스라엘이 그래도 지혜롭고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이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연약하고 잘할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믿고 그대로 하겠습니다.
일단은 하나님의 제의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연약하고 부족하여 그것을 잘 지키지 못할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우리가 그대로 하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일단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믿겠습니다. 따르겠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사실 우리가 연약하고 힘이 없어 넘어지지만 근본적인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아마 저것은 내가 할 수 없을 것이니 하나님 안됩니다. 안 할렵니다. 시작도 하기 전에 포기하여 버리고 자신이 선택하여서 이것은 내가 하고 저것은 안하고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이 말씀하시니 하겠습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옳고, 바르고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심을 우리가 믿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기도하고 한번 해보는 것입니다. "힘을 주십시오." "도와 주십시오." 그렇게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시도하여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하십시오. 제가 한 번 해보겠습니다."
그래서 순종이 제사보다 낳은 것입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이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그렇게 응답하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게 하십니다.
그 준비는 바로 '성결케' 하는 것입니다.
성결케 하는 작업으로 무엇을 하라고 하십니까?
옷을 빨라. 3일을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옷을 빠는 행위는 회개를 의미합니다. 성결케 한다는 것은 바로 회개를 의미합니다.
회개하는 자는 성결케 되는 것이며 성결케 되는 자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회개라는 것은 단지 옷을 빠는 행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회개라는 것은 과거의 것을 씻어 버리고 이제 새로운 시작을 하겠다는 고백입니다. 3일의 시간을 준 것은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철저하게 준비하라는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원한다는 말은 바로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고백입니다. 과거의 옷을 그대로 입고 하나님과의 교제는 이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과거의 것들을 청산하여야만 합니다.
저희 집이 마오리 힐에 있는데 저를 만나고 자 하는 사람이 오타곤으로 계속 가서는 저를 만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서 하나님 앞으로 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이제 과거의 옷을 빨고 이제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어야지 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과거의 잘못된 길을 벗어나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다는 구체적인 고백이 바로 회개이며 그러한 고백을 드리는 자들이 하나님과 교제를 시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예비하여 기다리며 여인을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데 있어서 정상적인 가족 관계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부부관계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가장 가까운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금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하여 세상에서는 가장 친밀한 관계인 부부의 관계도 잠시 쉬고 하나님만을 기다리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과의 만남을 모든 것을 위에 두라는 하나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을 위해서는 모든 것 위에 하나님을 우선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살펴 볼 것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계를 정하시고 그 이상은 올라오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을 만나기는 하지만 일정한 거리를 두고 만나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너무 엄청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감히 인간의 죄된 몸으로는 그 분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또 다른 상징을 내포합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그들에게 주시지만 이 율법으로는 하나님 앞에 오는 것이 한계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납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곳에 처음 올 때에 어떻게 이곳에 오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면 information centre에 가서 어떻게 더니든에 갑니까? 하고 물으면 안내를 하여 줍니다. 그 안내를 하시는 분이 차는 이곳에서 타면 됩니다. 그렇게 안내를 하여주기는 하지만 그 다음은 더니든으로 데려다 주지는 않습니다. 그 다음은 운전사가 데려다 줍니다.
우리가 율법을 통하여 우리 자신들이 죄인임을 알고 그 분의 앞에까지 갑니다. 그러나 그 다음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히브리서 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성소는 바로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입니다. 그곳에 우리가 어떻게 들어가느냐 바로 예수 의 피로 우리가 그곳에 그 엄청난 분의 존전에 서게 됩니다.
왜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느냐 하면 바로 우리가 그 분의 의를 힘입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를 거룩하신 그 하나님과의 교제를 이루어 주시기 위하여 우리 주님이 오신 날이 한 주가 남았습니다. 그 분이 오신 날을 기대하며 또한 그 분이 오신 이유들을 우리가 기억하며 한 주간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시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준비를 하라
(19: 10-15)
서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이스라엘 백성이 앞으로 율법을 받을 일을 위하여 준비할 것을 말씀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해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지시에 합당한 준비가 필요하다.
하늘에서 비가 쏟아져도 받을 그릇이 준비되지 않으면 받지 못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양식이요 (마 4:4)
생명의 물이다. (요 4:14)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먹고 은혜가 풍성해야만 우리가 영육간에 잘 살고 금생과 내생에 구원을 얻는 것이다.
고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준비는 무엇보다 귀중한 일이다.
본론
1. 옷을 빨 것 (10)
1) 이것은 구약시대의 영적 성결의 외부적 표현이다.
고로 옷을 빨라는 말은 의복을 세탁하라는 외부적인 지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내적, 심령적으로 깨끗게 하는 일이
필요한 것을 말한다. (레 11:44)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해서는 옷을 빨듯이 우리 마음을 거룩하게 갖지 않으면 안된다.
2) 사도요한이 하늘에 구원받은 144,000명을 보았는데 그들은 흰옷을 입었다고 했다. (계 7:14)
어떻게 흰옷을 입었는가?
계7:14에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더라”
주님의 십자가의 피는 우리의 더러워진 옷을 희게 씻어준다.
고로 그 피를 믿고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만 된다.
그리스도의 피를 믿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도 없고 아무런 은혜도 생명도 되지 않는다.
말세에는 거룩한 자는 더욱 거룩하여지는데 어떻게 그렇게 되는가하면 그리스도의 피를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때문이다.
2. 출입을 주의 할 것 (12)
1) 이스라엘 백성에게 사면 지경을 정해주시고 시내산에 아무나 오르지 못하게 하시며 범하는 자는 정녕 죽으리라 하셨다.
이는 하나님 앞에 출입을 심히 주의하란 것이다.
2)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 분별없이 출입하는 것은 오만이요 망동이다.
고로 죽임을 당하리만큼 무서운 죄인 것이다. (히 12:28-29)
경건함으로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 출입을 해야 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법대로 섬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소멸하시는 불의 심판을 받는다.
3. 여인을 가까이 말 것 (15)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예비하여 제 3일을 기다리고 여인을 가까이 말라”하니라.
1) 이것은 모세가 부부생활을 죄악시함이 아니다.
모세도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일곱 딸중에서 맏딸인 십보라를 아내로 맞아서 게르솜(나그네)과 엘르에셀(하나님은 나의 도움)이란 아들을 낳았던 사람이다.
2) 하나님은 에덴동산과 같은 곳에서도 아담을 위하여 하와란 여인을 지어주셨다.
고로 성경을 믿는 기독교는 부부생활을 죄악시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축복으로 알고 감사한다.
그런데 왜 “여인을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하였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특별한 행사를 앞두고
하나님 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는 죄에 빠지지 않게하라는 것이다.(딤후3:4)
결론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준비를 하자.
1. 옷을 빨자 - 우리의 옷은 물로 빨지만 심령의 옷은 그리스도의 피로 빤다.
2. 출입을 주의하자 -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자.
3. 여인을 가까이 말자 - 세상쾌락에 빠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못받는 일 없도록 하자.
출처: 임성락 원문보기 글쓴이: 임성락의 행복한 날들
시내산에서
출 19: 20 - 출 20: 2
세계의 여러 나라들은 그 나라만이 갖고 있는 고유한 자연환경을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는 산이 많습니다. 땅이 좁은데 산이 많아서 개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일본 같은 나라는 섬나라이기에 바다가 중심입니다. 그래서 일본은 바다와 관련된 문화와 음식과 생활풍습이 있고, 태풍이 많이 오기에 지진해일을 가리키는 ‘쓰나미’라는 일본말이 전 세계의 통용어가 될 만큼 지진과 해일에 탁월한 공헌을 했던 것을 봅니다. 영국은 기후의 변화가 심해 사람들의 마음을 우울하게 만들지만 많은 안개와 잦은 비로 영국의 자연은 푸른 풀밭과 나무로 안정감, 생동감을 갖게 합니다.
제가 6년 동안의 영국생활을 마치고 미국으로 갔을 때 가장 보고 싶은 것이 바로 푸른 풀밭이었습니다. 그것이 많이 그리웠던 적이 있었습니다. 미국은 넓은 광야와 비옥한 땅, 풍부한 자원을 가진 가장 좋은 자연환경을 가진 나라입니다. 그래서 지금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었을 것입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넓은 땅은 늘 보는 이로 하여금 시원하게 합니다. 그 많은 땅 어느 한 구석도 버릴 곳이 없다는 것이 더욱 우리를 부럽게 만듭니다.
규모로 보면 뒤지지 않는 호주는 못 쓰는 땅이 많습니다. 그래도 호주는 기후가 좋아 세계에서 소가 가장 살찌는 곳입니다. 호주산 소고기가 별 문제가 없는 것도 그런 이유라고 봅니다. 소가 많으니까 목장, 우유가 발달되었습니다. 아울러 꿀이 잘 나오는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래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가나안이 아니라 호주라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각 나라의 특징적인 자연환경이 있는데 성경의 배경이 되고 있는 팔레스타인은 어떨까요? 이곳은 사막이 대세입니다. 그래서 모래가 많고 먼지가 많습니다. 물이 귀합니다. 근동지역이 대부분 그렇습니다. 영국처럼 푸르지 않고, 미국처럼 광활하지도 않습니다. 일본처럼 바다를 구경하기도 힘들고, 우리처럼 산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광야생활의 한 중심지인 산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거기에는 뭔가 특별한 하나님의 의도가 있습니다. 매일 광야와 사막을 보며 사는 그들에게 산을 통해 하나님의 귀한 뜻을 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바로 본문의 배경이 되고 있는 시내산입니다.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목에서 시내산으로 인도하신 것에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홍해를 건너 엘림을 지나, 여기 시내산까지 왔습니다.
과연 시내산에서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에서 시내산은 그들에게, 우리에게 과연 어떤 곳일까요?
첫째는 성결을 요구하신 곳입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이곳에 장막을 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준엄한 뜻을 전하기 위해 모세를 산으로 올라오라고 부르셨습니다. 모세는 이곳에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와 대면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이런 말씀이 배경이 되는 본문은 19장부터 20장까지 이어지고 출애굽기가 끝나는 34장까지 계속 이어집니다. 시내산에서부터 광야생활은 비로소 시작된 것이고, 하나님은 뜻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는 여기 19장부터 마지막까지 긴 말씀이지만 하나로 보아야 합니다.
시내산에서의 말씀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19장 1절부터 6절까지가 첫 번째 부분이고, 7절부터 25절까지가 두 번째 부분입니다. 그리고 20장부터는 마지막까지가 세 번째 부분이라고 봅니다. 첫 번째 부분의 핵심적인 말씀은 한마디로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놓고 축복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먼저 이스라엘을 독수리 날개와 같이 이끄셨고 세계와 열국 중에 으뜸 되는 나라로 만드시겠다고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제사장 나라가 되고, 그들은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본문을 포함한 두 번째 부분에서 핵심은 성결입니다. 성결을 요구하는 말씀이 두 번이나 반복합니다. 10절에서 성결을 요구하고, 22절에서도 다시 성결을 요구합니다. 14절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성결해야 하는가를 알려줍니다. 그들은 옷을 빨고, 기다리고,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22절에서도 성결을 반복하여 강조하면서 만약 성결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돌격할지도 모른다는 의미 있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 앞에서 성결이 중요함을 강조합니다. 이것이 바로 시내산입니다. 그래서 시내산 하면 무엇보다도 성결이 생각나는 곳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나아가고 살아야 할지를 알려주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결’이란 ‘거룩하고 깨끗함’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갈 때, 하나님 앞에서 설 때,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으로 세상을 살 때, 거룩하고 깨끗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많이 부족하지만 우리는 늘 거룩하고 깨끗한 성결을 마음을 담고, 그렇게 살기를 위해 몸부림치면서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이요, 하나님이 더럽지 않기 때문이고, 하나님이 어둡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깨끗하시고, 빛이십니다. 빛과 어두움은 공존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빛이시기에 우리가 빛이어야 하고, 깨끗해야 합니다.
종교개혁이 진행될 때 영국의 개혁을 주도한 사람들을 ‘청교도’라로 부릅니다. 이들은 영국 속에 남아 있는 타락한 천주교의 요소를 벗겨버릴 것을 주장하다가 박해를 받고 여러 곳으로 흩어지게 됩니다. 그들 중에 한 부류가 배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와 오늘날 미국을 건설한 개척자가 되었습니다. 청교도를 영어로 ‘puritan, 퓨리탄’이라고 부릅니다.
이 퓨리탄은 ‘purity'에서 나온 말로서, 이 말의 뜻은 성결, 깨끗함, 거룩을 의미합니다. 퓨리탄, 청교도들은 타락한 천주교와 세상을 보면서 스스로 성결하기를 다짐했던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캄캄하여 어둠 속으로 깊이 들어가도, 세상에 남아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한줄기의 빛이 되어 어두운 세상을 밝혀야 한다는 것을 신앙과 삶의 목표로 삼고 평생을 헌신했던 것입니다. 이런 그들이 늘 삶의 슬로건으로 내 세운 말이 있습니다. 바로 ’코람데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라는 뜻입니다.
늘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기를 다짐한 그들의 신실한 신앙과 삶을 반영해 주는 말입니다. 이 같은 그들의 신앙과 수고로 오늘의 프로테스탄트, 개신교가 만들어졌고, 청교도의 신앙으로 미국을 세웠던 것입니다. 지금도 세계역사에는 청교도와 청교도정신이라는 것이 깊이 새겨질 만큼 잘 믿던 사람들입니다. 그 정신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 시대의 퓨리탄이 되어야 합니다. 코람데오의 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
시내산은 성결을 요구하신 곳입니다.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에 우리에게 필요한 신앙정신입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담고, 우리 모두 이 시대에 퓨리탄으로서, 특히 한국의 퓨리탄으로 되기를 다짐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계명을 받은 곳입니다.
계속되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계명을 주십니다. 십계명을 비롯한 많은 계명을 주십니다. 여기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받은 계명을 보통 ‘율법’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이 받은 율법은 적어도 600가지가 넘습니다. 이렇게 많은 계명과 율법은 크게 3가지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사회법으로서 그들이 당시 삶의 규범과 규례가 된 법입니다. 또 하나는 의식법으로서 제사와 신앙에 대한 규례를 자세하게 강조한 법입니다. 특히 이것에 대한 말씀이 레위기에 집중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도덕법으로서 이것은 사회법이나 의식법을 넘어 보통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포함한 계명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으로 오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율법의 마침과 완성을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율법을 문자 그대로 지키지 않습니다. 율법에는 정신과 실제가 있습니다. 사회법이나 의식법은 이제 정신만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도덕법은 정신과 실제가 다 남아 있는 법으로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 방향과 목표가 되는 법입니다. 이제 주님으로부터 자유하게 된 우리에게는 율법과 계명이 더 이상 우리를 옭아매진 않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물론 율법에 비하면 동기와 원인은 차원이 다릅니다. 어쨌든 우리는 여전히 계명을 지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명을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이유는 하나님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에 대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1)
우리가 계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계명을 지키고 살아야 합니다. 계명을 지키는 자가 주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우리가 말로만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행동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바로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결국 계명을 지키는 자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그런 자를 더욱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이유는 축복을 주시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계명을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사랑하고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출20:6) 계명을 지키는 것이 축복을 받는 길입니다. 보통 축복이 아니라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믿는 자들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신실히 믿고 그 계명을 잘 지키면 당대는 물론이고 후대까지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에 대한 예를 아주 많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와 후대가 복 받는 길은 계명을 지키는 길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길이요, 성경이 제시하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계명을 지키면서 축복의 길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성막을 명령하신 곳입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성결을 요구하고, 계명을 주시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성막을이지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이 출애굽기 26장부터 마지막장까지 말씀합니다. 성막은 이스라엘이 정착하지 않고 옮겨 다니는 상황이라서 성막이었습니다. 이것이 가나안땅에 정착한 이후에는 성전으로 바뀌었습니다. 솔로몬이 지은 성전이 아름답게 완공되었지만 바벨론의 침공으로 무너지고, 다시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성전을 재건축합니다. 그것이 다시 예수님시대를 지나 AD70년에 로마에 의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무너집니다. 그리고 성전은 교회로 바뀌게 됩니다. 오늘날 이 지구상에 많은 교회들의 뿌리는 성전이고, 성막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성막을 지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모세는 사람들을 세워 성막을 짓습니다. 옮겨 다니는 텐트라서 보기가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당시로서는 최상의 건물이라고 봅니다. 광야생활에서 그렇지 않아도 힘들고 어려운데 왜 하나님은 성막을 명령하셨을까요? 그 중요한 이유에 대해서도 밝혀줍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를 삼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시는 분입니다. 성막이나 성전이 아니더라도 하나님은 계시고 싶은 그 어디라도 거처를 삼으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성막과 성전을 지으면서 거처를 삼겠다는 것은 사람과 함께 하겠다는 것입니다. 더 친밀하고, 더 가까이, 더 실제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겠다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하여 성전중심의 삶을 통해 복을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이 명령에 따라 성막을 짓습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의도를 잘 알았던 사람들은 적극적인 헌신으로 성막에 참여했습니다. 그런 과정을 보여주는 말씀을 보면 몇 가지의 귀한 모습이 나타납니다. 하나는 마음에 감동된 자가 참여 했고, 또한 자원하는 자가 동참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즐겁게 헌신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솔로몬의 성전이나 스룹바벨의 성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음에 감동을 받은 자가 참여했고, 자원하는 자가 일어났고, 즐거움으로 참여했습니다. 마음에 감동이 있었기에 조건이 없었고, 오직 감사만이 있었습니다. 마음이 감동이 있었기에 부담이 아니라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자원하는 자가 참여했기에 그들은 억지로 하지 않았고, 축제와 은혜가 충만한 가운데 만들어졌습니다. 마침내 성막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완성이 되었고, 그들은 시내산에서부터 이제 성막을 통해 위로와 힘을 얻고, 성막을 중심으로 옮기면서 약속의 땅을 향해 한걸음씩 나아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성전을 지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성전을 짓고 있습니다. 분명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될 것입니다. 그 곳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통해 무한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는 학개 선지자의 선포와 같이 지금까지 교회를 통해 영광을 받으신 하나님께서 앞으로 더 큰 영광을 받으실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곳에서 하나님은 우리와 만나시고, 은혜와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헌신한 자를 하나님은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당대에 많은 은혜를 베푸셨고 후대에도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임할 것입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기간, 그리고 앞으로 새로운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은 더 아름다운 헌신을 요구하십니다. 마음에 감동된 자가 자원하는 심정으로 모든 교회 일에 동참하며 함께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마음에 감동된 자를 통해 이루십니다. 순간마다 성령의 감동을 입은 많은 사람들의 아름다운 헌신을 통해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감동을 입은 사람들을 통해 역사는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감동을 입은 사람들이 많이 생기기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감동을 받은 사람들의 반열에 나의 이름도 들어가야 합니다. 건축하는 일에 방관자가 되지 말아야 하고, 거치는 자가 되어서는 더욱 안 됩니다. 모두가 적극적인 참여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결정짓는 기준은 오직 하나, 바로 마음의 감동, 성령의 감동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는 모두 감동을 입은 사람들로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의 심령과 영혼에 성령의 놀라운 감동이 임하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인생에서 귀하고 아름다운 일에 쓰임받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 오늘은 시내산에서 있었던 귀한 사건을 함께 생각했습니다. 시내산은 성결을 요구하신 곳이고, 계명을 주신 곳이며, 그리고 성막을 명령하신 곳입니다. 저 천성을 향해 가는 우리의 인생길에 언제나 찾아오셔서 말씀하시고 명령하시고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서 한주간도 승리하며 살기를 축원합니다.